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을 지켜주세요.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백림.
그림/삽화
백림
작품등록일 :
2024.07.24 12:14
최근연재일 :
2024.08.09 10:00
연재수 :
13 회
조회수 :
165
추천수 :
0
글자수 :
76,321

작성
24.07.24 15:18
조회
25
추천
0
글자
13쪽

시작

DUMMY

망했어. 다 망했다고!


지금까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눈을 뜨니 이세계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목숨을 위협 받았다.

간신히 부지한 목숨이건만 몇 번이고 정체를 의심받고, 또 죽을 위기만 몇 번을 넘겼는지.


그와 계약한 이후에 엄청난 노동강도에 갈려나가기는 또 얼마나 갈려나갔는가.


하찮은 혀놀림으로, 태연한 척 예언자를 연기하며 마침내 이 자리에 섰다.


한데···, 하필 여기서. 고지가 눈앞이었는데.


아랫입술을 깨물자 통증이 느껴졌다.



“선지자 님?”


“······.”



기나긴 침묵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머리가 희끗한 신관이 나를 불렀다.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자 그녀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선지자께선 무엇이 보이십니까?”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눈앞의 샘을 내려다보았다.


고대의 샘. 이 고대 유적지에선 특별한 의식이 행해졌다. 바로 제국의 미래를 점치는 것.


예언자였던 황태후는 매년 이 곳에서 제국의 앞날을 알리며 모두에게 기대감을 주기도, 혹은 경계를 심어주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그녀의 예언은 항상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러나 황태후가 승하한 후에는 그저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의식을 거행하는 이도 매번 바뀌었다.

주로 신관이 담당했으나 때때로 황족이나 그 해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가 재단에 서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재단에 서는 것은 나였다. 불가능해보였던 계획이 마침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형식만 남은 연례행사다.



‘태양이 보인다니, 하하. 제국의 미래가 찬란하겠습니다.’

‘맑은 물이 보인다니요. 이번 년에도 제국의 미래가 밝겠습니다 그려.’



샘을 들여다보며 그럴싸한 단어나 문장들을 말하면 제국민이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는 그런 식이었다.

적어도 내가 듣기론 그랬다. 그래서 미리 할 말도 준비해왔다.


그 말이 계획의 핵심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고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제의 곁에서 예복을 차려입은 채로 서있는 그가 시야에 잡힌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작게 입모양으로 ‘왜?’ 라고 물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내지지 않던 말을 해야 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일정도로, 주변의 풍경을 그대로 반사할 정도로 깨끗하다던 샘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심해를 들여다보는 듯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깊고 짙은 어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어둠처럼 말이다.



“네?”



예상 범주를 벗어나는 나의 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 했는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모두가 믿지 못하는 그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덧붙일 말도, 설명할 말도 없었다.

나름의 최선을 다해 정리한 문장이었다. 차마 제국의 앞날에 어둠만이 가득하다고는 할 순 없었으니까.



“지금 뭐라고 하신 거야? 들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무슨 소리지?”



주변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고, 사태를 파악한 몇몇은 다급히 뛰어다녔다.

황실은 황실대로, 신관은 신관대로, 귀족은 귀족대로.

각자 이 상황을 어찌 처리해야 자신에게 유리할지 논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분주한 와중에 그는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예리한 그의 눈빛엔 의아함이 가득했다.



[푸른 매가 보입니다. 이 말만 하면 돼.]



한 마디. 푸른 매가 보인다는 한마디. 그것이 그와 나의 계약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은, 온갖 개고생들은 오직 그 말을 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바로 여기서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고대의 샘은 나에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광경을 보여주었다.

거짓을 말할 수 없을 만큼.


왜 이렇게 지독한 암흑을 보여주는 거지?

부정을 탄 걸까? 아니면 자격 없는 나에게 경고를 주는 걸까?

그래, 처음부터 잘못이었어. 모든 것이.


역시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거절했어야했다.

아무리 달콤해보여도 내 몫이 아닌 것은 탐하지 말았어야했다.


칼렌드리한. 이 개자식의 술수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 * *



‘어디지?’



유리는 눈을 끔벅거렸다. 느릿하게 한 번. 그리고 빠르게 여러 번.

하지만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은 변함없었다.

분명 한강 공원에 누워있다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덜컹거리는 마차 안이다.



‘서울 한복판에 마차라고?’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생경했다. 마차의 흔들림이 등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유리는 멍한 표정으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핸드폰 지갑 등을 넣어둔 가방은 보이지 않는다.

마부석엔 한 남자가, 유리의 앞엔 중년의 여성이 앉아있었다.



“정신이 드세요?”

“······네.”



“다행이네요. 어디 다친 곳은요?"

“없는 것 같아요.”



유리는 대답하면서도 자신이 내뱉는 말이 어색했다.

분명 처음 듣는 외국어이건만 반사 신경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유리는 의문을 가지는 대신 필요한 질문을 먼저 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죠?”



그녀는 숲에서 쓰러져있는 유리가 위험해보여 자신의 마차에 태웠다고 했다.



“비슬리가 가장 가까우니 거기서 내려줄게요. 걱정마요.”



'숲? 비슬리는 또 어디야?'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유리를 보던 여성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유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부석으로 몸을 옮겼다.

남자와의 대화는 거친 느낌의 낯선 언어로 이뤄졌다.

둘이서 몇 번 말을 주고받는 사이, 남자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나 때문인가.’



둘은 의견 차이가 있어 보였다. 유리의 시선은 바닥에 머물렀지만 온 신경은 그들에게 쏠려있었다.

여전히 뜻 모를 소리뿐이었지만 혹시라도 힌트가 있을까싶어 집중했다.



“···우······지금······ 어쩌려고!”



그러다 갑자기 말뜻이 들리기 시작했다. 유리는 깜짝 놀라 순간 헛숨이 새어나올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아는 척 해서는 안 될 분위기였다.



“진정해.”


“우리가 지금 누굴 데리고 다닐 입장이 아니잖아.”


“같이 움직이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옷차림이 독특하긴 하지만 귀족일 거야. 근처에서 승마라도 하다가 떨어진 거겠지. 적어도 부유한 집안임은 분명해.”


"그래서 집이라도 찾아주자고?”



그들의 고향 말은 방언이 심해 외부인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래서 둘이 대화할 때는 누군가 내용을 들을까 걱정하지 않았고, 거침이 없었다.

면전에 당사자를 둔 지금도 마찬가지.



“저 여자. 눈도 검은색이야.”


“정말이야?”



내내 부정적이던 남자의 태도가 급변했다.

검은 머리는 드물지만 실재했다. 대부분 다른 색이 섞여 있는 형태였지만.

하지만 검은 눈은 아니었다. 대륙을 통틀어서도 매우 희귀했다.

역사에 몇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게다가 눈은 쉽게 꾸며낼 수 없었다.


귀족은 출신을 드러내는 외모를 바꾸는 행위를 떳떳하지 못하다 여겼고, 이는 제국민도 마찬가지였다. 제

국에서 유독 머리 염색 기술도, 가발도 발전하지 못한 이유였다.

이런 분위기에 외형변경 마법은 사치 중의 사치.

즉, 저 여자의 머리와 눈은 진짜란 뜻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눈에 띄지 않겠어? 알잖아. 제국이 흑발, 흑안을 어떻게 보는지"


"신성하게 여기지."



시황제와 함께 제국을 건국한 검사,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 제국민을 구한 의원, 기나긴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황태후 등.

공교롭게도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자는 전부 칭송받기에 충분한 업적을 이루었다.

검술, 의술, 예언······. 모두 각자 한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선보인 위인들이었다.

제국민의 존경과 기대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데려가야지. 저리 귀한 여자가 수배 중인 우리와 동행할 거란 생각은 못 할테니."


“그럴까?”


“그리고··· 어쩌면 우리 계획에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심각한 이야기에 유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놀란 표정을 가리기 위함이었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실제로 두통이 나는 것 같았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이곳은 이국의 낯선 땅이고, 자신은 매우 눈에 띄는 이방인에, 저들은 도망 중인 수배자였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



“잠시 실례했어요.”



다시 돌아온 그녀는 짐마차를 덮는 하얀 천을 내렸다.

밖의 풍경도, 말을 모는 남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제국어를 못 해서요. 반나절이면 도착한다네요. 그때까지 쉬고 계세요.”



마차에 기대앉던 유리는 무릎을 끌어다 얼굴을 파묻었다.

실제 남편인지, 그가 정말로 제국어를 못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이 자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통증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그 감각에 집중했다.

지금은 정신을 빠짝 차려야 했다.



‘일단 마을까지 함께 가자. 여기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마을엔 사람이 많을테니 거기서 도망칠 기회를 엿보는 거야.’



​한동안 불쾌한 정적이 이어진 가운데 다그닥거리는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여자도 누군가 다가오는 걸 눈치 챘는지 마부석으로 움직였다.



“놈들이 벌써 쫓아온 건가?”


“아니, 제국 쪽 기사가 아니야.”



달리는 말이 만들어낸 땅의 울림이 멈추고 모래바람이 잦아들자 한 사내가 그들의 앞에 멈추었다.

얼굴에 복면을 두르고 있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는지, 그들은 곧장 마차에서 내려 예를 차렸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4기수를 뵙습니다. 임무를 마치고 비슬리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제법 오래 있었나보지? 나를 알다니.”


“그렇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태연한 척 했지만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4기수가 직접 오다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럼 4기수의 다른 이름도 알겠군.”


“추···추격대입니다.”



여자는 순간 직감했다. 꼬리가 붙은 자기를 살려두지 않을 거라고.



“잠시만요! 계획, 좋은 계획이 있습니다!"


"······."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습니다. 분명 단장님께서 보시면······.”


“변명은 듣지 않겠다.”



복면의 사내가 손을 들자 순식간에 생성된 얼음 화살들이 허공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부부를 꿰뚫었다. 정확히 심장을 가격당한 둘은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뭐였지, 방금? 마법? 마법으로 죽···죽인 거야?’



마차의 천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그들을 엿보던 유리는 경악했다.

혹여 숨소리라도 새어나갈까 입을 틀어막은 채 앉은 자세 그대로 뒷걸음을 쳤다.

들키는 순간 끝이다.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도망치려 움직이는 순간 죽는다.

유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대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다.



‘제발··· 제발···!’



찰나의 시간동안 유리는 ​간곡하게 빌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못한 바람이었다.



​“쥐새끼가 한 마리 있군.”



복면을 쓴 남자는 말에서 내려 유리가 숨어있던 마차로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어 마차의 천을 붙잡으려던 순간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단검에 찔린 말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기습이었다. 남자는 곧장 말의 목을 베어 강제로 진정시켰다.

곧이어 자신의 뒤를 찌르고 들어오는 칼을 막아내었다.

마차 안에서 크게 휘청거리던 유리도,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았다.



​“큭!”



복면의 남자는 칼날로 전해지는 충격까지 막지 못했는지 몸이 흔들렸다.

중심을 잡지 못한 채로 시작한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연이은 공격을 가까스로 방어했지만 몸의 상처는 점점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복면 쓴 남자의 눈에는 뒤따라오는 지원군도 보였다.


복면의 남자는 크게 뒤로 물러나며 마차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무리가 확실하지 않았지만, 기회는 언제든지 있으리라. 지금은 무사히 귀환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거칠게 뜯어내고 손에 쥐었다.



“이동!”



​시동어를 외치자 남자의 몸을 밝은 빛이 감쌌고, 그는 사라졌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종일관 공격을 유지하던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짙은 갈색 머리의 일행은 곧바로 주변을 살폈다.



“모두 사망했습니다. 상처 부위가 물에 젖어있는 걸 보니 얼음 마법으로 보입니다.”


“한발 늦었군.”


“어떡할까요?”​


“시신은 수습해라. 어쨌거나 제국의 수배자이니.”



제국의 기사로 보이는 그들은 능숙하게 현장을 정리했다.

익숙한 상황인지 표정도, 목소리도 매우 담담했다. 범인을 놓쳤다는 안타까움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차를 확인해. 누군가 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 글 설정에 의해 댓글을 쓸 수 없습니다.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계약을 지켜주세요.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3 아마도 24.08.09 5 0 11쪽
12 결론 24.08.08 6 0 11쪽
11 시선 24.08.06 7 0 10쪽
10 마법진 24.08.05 13 0 11쪽
9 계약 24.08.02 16 0 11쪽
8 의심 24.08.01 13 0 22쪽
7 확인 24.07.30 16 0 23쪽
6 시비 24.07.29 14 0 10쪽
5 방해 24.07.28 11 0 14쪽
4 새로운 인물 24.07.27 13 0 11쪽
3 거래 24.07.26 14 0 11쪽
2 만남 24.07.25 12 0 11쪽
» 시작 24.07.24 26 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