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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
그림/삽화
백림
작품등록일 :
2024.07.24 12:14
최근연재일 :
2024.08.09 10:00
연재수 :
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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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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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6,321

작성
24.08.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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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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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결론

DUMMY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유리아를 기다리는 건 첫 임무였다.


롤린 백작 부인의 독서 모임


그리고 초대장 밑에 그녀에 관한 정보로 가득한 종이뭉치를 보며 유리아는 질색했다.

유리아가 모임 전까지 파악해야할 내용이었다.


[힐다이치 공작 가문의 시녀 출신입니다. 공작 저에서 잠깐 황태후를 모셨었죠.]


작고한 남편을 대신하여 작위를 이어받은 그녀는 유일한 핏줄인 아들마저 잃고 홀로 가문을 이끌고 있었다.


고위 귀족도, 권력자도 아니지만 사교계에서 충분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


유리아가 친분을 쌓아야할 사람이었다.

모두가 그녀와의 교류를 원했지만 그녀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꾸준히 활동하는 곳은 독서 모임 뿐.


하지만 불순한 의도를 갖고 접근하는 이는 빡빡한 독서 모임의 일정에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남은 인원은 덴버 자작 부인과 론데이 남작 부인이 전부였다.


다음날 모임에서 유리아는 그 이유를 알았다. 처음 간단한 인사를 나눈 이후부터 그들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심도 깊은 토론은 끊이지 않고 정치, 경제, 역사 등 분야를 넘나들었고, 미젤린의 강도 높은 수업을 들은 유리아도 겨우 따라갈 지경이었다.


흥미없는 이들에게 이런 자리란, 앉아만 있는 것만으로도 곤욕이었으리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오늘 차는 제가 직접 준비했어요.”



론데이 자작부인은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게 좋겠네요. 안 그래도 목이 타던 참이었는데.”



론데이 남작부인은 시녀에게 손짓해 찻잎이 담긴 통을 건넸다. 시녀는 능숙하게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저도 이번에 처음 봤어요. 어디서 발견한 줄 아시나요?”


“동부 국경에 다녀오셨군요.”



유리아가 답했다.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론데이 남작부인이 짐짓 놀라며 물었지만, 유리아는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럼 제가 선정할 다음 책도 아시려나요?”



론데이 남작부인은 들뜬 표정으로 되물었다. 마치 무언가를 시험하는 듯이,



“잘은 모르겠지만, 그는 흰색의 만드슈에 둘러싸여 있네요.”


“맙소사!”



만드슈는 제국에서 흔한 꽃이지만 흰 만드슈은 오직 동부에서만 자랐다.

그중 동부 국경지대, ‘알레’에선 독특하게도 흰 만드슈의 꽃과 잎을 함께 차로 우려먹었다.

대개 예쁜 꽃잎만 골라내는 꽃차와는 대조적이었다. 만드슈 차의 항생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마물 서식지와 인접하여 전투가 많았던 알레 지역의 오랜 전통이었다.

약이 충분히 보급되는 지금은 흰 만드슈 차를 찾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유리아는 시녀가 차를 우리기 위해 찻잎을 꺼낸 모습을 흘겨보며, 론데이 남작부인의 여행지를 추측했다.


그리고, 알레에서 흰 만드슈와 깊은 사연을 지닌 한 시인. 여성편력이 심했던 그의 무덤엔 그를 사랑했던 여인들이 놓고 간 흰 만드슈로 가득했었다.



“맞아요. 이 시인의 무덤이 흰 만드슈로 가득했죠!”


“유리아 님께선 어찌 그리 다 아시는 건가요?”


“보이는 게 조금 있을 뿐입니다.”



모두 미젤린의 혹독한 수업의 결과였다. 유리아는 왜 이런 구석에 박힌 시인의 사연까지 알아야 하냐며 불평하던 과거의 모습을 반성했다.

덕분에, 얘기를 꺼내기가 수월해졌다.



“정말이세요?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요!”



론데이 남작 부인이 작게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유리아에 대한 소문은 아주 많았다. 그 중 무엇이 맞는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유리아가 ‘예지‘ 능력을 지녔음을 은연중 알리는 게 목표였다.



“어디까지나 조금일 뿐, 모든 걸 알 순 없어요.”


“그렇겠네요.”



덴버 자작 부인의 말끝엔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유리아는 그녀의 반응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과하지 않고, 그렇다고 가벼워 보이지도 않게.



“하지만 부인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곧 해결될 겁니다. 화려함은 언젠가 질리기 마련이거든요.”



그녀에겐 결혼 적령기의 아들은 화류계 여인에게 단단히 빠져있었다.

둘이 결혼이라도 할까 걱정 돼 발 벗고 나서서 반대하자니 괜히 아들의 사랑에 기름을 끼얹을 꼴이 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지 몇 달 째였다.



“정, 정말인가요?”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인은 조만간 백작의 사람을 만나, 충분한 대가를 받고 제국을 떠날 것이다.



“어머, 덴버 부인, 아들 걱정이 그리 많으시더니! 그 얘기를 하시나 봐요. 유리아 님, 그럼 저는요?”



론데이 남작 부인의 얼굴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혹시 제 고민도 해결해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동쪽의 산은 제 주인을 찾을 거예요.”



수수께끼 같은 말이지만 론데이 남작 부인은 곧바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론데이 남작이 동쪽 광산에 막대한 자금을 쏟았지만, 발견된 것은 공업용 광물이었던 것.


공업용 광물의 사용처는 충분했다. 다만, 공업용 광물을 취급할 정도의 대형 상단들은 이미 탄탄한 거래처가 있을 뿐.

론데이 남작이 기존의 거래처를 뚫고 새로 계약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에드몬드 백작의 사람이 남작의 훌륭한 거래처가 될 예정이었다.


지금껏 대화를 지켜보던 롤린 백작 부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들뜬 두 부인 사이에서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선 위엄이 느껴졌다



“저는 어떻습니까?”



하지만, 에드몬드 백작의 계획은 여기까지였다. 롤린 백작 부인에겐 이런 얕은 수가 통하지 않을 뿐더러 되레 괜한 의심을 받기 쉬웠기 때문.



[백작 부인의 일은 유리아 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말이 맡긴다는 거지, 결국 알아서 하란 거 아냐?’



“원하는 대로 볼 수 있는 건 아니랍니다.”



수다스러운 론데이 남작부인, 조용하고 마음이 여린 덴버 자작부인. 두 부인과는 달리 계속하여 자신을 관찰하는 롤린 백작부인은, 에드몬드 백작의 평처럼 결코 쉽지 않은 이였다.



“그럼 과거는 어떻습니까?”



색다른 질문. 유리아와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과거라······.”



이미 지나간 일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과를 알고 있으니까.

과거를 묻는 이가 원하는 건 대개 비슷했다.

과거 그 당시의 누군가의 마음. 생각. 감정······.


그녀의 사정은 모임에 참석하기 전 보고서에서 확인했다.

그녀의 오랜 아픔. 그녀에게 부분기억상실을 안겨줄 정도로 힘들었던 시간. 아들의 죽음.

확실치도 않는 힘에 기댈 정도로, 그녀는 과거에서 무엇을 보고 싶은 걸까.


유리아는 성급하게 답하지 않았다.



“언젠가 보이게 되는 날, 전해드리겠습니다.”



어설픈 위로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닐 테니.



* * *



이후로도 독서 모임을 가졌지만 처음처럼 수표를 남발하진 않았다. 과한 욕심은 금물. 씨를 뿌렸으니 지금은 기다려야했다.


미젤린의 수업은 모임 때마다 진가를 발휘했지만, 그녀의 가르침이 혹독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유리아는 과부하된 뇌를 식히고자 외출을 나왔다. 스트레스엔 돈지랄이 최고다.

이번엔 다리야도 함께였다. 곧 그녀의 생일이기도 했고.



“와, 전부 다 예뻐요!”



그녀는 본인의 생일 선물을 고는 중이었다.

처음 극구 사양하던 다리야도 유리아의 설득에 넘어간 이후부턴 누구보다도 쇼핑에 열중했다.


유리아의 시종으로서 함께 다니는 만큼 에드몬드 백작은 그녀의 옷차림도 신경 쓰고 있었지만, 장신구는 다른 문제였다.



“저 이 중에서 고를게요. 잠시만요!”



최종 선택만 남았는지 다리야는 무척이나 진지했지만, 그녀의 볼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유리아는 가게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뻐하는 다리야의 모습을 보자 흐뭇했다.



‘진작 데리고 올 걸 그랬네.’



다리야에겐 이 정도의 선물도 부족했다.


기본적인 의무만 해도 될 것을, 다리야는 항상 유리아를 살폈다. 여전히 사람을 부리는 데에 익숙지 않은 유리아는 되도록 혼자 해결하려 했지만, 다리야는 이미 유리아의 성향과 습관을 모두 파악했다. 필요한 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수도로 거처를 옮길 때도 새로운 공간이 낯설지 않게 일부러 쓰던 물건을 챙겨온 것에도 그녀의 세심함이 묻어나왔다.



그 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유리아의 옆에 나란히 앉은 이는 그녀도 아는 인물이었다.



“저 소녀에게 정말 필요한 물건일까요?”



롤린 백작 부인.

그녀는 쇼핑을 마치고, 물건을 포장하는 점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필요하니까 사고 싶어 하겠지요.”


“더 필요하고, 더 도움이 되는 선물이 있지 않을까요?”



시녀는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귀족과 연을 쌓기 위해서 시녀가 됐거나, 생계를 위해서 시녀가 됐거나.


다리야는 후자였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경험을 쌓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직 그녀의 봉급의 일부는 본가로 흘러갔다.


백작 부인도 짐작할 정도로 이런 사연은 흔했고, 유리 역시 그 사정을 알고 있었다.

백작 부인의 말은 이런 사치품보다 금전이나 다른 생필품이 낫지 않겠냔 뜻이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동의하지 않았다.



“욕망에도 자격이 필요할까요?”



뭔가를 원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

다리야의 삶이었고, 그녀의 선택이었다. 이미 최선을 다해 사는 이에게 왈가불가할 마음은 없다. 그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줄 따름이다.



“유리아 님은 색다른 견해를 갖고 계시군요.”



유리아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선택을 마친 다리야가 외쳤다.

그녀의 손에서 주황빛 브로치가 반짝였다.


“유리아 님! 골랐어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부인.”



멀어지는 유리아를 보며, 백작 부인은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온전히 제 감정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롤린 백작 부인은 사업가였다. 백작의 타계 이후 오히려 사업이 번창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언제나 귀족들만 상대해서는 돈이 되지 않았다. 대다수의 고객을 상대해야 했고, 그들의 사정과 특성에 빠삭해야 했다.


백작 부인의 질문에 유리아가 내놓은 답은 정답이었다.

물건 앞에서 고객은 모두 똑같다. 선망하고, 원하고, 구매하고


간혹 고고한 자들은 그들을 존중하면서도 자신과는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

항상 도와주거나, 돌봐줘야 할 존재로.



‘적어도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꼴은 아니겠어.’



유리아와 다리야의 모습을 지켜보던 롤린 백작 부인은 그제야 마음속에서 그녀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오랜 관찰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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