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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
그림/삽화
백림
작품등록일 :
2024.07.24 12:14
최근연재일 :
2024.08.09 10:00
연재수 :
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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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6,321

작성
24.07.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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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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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새로운 인물

DUMMY

[나의 사랑,

우리의 고향은 여전히 따사로운가요? 저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염려와는 달리 일도 어렵진 않아요. 그대와 함께했던 시간을 매일 밤 되새깁니다. 떠나기 마지막 날 그대의 손길이 저를 감쌌을 땐······.]



편지를 옮겨 적을수록 유리아의 얼굴 근육이 각기 따로 놀기 시작했다.

헤어지기 전, 깊은 사랑을 나누었는지 편지엔 그날의 일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자세히.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나드는 표현에 애꿎은 얼굴만 점점 괴상해졌다.



‘꽤나 열렬한 사랑을 하고 계셨네.’



이런 뜨거운 편지 수십 장, 수백 장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외모긴 했다.


부족한 표현력으로 표현해보자면, 그는 정말로 잘 정돈된 기사 같았다.

단정한 제복을 입은, 흐트러짐 없는 기사.


푸른빛이 감도는 어두운 머리색은 그의 매끈한 피부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도드라진 눈썹뼈와 콧날의 주변에 자리 잡은, 음영 진 그의 눈동자에선 깊이감이 느껴졌다.


무표정일 땐 그의 푸른 눈이 시리도록 서늘했지만, 굳게 다문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지을 땐 한없이 부드러워 같이 웃음 짓게 만들었다.


물론 섬뜩했던 첫 만남의 기억 덕분인지 그의 외모도 그리 와닿지 않았고, 그의 미소도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적어도 다른 이라면 그 간극에 심장을 움켜쥘 만했다.



‘다른 사람의 편지일 수도 있지.’



잉크가 마를 때까지 기다리던 유리아는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고 봉했다.


어찌 됐든 자신과 관계없는 일.

타인의 일에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산책이나 하는 편이 여러모로 생산적이다.


노동을 끝내고 정원으로 나가는 유리아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두둑한 보수를 생각하니 절로 흥이 나기도 했다.


평소에도 잘 관리된 정원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화려했다.

색색의 꽃들은 만개하여 싱그러움을 뽐냈고 작은 분수대도 몇 군데 추가되었다.

곳곳에 있는 테이블과 의자는 많은 손님 수용하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유리아 님!”



밝게 인사를 건네는 라이네를 보며 유리아는 그제야 이 모든 변화가 라이네 에드몬드를 위한 준비였음을 깨달았다.


에드몬드 백작 가의 영애. 그녀를 위한 생일 축하연이 내일 열릴 예정이었다.



“좋은 오후예요. 라이네 님께선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네. 정원이 잘 꾸며져서 맘에 들어요. 내일 날씨도 좋을 것 같고요.”



라이네는 연회를 준비하며 최종 점검을 위해 정원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원래 안주인의 역할이었지만 에드몬드의 부인의 타계 이후엔 라이네의 업무가 되었다.



“유리아 님도 내일 참석하실 거죠?”


“물론이에요.”



유리아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멋쩍은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라이네는 그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걸까요? 아란국 분들은 시끄러운 곳을 즐기지 않는다든지······. 부담이 된다면···”


“아니에요. 당연히 라이네 님의 탄생을 축하해야지요.”



유리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유리아의 은인은 에드몬드의 식솔 전부였다. 모두의 덕에 편한 생활을 누리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와는 별개로 외동으로 홀로 자란 유리아는 언제나 연하의 여동생들에게 약했다.

숨김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라이네는 충분히 귀여웠다.


게다가 이미 연회를 위한 드레스, 장신구까지 선물 받았다.

유리아의 거절에도 라이네는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지 말아달라며 강경하게 주장하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연회에 참석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누가 누구에게 부탁하는 건지······.’



애초에 유리아가 에드몬드 백작의 저택에 손님으로 머무는 한, 연회는 피할 수 없는 행사였다.



“단지 이런 연회는 처음이라 실례를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괜한 걱정이세요. 유리아 님께서 실례라니요.”



라이네의 말 대로였다. 지금껏 유리아는 무례한 적 없었고, 한 번도 그녀가 예절을 모른다 생각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가끔 유리아에게서 느껴지는 기품은 아란국 내에서도 중요한 위치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유리아의 기본적인 자태는 어릴 적부터 그녀를 교육한 조부의 영향이 컸지만, 대부분은 유리아의 사회 눈칫밥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식사할 때나, 차를 마실 때나, 이동할 때도 유리아는 라이네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피고 따라 했다.

시녀 다리야에게 묻기도 했고, 틈틈이 교양서를 읽으며 부족함을 보충하기도 했다.


전부 유리아의 부단한 노력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많은 귀족들이 모이는 연회는 또 다른 이야기.

이런 임기응변이 어디까지 통할지는 몰랐다.

사교계라······. 어차피 언젠가는 겪을 일이었지만 부담이 된다.



“오라버니도 임무를 마치고 어제 복귀했어요. 내일 연회에 오실 거예요.”



저택에 온 이후 앓아누웠던 탓에 헤이든과는 그 날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뵙겠네요.”



비록 현재 백작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들 처음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은 헤이든이었다.

이번에 제대로 감사인사를 전해야지.


그리고 바로 빠져나와야겠다.


연회를 나와 오늘 마친 일을 길드에 건네주면 임무 완료.

그 뒤엔 방에서 발 뻗고 잠이나 자면 될 일이다.




* * *




드넓은 메인 홀이 가득 찼다.

천장의 중심에 자리 잡은 거대한 샹들리에엔 초가 가득했다.

다른 장식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2층에는 붉은 태피스트리와 그와 대비되는 하얀 꽃이 난간 기둥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


생화로 가득한 홀은 라이네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집사와 시종장의 센스가 돋보이는 장식이었다.

재력을 과시하기에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이 넓은 공간을 생화로 가득 채우는 비용이 만만치 않음은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으니.


연회의 손님들 사이에선 에드몬드의 경제력, 헤이든과 라이네의 신변 등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가 오갔지만 단연 화젯거리는 에드몬드 백작의 손님. 유리아였다.



“어머, 정말이네요. 정말이야. 소문이 사실이었어.”


“아란국 사람이라지?”​



유리아는 어수선할 때 몰래 왔다 가려고 일부러 늦게 나왔건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그녀를 기다리며 잔뜩 부푼 기대감은 소문의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굳이 말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설사 몰래 속닥거렸다 한들 여기저기서 같은 주제로 말하고 있었기에 별반 차이가 없기도 했다. 어디에 있어도 유리아 얘기뿐이었다.



"저렇게 까만 머리는 처음이에요."


“하긴, 자네는 황태후 젊은 시절을 못 봤을 테니.”



영애의 순수한 감탄에 나이가 지긋한 부인은 과거를 회상하며 덧붙였다.



“정말이지···”



하지만 그녀는 뒷말을 삼켰다. 정신없이 입을 놀리더라도 감히 황족과 비슷하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엘리에제 힐다이치. 장장 3년에 이르는 루센티아와의 전쟁을 종식시킨 인물.


서부의 날개, 힐다이치 공작의 여식.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요양생활을 하던 그녀를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출생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태자비로 간택된 이후. 귀족들의 항의가 빗발쳤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루센티아와 전쟁 중인, 국가의 위기 상황이었다. 얼마 전엔 제국의 서부가 무너질 뻔했다. 힐다이치 영지의 피해도 극심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황제와 공작은 밀어붙였고, 태자비가 된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전쟁터로 향했다.


이후는 모든 제국민이 아는 이야기. 진지도, 전략도, 보급로도, 한쪽의 패가 훤히 보이는 전쟁은 일방적이었다. 그녀의 예지의 힘 앞에 적국의 군대는 속수무책이었다.



“단순히 머리카락과 눈 색이 같다고 황태후와 비교라니요. 가당키나 한 소린가요?”


“그, 그렇죠.”


“참으로 칙칙한 색이네요.”



모든 귀족이 호의를 표하진 않았다. 어느 집단이건 시기와 질투를 가진 이는 존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회에서 유리아는 모든 이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귀족들이 평소에 입는, 빳빳하게 레이스와 프릴로 부푼 강렬한 드레스들과는 달리 연한 크림색의 드레스는 바람이 살랑이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유리아는 특별한 장식도, 장신구도 없이 오직 코르사주로만 달고 있었다.

하지만 드레스 밑단엔 검은 실로 놓은 자수가 길게 늘어트린 그녀의 생머리와 어우러져 전혀 밋밋해 보이지 않았다.


재봉사에게 최대한 눈에 튀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한 결과였지만, 간결한 옷차림은 오히려 머리색을 강조하며 그녀를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만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이야.’



백작의 사용인들이 자신을 신경 쓰지 않으려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 새삼 깨달았다.

끈적한 시선들은 마치 유리아에게 눌어붙은 엿가락마냥 그녀가 움직임일 때마다 함께 따라왔다.


유리아는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느라 여념이 없는 라이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밀려드는 방문객에 한동안 자리를 벗어나진 못할 듯 보였다.



'일단 임무 하나는 완료했고.'



유리아는 메인 홀의 한 쪽 벽면, 핑거푸드와 음료가 마련된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유일하게 귀족이 몰려있지 않은 자리기도 했지만, 간단히 배를 채우기 위함이기도 했다.

식사를 따로 할 순 없을 테니 허기를 채우면 곧장 길드로 나가야지.

번역된 편지도 미리 챙겨왔다.



“자리를 떠나실 것 같군요.”


“······?”



낯선 목소리에 유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유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30대 중반의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멀끔하게 차려입고, 안경을 쓴 그에게선 학자 느낌이 물씬 났다.

어쩐지 날카로운 만년필이 떠오르는 첫인상이었다.



“곧 나가실 것 같단 얘기입니다.”


“아··· 네. 이런 자리는 어색해서요.”


“소개가 늦었군요. 반갑습니다. 로이 루펠이라 합니다.”


“저도 반가워요. 유리아입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 주변이 그들을 힐끔거렸다.

말소리를 들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이는 없었지만 혹시라도 그들의 대화가 들릴까 싶어 귀를 쫑긋 세우는 사람도 있었다.



“제국어가 상당히 유창하시네요.”



그의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타국인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발음과 어조는 뛰어났다. 제국민이라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얘기가 빠르겠어요.”



루펠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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