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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
그림/삽화
백림
작품등록일 :
2024.07.24 12:14
최근연재일 :
2024.08.09 10:00
연재수 :
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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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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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수 :
76,321

작성
24.07.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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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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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시비

DUMMY

“유리아입니다.”


“메로난이에요. 버지스 자작가의 장녀죠.”



요즘은 엄격하게 지키지 않은 관례였다. 공작이 유리아에게 먼저 자신을 소개한 것처럼.

제국의 상업과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사회계급도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하위 작위로 갈수록 신분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이미 준남작보다 전문직이 더 대우받는 분위기였다.



“근데 음악소리 때문에 제가 잘 못 들었나 봐요. 유리아님의 성이 무엇이라 했죠?”



메로난이 천진한 표정을 지었다. 유리아는 메로난이 작정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잘 버텼는데!’



퇴근 10분 전에 업무를 지시받은 회사원처럼 유리아는 속으로 짜증이 몰려왔다.



“성은 따로 없습니다.”



정확히는 없는 게 아니라 의미가 없는 거지만.

‘신 유리. 신 유리아. 유리아 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세계에서.

메로난에게 성에 붙은 작위가 중요했으니 없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머? 노예도 아니고. 아란국에서는 혈통이 중요하지 않나 봐요.”



평산 신씨의 종갓집이 대노할 소리였다.

고려의 개국공신이신 시조께선 제국의 공작쯤은 될 테고, 이후로도 꾸준히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왔다.

적어도 버질인지 버지스인지 하는 곳보다야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가문의 업적이 아니라 자신이 중요한 법이니까요.”


“가문이 없으면 본인도 없는 거예요.”


“아란국에선 중요치 않답니다.”


“하긴, 그러니까 범죄자나 도망자도 받아들이는 거겠죠? 그들의 피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데.”



아란국은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아란국이 타국에 관여하지 않듯 타국도 아란국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들은 적어도 목숨 걸고 넘어와 아란에 융화되는 자에 한해서는 어떠한 죄도 묻지 않았다.



“살아가는 방식은 다 다르니까요.”



무성한 소문 중 하나로, 실상은 아무도 몰랐다. 메로난도 그 사실을 알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또 다른 건수를 붙잡을 뿐이었다.



“흐응, 하지만 마법도 없이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버지스 영애.”



헤이든의 목소리가 메로난을 저지했다.

대화 중간에 끼어든 건 예의가 아닌지라 가만히 있었지만 이쯤 되니 그대로 두는 게 실례일 지경이었다.


노골적인 그녀의 의도를 느낀 건 헤이든 뿐이 아니었는지 셋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조금씩 몰려들었다.


하지만 메로난은 그의 경고에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만물의 어머니의 뜻이라며 문명을 거부하잖아요? 사실 마법없이 지내는 생활이 상상이 잘 안 가요. 북부라서 추울 텐데······. 어때요? 아직도 부싯돌로 불을 피우고, 화톳불에 둘러앉아 겨울을 지내나요?”



메로난은 처음 소식을 들을 때부터 유리아가 거슬렸다. 자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뻔뻔하게 헤이든의 저택에 눌러 붙은 주제에 고고한 척 홀로 다니는 것도.


그럴 거면 촌년답게 홀로 서성이다 얌전히 사라질 것이지 헤이든에게 수작을 거는 모습을 본 순간 메로난의 눈이 뒤집혔다.



메로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깟 머리카락과 눈이 뭐라고 그렇게 떠받드는지.

만일 자신의 머리카락과 눈이 검은색이었다면 저 것보다 훨씬 신비로운 분위기를 냈을 것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야만적이네요.”



메로난의 말을 대충 흘겨듣던 유리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정말 사람 사는 곳은 정말 다 똑같다. 시대를 불문하고, 지역을 불문하고, 세계까지 불문하는구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고. 통제하지 못한 자신의 감정조차 남 탓이었다.


이들은 날뛰는 본인의 감정을, 오물 뿌리듯 꼭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흔치 않은 가정사로 학창 시절부터 집중 받아온 유리아의 경험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아는 법이지요.”



유리아의 평온했다.

일일이 반박하는 것도 의미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유리아 말에 담긴 속뜻에 오히려 메로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는 것도 없고, 본 것도 없다.

즉 지식도 없고 경험도 없으니, 야만적인 건 아란국이 아니라 바로 너란 뜻이었다.



“아는 것이 많은 유리아 님도 귀족의 예법은 모르나 봅니다.”



메로난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자꾸 그럴싸한 말로 빠져나가는 것도 끝이었다.


저와 자신의 분명한 차이를 인식시켜 주리라.



“······?”

“제국에서 에스코트도 없이 연회에 오는 건 평민도 안 하는 행동이랍니다.”



유리아도 알고 있었다. 라이네도 에드몬드 소속 기사와 함께하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유리아는 연회에 오래 머물 생각도 없었고, 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메로난은 그녀는 승기를 잡은 듯 의기양양했다.



“신분에 따른 경험은 무시할 수 없겠죠? 이번에 잘 배워가세요. 그건 주최자에게도 실례되는 행동이에요. 사교계에선 급에 맞게 어울리는데······.”



이어지는 독한 말에 몇몇 귀족은 숨을 들이켰다.

안쓰러운 얼굴로 유리아를 쳐다보고 있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쉽게 나서지 못했다.


이는 유리아의 명예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대로 메로난을 말리고 끝난다면, 메로난의 말이 전부 사실이 돼버리는 꼴이었다.



“······.”



유리아는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었다.

메로난의 무례도 지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침묵을 유지한 건 메로난이 유리아가 숨겨놨던 치명적 약점을 들춰냈기 때문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이 없다는 것.

어떤 서류도, 어떤 사람도 자신을 증명해줄 수 없다는 것.


그녀가 이 세계로 온 이후부터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가장 무거운 돌이었다.


극단적으로 누군가 그럴싸한 문서를 들고서 유리아가 자신의 노예였다고 주장해도 그녀로썬 속수무책이었다.

제국의 재판은 오로지 제국민을 위한 절차였다.

에드몬드 백작이 보호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실례는 내가 한 것 같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푸른 빛이 도는 머리. 단출한 차림이었지만, 그의 기품은 가릴 수 없었다.

그는 놀라하는 유리아에게 웃었다.

마치 오랜 친우를 대하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용서해주게. 기사단에 급한 볼 일이 있어서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했어.”



말을 편히 한다고 했지 다정하게 한다곤 안 하셨잖아요?


그의 친근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괴리감에 손발이 움찔거렸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그의 의도대로 맞장구를 쳐



“괜찮······.”


“황자 전하······!”


하지만 한발 빠르게 반응한 메로난의 말에는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뭐? 황자 전하?’



유리아는 옆에 나란히 선 자신의 의뢰주를 올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다정한 얼굴을 연기 중이었다.



“제국의 축복을. 황자 전화를 뵙습니다.”

“딱딱하기는. 다들 편히 있게.”



헤이든의 경례를 시작으로 주변인들은 모두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황자의 허락이 있고나서야 모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유일하게 메로난만이 굽힌 몸을 세우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메로난 양. 그대가 나의 파트너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많아 보이네. 헌데 이만 자리를 떠도 될까? 그녀가 피곤해 보이는군.”



“송, 송구하옵니다. 전하, 어찌 제게 허락을 구하십니까.”


“자네는 예의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 같아서 말이야. 대화 중 갑자기 가버리는 건 실례 아니겠는가?”


“전, 전혀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메로난의 고개는 갈수록 바닥을 향했고, 일어날 줄을 몰랐다.

얼굴엔 식은땀이 한방울 흘러내렸다.



“그대의 배려는 잊지 않겠네.”



마치 협박과 같은 말을 남기고서, 황자는 유리아의 어깨를 감쌌다.


유리아는 얼떨결에 그의 리드에 따라 자리에서 벗어났다.

헤이든과 눈인사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눈치는 있었기에 홀을 빠져나올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유리아는 2층 응접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곳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계단을 오르는 둘의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다.



“황자 전하?”

“보시다시피.”


황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소파에 몸을 기댄 자세는 별채에서 봤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설마··· 제1황자 전하?”

“맞아. 잘 알고 있네. 칼렌드리한 로스테론. 제국의 1황자.”



‘남부 전쟁의 승리자. 칼...리 어쩌고?’

유리아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 듯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순간이었다. 황실 사람이라니.

누구도 아닌, 제국의 최상위 권력층인 황족이라니.


충격적 사실에 유리아는 그때부터 여과 없이 지껄였다.

초조한 마음에 방안도 이리저리 서성였다.



“계약 파기되나요? 아직 한 시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가는 길에 생각이 바뀌어 뒤돌아 다시 물러도 되는 정도이고···.”


“황실을 능욕할 셈인가? 말리지만 않겠지만.”



칼렌드리한은 테이블 위에 준비된 다과를 집어먹으며 답했다.


그는 유리아와 친근한 사이인 양 구는 태도를 멈추지 않았다.

둘이 있을 땐 거리를 두다가 사람들 앞에서 다시 친한 척 연기하기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에게 태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유리아도 덩달아 조금 편하게 행동했지만 칼렌드리한은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다.



마침내 무를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한 유리아는 그의 맞은 편 소파에 주저앉았다.

털썩하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왜 그러셨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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