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을 지켜주세요.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판타지

백림.
그림/삽화
백림
작품등록일 :
2024.07.24 12:14
최근연재일 :
2024.08.09 10:00
연재수 :
13 회
조회수 :
169
추천수 :
0
글자수 :
76,321

작성
24.07.28 10:00
조회
11
추천
0
글자
14쪽

방해

DUMMY

“무슨···?”


“유리아 님을 저희 녹의 정원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안경너머로 보이는 루펠의 눈빛이 진지했다.

굳게 다문 입술에선 결연한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한동안 그의 표정을 살피던 유리아는 이내 고개를 끄덕여 그의 초대를 수락했다.



“알겠어요.”



유리아의 대답에 루펠은 꽤 놀란 표정이었다.

거절당할 각오도 했건만. 유리아가 이리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조금은요. 근데 어차피 할 일은 빨리 하자는 주의라서요.”



모든지 처음은 어렵다.

귀족들이 유리아를 주시하면서도 먼저 다가오지 않은 이유였다.

아직 아무도 유리아와 대화한 적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혹여라도 체면이 깎일 일은 원치 않았다.


반면 루펠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체면도 망신도 상관없을 정도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진 쉬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저에겐 환영할 만한 일이군요.”


“그럴지도 모르죠.”


“아, 그리고 말씀드리지 못 한 게 있는데··· 루펠은 공작가문입니다. 남부에 위치한.”



루펠은 혹여 자신의 작위가 부담스러워 유리아가 초대를 거절할까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제국에서 공작은 단순한 고위 귀족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 제국의 수호자였다.


서부의 날개, 힐다이치 공작 가

동부의 방패, 카프너 공작 가

북부의 창, 린하트 공작 가

남부의 방벽, 루펠 공작 가


각 가문의 초대가주들은 시황제와 함께 어둠을 물리친 개국 공신이었다.

건국 이후부터 지금까지 각 공작 가문은 제국의 기둥이었다.



“남부의 공작 가문이라면··· 혹시 남부 전쟁의?”


“맞습니다. 아버님과 형님이 참전하셨죠.”



루센티아 전쟁이후 제국이 겪은 최대의 위기, 남부전쟁.


타국과 국경을 맞댄 동, 서, 북과는 달리 남부는 바다에 둘러싸였다. 상대적으로 군사적 방비에 소홀했다.

제국에게 남부는 안정적으로 농사나 짓는 땅에 불과했다.

그 허점을 남쪽의 섬나라, 알본디가 깊숙이 파고들었고, 방심의 대가는 혹독했다.


알본디의 대군에 곡창지대는 불탔고, 마을은 약탈당했다.

그들은 강을 따라 그대로 제국의 수도까지 진격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 같던 알본디의 군대.

질주하는 그들의 진군을 멈춰 세운 건 제국의 1황자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칼...리..?’



루펠 공작은 남부의 방벽이란 칭호에 걸맞게 자신의 공작령에서 최후의 방비선을 펼쳤다.

다급하게 소수의 기사단을 이끌고 출정한 1황자와 함께.


그리고 참으로 많은 이들이 죽었다.



“대지의 안식에 깃드셨기를.”



루펠 공작은 유리아의 조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엄숙해진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시간을 많이 뺏었군요. 나가시던 길을 에스코드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공작의 작은 호의였다.

자신이 자리를 나선 이후 벌떼처럼 몰려들 귀족으로부터 유리아를 보호해주기 위해서.


공작보다 작위가 높은 이가 없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귀족은 공작이 자리를 뜨는 순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친분을 쌓아 과시하고자, 혹은 흠을 잡아 헐뜯고자···

각자의 목적을 위해 유리아에게 접근할 것이다.



“좋아요.”



유리아는 공작의 의도를 파악하고 함께 움직였다.

홀을 나가는 내내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그와 가까운 사이처럼 보이는 건 또 다른 소문을 양산할 테지만 차라리 이편이 나았다.



공작을 배웅하고 유리아는 정원에 덩그러니 남았다.

그녀는 원래의 계획을 수정했다.

길드 방문을 잠시 미루었다. 꽤 피곤했다.



'지치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기력이 소진됐다.

기가 빨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정원 한 켠에 준비된 샴페인을 맛 본 유리아는 그대로 몇 번을 더 들이켰다.

입맛에 맞기도 했지만, 허기를 채우려는 목적도 있었다.

빈 속에 들어간 샴페인은 금방 유리아의 몸속에 퍼졌다.


유리아는 음주를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몇 잔을 더 마시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그녀는 곧바로 별채로 향했다.


별채는 하룻밤 묶는 손님을 위한 장소라 그런지 평소엔 인적이 드물었다.


회랑과 연결된 중앙 정원은 아담하고 포근했다.

정원의 의자에 앉으면 마치 해외여행지에서 숙소 1층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별채를 갈 때는 여행을 가는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방금 마신 샴페인 속 알코올 덕에 걸을수록 열기가 올라왔다.

유리아는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적어도 분수대에 앉아있는 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중앙의 작은 분수대에 앉아있던 사람 역시 유리아의 기척을 알아차리고선 몸을 돌렸다.



“어?”



유리아는 뜻밖의 인물에 놀랐다.

그 덕에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의식할 새도 없었다.


고장난 기계처럼 바보 같던 반응을 보인 게 머쓱했는지 유리아는 괜한 말을 덧붙였다.



“음···. 반갑···네요.”



바로 열렬한 연애편지의 소유자였다.


따지고 보면 반갑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연회의 귀족들, 누군지도 모르는 승냥이들보단 안면 있는 재수남이 훨씬 나았다.



“여기에 숨어 계셨던 건가요?”



기사 제복 차림의 남자는 최소한의 격식만 갖춘 상태로, 누가 봐도 억지로 끌려나온 모습이었다.

대개 가슴께에 달린 한 훈장이나 휘장도, 어깨를 감싸는 견장도 없었다.

그저 코트에,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 넘기는 정도의 예를 갖추었을 뿐이지만 그의 얼굴 덕분인지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남자의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유리아가 말을 이었다.



“여긴 제 아지트인데.”


“아지트?”


“아, 뜻을 모르시나? 음··· 나만의 비밀장소. 대충 그런 의미예요.”


“딱히 비밀스런 공간은 아니지 싶은데.”



남자의 지적에 유리아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대충이요. 대충 비슷한 의미.”



역시 재수 없어.

하지만 지금은 기분이 매우 좋으니 이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었다.

게다가 나의 의뢰주님이 아니신가.


유리아는 남자와 나란히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손을 뻗으면 겨우 닿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였다.



“안 그래도 길드에 가려던 참이었는데.”



유리아는 챙겨왔던 편지를 내밀었다.

그녀의 기다란 손에 들린 봉투엔 어떤 무늬도 인장도 없었다.

그는 편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기한은 내일까지였을 텐데요.”


“대충하진 않았으니 걱정 마요. 돈값은 해야죠.”



이걸로 오늘 일정은 끝이었다. 유리아는 앞으로 손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 사이 남자는 봉투를 열어 편지를 훑어보았다. 전부를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이군요.”


“네?”


“돈값 말입니다.”



번역된 내용은 깔끔했다. 단어하나 누락된 부분도 없이.

편지는 수사 과정 중에 습득한 것으로, 사실 남자는 이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이전의 번역가가 오랜 방언이 섞여 완역은 힘들다 했던 내용을.

숨겨진 단서가 있을까싶어 길드에 재의뢰를 했었다.

지금 보니 결국 의미 없는 사랑의 미사여구였지만 말이다.



“적나라한 내용이 있었을 텐데.”


“글쎄요.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요. 잊어버렸어요.”



번역은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강렬한 고백이 그리 쉬이 잊힐 리도 없었지만 유리아는 모르는 척했다.

이런 일엔 언제나 비밀 유지가 중요한 법이니.


유리아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남자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확신했다.

유리아는 눈치가 빨랐고, 상황 판단력은 매우 훌륭했다. 자신이 있어야할 곳과 아닌 곳. 알아야할 것과 아닌 것. 경계가 분명했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일부러 떠보는 말에 넘어오지 않았고, 궁금하지 말아야 할 사항은 묻지 않았다.


수배자의 죄목도, 심지어 자신의 이름도, 신분도.


참으로 공교로웠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지고, 언어 능력도 정치적 감각도 뛰어난 여인이, 하필 그 조직과 함께, 기억을 잃은 채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사실처럼 보였다.

자신도 주변의 부관들도 모두 인정한 부분이었다.

남자는 전쟁터와 정치판을 구르며 체득한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하지만, 우연은 믿지 않았다.



“번역 일은 계속 합니까? 개인적으로 고용하고 싶은데요.”



지켜봐야 할 사람임은 분명했다.



“글쎄요.”



남자의 제안에 유리아는 말끝을 흐렸다.

순간 감정에 혹하여 의뢰를 받긴 했지만, 이 남자와 엮여서 좋을 게 없단 생각은 변함없었다.

찝찝하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꺼려졌다.


보장된 가시밭길 같달까.



“물론 수임료는 지금처럼.”



100배. 언제 들어도 매력적인 숫자는 유리아를 고뇌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유리아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본능과 이성사이, 가시밭길과 돈길 사이를 오가던 저울이 멈춘 쪽은 결국 이성, 즉 실리였다.


그래. 어차피 위험 없는 인생은 없고, 고난 없는 삶은 없다.

오늘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백작 저택 구석에서 유유자적하기엔 이미 글렀다.

어차피 구를 거 돈 길에서 구르는 게 나아.



“맡겨만 주세요.”



유리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치 스스로 되뇌는 다짐처럼.


그녀의 고갯짓에 앞뒤로 흔들리는 머리칼을 보던 남자는 편지를 품에 넣었다.



“이번 의뢰비는 길드를 통해 전달하죠.”



유리아는 남자의 분명한 일 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일전에는 거슬렸던 점도 남자의 제안을 수락하고 나니 갑자기 장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고심했던 기억은 어느새 잊힌 지 오래. 유리아는 만족스러웠다.



“역시 제가 좀 하죠?”


“······.”



남자는 유리아를 응시했다.

어떻게 반응해야하나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좀 재수 없는 말인가요?”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력을 바탕으로 하는 자신감은 언제든 환영이었다. 예의바른 무능력자보다 건방진 능력자가 낫다.



“하긴. 재수 없는 건 그쪽이······.”



유리아는 급하게 입을 닫았다.


이건 아까 마신 샴페인 탓이다.

마음이 들뜨다 못해 입까지 들떴는지, 가벼운 입에선 나와선 안 될 말이 흘러나왔다.



“······.”



유리아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덧붙였다.



“아니, 꼭 그렇다기 보다는··· 좀 재수 없는 상황에서 마주쳤고···”


“그리고?”


“존대랑 하대 섞어 쓰는 게 일부러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수습하려 했지만 갈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유리아는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앞으로 무례하지 않도록 숙녀 분께 예를 다하겠습니다.”


“아, 아뇨. 그런 의도는 아니였어요. 그냥 편히 하세요.”



유리아는 과하게 예를 차리는 남자의 모습에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남자는 꾸준하게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던 유리아의 태도가 급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조심스러운 태도와는 반대로 그녀는 감정표현에 꽤 솔직한 편이었다. 유리아의 반응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올린 남자의 대답은 빨랐다.



“···그럼 그렇게 할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하···.”



남자는 몸을 뒤로 젖히며 유리아가 앉은 방향으로 다리를 꼬았다. 자연스레 유리아 쪽으로 돌려진 남자의 몸 때문인지 일순 거리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유리아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흘리며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여전히 앉은 채로 뒷걸음치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물론이죠, 의뢰주님.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럼 전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유리아는 다급하게 인사말을 쏟아내고서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별채를 빠져나올 때까지 그는 유리아를 붙잡지 않았다.



‘여기서 말실수라니.’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 것. 혹독한 사회생활 끝에 얻은 교훈이었다.

분명 알코올과 보장된 금빛 미래에 흥분한 것이 틀림없다.



더 이상이 실수는 안 돼.

정원을 지나 홀에 들어선 유리아는 일부러 사람들을 피해 움직였다. 그대로 유유히 방으로 사라지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눈 앞에서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이를 보고는 포기했다.

역시 무리였나.



“유리아 님.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헤이든은 에드몬드의 장남으로서, 라이네의 연회 파트너로서 정식으로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방금 전 헤어진 남자와는 비교됐다.



“전혀요. 매우 좋았어요.”


“라이네가 괜히 우긴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유리아의 몸 상태를 염려했다.

아팠던 건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지만 속내를 모르는 그로선 한 달 가량을 몸져누워있던 유리아가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유리아가 자신은 건강하다고 말하려는 찰나, 다른 이가 방해했다.



“헤이든 님!”



라이네와 비슷한 연령대의 한 소녀가 둘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당연하지만 유리아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메로난 버지스. 헤이든과는 면식이 있는, 버지스 자작의 영애였다.



“한참을 찾았어요. 저와 한 곡 추시기로 약속하셨잖아요?”



메로난은 애교섞인 투정을 부렸다.

일부러 약속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헤이든에게 다가가는 속내가 훤히 보여 유리아는 자리를 피하려 했다.



“처음 뵙는 분이네요.”



메로난은 유리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따가운 시선에선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그녀는 인사를 건넨 뒤에도 본인을 소개하지 않고 물끄러미 유리아를 응시했다.


네가 신분이 낮으니 먼저 인사하라는 뜻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 글 설정에 의해 댓글을 쓸 수 없습니다.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계약을 지켜주세요.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3 아마도 24.08.09 6 0 11쪽
12 결론 24.08.08 6 0 11쪽
11 시선 24.08.06 8 0 10쪽
10 마법진 24.08.05 13 0 11쪽
9 계약 24.08.02 16 0 11쪽
8 의심 24.08.01 13 0 22쪽
7 확인 24.07.30 16 0 23쪽
6 시비 24.07.29 14 0 10쪽
» 방해 24.07.28 12 0 14쪽
4 새로운 인물 24.07.27 13 0 11쪽
3 거래 24.07.26 15 0 11쪽
2 만남 24.07.25 12 0 11쪽
1 시작 24.07.24 26 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