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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
그림/삽화
백림
작품등록일 :
2024.07.24 12:14
최근연재일 :
2024.08.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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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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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불필요한 만남을 피하고. 불필요한 상황을 피하는, 곤경에 처한 이를 봐도 굳이 나서지 않을 이.


유리아가 판단한 그의 성향이었다.



“아까 나선 것? 계약금이었던 셈 치지.”



좀 더 어렸다면 몰랐을까, 지금은 순수한 호의를 받아들일 나이가 아니었다.

유리아는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진짜 대답을 기다렸다.


황자는 어쩔수 없다는 듯, 이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숨길 이유도 없었다.



“그러는 편이 모두에게 이득이니까. 아, 물론 메로난 양은 빼고.”



유리아는 단순한 손님이 아니었다. 백작 가의 객식구나 다름없었다.

유리아가 당하는 망신은 연회의 주최자인 에드몬드 가문의 망신이기도 했다. 유리아의 교양과 함께 파트너도 준비 못한 백작의 처사를 물고 늘어졌으리라.


1황자 세력의 핵심인 백작을 흠집 내고 싶어 안달인 자들의 억지일 뿐이지만,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유리아는 납득했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편한 건 아니었다.


가장 궁금했던 의문이 해결이 되자, 제게 닥친 현실이 보였기 때문이다.

눈앞에 앉은 이가 제국의 1황자라는 사실이.

순간 자신의 과거 행동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근데 황자 전하께··· 음··· 앞으로 제가······”



유리아는 횡설수설하며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도 못 했다.

황족을 마주할 일은 없으리라 여겼기에 황실 예법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갑자기 황족으로 대우하려니 말투를 어디서부터 고쳐야할지 가늠이 안 됐다.


황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이 자의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의 목이 붙었다 떨어졌다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던 대로 하시길.”



칼렌드리한은 갑자기 공손해진 유리아의 태도가 어이없었는지 말하는 중간에 짧은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황자 전하께 어찌······”



유리아는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예를 바랬다면 애초에 황자임을 밝혔겠지.”



칼렌드리한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유리아는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계속 예의바른 척 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으니 차라리 하나씩 확인받을 심산이었다.



“전하 제안을 거절한 건 제 의도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하지.”


“터무니없는 수임료도···”


“상관없네.”


칼렌드리한은 가슴께에 낀 팔짱을 풀지 않고, 유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그는 이 의미 없는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럼 재수 없다는 말도······”


“넘어가지.”



칼렌드리한의 목소리는 무심하기 그지없었지만, 유리아에겐 마치 아리아 마냥 감미로웠다.

그제야 잔뜩 굳어있던 유리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정도면 충분했다.

비록 녹음은 하지 못했지만, 유리아의 근심을 하찮게 보는 그의 태도로 보아하니 나중에 말 바꾸어 추궁할 일은 없으리라.



“이제 끝났나?”


“네.”



칼렌드리한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일어나야할 때였다.

간단한 안부나 전할만큼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있는 건 이정도가 적절했다.

괜히 오래 머물러 그녀와 친분이 깊어 보여 좋을 게 없었다.



“이만 가야겠군. 다음 의뢰 때 연락하지.”


“알겠어요.”



유리아는 갑자기 떠나는 그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유리아의 목적은 모두 이루었고, 그만한 사정이 있으니 나서는 거겠지 싶었다.


응접실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잘못 꼬인 매듭은 모두 풀었다, 그리 믿었다.

아직도 이 남자가 남부 전쟁의 영웅, 1황자란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지만.




* * *


고요한 밤. 연회에서 돌아온 칼렌드리한은 밀린 서류를 훑어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들지 못한 이는 그 뿐만이 아니었는지, 누군가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불청객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부터 말했다.



“성급하셨습니다.”



칼렌드리한의 수하 아이젠이었다.

그는 황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뛰어오는 길이었다.


아이젠이 책상으로 다가오는 와중에도 칼렌드리한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다.



“소식도 빠르군.”


“그게 제가 전하 곁에 있는 이유니까요.”



아이젠의 말엔 타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의 헤프닝은 내일이면 수도 전역으로 퍼질 것이다.

남녀의 일, 게다가 아란국의 여자와 1황자가 당사자라니.


대체 얼마나 많은 소문을 양산할지 짐작도 안 갔다.



“언젠간 필요한 일이었어.”



유리아의 존재는 가린다고 가려지지 않았다. 칼렌드리한이 이번 연회에서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녀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절로 시선을 잡아 이끌었고, 이목을 집중시켰다.


제국 영웅들의 그림자는 그녀에게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고, 흰 피부와 대조적인 흑발과 흑안은 신비로웠다.

외향만이라면 관심은 쉽게 사그라진다. 모든 익숙하면 지겨운 법이니.


하지만···


그녀는 이질적이었다.

유리아의 말이나 행동 전부가.아니, 어쩌면 존재 자체가.


제국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

검사의 직감이었다. 유리아의 기운은 완전한 이방인과 같았다.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한 경계가 느껴졌다. 솔직한 감정표현의 이면에 느껴지는 무심함.


그녀는 두둑한 수임료에 기뻐하면서 또 어찌 되든 상관없어 보이기도 했고, 칼렌드리한의 정체에 놀라면서도, 황자든 아니든 자신이 알 바 아니란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제 일이 아니라는 듯, 마치 딴 세계 사람처럼.



그 분위기가 한층 그녀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무리 속에서도 유리아는 단연코 도드라졌다.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인정하지.”



사교계는 이미 다음 먹잇감으로 유리아를 점찍었다.

정치계 역시 이 화젯거리를 놓칠 리 없었다. 2황자 측은 어떻게든 그녀를 이용할 것이다.


칼렌드리한도 유리아와 친분을 보여줄 필요는 있었지만, 너무 깊게 관여해서는 안 됐다. 행동 하나에도 조심해야할 때. 공격당할 빌미를 제공해선 안 됐다.


2황자 측도 유리아의 적절한 쓰임을 확인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아직 이 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유리아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어쩌면··· 그들과 한 패일 수도 있었다.

황자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터.



‘항상 조심하던 분이······.’



아이젠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수습은 결국 제 영역이었다.



“왜, 내가 재수 없나?”


“···왜 갑자기 자아성찰하십니까?”


“누구한테 들어서.”



아이젠의 입이 벌어졌다.

비록 욕설은 아니었지만 황족의 면전에 대고 할 말도 아니었다.



“황자 전하께요? 대체 누굽니까? 그런 깊은 혜안과 엄청난 배짱을 가지신 분이. 당장 영입하십시오. 인재입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유물은?”



흥분한 아이젠을 무시하며 칼렌드리한은 화제를 돌렸다.

그는 금세 흥분을 가라앉히고 본래의 업무 태도로 돌아왔다.



“추가적인 정보는 아직입니다.”



비슬리의 고대 유적지에 유물이 있다는 정보에 유적지를 샅샅이 뒤졌지만 쉽지 않았다.


고대 유물. 칼렌드리한이 에드몬드 백작 령에 머무는 이유.

일부 고대 유물에는 강력한 고대 마법이 깃들어 있었다. 현대 마법과 비견되지 않는.


그가 고대 유물의 힘을 제대로 인지한 건 남부 전쟁에서였다.

칼렌드리한의 검, 푸른 매 역시 고대 유물이었는데 검에 깃든 빙결의 힘이 아니었다면 남부 전쟁의 승리는 없었으리라.


남부 전쟁의 마지막 전투. 첼시 해전에서 푸른 매의 빙결의 힘은 일대의 강물을 전부 얼려버렸다.

알본디의 군함도 함께. 알본디 해군의 당황함은 당연지사.

제국군마저도 불가능한 광경에 얼이 나갔지만, 황자는 제국군을 이끌고 곧바로 알본디의 후미와 측면을 기습했다.



“열쇠가 필요해보였어. 중점적으로 알아 봐.”


“알겠습니다.”



고대 유물의 힘은 제각각이었다.

유물마다 숨겨진 힘은 알 수 없었지만 보물찾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건 보물찾기가 아니쟈나! 너 재수 업써!]



불현듯 머릿속을 맴도는 목소리에 기억에 칼렌드리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갑자기 찾아온 추억에 손끝에선 온기가 감도는 느낌마저 들었다.



‘맞아. 그런 말도 들었었지.’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얼굴도, 목소리도 흐릿했지만 함께했던 날들만큼은 잊지 않았다.

항상 불쑥 찾아오곤 했던, 그리고 가장 힘들 때마다 찾아왔던 아이와의 기억.


전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기억을 되새기고 또 되새긴 결과였다.



[넌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해?!]



모든 걸 잃고난 뒤,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가만히 있던 시절,

나를 구원해준 그 아이는 참으로 거침이 없었다.




***



"어머, 이게 다 유리아 님께 온 초대장이에요?”


다리야는 테이블에 한가득 쌓인 우편 봉투를 보며 소리쳤다.

유리아에게 직접 보내는 사람만 이 정도였다.


유리아와 사교계에 두문분출하던 황자가 어떻게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됐는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겠지.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귀족들이 황자에게 직접 물을 순 없으니 모두 유리아에게 쏠린 것이다.

게 중에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보단 어떻게든 황자와 연줄을 쌓아보려는 목적이 있는 자도 있었다.


물론 황자의 등장이 아니었더라도 초대장 세례는 변함없었겠지만.



“맞아.”


“파엘로 자작가, 잇센 남작가, 어머, 펠로스 상단까지요?”



봉투를 하나씩 들어 겉면에 찍힌 인장을 확인하던 다리야가 놀랐다.

다방면의 인사가 초대장을 보내왔던 것.



“당연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야. 전부 답장해야 할까?”


“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안면도 없이 다짜고짜 초대장부터 보낸 거니까요.”



다리야의 말처럼 예의가 아닌 행동에, 정성스레 답장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전부 쓰레기통에 집어 넣기엔 마음에 걸렸다.



“한번 확인해줄래?”


“네. 확인해보고 처리할게요.”



유리아가 무시하면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 고위 귀족이 있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그 정도 작위가 있는 이들이라면 에드몬드 백작이나 라이네를 통했을 테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다리야가 봉투를 한가득 품에 안고 나가는 사이 유리아는 따로 구분해둔 초록색 봉투를 집어 들었다.


로이 루펠.

가장 먼저 도착한 초대장이었다.



‘실행력 하나는 대단하시네.’



제국의 공작은 모두 정치적 중립을 고수했다. 이는 제국의 건국 이래 바뀌지 않았다.

설사 아니라고 한들, 그는 황자와 친분을 드러내기도 전에 접근했었다.


공작의 목적이 무엇일까. 저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부딪혀봐야 알겠지.”



탁자 위에 초대장이 내려지며 작은 마찰음이 들렸다.

오늘 확인해 볼 예정이었다.




***



유리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석판을 내려다보았다.


글자가 새겨진 석판은 군데군데 부서지고 금이 가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훼손된 글자는 없었다.


정성 들여 관리한 태가 났다.

유리아는 공작이 자신을 초대한 연유를 알 것만 같았다.



“해석을 부탁드립니다.”



공작의 청은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공작과 마주 앉은 유리아는 그의 공손함에 금세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제겐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유리아는 루펠 공작을 보았다. 공작과 보낸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여태까지 봤던 모습 중에 가장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엔 확신이 있었다.



“···제 뒤를 알아보셨군요.”


“그렇지 않은 귀족이 어디 있을까요? 제가 다른 건 다른 이보다 정보력이 더 뛰어났다는 점이죠.”



“번역 일, 맞아요.

하지만 공작님께서 일생을 연구해도 몰랐던 분야입니다. 제가 알고 있을 리가요.”



루펠 공작은 가문의 비보, 석판을 해석하고자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대부분의 여타 귀족 자제들이 1-2년의 수료과정만 이수하는 데 비해 공작은 기한 없는 출구로 유명한 아카데미 졸업까지 마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석판의 단 한 줄도 알 수 없었단다.

단지 체계가 북방어와 비슷하다는 점만 발견했을 뿐.



“지식에 나이의 고하가 관계없듯이 성과 역시 시간과 노력에 비례하진 않죠.

지나가는 어린아이가 뜻을 알고 있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의 대답엔 학자로서의 신념마저 담겨있었다.

그만큼 완강하고 단호했다.


몇 번의 공방이 이어졌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유리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



잠시간의 정적.

유리아는 일부러 석판에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읽다가 뜻이라도 해석되면 정말로 거절하기 힘들 것 같아서.

하지만 눈을 감아도 석판에 담긴 공작의 일생까지 가려지진 않았다.


결국 침묵을 깬 건 유리아었다.



“조건은요?”



평생의 숙원. 그 간절함을 쉬이 외면할 순 없었다.


그래. 큰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뜻을 알려주는 것 뿐이잖아?

정체를 의심 받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또 공작의 말처럼 상관없어 보이기도 했다.



‘우연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공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혹여 유리아가 말을 바꿀까봐 빠르게 답했다.



“무엇이든요. 루펠 가문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 그 어떤 것이든 해드리겠습니다.”



공작의 말은 유리아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지만,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과하지 않나요?”


“역대 루펠 가문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제 남은 평생의 시간에 비하면 하찮습니다.”



결코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가주로서 심사숙고했다.

석판을 가문 외 사람에게 공개하는 것도 파격적인 조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제안을 한 건, 몇 년을 매달린 조사에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루펠은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좋아요. 다만 비밀로 해주세요.”


“저 역시 원하는 바입니다.”


유리아는 석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공작은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유리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얕은 숨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와중 유리아는 석판의 한 줄, 한 줄을 읽어 내렸다.

M과 N의 향연이던, 의미 없는 모양은 조금씩 글자로 변환되었다. 유리아는 그대로 종이에 옮겨 적었다.



[ 최후의 방벽은 루펠의 보호막이자 제국의 보호막이 될 것이니, 이를 지키는 일 또한 루펠의 의무···············.]


- 카민 루펠. ]



유리아는 기계적으로 옮겨 적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용은 곧바로 잊는 게 상책이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공작에게 유리아는 종이를 건넸다.


길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공작은 몇 번이고 집중해서 읽어내렸다.

그에겐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가문의 비보라는데, 쉽게 파악할 순 없겠지.’



공작이 집중하는 사이 유리아는 석판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석판을 뒤집자 뒤에는 또 다른 글자가 보였다.

글자는 유리아가 해석하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어둠이 내려앉고, 대지는 생명력을 잃었다. 어둠은 물러났을 뿐, 소멸하진 않았다. 조각은 여전히 존재했다.

위대한 피를 지닌 자, 오만한 선택의 대가를 치루니 제국의 기둥을 수호하라. 그것만이 속죄의 길이다.

그리하면 그대들의 시대가 다시 꽃피우는 날이 오리라.’



‘어둠? 고대 이야기인가?’



수수께기 같은 문구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를 쓰는 와중에 공작이 입을 열었다.



“유리아 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루펠 가문은 이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공작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유리아에게 예를 다했다.

상념에서 벗어난 유리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이 부담스러웠지만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약조는 서약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은 투명한 보석을 꺼내 들었다. 서약석이라 불리는 보석은 서명이나 인장 대신으로 사용되는 마도구였다.


맹세 후, 시전자의 머리색과 동일한 색으로 바뀐 서약석은 도장처럼 사용됐다.

오직 당사자가 만져야만 빛이 흘러나오는 서약석. 이보다 확실한 증명은 없었다.


등급에 따라 세부 기능은 달랐다. 녹음 기능이나 영상 기록 기능, 심지어 맹세를 어길시 지정된 마법이 발동되는 경우도 있었다. 위약자에게 해를 가하는 식의 마법을.


위조가 불가능한 서약석은 재판에서 가장 결정적인 증거였기에 귀족이나 상인들은 고가의 서약석을 애용했다.



“강제력은 없습니다. 단지 증명할 뿐이죠.”



공작의 간단한 설명을 들은 유리아 역시 비밀 유지를 맹세했고, 공작과 서약석을 교환했다. 이로써 계약이 완료됐다.

모든 용건을 마치고, 유리아는 그제야 궁금했던 얘기를 꺼냈다.



“혹시 석판의 뒤편은······.”


“아, 고대어 말씀이신가요? 제가 유리아 님께 고대어 해석을 부탁할 정도로 뻔뻔하진 않습니다.”



고대어. 고대 마법의 일부가 되는 언어.

역사학자도, 마법사도, 제국도, 그 외 수많은 이들이 매달렸지만 성과는 고작 단어 몇 개의 뜻을 파악한 것이 전부였다.

미지의 영역인 고대어. 분명한 것은 대륙에 고대어를 완전하게 구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리아 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어쩌면 고마워해야하는 이는 유리아일지도 몰랐다. 고대어는 뜻밖의 수확이었다.




* * *




유리아는 비슬리의 고대유적지, 옛 극장의 계단에 걸터앉았다.

찬란한 영광도 과거일 뿐.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에게 유적지는 돌 무덩이나 다를 바 없었다.



‘광장의 극장은 고대 유적지예요.’


‘고대 유적?’


‘제국 건국 이전, 어둠이 내려앉기 이전의 문명이요. 용족의 문명이라 볼 수도 있겠네요.


‘용족이 있었어?’


‘네. 지금은 멸종했지만요. 용족은 마석도 없이 마법을 썼대요. 또 손짓만으로 불과 얼음이 만들어지고, 심지어 하늘이 열리고 땅이 갈라졌을거래요.

대단하죠?’


‘그런 힘을 가졌는데 왜 멸망한 거야?'


‘어둠 때문이겠죠.’


‘음, 지금 마법사랑 차이가 많이 나?’


‘비교가 안 되죠.

그래서 그렇게 다들 고대어를 연구하는 거 아닐까요? 고대 마법을 되찾고 싶어서. 고대 마법이 깃든 고대 유물만 해도 엄청나다잖아요.’



첫 외출에 다리야가 설명해줬다.

고대 마법의 위대함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대어를 원하는 지도.



유리아는 주변을 살피며 무대로 걸어갔다. 무대의 단상 밑에 새긴 글자가 보였다.



‘세이지 극장’



유리아는 한참을 보며 그 모양을 눈에 익혔다.


지금껏 언어를 유의 깊게 본 적은 없었다. 언제나 의미에만 집중했다.

번역하며 제국어는 뚜렷하게 구분이 됐지만, 다른 건 사실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고대어의 가치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비밀로 해야 한다는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무의식중에 고대어를 내뱉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됐다.

유리아가 곧바로 유적지를 찾아온 이유였다.


유리아는 극장의 무대 뒤 공간도 꼼꼼하게 살폈다. 다른 고대어가 새겨져있나 살피기 위해서였다.

하나의 방처럼 구성된 공간은 배우의 분장실처럼 보였다. 관리되지 않은 느낌은 있었지만, 극장의 다른 곳과는 달리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다.


방을 살펴보던 유리아는 화장대 쓰인 글귀를 발견했다.


[영원한 나의 뮤즈.


그대의 아름다움을 보관하는 곳에 나의 뜻을 담아두었소. 진짜는 쏟아지는 별빛 아래에서 함께 꺼내보려 숨겨두었지.


시동어는 언제나처럼 그대의 이름이지. 공연을 마치면 올라오시오. 기다리고 있겠소.]



이곳도 열렬한 사랑 중이셨군.

한데 이게 갑자기 뭔 소리야? 유물이 남아있어?

화장대 위에 새겨진 글자는 멀끔했다. 어제 새긴 편지처럼 보일 정도로.



'시동어가 그대의 이름이라.'



600년 전의 여배우 이름을 어떻게 알겠는가.


유리아는 되는대로 내뱉었다.



"뮤즈"

“······.”

"피앙세"

“······.”



아무 반응이 없었다. 유리아는 우두커니 서서 화장대를 노려봤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복잡했다.



‘전용 분장실까지 만들어 줄 재력이었다면 혹시?’



"세이지"



극장의 이름을 대자 화장대가 둘로 나뉘었다.


역시 스케일있는 오빠였어.

서랍이 열리듯 튀어나온 곳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황금 원판이 놓여 있었다.


원판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앞면에 박힌 붉은 보석은 원판의 문양과 어우러져 화려함을 뽐냈다. 먼지조차 쌓이지 않은 원판은 600년 전의 물건이라곤 믿기지 않았는데, 보존 마법이 걸린 듯 했다.

유리아는 고대 마법의 수준에 경탄했다.



'다리야의 말이 맞았어.'



원판을 집어 상태를 살피던 유리아는 손가락에 느껴지는 거친 느낌에 뒤를 확인했다.


매끈한 앞면과는 달리 오돌토돌했다. 마치 열쇠처럼.



'진짜는 숨겨두었다더니, 원판으로 열라는 건가?'



이보다 뛰어날 보물을 상상하니 흥분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 유리아는 진정하고 단서를 정리했다.



함께 별빛을 본다. 올라간다. 둘이 밀회를 즐길 만큼 외진 곳이다.


······순간 머릿속 퍼뜩 스치는 장소가 있었다.


비슬리에 있는 또 다른 유적지, 첨탑. 그곳의 꼭대기로 가면 무언가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첨탑이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는 건 원판처럼 보존마법이 걸려있어서가 아닐까?


유리아는 로브 안쪽에 원판을 숨기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더 늦어지면 아무리 치안이 좋은 비슬리라도 위험했다.

빠르게 찾아보고 돌아가야했다.



다른 유적지도 이렇게 유물이 숨겨져 있을까?

이런 식으로 몇 번만 하면 작위를 살 정도의 돈도 금방 모으지 않을까?


뜻밖의 행운에 행복회로를 돌리는 사이 유리아는 첨탑에 도달했다.


극장과 같이 석재로 된 원뿔 모양의 탑이었다. 지름이 그리 크진 않았다.

군데군데 부서진 벽면을 통해 내부가 보였지만 훼손 정도가 그리 심하진 않았다.


고개를 젖혀 탑을 올려다보던 유리아는 내부로 들어갔다.

아치형의 입구를 시작으로 원형 돌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수많은 계단을 쉼도 없이 올라가자 숨이 차올랐지만 멈추진 않았다. 터벅이는 계단 오르는 소리가 반복됐다.



“하아.”



마침내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유리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유리아는 탁 트인 공간에서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격해진 숨을 가라앉혔다.


꼭대기는 생각보다 좁았다. 하지만 난간 밖으로 보이는 하늘엔 정말로 별빛이 쏟아질 것 같았다.

연인의 밀회장소로 충분했다.



‘여기가 맞는 것 같아.’



풍경을 즐길 틈도 없이 꼼꼼하게 주변을 살폈다.

조명은 없었지만, 유난히 밝은 달빛 아래 어느 정도 구분은 가능했다.


유리아는 난간 밑의 공간을 손으로 훑는 도중, 움푹 파인 곳을 발견했다.

원판의 뒷면이 자잘하게 튀어나왔다면, 여기는 움푹 패어있었다.



‘빙고.’



유리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원판을 끼워 넣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둘이 마치 제 짝을 찾은 것처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시동어를 외치려던 유리아는 이내 등줄기에 느껴지는 써늘함에 입을 다물었다.



“그대는 항상 내 판단을 의심하게 만들어.”



뒤를 돌아보니 자신을 겨누는 칼끝이 보였다.


검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매 모양의 손잡이가, 그리고 조소를 품은 입가가, 깊게 내리 앉은 눈매가 차례로 보였다.


밤하늘과 같은 머리를 가진 그, 칼렌드리한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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