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을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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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
그림/삽화
백림
작품등록일 :
2024.07.24 12:14
최근연재일 :
2024.08.09 10:00
연재수 :
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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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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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의심

DUMMY

“가끔, 정말 기억을 잃은 게 맞는지 모르겠거든.”



그의 건조한 목소리가 좁은 첨탑을 가득 채웠다.


언어라는 건, 무의식중에 사용하는 것이니 넘길 수 있었다. 아란국 출신이라면 그 대단한 언어 능력도 납득이 갔다.



"기억을 잃은 게 맞아요."



이 세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유리아를 내려 보던 그의 입이 비틀렸다.

그녀는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당당했다. 이로써 두 번째였다.


칼렌드리한의 정체를 알고 계약을 물러달라며 발을 동동 구르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칼렌드리한은 검을 거두었다.

유리아의 대답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목적이 뭐지?"


"······."


"아, 우연이라곤 말하지 마. 열쇠까지 들고 와서 하는 말이 그거라면 조금 실망할거 같거든."



유리아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의심스런 자가 될 것인가, 미친 여자가 될 것인가.


기억을 잃은 수상한 사람, 아니면 차원 이동했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 둘 중에 말이다.


그가 어디까지 믿어줄까?

하지만 모른다는 대답은 분명 통하지 않으리라.



‘사실대로 말하자. 가장 중요한 하나만 빼면 될 거야.’



"고대어를 할 수 있어요."


"······!"



처음으로 칼렌드리리한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전부 드러냈다. 자신의 예상 답안에 없었다.


···고대어라니.



"루펠 공작 가에 방문했어요. 공작님께서 보여준 유물을 보고 알게 됐죠. 고대어를 읽을 수 있었거든요."



공작이 고고학에 조예가 깊은 건 평민도 아는 사실이었다. 유물 수집이 취미인 것도.


루펠이 연회에서 유리아에게 접근했고, 오늘 그의 집에 방문 한 사실 역시 조사하면 바로 알 수 있었다. 원한다면 대화 내용까지 빠짐없이.



"공작님껜 알리지 않았어요. 저도 이 능력으로 인해 벌어질 일들이 가늠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처럼요. 글자하나 읽을 수 있단 이유로 목숨을 위협받고 있잖아요?”



유리아는 경위를 말할수록 점점 분노가 차올랐다.


비단 지금뿐 아니라 지금껏 눌러왔던 감정이 다시금 올라왔다.


이전에도, 지금도 자신의 삶은 언제나 아등바등 이었다. 남들에겐 당연한 일도 자신에겐 전혀 쉽지 않았다. 대단한 삶을 바란 것도 아니었건만, 제자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어린나이에 반강제적으로 자립하여 겨우 자리를 잡았나싶었는데 이 세계에서 처음부터 시작이었다.

그곳도 비빌 곳 하나 없는 곳에서.


유리아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 벌써 익숙하다니. 기가 찼다.

대체 왜.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기에.


칼렌드리한은 유리아의 감정의 동요를 고스란히 느꼈다. 그 역시 언젠가 느껴본 적 있었다.


치열한 삶에 대한 분노와 누구를 향해야할지 모르는 원망. 살아남고자 매 순간 느껴야했던 감정.



“사과하지.”


“······받아들이죠.”



간결한 말에 담긴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무덤덤한 말투였지만 되레 유리아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 그로썬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수배자와 한 패일 가능성은 여전히 있었으니까.


알지만···, 다 알지만, 매번 치열해야하는 상황에 화가 났고 그저 갈 곳 잃은 분노를 그에게 쏟아낸 것뿐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고요함을 먼저 깬 것은 칼렌드리한이었다.



"원하는 게 뭔데?"



한껏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그의 말투는 연회에서처럼 가벼웠다.


"돈이요."


“······.”



유리아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설마하니 고대 유물로 엿 바꿔먹겠다는 말은 할 줄 몰랐는지 칼렌드리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는 덴 돈이 필요하죠."


"뭘 하면서 살려고?"


"인간답게 사려고요.”



유리아가 기억을 되찾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는 건,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길드에서 받아오는 유리아의 만만치 않은 작업량, 그리고 자신과의 계약을 보면 짐작이 갔다.

또한 보수에 집착하던 것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리아는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그대로 턱을 괴었다.


잠깐이라도 속내를 터놓아서 그런지 조금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조금 수다스러워졌다.



“글쎄요. 사업이나 할까요? 아란국 사람이 파는 물품이면 잘 팔릴 것 같은데. 특별한 힘이 깃들어있을지 모르잖아요.”


“실없는 이야기군.”


“아니면 작위를 사도 좋겠어요. 고대 유물을 팔면 그 정돈 가능하지 않겠어요?”


“이번엔 불가능한 이야기고.”


“어째서요?”


“작위 매매는 생각보다 까다로워. 금전만으로 사는 건 옛말이지. 부호민이 무작위하게 작위를 사들인 부작용이 꽤 있었거든”


“맙소사.”


“결국 황실에서 작위를 하사하는 방법뿐인데, 당연하지만 그만한 명예가 필요하지.”



유리아는 절망했다.

이 많은 돈이 있는데 왜 쓰지를 못하니.


그럼 역시 다른 나라로 가야할까? 다른 나라가 제국만큼 발전하지 못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유리아는 난간위에 올려둔 양팔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칼렌드리한의 희망적인 말에 유리아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 전에, 고대 유물부터 찾는 건 어때?”



맞다. 고대 유물.

잠시 잊고 있었다.



“이거 찾으면 뺏어갈 건가요?”



따지고 보면 제국의 고대 유적지는 황실 소유였으니, 고대 유물도 황실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설마. 그대의 정당한 소유권을 인정해주지.”



유리아는 미심쩍었지만, 한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라 판단하고 원판을 다시 쳐다보았다.



“세이지.”



벽에 꽂혀있던 원판이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원판이 돌아가며 벽 뒤의 작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작은 보석함이 놓여있었다.


유리아가 조심스럽게 연 보석함에는 반지가 있었다.



“시동어가 세이지인가?”


“네. 이 반지의 주인 이름이 세이지거든요.”



유리아는 간단히 유물에 얽힌 이야기를 설명했다.



“대단한 사랑이군.”



저와 같은 말을 뱉는 리한을 보며 유리아는 풋-하고 작게 웃었다.


유리아는 원판과 반지가 담긴 보석함을 챙겼다.

칼렌드리한은 약속대로 유물을 탐내지 않았다.



“근데 아까 말한 방법이 뭐예요?

작위 받을 수 있는 방법이요.”



“나와 다시 계약하는 게 어때?”



명예를 지닌 자에게만 하사하는 작위란 반대로 인정할만한 명예가 있다면 누구든 작위를 받을 수 있단 말이었다.

작위는 황제가 직접 하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황실의 일원이 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작위, 내려주지.”


“가능해요? 아··· 황자셨지. 황자면 작위도 주고 영지도 주고?”


“물론. 원한다면 세금을 받을 영지도 하사하지.



영지 따위 관리만 귀찮을 뿐, 관심도 없었지만 파격적인 제안에 유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항상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준다. 그만큼 엿도 준 것 같았지만.



“어떻게요?”


“역할 놀이에 더 집중해봐.”


“선지자가 되는 거지.”


“선지자요?”


“쉽게 말해 예언자 같은 거야.”



제국에 오가는 사신단을 통해 들은 적 있다. 아란국 출신의 사람 중에는 종종 선지자라 불리는 인물이 있었다.



“지금 예언자 행세를 하란 말이에요?”



칼렌드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될 것 없다는 표정에 유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원래 이렇게 뻔뻔했던가? 아니면 그저 자신감이 넘치는 건가? 자기 생각이 틀릴 리 없다고?


유리아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작위를 준다는 말에 잠시라도 기대했던 내가 잘못이지.

그래, 안하면 되니까 굳이 여기서 언성을 높일 필욘 없다.



“저에겐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데요.”


“본인을 꽤 과소평가 하는군. 상황 판단력, 연기력, 배짱···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황자님.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유리아는 한마디씩 끊어 또박또박 의사를 전달했다. 마지막엔 잘게 씹은 입술 때문에 발음이 뭉개졌지만.



“물론 도움은 주지. 적절히 필요한 정보도 주고. 어차피 아란국 출신 흉내 내며 비슷하게 구는 건 마찬가지잖아? 거기에 좀 더 그럴싸한 말만 보태는 것뿐인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드몬드 백작의 사용인들은 이미 유리아에게 신비한 힘이 있다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굳이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았다.

오히려 부러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리야의 친구에게 연애사를 상담해준 것처럼.



“작위와 영토는 물론 계약금, 선수금. 품위 유지비와 활동비도 별도로 주지.”



칼렌드리한이 조건을 나열할수록 유리아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만큼 힘든 일이었지만 그의 말대로 어차피 남을 속이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뭐 달라질 게 있겠어?


나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하지만 작위를 내릴 만큼의 업적은 쌓아야해. 나라고 아무에게나 줄 순 없거든. 즉, 그럴싸한 선지자가 돼야 한단 말이지.”


“갑자기 내가 선지자요, 하고 나타나서 말한들 누가 믿을까요?”


“믿게 만들어야지. 그게 그대가 할 일이고.”


“대가가 뭐예요? 제가 이 모든 것을 받는 대가요.”



어디까지나 계약이었다. 호의가 아닌.

칼렌드리한 이 자는 원하는 바가 있었다.



“황태자. 그리고 황제.”



유리아는 그제서야 모든 게 납득이 갔다.

과분했던 했던 조건은 오히려 불공정계약에 가까울 정도로 소박하게 느껴졌다.


제국의 사정을 모르는 저도 황제가 소꿉놀이처럼 되는 게 아니란 건 알았다.



“물론 그대에게 나를 황제로 만들어 달라는 건 아니야.”


“당연하죠!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요.”


“다만, 황태자가 되는 길에 약간의 도움을 줬으면 해서.”


“거짓 예언이라도 하란 말인가요?


“역시, 눈치가 빠르군.”



사기꾼이 되라는 거 아닌가. 귀족 파벌, 민심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희대의 사기꾼.

황태자는 황제가 임명하니, 결국 황제까지 속이라는 말 아냐?



“제가 선지자가 된다고 쳐요. 그럼 ‘1황자가 황제가 될 것이다.’ 라고 말하란 건가요?”



“설마. 건국제 마지막 날, 고대의 샘을 들여다보며 한 마디만 하면 돼. 제국의 푸른 매가 활개를 솟아오른다고.”



고대의 샘.

황태후가 고대의 샘을 들여다보며 제국의 미래를 점쳤지만 황태후의 승하 후엔 그저 형식적인 연례행사가 된.

제국의 건국을 축하하는 건국제 의식인 만큼 제국을 축복하는 의미가 컸다.


칼렌드리한은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어차피 형식적인 행사야.”


“그렇다고 아무나 설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림을 만들어봐야지. 그건 내가 할 일이고.”


“···거절하면요?”


“글쎄? 그대는 지금처럼 살겠지?”



가능한지 아닌지는 내 알바가 아니다. 불가능했다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겠지.


복잡한 일일수록 단순하게. 생각보단 실천을.

지금껏 유리아를 움직인 동력이었다.



“좋아요.”


“생각보다 승낙이 빠르군.”


“오래 고민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요.”



그리고··· 계약관계에 불과할지라도 지금은 확실한 제 편이 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좋아. 그럼 조만간 정식으로 얘기하도록 하지.”



***



고대 유물은 칼렌드리한이 가져갔다. 고대 유물에 걸린 마법을 파악하고 돌려준다고 했다.


유물을 발견하고 환호했던 처음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복잡했다.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학문적으로도 의미 있는 고대 유물 아닌가. 심지어 고대 마법까지 깃든.


갖고 있자니 자신에겐 쓸모없는 물건이었고, 팔자니 문화재를 도굴한 장물아비가 된 느낌이었다.


루펠 공작에게 건네는 것도 고려해봤다. 그라면 아무 것도 묻지 않을 테니.

설명할 필요도 없고, 뒤를 밟힐 필요도 없었다.

공작 덕에 고대어를 익히고 유물을 얻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선뜻 내어주기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아, 모르겠다.’


유리아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며 첨탑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황태자라······.”



황자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 있었고, 제안도 합당했다.

헌데 어째 매번 같은 패턴으로 말리는 느낌이 든다.



‘결국 자기 황제 만들어 달라는 소리가 아닌가?’



유리아는 그만 따지기로 했다.

조건을 분명히 하면 될 일이다.

설사 2황자가 황태자가 되더라도 황자가 반역이라도 일으키지 않는 한, 일개 소시민인 자기이 받는 불이익은 없을 것이다.



계약이 잘 성사된다면 황자에게 실력 있는 마법사나 신전의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해야겠다.

지금까진 여유가 없어 고려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차원 이동 마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곳에 오는 방법이 있듯이 가는 방법도 있겠지.


차기 황제의 자리에 비하면 그리 무리한 부탁도 아니리라.



“유리아 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유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다리야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리아는 곧바로 응접실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누구냐고 물어보았지만 다리야도 모르는 이라고 했다.


응접실에 다다르자 의자에 앉아있던 여인은 일어나 유리아에게 예의를 차렸다.

그 모습이 군더더기 없고 흠 잡을 데가 없어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까딱하는 고개의 각도까지 완벽했다. 중년의 여성에게선 기품이 넘쳐 흘렀다.


마치 황족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미젤린입니다. 유리아 님의 가정교사로서 수업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유리아는 헤어지기 전, 칼렌드리한이 한 말이 떠올랐다.



[곧 백작의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지.]



‘곧’이 당장 다음날 아침을 의미할 줄은 몰랐다.



“오늘부터면······ 지금이요?”



고개를 끄덕이는 미젤린의 몸짓이 매우 우아했다.




***




미젤린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사교계에 데뷔하기 전 귀족의 자제들을 주로 교육해왔다.

무지렁이 교육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유리아는 제국이나 인접국의 역사, 전쟁사 등은 두루 알고 있으면서도, 어린아이도 알 법한 기본적인 사항을 모르기도 했다.


모두 마구잡이로 읽은 책이 원인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미젤린으로서는 황제의 존함조차 모르는 유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페를리오 로스테론 황제 폐하.

엘리시아 발리에르 황후 폐하.

1황자 칼렌드리한 황자 전하.

2황자 페르디난 황자 전하.

3황녀 로엔드리 황녀 전하.


미젤린은 가계도를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했지만, 낯선 방식의 이름이 단번에 외워질 리가 없었다.

결국 머리가 아닌 입에다 새기는 수밖에 없었다. 유리아는 초상화를 보며 각 이름을 수십 번씩을 중얼거렸다.


초상화에선 화가의 의도대로 황족의 위압감과 고귀함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표정한 두 미남과 미녀는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그리고 2황자와 3황녀는 황후를 많이 닮았었다.



‘근데 유전적으로 이게 가능한가?’



금발의 황제와 은발의 황후. 그리고 금발의 2황자와 은발의 3황녀.

그들 사이에 검푸른 머리의 칼렌드리한은 그의 얼굴만 따로 도려다가 억지로 갖다 붙인 듯 어색했다.

마치 물과 섞이지 않은 기름처럼



‘모두 1황자의 상대로 보이진 않는데.’



2황자도 3황녀도 칼렌드리한에 비하면 핏덩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단순히 나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자신만만하게 말린 입꼬리에선 오만함이 담겨있었고, 눈빛은 총명해보였으나 세상의 풍파를 겪지 않은 자의 치기가 느껴졌다.

이들에게 무릎을 꿇는 칼렌드리한의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안 됐다.



“근데 황태자 자리는 왜 아직까지 공석이죠? 1황자 전하라면 자격이 충분하실 텐데.”



유리아가 가장 궁금했던 점이었다. 필요한 정보이기도 했고.

다른 이라면 황제의 뜻이라며 얼버무렸겠지만 미젤린은 칼렌드리한의 사람이었다.

이 수업은 단순히 유리아의 교양을 쌓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유리아는 칼렌드리한이 아무나 보내진 않았으리란 판단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유리아 님.”



일순 미젤린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갑자기 심각해진 분위기에 유리아도 긴장이 됐다.

미젤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꺼낼 얘기에 담담해지기 위해서였다.



“지금부터 집중해서 들어주세요. 제국민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누구도 입에 담지 않는 이야기기도 합니다.”



아스트리드 린하트.

제국의 황후. 북부의 창, 존경받는 린하트 공작 가문의 장녀. 황태자 칼렌드리한의 어머니.


하지만 모두 옛말일 뿐.

15년 전의 사건으로 그녀는 황후자리에서 폐위되었고, 린하트 공작가의 위명은 전과 같지 않았으며, 칼렌드리한은 황태자가 아닌 황자가 되었다.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황후의 스캔들 때문에.



‘자네, 소식 들었어? 황후께서 루센티아의 어떤 잡놈이랑 바람이 났대.’


‘이 사람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그분께서 뭐가 아쉽다고.’


‘기사단에 있는 옆집 렉스의 아들놈이 현장을 직접 목격했대도.’


‘하! 참말인가? 아무리 잘나신 분들이 정부 한 두 명쯤 품에 두는 게 대단한 일도 아니라지만 왜 하필이면 썩을 루센티아 놈인지. 그놈들한테 죽은 제국민이 피눈물을 흘리겠군.’


‘장소도 루센티아에 있는 그 놈 집이었다는군. 그 귀한 공간 이동석을 고작 밀회나 즐기는데 쓰다니. 마석 귀한 줄도 모르고. 하긴. 그러니까 그 놈한테 제국의 마석 가공법까지 알려줬겠지.’


‘뭐라고? 아니 제국의 마석은 린하트 공작께서 직접 관리하시지 않는가?’


‘사랑에 눈이 먼 황후가 제 아비 몰래 빼돌린 거지 뭐겠나.’


‘마석으로 무기를 만들어서 쳐들어오면 어쩌려고! 공작님께서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셨기에 그놈들한테 넘어가.’


‘흥, 어디 그 뿐인 줄 아는가? 사내새끼도 아닐세. 아직도 소년티를 못 벗었다더군. 성년이나 지났을까 몰라?’


‘어디 그런······!’



황실이 손을 쓰기도 전에 소문은 제국 전역으로 퍼졌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퍼트린 것처럼.

눈덩이가 불어나듯, 황후를 둘러싼 온갖 추문은 누구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다.


명망 있는 가문의 여식으로 태어나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 이르기까지.

마치 잘 재단된 흰 도화지와 같던 그녀의 삶에 쏟아지는 추악한 잉크는 멈추질 않았다.



‘처음 황제의 구애를 거절한 건 그녀의 남성 편력 때문이었대.’


‘황후궁에는 젊은 남자들이 기거하고 있다던데? 매달 새로운 자들이 들어왔다는군.’


‘······ 혹시 또 모르지? 황태자가 어떤 놈의 씨일지. 지 애미만 쏙 빼닮지 않았는가.’



온갖 추문으로 얼룩진 그녀의 인생이, 이제는 무슨 색이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폐위와 유폐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황제는 현 황후인 알레시아 발리에르와 재혼하였고, 2황자와 3황녀를 낳았다.

제국의 마석은 발리에르 후작 가문이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후 린하트 공작은 두문분출.


홀로 남은 칼렌드리한이 황자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던 건 모두 황태후 덕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황태후였지만, 그녀의 방패는 제국 누구보다도 든든했다.

적어도 황태후의 승하 전까지는 말이다.


방패를 잃은 1황자는 돌연 기사단에 입단하여 전장을 떠돌았다.

그것만이 귀족들에게서, 현 황후의 발리에르 가문에게서 황자 자리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제국에게 치욕을 안긴 죄인이 제국의 명예를 위해 싸우다 죽는다면 그만큼 아름다운 결말도 없었으니.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이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칼렌드리한은 매번 전공과 함께 돌아왔고, 마침내 첼시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남부를 되찾았다.


냉담하던 민심도 돌아왔다.

어린 나이부터 10년가량을 묵묵히 제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나서야 칼렌드리한을 황위 계승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증거는 있었어요?”



황실 소유의 마석과 공간 이동석이 다량으로 사라진 것이 확인됐다.

황후께서 종종 자리를 비운다는 시녀의 증언은 덤이었다.


무엇보다 루센티아에 있는 남자의 집을 들이닥친 기사단이 아스트리드를 마주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동석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존재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남자의 집에서 마석 가공법이 담긴 서류가 발견됐다.



“증거들이 너무 많네요.”



들으면 들을수록 유리아는 미심쩍었다.


직접 보지 못했으니 실제 그녀의 성정이 어땠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다지만, 가는 길목마다 증거를 뿌리고 다닐 리는 없었다.

마석이나 공간 이동석은 제국에서도 철저하게 관리하는 물품이니 도난당한 사실은 금방 들통날 텐데.


공작 가문에서 교육받고, 황후인 그녀가 그 정도의 사리분별이 없었다?

이정도면 자신을 잡아달라고 시위하는 거나 다를 바 없었다.


침통해하는 미젤린의 표정을 보아하니 유리아와 같은 생각인 듯 보였다.



“하지만 아스트리드 님께선 부정하지 않으셨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혐의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재판 과정 내내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그녀에게 모두들 손가락질했다.

당사자가 입을 꼭 다물고 있으니 린하트 공작도, 그녀의 지지세력도 도울 수 없었다.



“그럼 그때부터 황태자 자리가 비어있던 건가요?”


“네.”


“지지세력은 어때요?”


“1황자 전하께서 일선에서 움직이시는 만큼 기사단과 젊은 귀족, 제국민의 지지가 높지만 발리에르 후작님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해서···. 중립인 귀족도 많고요.”


“사실상 비등하다?”


“맞아요.”


“하지만 올해 있을 2황자 전하의 성년식 기점으로 흐름이 바뀌겠죠.”



침묵을 지키던 황제도 이제는 미룰 수 없는 시기가 다가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움직이게 만들어야지. 누구든.]



유리아는 어제 칼렌드리한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가능한 모든 수를 던지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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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선 24.08.06 8 0 10쪽
10 마법진 24.08.05 13 0 11쪽
9 계약 24.08.02 16 0 11쪽
» 의심 24.08.01 13 0 22쪽
7 확인 24.07.30 16 0 23쪽
6 시비 24.07.29 14 0 10쪽
5 방해 24.07.28 12 0 14쪽
4 새로운 인물 24.07.27 13 0 11쪽
3 거래 24.07.26 15 0 11쪽
2 만남 24.07.25 12 0 11쪽
1 시작 24.07.24 26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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