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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
그림/삽화
백림
작품등록일 :
2024.07.24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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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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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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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DUMMY



그의 사정을 들었다고 갑자기 없던 사명감이 생기거나 열의에 불탄 건 아니었다.

단지, 남의 가정사를 듣게 된 유리아는 모래를 삼킨 것처럼 껄끄러웠다.


본인에게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 모두에게 까발려지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 사연을 아는 건 어떤 기분일까.


유리아는 미젤린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책상에 앉아 황실의 초상화를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 뒤에 숨겨진 감정까지 알 순 없었지만, 그리 유쾌하진 않았을 것이다.

유리아는 칼렌드리한이 가진 특유의 날선 느낌의 정체를 깨달았다. 생존을 위해 잔뜩 곤두세운 경계심은 습관이 되고, 본능이 되었으리라.



‘당신도 꽤나 치열하게 살아남았구나.’



연민이 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디까지나 그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힘든 과거는 있는 법이다. 유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유리아는 자신에겐 남의 과거를 평가할 자격이 없다 여겼다. 동정도 연민도 모두 본인의 몫이지 타인의 몫이 아니니까.


지금은 단지··· 모든 것을 잃고 홀로 싸워야했던 어린 소년을 향한 작은 위로를 시간을 가질 따름이었다.



‘내 일에나 집중하자.’



책상에는 수업교재와 종이가 잔뜩 쌓여있었다.

상념에서 빠져나 온 유리아는 필기 된 내용을 살피며 수업을 되짚어보았다.


미젤린은 훌륭한 선생님이었지만 자신은 훌륭한 학생이 아니었다. 부족한 학습능력은 더 많은 시간으로 보충해야 했다.


한참 집중하던 유리아는 톡톡거리는 작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니 새 한 마리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창을 열자 새는 창틀을 걸어들어 왔는데 그 모습이 하얀 깃털만큼이나 퍽 고고했다.


위풍당당한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유리아는 새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았지만, 새는 여전히 창틀에서 꼿꼿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알아서 하란 거니?”



유리아는 새의 발에 묶인 쪽지를 풀었다.

그러자 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린 창틈으로 날아갔다.



‘주인이 누군지 참.’



유리아는 여러 번 접힌 쪽지를 펼쳤다.



[일전에 만났던 장소로.]



내용은 간결했다. 중요한 정보는 모두 빠져있을 정도로.

혹시라도 다른 이가 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쌀쌀한 공기에 숄을 여미며 도착한 정원엔 그가 있었다.



“미리 언질이라도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유리아는 투덜거리며 칼렌드리한의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머금던 찬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급하게 결정된 거라. 다음부턴 조심하지.”



칼렌드리한은 유리아에게 얇은 링 모양의 팔찌를 내밀었다.

안에 깃든 마법의 종류를 확인해보겠다며 칼렌드리한이 가져갔던 고대 유물이었다.



“보호마법이 걸려있다더군.”


“팔찌를 보호하는 건가요?”


“정확히는 팔찌를 착용한 이를.”


“보존마법만 있는 줄 알았는데?”


“원판은 그랬지. 팔찌를 착용하면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위협적인 공격에 반응해서 보호막이 펼쳐질 거야. 일회성인 건 좀 아쉽지만.”



아쉬워하는 칼렌드리한과는 달리 유리아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떴다.

흥분된 열기에 방금까지 맴돌던 밤공기의 서늘함이 전부 사라지고 훈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유물을 어떻게 처리할까,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던 고민이 한 방에 해결된 것이다.


이정도면 정당한 명분이었다.

목숨을 위해 소중히 차고 다니면 될 일이었다.



“이거 주려고 부른 거예요?”


“계약도 구체화할 겸.”



첨탑에선 예언자가 되어, 고대의 샘 의식에서 황자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를 원했다.

계약이 종료되는 시점도 당연히 그 때가 되리라.


그러나 칼렌드리한에게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고대 유물을 찾는 데 도움을 줬으면 해.”


“그게 찾는다고 찾아져요?”



극장에서의 일은 어디까지나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모든 유물이 극장처럼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

물론 칼렌드리한은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유적지를 찾아온 것 같았지만.



“해 봐야 알겠지.”


“왜 찾는 지 물어봐도 돼요?”



고대 유물이 갖는 학문적 가치, 금적적 가치, 모두 상정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할 테지만, 어쩐지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의 고대어 능력이 도움이 될 순 있겠지만 확신하진 못 했다. 유리아는 섣불리 수락했다가 무리한 계약이 될까 걱정됐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



내포하는 의미가 가진 무게에 비하면,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오늘 그의 사연을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유리아는 내뱉은 그의 말에서 어쩐지 씁쓸함이 느껴졌다.



“하긴, 그 외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찾아달라는 건 아냐. 해석정도만. 다만 상황에 따라서는 함께 움직여야할지도 모르겠군. 고대어를 그대로 옮겨 적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위험하진 않겠죠?”


“아직까진 없었지만 확신할 순 없어.”



솔직한 칼렌드리한의 대답에 유리아는 자신의 양팔을 꼬아 팔짱을 꼈다. ‘음···.’ 하는 소리가 잠시 이어지더니 그녀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이런 걱정을 하는 제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어차피 위험하지 않은 일은 없다. 이제와 안전을 추구하는 것도 우스웠다.

위험수당이나 챙기는 편이 나았다.



“알겠어요.”


“다행이군.”



애초에 유리아의 거절은 염두에 두지 않은 그였다.



“그리고 이것도.”



그는 작은 보석을 꺼냈다. 딱 한손에 움켜쥘 정도의 사이즈였다.



“이게 뭐죠?”


“통신석.”


“통신석이요?”


“아, 전부 설명해줘야 하나? 통신석이 반짝일 때 만지면 내가 기록한 말이 들릴 거야.”



유리아는 통신석을 이리저리 굴리며 살펴보았다.


전화의 자동응답기 같은 기능인가?

그녀에겐 장난감처럼 느껴졌지만, 귀한 물품임은 분명했다.



“저도 전달 할 수 있어요?”


“아니. 안타깝게도 수신용이야. 급하게 구하느라 이 정도가 한계더군.”



어차피 앞으로 주요 사항은 에드몬드 백작을 통해서 전달될 예정이었다.

통신석은 어디까지나 비상용일 뿐.



“그럼 또 있어요?”



칼렌드리한의 품에서 신기한 물건이 계속해서 나오자 유리아는 자연히 다음을 기대했다.


업무를 위한 비품 같은 개념이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데다가 전부 귀한 물건이라 그런지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칼렌드리한은 사안의 심각성을 모르는 유리아의 태도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있지.”



그리고 품에서 다른 보석을 꺼내들었다.

이번엔 칼렌드리한이 설명하기 전, 유리아가 먼저 알아보았다.



“서약석?”


“알고 있네?”


“한번 본적이 있거든요.”



칼렌드리한은 굳이 캐묻진 않았다.



“그럼 사용법은?”


“알아요.”



하나씩 서약석을 나눈 둘은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각자 서약석에 맹세한 후, 서로 교환했다.


그의 머리색과 같은 짙은 남색의 보석을 받아든 유리아는 기시감을 느꼈다.

어릴 때 자신이 애지중지 했던 그 보석과 색이 참 닮아있었다.


그 역시 유리아의 맹세가 담긴 보석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더니 이내 품 안에 넣었다.


칼렌드리한의 방문 목적은 이걸로 끝이었다.



“미젤린의 수업은 어때?”


“일단 따라가곤 있어요.”



칼렌드리한은 미젤린에게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지시했고, 이후부턴 유리아 교육은 미젤린의 관할이었다.

추가의 지시도 보고도 없었다. 미젤린을 믿었기 때문이다.


미젤린은 계획에 대해선 전혀 몰랐지만, 유리아가 사교계에 등장하고 제 역할을 할 즈음이면 칼렌드리한의 그림을 깨닫게 되리라.



“곧 수도로 거처를 옮기고,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할 거야. 자세한 사항은 백작이 지시할 거고.”


“수도면··· 테른이요?”


“맞아.”



무대를 옮기고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유리아의 마음속에선 의구심이 피어났다.



“근데 정말 괜찮을까요?”


“걱정되나보지?”


“좀 현실감이 떨어지네요. 누가 믿을까 싶기도 하고요.”



계약을 하고 시키는 대로 하고는 있는데 이게 정말 가능할까?

괜한 헛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수업을 듣고, 예법을 배우고, 승마를 배우는 등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지만 이따금 봉긋하고 솟아나는 의문을 완전히 떨칠 순 없었다.



“가능한지 아닌지는 직접 느끼게 될 거야.”



확신에 찬 칼렌드리한의 표정엔 여유가 가득했다.



“우리의 예언자 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지.”



제국 영웅들, 특히 황태후의 두터운 그늘아래 그녀는 제국에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




“오늘 떠나십니까?”



유리아를 만나고 난 뒤, 칼렌드리한은 에드몬드 백작을 찾았다.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으니, 밀린 일을 처리해야겠지.”



칼렌드리한이 비슬리에 머문 목적은 고대 유물을 찾기 위함이었다. 비록 자신의 소유는 아니었지만 고대 유물을 찾았으니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유리아에게 전해줄 물건도 전부 전달해 주었고.



“그녀의 일정은 잘 조율하고. 자주 얼굴을 비추는 것도 좋지 않아.”


“알겠습니다.”



모두에게 유리아의 얼굴을 알리면서도 그녀의 신비감은 유지해야 했다.

그녀의 이미지가 이번 계획의 핵심이었기에 유리아의 모든 움직임은 철저한 계산 하에 진행돼야 한다.



“헌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이젠의 잔소리?”


“무슨 뜻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백작의 목소리엔 타박이 섞여있었다.

한 번도 황자의 계획에 토를 단 적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걱정이 됐다.



“차라리 유리아 님의 고대어 능력을 미끼로 마법사를 끌어들이는 건 어떻습니까.”


“나쁘진 않지만 그리 매력적이지도 않아. 마법사는 마법에 미친놈들이야. 그 시커먼 속을 누가 알까? 눈이 뒤집혀 어떻게 나올지 몰라.”



고대어를 해석할 줄 아는 이가 나타난다? 그 파장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다.

최악의 경우 마법사들이 합심하여 유리아를 납치할 수도 있다.

제국과 척을 치는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중립을 가장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이득이 최우선인 자들이었으니.



“답지 않게 충동적이셨습니다.”



백작의 충언에 칼렌드리한은 침묵했다.


부정할 순 없었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미치는 영향을 알고 있다.

하나의 움직임이 꼬리에 잡혀 죄가 되기도 하는 일생이었기에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나도 다급해졌나보지.”



준비된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했다. 황후의 아비, 발리에르 후작 그 늙은 여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번 패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중간에 유리아 님의 기억이 돌아오면 어쩌실 겁니까.”



만만의 준비를 하고 철저한 계획을 세워도 어긋나는 게 이 판이다.

헌데 가장 강력한 불확실성을 안고 가다니.


누구도 유리아의 정체를 몰랐다. 심지어 본인조차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는 판 아닌가.


모든 정보망을 돌려도,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마저 발견하지 못 했다.

추측대로 아란국 출신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유리아가 2황자나 그들이 쫓는 조직의 사람이라면······.



“그때도··· 계약이 유지되길 바랄 수밖에.”



유리아의 일이 무산되더라도 칼렌드리한의 노선엔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유리아도 많은 플랜 중에 하나일 뿐.

그리고 안전장치도 마련해두었다.


하지만 칼렌드리한은 이왕이면 무사히 계약이 성사되길 바랐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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