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쌀먹왕자에게 조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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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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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700년 전의 한류(韓流)

DUMMY

16화.



그로부터 몇 달 후.

대원제국의 수도, 대도.


“고려에서 온 사신단이 대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셨습니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그의 양아버지이자 외삼촌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였다.


“지금 고려왕은 반항심 가득한 자라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후계자를 대도에 보냈다는 건 대원의 질서에 순응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지. 가뜩이나 남방이 도적 떼와 반란군으로 어지러운데, 잘된 일이다.”


고려는 후계자를 대도에 보낸 김에 세자 책봉까지 황제에게 인정받았다.

그걸 보니 그들이 대원제국의 질서를 더 이상 어지럽힐 생각은 없는 것 같다며, 젊은이의 양부가 덧붙였다.


양부에게서는 무인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사실 그의 정체는 올해로 6년째 한족 반란군을 토벌 중인 명장. 차간테무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그쪽으로 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양부님.”


그런데, 젊은이는 그 말에 동의를 못 하는 듯했다.


“고려는 2황후의 나라. 오히려 그녀의 힘이 쓸데없이 커지는 건 아닐지.”


현 황태자의 어머니이자 1황후 자리를 노리는 기황후 이야기였다.

하지만 차간테무르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고려왕은 2황후의 오라비를 비롯한 일족을 참살한 자. 혈육을 잃은 그녀가 과연 원한을 쉽게 잊겠느냐?”

“그 말씀이 옳습니다만······.”


젊은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 차간테무르는 김이 오르는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현재 원나라 조정은 기황후와 그녀가 낳은 태자 아유시리다라를 받드는 세력에게 장악당한 상황.

그런데 얼마 전 기황후에게 풀 수 없는 원한을 남긴 주제에, 고려가 원에 내민 화해의 손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고려는 무슨 꿍꿍이인지······.”


게다가, 지금은 거대한 홍건적의 무리가 대원제국을 위기로 몰고 있는 상황이었다.

백련교도 유복통이 이끄는 홍건적이 세 갈래로 나뉘어 진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놈들의 서로군이 진격한 관중과 사천 일대는 이미 쑥대밭이 되었다.

대도를 공격하려던 동로군은 차간테무르에게 패배했지만, 나머지 중로군은 제국의 여름 수도 상도를 노리고 있었다.


승전보를 보고하러 대도에 복귀한 차간테무르의 심경이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박살 낸 홍건적 무리는 제남으로 물러났지만, 아직도 쓰러뜨릴 적들은 끝이 없었기에.


게다가 대도 바깥만 엉망인 게 아니었다.

현 원나라 황제, 혜종 토곤테무르는 정치에 뜻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기황후와 황태자 세력에게 국정이 완전히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태자께서 국정을 거의 전담하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황제께선 지치셨다. 황자 시절부터 온갖 정쟁에 휘말리고, 황위에 오른 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겠다만.”


후대의 명나라로 치면 만력제 같은 황제가 망하기 직전의 제국을 지배하는 상황.

그 결과,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휘두르려는 자들끼리 피 터지는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토곤테무르가 즉위하고 얼마나 많은 숙청의 피가 흘렀던가.

그나마 나라를 위해 몸을 갈아 넣던 명재상 토크토아가 숙청된 후, 나라 꼴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최근에는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를 앞세운 기황후 세력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중이었고.


그래서 차간테무르가 고려 사신단의 동향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물론, 그의 생각으로는 고려와 기황후가 손을 잡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또 일어나곤 하는 게 세상살이인 법.


“좋지 않군.”


차간테무르의 눈빛은 어두웠다.

오로지 대원제국을 구하기 위해 의롭게 군사를 일으켰건만.

그의 앞길에는 장애물이 끝없이 쌓여 있었다. 그것도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많이.


“그럼 양부님.”


그때, 차간테무르를 조용히 지켜보던 양자가 나섰다.


“제가 그들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들이라니?”

“고려에서 온 사신들 말입니다.”

“네가 직접 말이더냐?”


갓 20대에 접어든 양자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소문을 들으니, 고려의 세자는 무예를 닦는 데 열심이라더군요. 덕분에 접근할 길이 생겼습니다.”

“아아. 그 소문, 나도 들었다. 대도에 웬 동쪽에서 온 신궁이 나타났다던데······.”


계획의 일부를 확인한 차간테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이라면 위험 부담 없이 고려 사신단의 속내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고려 세자에게 접근해서 나쁠 것이 없습니다. 이상하게 여겨질 리도 없고요.”

“이상하게 여겨질 리 없다니? 그래도 그들은 국빈이다. 관련 없는 자가 고려 사신단에 접근하는 일이 어떻게?”

“양부님은 이쪽 일에는 어두우시군요. 안 그래도 양모님이 부탁하신 일도 있고 하니, 그들도 저를 경계하진 않을 겁니다.”


양자의 말은 알쏭달쏭했다.

하지만 자신의 옷깃을 툭툭 치며 장담하는 양자의 모습을 보고, 차간테무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아아. 설마 그 얘기냐? ‘향목’이니 어쩌고 했던 것들이?”

“예. 그걸 구하려면 결국 고려 세자에게 접근하는 게 빠르겠더군요.”

“한낱 수행원 나부랭이들에게 접근해서는 얻기 어려울 정도로 귀한 물건인가 보군. 네 어미는 어쩌다가 그런 물건에 빠져서는······.”


눈썹을 찌푸린 차간테무르가 혀를 끌끌 찼다.

지금 대도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웬 낯선 사치품이 유행하고 있었다.

차간테무르의 부인 역시 유행을 따르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차간테무르는 그 사치품의 출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대도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유행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대체 그깟 번국에서 온 물건이 뭐가 좋다고 난리인 건지, 이해를 할 수 없구나.”

“하지만 양부님. 저 거리를 보십쇼.”


하지만 양자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차간테무르와 양자가 이야기를 나누던 전각 2층.

그 인근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몽골족이나 한족의 옷차림과는 사뭇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전부 고려 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을 차간테무르는 부정할 수 없었다.


거리를 지나는 남자 대부분은 옆트임 없는 겉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명백히 몽골식 단령이 아닌, 고려식 직령포를 닮은 모습이었다.

여자들도 풍성한 치마와 저고리를 걸치고 있었는데, 이것 또한 고려인들이 유행시킨 고려식 의복이었다.


언젠가부터 대도에 유행하던 고려식 문물들.

원나라 사람들은 그걸 고려양이라 부르고 있었다.



**



오늘이 대도에 도착한 지 며칠째더라?

고려를 떠난 지도 어느새 꽤 시간이 흘러 있었다.


이곳은 위왕부(魏王府). 외할아버지 위왕 베이르테무르의 저택.

고려 사신단을 환영하는 행사가 마무리된 뒤, 나와 어머니 노국공주는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짧지 않은 대도 생활의 아지트 같은 거점 같은 곳이었달까.


하지만, 세자 책봉 인정이라는 가장 큰 일이 황제의 변덕으로 쉽게 끝나버렸음에도, 나는 예상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공식 일정이 끝나고 여유로워져야 했을 스케줄이 아직도 상당히 빡빡했던 것이다.

원래 지금쯤이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인맥을 만들고, 역사 개변을 위한 씨앗을 심고 있어야 할 때인데.


“오늘도 외출하세요?”


오늘 오후에도 방을 힘없이 걸어 나가는 노국공주를 보고, 나는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그러나, 돌아오는 목소리에는 맥이 빠져 있었다.


“외출은 아니고······. 네 외할머니께서 또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다는구나.”


외할머니라면 이곳 위왕부의 안주인, 위왕비를 말하는 것일 터.

하지만, 노국공주에게 힘이 없는 이유는 반쯤은 외할머니 탓이었다.

그녀가 매일같이 원나라 귀족 부인들을 위왕부로 불러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요?”

“그래······. 네 탓은 아니니 너무 그렇게 염려하는 표정 하진 말고.”


고려를 벗어난 뒤로 노국공주가 나를 평범한 아들처럼 대해주는 건 좋았다.

하지만 대놓고 힘든 게 분명한데도 노국공주는 내 앞에서 티를 일절 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도 외할머니 방에는 귀부인들이 모일 테고······.”

“여인들이 좋은 물건을 탐내는 게 어떻게 네 탓이겠니. 걱정 말렴.”


고려에서는 눈을 치켜뜨고 있는 공민왕 덕에 노국공주는 말 그대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편히 살아왔는데.


그런 고운 사람이 귀부인들 사이에서 고생하는 건 확실히 못 볼 꼴이었다.

특히, 모여든 귀부인들이 상당히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을 때는 더욱이.


하지만, 나는 이런 사태가 일어나고도 입을 열 자격이 없었다.

왜냐면 지금 위왕부에 모여드는 원나라 귀부인들이 품은 불순한 동기는······.


······바로 내가 제공한 거니까


“외할머니도 좋아하시더라고. 우리 저택이 사교의 중심이 된 게 대체 얼마 만이냐면서.”

“그, 그런가요?”

“다만, 이 어미가 걱정하는 건······.”


노국공주가 조용히 엄지와 검지를 모아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물건’이 충분히 있냐는 소리였다.

그것은 마치 몇백 년 후 슬럼가의 약쟁이들 사이에서나 오갈 만한 제스처.


“무, 물론이죠, 어머니.”

“그분들을 만족시킬 만큼의 물건이 없으면 고려의 권위가 추락할 거야. 잘 알고 있지?”


순수하고 선한 모습만 봐 왔던 어머니의 파격적인 변신이었다.

물론, 지금도 노국공주의 얼굴에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자애로운 미소가 넘치고 있었지만.


전부 내 탓이었다.

순진한 어머니를 타락시킨 건.


“오늘 치 물건, 그러니까 ‘향목’은 충분하니 다녀오세요. 건강 챙기시고요.”

“알았어. 그럼 이따 보자꾸나.”


어느새 지친 기운은 싹 사라지고 상큼한 미소만을 실내에 남긴 채.

노국공주가 사교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리고, 미리 내 지시를 받은 방 환관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는 고려에서부터 대도에 싣고 온 ‘물건’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물론, 그 ‘물건’의 적당하고 만족스러운 가격은 우리 어머니께서 정하고 계셨고.


그렇게 노국공주의 충격적 변화에 아직도 얼이 빠져있던 때였다.


“저하, 소생 들어가 봐도 되겠사옵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입실을 청했다.

수행원으로 대도까지 동행한 정몽주였다.

표정에 은근히 불만이 섞여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게······ 이 교위가 시간이 다 되었다고 난리이옵니다.”

“시간?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방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새 태양이 훌쩍 이동해 있었다.


‘물건’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던 게 화근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미래 물품들이 대도에서 상상 이상의 인기를 끌어댄 탓에 대응이 곤란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이성계를 너무 오래 방치해 버렸다.

뭐, 그렇다고 삐치거나 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늘 훈련의 난이도가 100% 올라갈 예정인 게 문제였다.


“소생 또한 여전히 이 교위의 고강도 훈련이 마음에 들지 않사옵니다만······.”

“그럼, 정 서생이 어떻게 말을 잘해주면 안 될까?”

“하오나 활쏘기는 선비의 덕목, 저하께서 훌륭한 성인의 발자취를 따르시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옵니다.”


공부 못 할 정도로 굴리는 거 아닌 이상, 이성계를 막을 생각이 없다는 선언.

정몽주에게 징징대봤자 소용은 없었다.

하아.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이던가.

지나가던 선비도 승려도 저 멀리 서 있는 나무에 올라가는 구렁이 정도는 화살 한 방으로 맞힐 수 있는 민족 아니던가.


원딜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고려에서는 무예의 무 자도 익혔다 할 수 없었다.

거기다 유교에서는 대놓고 심신 단련을 목적으로 활 못 쏘는 놈은 선비 취급을 안 하던 흉참한 시절 아니던가.


게다가, 내 무술 스승은 하필이면 원딜계의 상위 0.001% 챌린저 티어를 찍으신 분.

나는 절대 이 무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젠장, 최무선은 왜 조총을 뚝딱 만들어다 바치지 않아서 내가 이런 꼴을 겪게 하는 건지.


그렇게 이성계가 망부석처럼 기다리고 있을 저택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아, 오셨습니까! 빨리 활터로 가시죠. 애가 다 타는 줄 알았습니다!”


기다린 시간마저 까먹은 걸까.

이성계의 눈에서는 괴상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미친 동네 같으니라고.

몽골 제국의 수도답게, 대도에는 도시 곳곳에 활터가 존재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게다가, 그냥 활터만 있는 것도 아니다.

농담 없이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대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취미를 대라면 활쏘기가 나올 것이다.

활터의 위상이 거의 잘나가던 시절 PC방에 비교될 만한 위상이랄까.

이 시대 대도 사람들에게는 심심하면 근처 활터에 가서 활을 쏘고 술 내기, 밥 내기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니 이성계의 눈이 저렇게 뒤집혀 있는 것이다.

이럴 거면 성계는 대도에서 살아! 라고 할 수도 없고. 쳇.


“그······ 이 교위. 활터에 나를 데려가도 괜찮겠어? 저번에도 말했듯이 적당한 연습용 활이······.”

“걱정 마십시오, 저하. 제가 누굽니까? 저하의 힘에 맞을 만한 활이라면 전부 싹 긁어 준비해놨습니다!”

“뭐, 뭐라고?”

“이렇게 다양한 활을 구비하고 있다니, 역시 몽골 친구들이더군요. 말 못 타고 활 못 쏘면 사내 취급 안 하는 바람직한 나라답습니다. 하핫.”


세상에! 살려줘!

활 핑계 대고 활쏘기를 피하려고 했더니, 더는 피할 수 없는 5톤 트럭이 달려온 셈이었다.


더는 도망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심정으로 위왕부에서 가까운 활터로 향해야 했다.


그렇게 오늘은 등에서 찢어지는 근육통을 느끼며 잠드는 게 운명인가 체념하고 있을 때.


“혹시, 고려의 세자십니까?”


활터에 들어서는데, 등 뒤에서 낯선 몽골어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돌아서니 어느새 거대한 등짝의 벽이 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성계가 웬 낯선 청년과 나 사이를 순식간에 가로막은 것이었다.


“누구냐, 너?”

“그렇게 경계하지 마십시오. 수상한 사람은 아니니까.”


적의라고는 없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낯선 청년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아주 수상한 사람은 아닐 것이었다.

이 활터는 최소 원나라 귀족들만 드나들 수 있는 제한된 장소였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내게?


하지만 이성계의 태도는 여전히 완강했다.


“웃기지도 않는군. 네놈처럼 단련된 무사가 저하께 접근하는데, 무방비로 놔둘 머저리는 없다.”

“하아······. 쓸데없이 눈이 좋으시군. 고려의 세자께서는 훌륭한 사냥개를 보유하셨나.”

“뭐야?”


이성계가 당장 한판 붙자는 듯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언제나 주먹보다는 말이 빠른 법이었다.


“‘석감’과 ‘향목’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고려의 세자 저하.”


청년은 내가 만들어낸 물건 두 가지를 언급했다.

공민왕에게 대도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를 굴려 만들어낸 현대의 물품들이었다.


지금 원나라 조정은 기황후와 그녀가 낳은 태자, 아유시리다라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미 공민왕이 기철을 비롯한 기씨 일족을 베어버렸으니, 그들과는 평생 한배를 타지 못할 처지.

그래서 최소한 원나라가 당분간 고려를 적대하지 않도록, 나는 대도에서 다른 세력에게 접근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권 없는 일자왕의 딸인 노국공주와, 그녀의 여섯 살 난 아들이 아무것도 없이 권력의 중심부에 접근할 순 없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향목’과 ‘석감’.

원래는 왕의 유일한 약점, 어머니 노국공주를 공략하려던 게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어쨌든, 석감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비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염전 인부 대식이가 열심히 구해다 준 함초를 태운 재에서 뽑은 수산화나트륨에 지방분과 향을 위한 꽃 추출물을 더해 짠!

그냥 잿물로 만든 비누는 세탁용으로나 쓸법한 저품질이었는지라, 세안용 비누를 만들기 위해선 해초에서 뽑은 재가 필요했다.


물론, 기름은 고려에서 귀하니까 백성들에게 비누를 널리 보급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대도 한정 사치품으로 써먹기는 매우 좋았다. 다행히 대도에서 기름은 비교적 흔했고.

왜 현대인들이 판타지 세상에 떨어지면 비누부터 만드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 향목은 이 시절 사람들이 사용하던 향낭의 상위 호환 버전이라고나 할까.

어느 시대든 여인들은 자신을 치장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을 거라는 발상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효과는 상상외로 뛰어났다.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두 개나 걸고 기다리다 보면, 원하던 대어는 언젠가 낚싯대에 걸려들 것이었다.

권력의 언저리에 불과했던 위왕부 저택이 이토록 붐비는 걸 보라고.

오죽하면 어깨가 잔뜩 올라간 외할머니가 나를 볼 때마다 볼에 뽀뽀를 날려대시겠어.


어쨌든, 낯선 청년이 나를 찾아온 목적은 명백했다.

이성계의 경계심이 코딱지만큼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석감과 향목? 그건 저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다. 여유분이 남아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혹시나 취소분이 나올 수 있다면, 그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어머니께서 고려의 신품에 속이 달아 계시거든요.”


오호.

사실이라면 효자 가산점 +1.

나와 정확히 같은 생각인지, 옆에서 지켜보던 정몽주가 의미심장하게 목을 가다듬는 게 들렸다.


그렇게 이 정도면 취소 대기표 순번을 줘도 되지 않을까 막 생각이 정리됐을 때.


“아차, 실례가 많았습니다, 고려의 세자 저하. 처음 뵙는 자리에서는 소인의 신분부터 밝혀야 했던 것을.”


어머니에 대한 효성 때문이었을까.

뒤늦게 자신의 실례를 깨달은 젊은이가 내가 연신 허리를 굽혀댔다.


하지만.

정말로 나를 놀라게 한 건 그의 다음 말이었다.


“저는 나이만 부족의 코케테무르. 그 두 물건뿐만 아니라, 당신과 고려에 큰 관심이 있습니다.”


잠깐, 코케테무르라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만일 그가 내가 아는 사람이 맞다면.

내 앞에 선 젊은이는 훗날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남길 사람이었다.


작가의말



1. 실제로 이 시대에 고려양, 즉 고려 풍습의 유행은 원나라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번 화에서 언급된 건 복장뿐이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고려의 풍습이 유행했었죠.


그 결과 당시 한족의 복장에도 고려 옷의 흔적이 물들고 마는데, 그것이 현대에 와서는 중국이 한복(韓服)이 자기네 것이라며 떼쓰는 결과로 빚어진 게 참 아이러니합니다.



2. 앞으로 원나라 대도에서 묘사될 생활상들은 <박통사(朴通事)>를 참고했습니다.


<박통사>는 <노걸대> 같은 어학서적인데, 원나라 말의 생활사를 잘 담고 있거든요.

대도 사람들은 취미로 활쏘기를 즐기고 결과로 술내기를 하는 내용이 들어 있더군요.

말의 가격이나 이발, 목욕비용, 심지어는 유부녀를 유혹하는 불륜남의 대화 내용도 있어 생각보다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3. 원나라, 특히 말기의 기록은 정말로 엉망입니다.

같은 사람을 다른 한자로 표기하거나, 동명이인을 같은 맥락에서 서술하는 등 해석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편이죠.

(미리 말씀드리는데, 후에 동명이인이 나올 경우 이해를 위해 발음을 약간 다르게 표기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세자의 외할아버지 위왕 베이르테무르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공민왕 2년(1353)에 홍건적 토벌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1369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며,

고려사에는 1370년에 처형당했다는 기록과 함께, 공민왕이 조회를 중지시키고 고기반찬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고려사에 실린 1370년 사망설을 따라가겠습니다.

장인이 죽은 일에 대한 공민왕의 반응이 함께 서술되어있을뿐더러.

타이밍상 원 혜종 토곤테무르가 사망하고 소종 아유시리다라가 칸을 계승하며 일어난 정쟁에 휘말려 죽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지거든요.





***



文pia블랙 님, 벌써 네 번째 후원이네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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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6화. 괴짜가 두 배 +15 24.09.08 4,865 172 18쪽
35 35화. 두 명의 불도저 +17 24.09.07 5,008 178 16쪽
34 34화. 전부 내가 짊어지겠다 +13 24.09.06 5,084 171 19쪽
33 33화. 포기하지 마라, 내가 널 포기하기 전까지 +17 24.09.05 5,028 195 19쪽
32 32화. 명군과 명장의 자질 +15 24.09.04 5,086 184 16쪽
31 31화. 넌 못 지나간다 +13 24.09.03 5,088 173 13쪽
30 30화. 세자가 정체를 숨김 +12 24.09.02 5,188 157 16쪽
29 29화. 귀여운 세자의 서경 사수 쇼 +8 24.09.01 5,232 162 17쪽
28 28화. 폭풍전야 +11 24.08.31 5,245 162 14쪽
27 27화. 노병은 죽지 않는다 +12 24.08.30 5,296 173 16쪽
26 26화. 여진해병 이지란과 기합찬 야만전사들 +15 24.08.29 5,397 170 14쪽
25 25화. 용의 피를 타고난 아이 +14 24.08.28 5,424 185 13쪽
24 24화. 고려가 힘을 숨김 +14 24.08.27 5,396 192 18쪽
23 23화. 천 리 바깥을 꿰뚫는 눈 +13 24.08.26 5,314 192 14쪽
22 22화. 카사르테무르 +17 24.08.25 5,369 201 15쪽
21 21화. 마음을 사는 방법 +20 24.08.24 5,397 209 15쪽
20 20화. 동심결(同心結) +18 24.08.23 5,461 195 13쪽
19 19화. 고려세자삼합과 황좌의 게임 +19 24.08.22 5,574 199 15쪽
18 18화. 천기누설 +18 24.08.21 5,572 205 13쪽
17 17화. K-상추쌈과 삼겹살 +13 24.08.20 5,764 188 14쪽
» 16화. 700년 전의 한류(韓流) +15 24.08.19 5,874 188 18쪽
15 15화. 큰 그림 그리기 +16 24.08.18 5,848 191 14쪽
14 14화. 화력고려의 태동 +15 24.08.17 6,001 206 15쪽
13 13화. 하, 총 마렵다 +14 24.08.16 5,974 200 13쪽
12 12화. 염전 인부 대식이 +15 24.08.15 6,040 232 14쪽
11 11화. (딸깍) +18 24.08.14 6,185 218 16쪽
10 10화. SSS급 유망주의 삶은 고달프다 +15 24.08.13 6,394 211 13쪽
9 9화. 수확물 두 배 이벤트 +17 24.08.12 6,629 221 18쪽
8 8화. 사기템 +17 24.08.11 6,625 242 12쪽
7 7화. 기적의 볍씨 +14 24.08.10 6,728 231 14쪽
6 6화. 연철의 연금술사 +13 24.08.09 6,834 226 17쪽
5 5화. 은이 필요해요. 아주 많이 +12 24.08.08 7,154 232 14쪽
4 4화. 동북 촌놈과 재능충 +16 24.08.07 7,796 238 17쪽
3 3화. 명마 고르기 +22 24.08.06 8,139 257 15쪽
2 2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혼혈왕자 +17 24.08.05 8,727 256 13쪽
1 1화. 고려에서도 쌀먹이 가능할까요 +36 24.08.05 9,685 25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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