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쌀먹왕자에게 조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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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승자가 패자에게 거둘 권리

DUMMY

43화.



“이, 이건 말도 안 된다! 고려의 부사!!”


그렇게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사실, 협상이라기보다는 고려에게만 개이득인 불공정 계약이 강요된 꼴이지만.


뭐, 까놓고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갔다가 개 발린 주제에.

나하추가 배부른 소리를 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심양에서 나온 군대에게 짓밟힌 동북면의 농지는 분명 이 정도 가치가 있습니다, 승상님.”

“그, 그러나······!!”

“게다가 동북면에서 병력을 운용하느라 소모한 무수한 물자까지. 아국 입장에서는 이만한 청구서를 내밀 자격이 있습니다.”


고려의 젊은 외교관, 정몽주 앞에서 나하추는 명백히 끌려다니고 있었다.

사신단의 정사를 맡은 고려국 법부의 우두머리 놈이 풍토병을 앓느라 교섭 장소에 나오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생각해 보시지요.”

“뭘 말인가?”

“만약 승상의 땅이 근처의 군벌에게 짓밟혔다가 큰 역전승을 거뒀다면, 이렇게 자비로운 청구서를 내밀 수 있을지 말입니다.”


고려가 내민 지금의 강화 조건도 엄청나게 관용적이란 걸 알라는 정몽주의 일침.


대체 이십 대 중반의 젊은 문신이 어떻게 이렇게 노련한 것인지.

나하추는 모양 좋게 당하는 와중에도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의 역사대로라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몽주는 외교관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이.

처음 갔던 명나라 사행에서 황제 주원장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 정도로 강렬한 외교관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고려에서 기껏 화해하려고 제시한 판을 엎고, 영원히 감정을 상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선빵 친 전쟁에서 무력하게 패배한 쪽이 기세가 등등한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하, 하지만······!!”

“마지막 조항이 마음에 걸리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것은 그저 고려의 군사행동을 묵인하기만 하면 되는 조항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그러나 그 땅은······.”

“아쉽군요. 소인은 이 조항이 고려와 승상님의 무궁한 친선을 담보한다고 생각했거늘······.”


이제 나하추는 완전히 정몽주의 페이스에 말려든 상태였다.


그렇게, 나하추는 굴욕에 가까운 강화 서약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그것은 패배자 입장에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제안.

하지만 이전에 겪었던 압도적인 힘 차이를 생각하면, 피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허나······ 내 군대가 크게 꺾인 상태에서 고려 놈들이 음흉한 꿍꿍이라도 꾸몄다간······.’


나하추가 약하게 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만약 이 강화 서약을 거부했다가 요동 남부를 지배하는 요양행성 놈들과 고려가 손이라도 잡았다간.

그걸 넘어 놈들이 연합해서 나하추의 구역을 노리기라도 했다간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이제 고려에게 콧대를 크게 짓밟힌 이상.

나하추는 자신의 구역인 요동 북부, 심양 일대에 끼칠 영향력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끄, 끄아아악!!”


결국, 나하추는 중대한 평화 협상 중 체통에 안 맞는 비명까지 내지르고 말았다.

이건 완벽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PTSD였다.


결국 고려 세자가 보낸 이성계와 정몽주.

좌청룡 우백호 조합에 제대로 당한 나하추는 다시는 고려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평화 협상의 결과 또한, 상당히 불평등하게 작성되었음은 물론이다.



**



그로부터 몇 주 후.

고려 개경.


“저하! 소신 정몽주! 첫 외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복귀······.”


벌컥.

기세 좋게 세자궁으로 뛰어든 정몽주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먼저 도착해 정몽주에게 따가운 시선을 쏘는 이성계의 존재와.

내 옆에 산처럼 쌓인 서류의 존재 때문일 것이었다.


“저하?”

“하······.”


정몽주를 보자 자동으로 한숨이 튀어 나갔다.


그래도 원 역사에서 동아시아를 돌아다니며 능력 있는 외교관 모습을 보여줬기에.

그래서 귀여운 세자는 몽주를 믿었단 말이야!


“설마, 그거······. 전하께서 내리신?”

“일단 앉아.”


나도 모르게 나간 차가운 목소리에, 정몽주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일단 이 서류 더미들은 다음 문제였다.

그렇다고 정몽주가 심양에 가서 큰 잘못을 했냐면, 또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첫 외교에서 지나치게 큰 성공을 한 게 문제였다.


지금도 보라고.

얼마나 가슴에 자만심이 부풀어 올랐으면 걸음걸이부터가 아주 공중에 둥둥 떠다니겠어.


“정 수찬.”


잘한 건 잘한 거고.

오늘은 어깨 좀 누르자고, 포은 선생.


“예. 저하.”

“내가 이번에 정 수찬한테 아주 큰 기회를 줬지?”

“······예. 임시지만 종5품직까지 달아봤사옵니다.”


사신단의 부사(副使) 자리는 원래 정몽주가 꿈꿀 수도 없는 자리다.

아마 원나라로 보내는 사신단이었으면 최소 종2품 관료를 임명했을 것이고.

일본으로 보내는 사신단이어도 조금 아래지만 그만한 짬을 먹어야 가능할 터.


하지만 이번에 고려에서 보낸 사신단의 목적지는 요동의 군벌, 나하추.

덕분에 정몽주는 임시 품계까지 달아가며 그런 휘황찬란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물론, 이번 사신 임무는 원나라에 가는 것에 비하면 비교적 위험한 임무였을뿐더러.

웬일로 정몽주가 공민왕의 눈에 들었기에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인데.


“소문을 들어보니, 거기서 꽤 방자하게 굴었더라?”


언성, 언성을 높이지 마라.

너무 강한 말을 쓰지 마, 약해 보이니까.


심양으로 출발하는 정몽주에게 내가 그리도 주입했던 말이었건만.

이 꼰꼰 그 자체로 이루어진 인간은 무려 나하추를 상대로 평소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 모양이었다.


그것도, 원래 나하추를 상대해야 했을 정사(正使)가 병으로 앓아누운 사이 커버만 하면 됐을 임무를.

정몽주의 독단으로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강화 협약에 도장을 꾹 찍고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내 눈앞에 있었다.


“······.”

“저하. 그래도 소신 정몽주. 나하추를 상대로 얻어낼 것은 분명 전부 얻어냈다 생각하옵니다······.”


까놓고, 정몽주가 저리 변명했을 정도로 결과물은 매우 훌륭하긴 했다.


일단, 나하추가 자신의 영역에서 거두는 일 년 치 세금.

솔직히 더 뜯어 볼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나하추가 다른 군벌 에센부카나 요양행성 세력에 당해버릴 수 있으니 관용을 베푸는 걸로.


요동의 균형이 생각 이상으로 무너져버리면 내가 곤란했다.

적당히 지금처럼 갈라져 지들끼리 아웅다웅하고 있어야, 힘을 키운 고려가 한 놈씩 꿀꺽하기 좋지 않겠는가.


뭐, 더 뜯을 수 있었음에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상황에 피눈물이 흐른 건 사실이었지만.

어차피 이대로 진행된다면 언젠가 삼킬 요동, 청구서는 조금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저하께서 말씀하셨던 조건 역시 전부 받아 오지 않았사옵니까?”

“그건 그렇지.”


그리고 다음 조건.

고려국 상단에게 심양 일대의 무역을 전면 개방할 것.


이 일이 성사된다면.

대식이 놈은 분명 눈을 번쩍이며 달려가 심양 일대를 와앙 물어뜯으려 날뛸 터.

인삼과 가죽부터 시작해 요동과 만주에서 나는 돈이 되는 특산물들.

그걸 전부 고려가 ‘합리적인’ 가격에 받아 대도로 무역을 ‘대리’해 준다는 이야기지 않은가.


그건 분명 나하추의 쏠쏠한 용돈벌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코 묻은 돈도 알뜰하게 가져가는 게 승자의 권리였다.


“그리고 중결! 자네도 말 좀 해 보게! 자네 의동생도 이번 합의로 동족들이 크나큰 이득을 보지 않았던가!”

“······.”


하지만 내 반응이 시원치 않자, 정몽주는 옆에 앉아있던 이성계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했다.


세 번째 조건은 나하추가 옷치긴 왕가의 이름을 빌려 영향력을 끼치던 여진족들에게 손을 떼는 것이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두 번째 조항, 만주 특산물로 나하추가 짭짤한 수익을 거두던 일과 연관이 있는 항목이기도 했다.


사실 크진 않았지만 나하추가 동북면을 침공한 데는 이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나와 이성계가 은근슬쩍 개마고원과 두만강 일대 여진족들에게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으니까.


“뭐, 지라이 그놈이 들으면 좋아할 이야기긴 하군.”

“그렇지?”


이성계가 마지못해 인정한 말처럼, 이지란과 그와 가까운 여진족들은 이번 결정에 환호할 가능성이 높았다.

여진족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아가던 요동 군벌에게 해방되어, 고려의 따뜻한 품에 안기는 일이 사실상 명문화된 게 아닌가.


이제 이성계의 퉁명스러운 대답까지 듣고 나자, 잔뜩 기가 죽어 있던 정몽주는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온 듯했다.


뭐, 그가 가리키는 네 번째 조항.

솔직히 나하추가 순순히 동의할 거라고 예상하고 정몽주를 심양으로 보냈던 건 아니긴 했으니까.


“그리고 저하! 나하추는 소생의 압력을 못 이겨 이 조항까지 동의했사옵니다! 압록강 유역의 옛 파사부 땅 말이옵니다!”


물론, 이건 이성계와 정몽주의 합작 업적이 맞는 듯했다.

이성계가 내가 맡긴 화총병을 이용해 기대 이상으로 나하추군을 박살 낸 덕에.

그리고 그렇게 기가 팍 죽은 나하추를 정몽주가 외교적으로 몰아붙인 덕에.


나하추는 요동 일부를 고려가 정복하더라도 묵인하겠다는 비밀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문서에 오른 땅은 천산산맥과 압록강 사이에 낀 옛 파사부 땅.

한때 공민왕이 동북면과 함께 손봐준 적이 있었던, 요동 정복의 전초기지 같은 땅에 고려가 깃발을 꽂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요동의 다른 세력들도 이 합의를 묵인하느냐는 다른 문제였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놈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삼겹살을 아주 좋아하시는 분께 이미 호감작을 잔뜩 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결과적으로 이번에 나하추에게 고려가 뜯어낸 걸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막대한 배상금.

독점 무역권.

남만주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 공언.

그리고, 요동으로 가는 교두보 확보.


크으, 보기만 해도 배부르구만.


“역시, 소신은 저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게지요?”


하지만 정몽주는 아직도 조금 어깨가 올라가 있었다.

이번 나하추와의 교섭 건을 전부 자신이 이룬 일처럼 느끼고 있기라도 한 걸까.

뭐, 이십 대 중반에 첫 외교관 일이자 정사를 대리한 커다란 건을 성공시켰으니 저렇게 들뜬 것도 이해는 간다만.


“아니. 정 수찬. 아직 뭘 착각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저하?”

“애초에, 정 수찬이 심양에 사신으로 갈 수 있는 이유가 뭐였지?”


하지만 정도를 넘어 끓어오른 냄비에서 김을 빼줄 필요가 있듯.

정몽주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팩트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풋.

그때, 이성계가 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뒷일을 예감하기라도 한 건지, 안색이 파리해져 가는 정몽주를 보고 낸 소리가 분명했다.

하여튼, 이 두 인간은 이 와중에도.


“그, 그것은······.”

“원래 나하추의 사신으로 가야 할 사람들이 옥새 반납을 위해 대도를 방문하느라 그런 거잖아. 잊었어?”

“그······ 홍건적에게 노획한 옥새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

홍건적 방어전을 막아낸 고려는 생각지도 못한 전리품을 얻은 상태였다.

승전을 거두고 개경으로 귀환한 뒤, 전리품을 정리하던 과정에서 어느 상자에서 원나라 옥새가 튀어나온 것이다.


‘세, 세상에······.’

‘저하?’


솔직히, 전리품 중 귀중품을 내가 직접 검수하는 과정에서 옥새가 튀어나왔을 때.

나는 정말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홍건적 놈들이 여름 수도인 상도를 터는 과정에서 몽골 대칸의 옥새도 함께 털린 것이었을까.

몽골 제국의 정통성 그 자체인 옥새는 가치를 숫자로 따질 수 없는 물건.


그렇게 고려의 손에 들어온 옥새는.

정몽주보다 훨씬 높은 급의 사신을 통해 대도에 누워 있을 토곤테무르에게 반납되었다.

그 덕분에, 나하추를 외교적으로 두들겨 패면서 대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하······.”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드디어 깨달은 걸까.

방금 정몽주의 높이 치솟았던 어깨가 어느 정도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까짓거, 아직 이십 대의 젊은 나이니 귀여운 실수 정도로 넘어가 주지 뭐.

나는 넓은 아량을 가진 관대한 세자 저하니까.


“정 수찬. 이번 일을 잘 해낸 건 맞지만, 다른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잊지 말라고.”

“저하······. 소신이 지나치게 방자했던 것 같사옵니다······.”


나와 고려군이 홍건적을 박살 내 옥새를 얻었고.

이성계가 나하추군을 유린하며 콧대를 꺾었다.

그랬기 때문에 정몽주가 원나라 조정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하추와의 교섭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랏일이란 늘 이렇게 수많은 빌드업과 다수의 협조 아래 굴러가는 것.

정몽주쯤 되는 사람이 이걸 잊으면 곤란했다.

뭐, 우리 포은 선생님께서는 당연히 이해가 빨라, 자신의 잘못을 금세 반성하는 모습이었지만.


“하여튼 몽주 느이 언젠가는 제 잘난 맛에 살다 크게 실수할 줄 알았다이.”

“······.”

“감사하게 여겨라이. 더 큰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저하께서 정신을 차리게 해 준 것이니.”

“중결······.”


이성계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걸까.

아니면 친구의 어깨가 잔뜩 올라가 있던 게 눈꼴 시렸던 걸까.


어쨌든, 일침을 내린 이성계가 정몽주의 등을 팡팡 두들김을 끝으로 나하추의 고려 침공 건은 공식적인 부분이 마무리됐다.


원 역사보다 훨씬 덜한 희생으로.

원 역사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얻었고.

나아가 훗날 요동으로 진격할 때 필요한 첫 발판을 얻은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 하나.

비공식적으로 나는 나하추에게서 얻어낼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아, 그리고 저하.”

“그래. 아직 말할 게 하나 더 있었지?”

“웬만하면 저하를 단독으로 뵙고 드리고 싶었던 것이오나······ 중결 정도면 문제는 없겠지요.”


이성계를 향해 표정을 찡그려 보인 정몽주가 소매에서 비밀스러운 문서를 꺼냈다.

공민왕이 이 문서를 확인한 뒤에야 허락을 받아 내게 전할 수 있었다는 말은 덤이었다.


이것은 아마도, 이 고려 땅에서 단둘.

왕과 나만이 내용을 알아야 할 문서일 터.


내가 뭐 어떻냐며 발끈한 이성계를 옆에 두고, 나는 조심스레 문서를 펼쳤다.


[······나를 능멸한 고려에게 지옥을 보여주도록. 놈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기만 한다면 뒷일은 자정원에서 책임지겠다······.]


자정원이라······.

나는 대도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그곳과 엮였던 적이 있었다.


그래.

내가 황후의 체면을 생각해 마지못해 비누와 디퓨저를 넘겨주었던 그곳.

기황후의 재정을 책임지는 곳이 바로 자정원이었던 것이다.


뒤이은 문서의 내용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예의 그 서릿발 같은 말투로, 편지에는 나하추에게 고려를 크게 손봐 줄 것을 요구하는 고압적인 내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누가 봐도 기황후가 직접 쓴 내용이었다.


“저하······?”

“나쁘지 않군.”

“예? 나하추의 말로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 들어있을 것이라 하였사온데······.”


뭐, 충격적이긴 했을 거다.

내 머릿속에 14세기 동아시아의 세력 구도가 들어있지 않았으면 말이지.


하지만 역사에 나하추가 고려를 침공한 이유가 적혀있지 않다 뿐이지.

이놈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을 세력은 뻔했다.

만주의 주인, 옷치긴 왕가.

혹은 고려에 원한을 가진 기황후 측.


사실 나하추가 패를 완전히 까발렸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놈은 기황후와의 연결고리만을 내게 내밀었지만, 언제든 옷치긴 왕가와 뒤로 손을 잡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놈이니까.

애초에, 만주에서 군벌 노릇 하면서 옷치긴 왕가 놈들이랑 원수 되고 살 수가 있겠는가.


“나중에 말해줄게, 정 수찬. 지금 말해줄 수 있는 건, 이 문서는 내게 확실히 커다란 무기가 될 거라는 것 정도야.”

“저하께 도움이 되었다면야 소신은 기쁘옵니다만······.”


그렇게 말을 잇던 정몽주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서렸다.

음······. 저거 숭배의 단위로 치면 0.1 최대식 정도로군.


“신기하옵니다. 그 문서는 전하께서도 읽어보시고는 안색이 변한 물건이옵는데.”

“그래?”

“저하께서는 어찌 놀라는 기색이 하나 없으신지, 그것이 경이로울 뿐이옵니다.”


하긴, 내 손에 들린 건 제국의 황후에게서 온 밀서다.

거기에 기황후가 무력까지 동원해서 고려를 조지려 든다는 내용을 보면 크게 당황해야 정상이었다.

아마 정몽주에게 이 문서를 가장 먼저 받아봤을 공민왕도 오랜만에 표정이 변했을 터.


하지만, 나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곧 얼마 안 있어 기황후가 공민왕을 폐하고 고려 왕족 덕흥군을 앞세워 고려로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말이지.


그러니 기황후가 변방 군벌에 불과한 나하추에게 손을 써서 고려를 조지려 했다는 사실 정도야.

당연히 계산 안에 있던 내용이었다.

그러니, 놀랄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좋아. 이건 내가 맡아두지.”


그렇게 기황후의 밀서를 손에 넣음을 끝으로 나하추 건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이렇게 손에 넣은 기황후의 밀서는 유용하게 쓸 장기말이 될 것이었다.

훗날 대도에서 성대하게 벌어질 왕좌의 게임에서 잘 써먹어 줄 예정이었달까.


그렇게 합법적인 갈굼 시간이 끝났다.

긴 여정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정몽주가 슬슬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 봐도······.”

“잠깐. 어딜 도망가려고.”

“예?”


하지만 그건 그거고.

잘못을 말로만 때우면 섭섭하지.


마침, 내 눈앞에는 여전히 커다란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공민왕에게 올려야 할 후속 보고서가 그대로 책상 위에 높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걸 올리게 된 이유는 정몽주가 외교관 일을 너무 완벽하게 해준 탓이었다.

그놈의 조치-보고-반성-점검.

나하추에게 큰 승리를 거두고 엄청난 이익을 뜯어내게 된 지금, 공민왕이 저 4대 악마를 지옥에서 꺼내 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아. 이놈의 세자 자리.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아아······.”

“붓······ 들어야겠지?”

“소신이 외교의 자리에서 방자한 탓도 있었다니, 무슨 할 말이 있겠사옵니까······.”


결국 무릎을 꿇고 사죄를 올린 정몽주는, 귀가도 미루고 보고서 작성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참. 저하, 그러고 보니 입궁하는 길에 삼봉을 우연히 만났사옵니다만.”


옆에서 열심히 보고서 틀을 잡아주던 정몽주가 무릎을 탁, 쳤다.

분명 심양에서 복귀한 정몽주를 끌고 술 한잔하러 갈 생각이었을 이성계가 입맛을 쓰게 다시고 있던 순간이었다.


“삼봉을?”

“예. 듣자 하니 요새 연백 염전에서 후진(後進)들을 교육시키며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하였사온데······.”


아, 그 이야기군.


“그······ 삼봉은 이름도 괴상한 불신지옥인가 뭔가 하는 단체를 조직해서는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옵니까?”

“불신지옥?”


그런데, 내가 알고 있던 것 이상의.

꽤나 불길한 어감의 네 글자 단어를 듣고.

나는 이맛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 이 미친놈.

시작부터 화려하게 저질렀구나.


작가의말


홍건적 두령 사류를 쓰러뜨린 고려가 원나라 옥새를 득템한 건 고증입니다.

나중에 이자송이란 신하가 그걸 반납하러 대도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참고문헌 :

정동훈, 「고려 공민왕대 대중국 사신 인선의 특징」, 『동국사학 제60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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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8화. 묵직한 무장의 결의 +10 24.09.10 4,511 152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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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4화. 전부 내가 짊어지겠다 +13 24.09.06 5,083 171 19쪽
33 33화. 포기하지 마라, 내가 널 포기하기 전까지 +17 24.09.05 5,025 195 19쪽
32 32화. 명군과 명장의 자질 +15 24.09.04 5,086 184 16쪽
31 31화. 넌 못 지나간다 +13 24.09.03 5,087 173 13쪽
30 30화. 세자가 정체를 숨김 +12 24.09.02 5,188 157 16쪽
29 29화. 귀여운 세자의 서경 사수 쇼 +8 24.09.01 5,232 162 17쪽
28 28화. 폭풍전야 +11 24.08.31 5,245 162 14쪽
27 27화. 노병은 죽지 않는다 +12 24.08.30 5,296 173 16쪽
26 26화. 여진해병 이지란과 기합찬 야만전사들 +15 24.08.29 5,397 170 14쪽
25 25화. 용의 피를 타고난 아이 +14 24.08.28 5,424 185 13쪽
24 24화. 고려가 힘을 숨김 +14 24.08.27 5,395 192 18쪽
23 23화. 천 리 바깥을 꿰뚫는 눈 +13 24.08.26 5,313 192 14쪽
22 22화. 카사르테무르 +17 24.08.25 5,366 201 15쪽
21 21화. 마음을 사는 방법 +20 24.08.24 5,396 209 15쪽
20 20화. 동심결(同心結) +18 24.08.23 5,461 195 13쪽
19 19화. 고려세자삼합과 황좌의 게임 +19 24.08.22 5,574 199 15쪽
18 18화. 천기누설 +18 24.08.21 5,572 205 13쪽
17 17화. K-상추쌈과 삼겹살 +13 24.08.20 5,764 188 14쪽
16 16화. 700년 전의 한류(韓流) +15 24.08.19 5,873 188 18쪽
15 15화. 큰 그림 그리기 +16 24.08.18 5,848 191 14쪽
14 14화. 화력고려의 태동 +15 24.08.17 6,001 206 15쪽
13 13화. 하, 총 마렵다 +14 24.08.16 5,974 200 13쪽
12 12화. 염전 인부 대식이 +15 24.08.15 6,038 232 14쪽
11 11화. (딸깍) +18 24.08.14 6,184 218 16쪽
10 10화. SSS급 유망주의 삶은 고달프다 +15 24.08.13 6,393 211 13쪽
9 9화. 수확물 두 배 이벤트 +17 24.08.12 6,629 221 18쪽
8 8화. 사기템 +17 24.08.11 6,625 242 12쪽
7 7화. 기적의 볍씨 +14 24.08.10 6,727 231 14쪽
6 6화. 연철의 연금술사 +13 24.08.09 6,832 226 17쪽
5 5화. 은이 필요해요. 아주 많이 +12 24.08.08 7,153 232 14쪽
4 4화. 동북 촌놈과 재능충 +16 24.08.07 7,794 238 17쪽
3 3화. 명마 고르기 +22 24.08.06 8,139 257 15쪽
2 2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혼혈왕자 +17 24.08.05 8,725 256 13쪽
1 1화. 고려에서도 쌀먹이 가능할까요 +36 24.08.05 9,684 25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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