공민왕의 쌀먹왕자에게 조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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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묵직한 무장의 결의

DUMMY

38화.



그렇게 정도전을 새 측근으로 받은 뒤.

나는 개경으로 말을 돌렸다.


그런데 세자궁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다소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정 장군이······ 낙향했다고?”

“예. 고향인 장택현(長澤縣, 현재의 전라남도 장흥)으로 돌아가겠다 하였사옵니다.”


내가 개경을 비운 사이.

정세운이 은퇴했다.


뭐, 회복이 불가능한 큰 부상을 입었으니, 그가 군에서 물러나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정세운이 날 놀라게 한 건 다른 쪽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째서 이 장군과 최 병마사가······?”


다만, 그 소식을 내게 전한 사람은 방 환관이 아닌.

다소 굳은 표정을 한 최영과 이성계였다.


“그것이······.”

“저하, 은퇴한 정 장군이 무신들 사이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는 아시는지요.”


이제는 침통한 얼굴을 하고는, 최영이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정세운이 내게 남긴 뜻은 상당히 무거운 것인 듯했다.


“알지.”

“그렇사옵니다. 아시다시피 정 장군은 전하를 대도에 머무시던 시절부터 모신 충복.”

“상장군 중에서도 서열로 치면 정 장군이 가장 높은 장수였사옵니다.”


상장군.

고려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이자, 무관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


고려에는 무신의 톱인 8인의 상장군과, 그 아래 8인의 대장군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말은, 정세운은 8인의 상장군 사이에서 가장 서열이 높았다는 뜻이었다.

아버지의 자리를 세습해 상장군 자리에 오른 이성계가 제일 낮은 서열일 테고.


“그래서, 정 장군은 무신들 사이에서 가장 인망이 높았고, 중심과도 같은 분이었사옵니다.”

“물론, 정 장군을 시기하는 자도 없진 않사옵니다만······ 장수들의 우두머리라는 걸 부정할 무관은 없을 것이옵니다.”


정세운을 시기할 장수라는 건······.

원 역사에서 김용의 꼬임에 넘어가 그를 죽인 안우나 이방실 같은 자들인가.


뭐, 직접 눈으로 본 안우와 이방실은 내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다르긴 했다.

정세운에 대해 감정이 있긴 했지만, 그들 또한 충직한 무인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혹시 그들도 흑막의 이간질에 당한 희생자였던 것일까.


어쨌든, 이들의 비참한 최후는 내가 만들어내는 역사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중요한 건, 정세운이 고려의 무장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일 터.


“그래서, 정 장군이 은퇴를 결심하고 전하께 고한 날, 모든 무장들이 그의 저택에 모였사옵니다.”

“그리고 정 장군은 그날, 무장들로 하여금 어떠한 맹세를 남기도록 하였사온데······.”


입술을 깨문 최영이 소매에서 서찰을 꺼내 내게 건넸다.

무장 특유의 힘 있고 거친 필체가 나를 반겼다.

정세운의 글씨였다.


[······죽음을 각오하였으나 나라를 위해 죽지 못해 부끄러운 천장(賤將) 정세운.

세자 저하께 짧은 식견을 담아 고언을 올리옵니다······.]


정세운의 편지에는 평소 그가 보이던 충직한 말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건······.”

“계속 읽어보시옵소서.”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르게 하고, 옷차림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의 것이든, 이만한 뜻이 담긴 편지를 흐트러진 채 읽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정세운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눈에 새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편지를 전부 읽고 난 후.

자연스레 나는 숨을 크게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 미약한 늙은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하께 바치는 충심이옵니다.

부디 저하의 앞날과 새로운 고려의 영광에 작은 보탬이 되길 바라나이다······.]


편지에 담긴 정세운의 뜻은 높고도 묵직했다.


“정 장군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정세운은 나를 위해, 고려의 미래를 위해 이걸 준비한 듯했다.

그것도, 귀중한 자신의 은퇴 자리를 망쳐가면서까지.


“소장 최영. 젊어서부터 그분께 많은 것들을 배웠사옵니다. 특히, 나라를 지키는 장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 전부를 말이옵니다.”

“그랬군······.”

“소장 이성계, 정 장군과 깊은 교분은 없었으나······. 최 장군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건 마찬가지였사옵니다.”


이성계 또한 정세운에게서 감각적으로 전해진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의 충성심과 고려를 향한 애국심을 같은 전장에서 싸우면서 느끼지 못하기가 더 어려웠을 터.


“그런데······. 정 장군이 적은 이 ‘무장들의 총의(總意)’라는 건 대체······.”

“장군은 모든 장수들을 모아놓고 물었습니다. 고려가 끊임없는 외침으로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된 지금, 고려를 지킬 충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

“그리고, 그렇게 진행된 이야기의 결론이 이것이옵니다, 저하.”


최영이 붉은 얼룩으로 물든, 편지에 따로 첨부된 종이를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거······ 내가 보기엔 상당히 위험한 물건인데.”

“그렇사옵니다. 이것은 혹여나 전하께 들어갔다간, 분명 역모의 증거가 될 수도 있는 물건.”


내가 든 종이에는 그날 정세운의 집에 모였던 장수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이름 아래 하나같이 붙은 것은, 그들의 서명인 수결(手決).

고려의 모든 장수들이 서명한 일종의 연판장이 내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맨 위에 적힌 3인의 서명.

정세운.

최영.

이성계.


이 세 사람의 수결은 붉은색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피였다.


“이것은 저하의 활약을 목격한 장수 전원이 동의한 결과이옵니다.”

“모든 장수들이······ 동의했다고?”

“서경성에서 저하께서 보여주신 고귀한 모습은 그야말로 명군의 자질 그 자체. 그걸 부정한 이는 한 명도 없었사옵니다.”


다시 한번 나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최영이 말했다.


“그리고 정 장군의 뜻에 따라, 고려의 모든 장수들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세자 저하를 지지하기로 약속했사오니······.”

“······하면 내가 불구덩이에 뛰어들라 해도 뛰어들겠단 말인가?”

“예. 기꺼이.”


죽으라면 죽으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대답이 즉시 떨어졌다.

내 앞에 엎드린 최영과 이성계는 그만큼 한 치 망설임이 없어 보였다.


그들에게서 전해져 오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주 많이.


“하지만······.”


그러나, 이들의 마음을 지금 온전히 받을 수는 없었다.

내가 왕이라면,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할지도 모르는 상황이겠다만.

지금의 나는 세자.

내 위에는 엄연히 젊은 공민왕이 멀쩡히 군림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세자를 지지하는 장수들의 연판장이라니.


물론, 공민왕의 공포 정치와 반복되는 숙청에 염증을 느끼는 장수들이 있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무인들이란 본래 전장에서 등을 맞대고 싸운 이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경향이 있단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최영의 말대로 이건 잘못 흘러 나갔다간 빼도 박도 못하는 역적질의 증거가 되어 숱한 모가지를 날려버릴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대체 어떤 행동을 취해야 올바른가.


“······!!”


황초 위에서 불타는 화염이 정세운의 붉은 글씨를 뭉텅 베어먹었다.

최영의 혈서도, 이성계의 혈서도.

다른 장수들의 수결도 전부 그렇게 한 줄기 연기와 재가 되어 자취를 감췄다.


“······.”


그러나.

이상하게도 최영과 이성계의 반응이 담담했다.

자신들의 큰 뜻을 내가 삽시간에 불태웠음에도, 그들은 조금의 충격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말투로, 최영이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역시······ 정 장군이 말한 그대로시군요.”


최영은 약간은 감동한 눈초리였다.

이성계 역시 평소의 우직한 심복의 모습 대신, 약간 표정이 달라진 게 눈에 띄었다.


“뭐라고?”

“상장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하께서는 서북의 한낱 백성 한 명마저 아끼시는 분.”

“······우리의 목에 들이밀 칼날이 될 연판장을 그대로 놔두실 리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정세운은 내가 자신들의 서명을 태워버릴 것까지 예상하고 연판장을 보냈단 것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대체 고려의 장수들은 나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단 소리인가.

그저 나는······ 헬고려 시절을 살아남기 위해 몸을 열심히 비틀었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저하.”


그때.

무언가 모를 감정에 압도당한 나를 향해 이성계가 입을 열었다.


“영광스러운 저하의 첫 번째 심복으로서, 소장은 알고 있사옵니다. 저하께서는 분명 방금의 수결들을 잊으실 분이 아니라는 걸.”


이성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옳았다.


방금 연판장에 적혀있던 모두의 서명.

결코 잊어버릴 일은 없을 것이었다.

맹세코.


“소장과 최 병마사, 그리고 다른 장수들은 그것으로 충분하옵니다.”

“그리고 낙향한 정 장군도 마찬가지일 것이옵니다, 저하.”


그랬다.

이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뜻을 내게 온전히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물론, 판단의 근거로 삼기 위해 나를 오랫동안 관찰해 온 이성계의 힘을 빌리고, 서경성에서 보여준 내 모습을 끌어모았겠지만.


어쨌든.

고려의 장수들이 건 목숨의 무게만큼.

연판장에 적힌 모든 이름의 무게는 내게 무겁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저 무거운 연판장 맨 위에 적힌 3인의 이름.


무신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끌어낸 정세운.

고려 최후의 수호신이자 충절의 아이콘, 최영.

그리고 원 역사에서는 고려를 끝장낸 맹장이지만 지금은 내 충실한 심복인, 이성계.


이들의 이름은 특히 무거웠다.


원래는 나라를 구하고도 억울하게 숙청당했을 명장이 살아남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려를 끝까지 수호하던 충신이 나를 지키겠다 맹세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6년 전 처음으로 접한 이후로 속내를 가늠할 수 없던 고려 말의 최종 병기가.

처음으로 내게 충성의 표시를 드러냈기 때문일까.


뭐, 이성계가 적어도 공민왕의 치세까지는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고도, 그를 등용해 중하게 쓴 왕을 끝까지 왕으로 대접한 데에서 그의 뜻은 확실했다.

그 증거로, 종묘엔 조선의 임금이 아닌 단 한 명의 군주를 모시는 신당이 남아있다.

그것은 바로 공민왕과 그의 왕비 노국공주를 모신 사당이다.


하지만.

결국은 원 역사에서 역성혁명을 선택한 이성계였기에, 나는 지금까지 계속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쭉 이어져 오던 긴장의 끈이, 오늘 처음으로 툭 끊어졌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아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벌써부터 이성계에게 느슨하게 굴 순 없었다.


나는 아직 원 역사를 크게 바꾸지 못했으니까.

공민왕에게 충성하던 북부대공이 어느 시점부터 왕좌를 노리는 역적이 되었듯.

이성계의 충성에 걸맞은 훌륭한 군주가 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미래가 어찌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와중에 차가운 머리와 달리.

이들이 뜨겁게 달군 가슴은 여전히 겉으로 티를 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하?”

“저하? 무슨 일이시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격해진 감정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최영과 이성계가 동시에 안부를 물어왔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건 여기까지.

저들은 내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나의 신하일 뿐.

군주가 신하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들끓는 마음을 꾹 눌러 삼켰다.


“아무튼, 잘 알겠소. 무신들의 총의란 어떠했는지.”

“저희의 뜻을 알아주셨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그리고.

정세운, 최영, 이성계가 아니더라도 다른 무신들의 뜻 역시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무신이라고 권문세족과 교류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권문세족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신진사대부라 불리던 집단과 권문세족 집단이 딱히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밝혀진 연구 결과와 비슷하달까.


하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면 자신들의 이득이 줄어들 수 있음에도, 무신들은 나를 지지하고 있었다.

뭐, 물론 왕이 된 후에 조금은 챙겨달라는 어필도 어느 정도 끼어 있겠지만.

그만큼 무신들은 지금 고려가 처한 위기를 해결해 줄 왕의 존재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뜻일 터.


“그대들이 바라는 대로, 앞으로 훌륭한 고려의 세자로서 행동하도록 하지.”


서경성에서 목숨을 건 보람이 있었다.

지금 얻은 무신들의 지지는 고려 조정의 절반을 장악한 것과 같았으니까.

그리고 훗날, 내가 왕좌에 오르는 날엔 이들의 지지가 강력한 왕권의 기둥이 되어 작용할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공민왕을 제치고 일찍 왕이 될 생각 따윈 전혀 없었지만.

혈육끼리 동족상잔을 벌이다니. 그럼 우리 어머니가 슬퍼하실 거란 말이야.


어쨌든.

나는 세자의 신분으로 벌써부터 강한 지지세력을 손에 넣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공민왕의 개혁 드라이브에 꽤 많은 힘을 실어줄 수 있을지도.


“그리고, 훗날 훌륭한 왕이 되어, 그대들의 충심에 보답하도록 하겠소.”

“그것이야말로 바라는 대답이었사옵니다!”


엎드려 오열하기 직전인 최영을 보며.

말없이 무언가 감동을 받은 듯한 이성계를 보며.


그리고.

중상을 입어 은퇴를 앞두고도 오로지 고려의 안위만을 생각하던 정세운을 떠올리며.


나는 생각했다.

왕의 자리란 상당히 무거운 것이었다.



**



그렇게 무의 길을 걷는 이들끼리 말없이 한참 동안 감정을 교류하던 시간이 끝나고.

최영과 이성계는 정세운의 모든 뜻을 전하고 내 앞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이 장군! 잠깐만!”


세자궁을 물러나던 이성계가 놀란 토끼눈을 떴다.

방금까지 최영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고는 나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후의 이야기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하?”

“온 김에 전할 말이 있었어. 지금 당장은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중대한 분기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을.


“그렇습니까?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소장은 저하의 첫 번째 심복 아닙니까.”

“이거 든든한데? 이번 건은 이 장군이 꼭 해줬으면 하는 일이야.”


그렇게 나는 이성계를 불러 세운 목적을 전했다.

옆에서 자연스레 대화를 듣던 최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이 장군과 친밀한 사이셨군요. 소장 최영도 언젠가는 이처럼 저하와 격의 없이 지낼 날이 왔으면 좋겠사옵니다만.”

“언젠가는 그럴 날이 올 거야. 나는 병마사에게 병법을 배운 후로 당신을 쭉 고평가하고 있거든.”

“그렇다면 백골난망할 은혜이옵니다만······.”


그 와중에 최영에게 호감도 작업 한번 해주고.

나는 이성계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대답은 OK였다.


“물론입니다. 저하의 병사를 훈련하는 데 소장의 동북면 땅이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협조해 드려야지요.”

“그쪽은 이지란 교위의 고향이기도 하고 말이야.”

“퉁두란 그놈, 저하께 온갖 실수를 저질렀다던데 언젠가 한번 크게 혼을 내야 할 텐데 말입니다. 하하.”


방금까지 무거운 대화가 오간 게 거짓말 같았을 정도로.

이성계는 평소 훈련장에서 봤을 때처럼 나를 대하고 있었다.


우리가 쌓은 세월은 헛되지 않았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그럼 소장이 동북면으로 복귀할 때 그들을 데려가면 되겠습니까?”

“그래. 가서 확실하게 굴려달라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강병이 될 때까지.”

“물론입니다. 소장만 믿으십시오.”


그렇게 이성계는 내 제안을 시원스레 수락하고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세자궁을 떠났다.

내게 방자하게 굴었던 이지란과 야만전사들을 반드시 조져주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다.

기황후가 공민왕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전 벌어질, 사소한 이벤트라 그냥 넘기기 쉬운 일이긴 했는데.


“방 환관.”

“예, 저하.”


그렇게 충직한 최영과 이성계를 떠나보낸 후.

나는 옆을 지키던 방 환관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기억하는 게 정확한지, 그의 검증이 필요했다.


“혹시 방 환관은 나하추라고 들어본 적이 있어? 심양에서 활동하는 자라고 하던데.”

“아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려와 가까운 심양행성의 승상을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방 환관의 입에서는 숫제 나하추의 족보까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칭기즈 칸을 따르던 8명의 보검.

사준사구(四駿四狗)의 한 명인 무칼리의 후손. 나하추.

그는 내가 기억하는 그 나하추가 맞았다.


대대로 심양 일대의 북부 요동을 장악해온 세력의 우두머리이자.

곧, 고려를 시험하듯 대군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치고 들어올 놈.


“그런데, 그분은 어째서······?”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그렇사옵니까? 바람이 찬데, 이제 안으로 드시지요.”

“그럴까.”


하지만 방 환관의 권유를 따라 세자궁으로 복귀하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나하추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건 분명 정도전 그놈 탓이었다.

요동이니, 북벌이니 그딴 헛소리를 지껄여대니 나도 모르게 혹시를 대비해 대처할 생각이 들잖는가.


어쨌든, 나하추는 이 시기 한반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였다.

그는 사실상 요동의 북부를 지배하는 거대 군벌이었으니까.

원 역사에서의 나하추는 원이 대도를 잃고 초원으로 쫓겨난 후에도 상당한 세월 동안 영향력을 유지했을 터.


그런데, 내가 원나라의 수명을 늘려 놓을 작정인 지금.

나하추가 요동에 끼친 영향력은 원 역사보다 더 길게 지속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방 환관.”

“예, 저하.”

“혹시 적이 될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놈이 나를 얕보지 못하게 하려면, 첫 만남부터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겠지?”


뜻밖의 질문에 방 환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충직한 내 심복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질문마저도 성실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런 일을 겪으면 앞으로도 적이 기죽는 게 당연하옵니다만······. 혹시 누구와 싸우기라도 하셨사옵니까?”

“그럴 리가.”

“웬만하면 말로 해결하시옵소서. 저하의 또래 중에는 저하를 힘으로 당해낼 사람이 있겠사옵니까?”


뭐, 방 환관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얼마 후, 당분간 고약한 이웃이 될 나하추와 고려의 첫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것도 놈의 선빵으로.


선빵을 맞으면 배로 갚아줘야 한다는 게 보육원 시절부터 내가 몸으로 배운 교훈.


물론, 세자인 내가 직접 위험을 무릅쓸 생각은 당분간은 없었다.

그래서, 이성계를 불러 내 최고의 정예병을 동북으로 보낸 것이었다.


고려를 얕보고 함부로 침공한 나하추의 높디높은 코를.

이성계라는 전쟁 병기로 한 방에 뭉개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말로 안 되는 상황이라면?”

“그럼 저와 이 장군, 정 수찬에게 의지하시옵소서. 그러려고 있는 사람들이 측근 아니겠사옵니까?”

“그래. 역시 이 장군이 답인 것 같네.”

“잘 생각하셨사옵니다. 이 장군이라면 말 몇 마디만 해도 상대가 기가 죽을 것이옵니다.”


방 환관과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이따금씩 핀트가 안 맞긴 했지만, 뭐.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하추와의 싸움은 아무리 이성계라도 말 몇 마디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그렇다면 최종 병기 이성계의 양 주먹에 가별초와 화총병을 쥐여준 뒤.

나와 고려를 얕보는 양아치 놈을 죽기 직전까지 패 줘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작가의말


사견에 불과합니다만.

개인적으로 공민왕은 이성계가 마지막 충성을 바친 고려왕이라 생각합니다.


일개 지방 만호에 불과하던 그를 고려의 거물 무장으로 끌어올린 것이 공민왕이었을뿐더러.

기록상 이성계가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건 우왕이 즉위한 이후부터거든요.


그 근거로.

조선의 종묘에는 단 한 명, 타국의 군주가 왕비와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그것이 공민왕입니다.


실제로 종묘에 방문하시면, 아직까지도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함께 모셔져 있는 모습과, 두 사람의 초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손자인 세종이 고려의 어진을 남김없이 불태웠음에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려 임금의 초상화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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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6화. 괴짜가 두 배 +15 24.09.08 4,865 172 18쪽
35 35화. 두 명의 불도저 +17 24.09.07 5,008 178 16쪽
34 34화. 전부 내가 짊어지겠다 +13 24.09.06 5,085 171 19쪽
33 33화. 포기하지 마라, 내가 널 포기하기 전까지 +17 24.09.05 5,028 195 19쪽
32 32화. 명군과 명장의 자질 +15 24.09.04 5,087 184 16쪽
31 31화. 넌 못 지나간다 +13 24.09.03 5,088 173 13쪽
30 30화. 세자가 정체를 숨김 +12 24.09.02 5,188 157 16쪽
29 29화. 귀여운 세자의 서경 사수 쇼 +8 24.09.01 5,232 162 17쪽
28 28화. 폭풍전야 +11 24.08.31 5,245 162 14쪽
27 27화. 노병은 죽지 않는다 +12 24.08.30 5,296 173 16쪽
26 26화. 여진해병 이지란과 기합찬 야만전사들 +15 24.08.29 5,397 170 14쪽
25 25화. 용의 피를 타고난 아이 +14 24.08.28 5,424 185 13쪽
24 24화. 고려가 힘을 숨김 +14 24.08.27 5,396 192 18쪽
23 23화. 천 리 바깥을 꿰뚫는 눈 +13 24.08.26 5,314 192 14쪽
22 22화. 카사르테무르 +17 24.08.25 5,369 201 15쪽
21 21화. 마음을 사는 방법 +20 24.08.24 5,397 209 15쪽
20 20화. 동심결(同心結) +18 24.08.23 5,461 195 13쪽
19 19화. 고려세자삼합과 황좌의 게임 +19 24.08.22 5,574 199 15쪽
18 18화. 천기누설 +18 24.08.21 5,572 205 13쪽
17 17화. K-상추쌈과 삼겹살 +13 24.08.20 5,764 188 14쪽
16 16화. 700년 전의 한류(韓流) +15 24.08.19 5,874 188 18쪽
15 15화. 큰 그림 그리기 +16 24.08.18 5,848 191 14쪽
14 14화. 화력고려의 태동 +15 24.08.17 6,001 206 15쪽
13 13화. 하, 총 마렵다 +14 24.08.16 5,974 200 13쪽
12 12화. 염전 인부 대식이 +15 24.08.15 6,040 232 14쪽
11 11화. (딸깍) +18 24.08.14 6,186 218 16쪽
10 10화. SSS급 유망주의 삶은 고달프다 +15 24.08.13 6,394 211 13쪽
9 9화. 수확물 두 배 이벤트 +17 24.08.12 6,629 221 18쪽
8 8화. 사기템 +17 24.08.11 6,625 242 12쪽
7 7화. 기적의 볍씨 +14 24.08.10 6,728 231 14쪽
6 6화. 연철의 연금술사 +13 24.08.09 6,834 226 17쪽
5 5화. 은이 필요해요. 아주 많이 +12 24.08.08 7,154 232 14쪽
4 4화. 동북 촌놈과 재능충 +16 24.08.07 7,796 238 17쪽
3 3화. 명마 고르기 +22 24.08.06 8,139 257 15쪽
2 2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혼혈왕자 +17 24.08.05 8,727 256 13쪽
1 1화. 고려에서도 쌀먹이 가능할까요 +36 24.08.05 9,685 25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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