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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
그림/삽화
백림
작품등록일 :
2024.07.24 12:14
최근연재일 :
2024.08.09 10:00
연재수 :
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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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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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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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거래

DUMMY

유리아는 사람들이 아란국을 도깨비 나라 정도로 여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한.

거기에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졌으니, 유리아를 향한 호기심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조금 전 소녀처럼 사람들은 유리아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특별한 사람 취급을 받는 건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목숨이 온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과연 백작은 다른 평범한 사람에게도 머무르라고 했을까?

적어도 이런 대접은 받지 못 하리란 건 확실했다.


유리아를 마주친 고용인들은 모두 융숭하게 그녀를 대했다.

몇몇은 성녀라도 만난 듯 황송해하기도 했다.


유리아는 그제야 실감했다.

이 흔해빠졌던 머리색과 눈 색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마주칠 때마다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힐끗대는 시선에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시종장의 엄명 이후 많이 누그러졌지만, 그들의 정중한 태도만큼은 변함없었다.



‘치트키 같네.’



유리아는 자신의 머리 끝을 매만졌다.


수배자 부부의 말처럼 일종의 방패막이였다.


굳이 나서서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 목숨줄을 내놓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마땅한 신분증도 없는 사회에서 무엇이 그녀를 보증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은, 누군가의 먹잇감이 되기 쉬웠다.


그럴싸해 보이는 사람이 되는 정도는 유리아가 감내 해야 할 부분이었다.

다리야의 친구를 상담한 것처럼.


···조금, 점쟁이 같은 느낌이긴 했지만 말이다.



백작의 저택에 머문 지 두 달가량 되었다.


깨어난 이후 헤이든도, 그의 상사도 다시 만난 적 없었다. 그녀의 결백을 믿어서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어쩌면 모든 게 보고되고 있을 수도.’



순순히 물러날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는 지금 이 세계, 제국에서 살아야했다.

유리아는 가장 먼저 가능한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모든 내용을 종합해봤을 때, 유리아는 여기가 이 세계쯤 된다고 결론지었다.



‘이렇게 세계관이 탄탄한 꿈이 있을 리 없지.’



결정적으로 마법이 존재했다. 마차 안에서 본, 복면의 남자가 만든 마법 화살은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언제까지 이방인인채로 살 순 없다. 일단 적응이 먼저였다.

돌아가는 방법같은 건 이 낯선 생활이 감당이 돼야 가능한 이야기다.

누구에게도 부탁할 수 없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니.



유리아는 무릎에 놓여있던 책을 탁자 위로 옮겼다.


<당신도 할 수 있다. 쉽게 배우는 카냐스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의미가 들린 마차에서 경험처럼, 처음에는 지렁이와 굼벵이가 나란히 기어가는 모습으로만 보이던 외국어가 한 줄, 두 줄 읽어 내려가자 자연스레 의미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여러 번 실험해본 결과, 언어에 일정량이 노출되면 의미가 해석된다 결론에 이르렀다.


책 제목처럼, 정말 쉬웠다.



‘왜일까······.’



갑자기 생긴 마법과도 같은 능력. 큰 사고를 겪은 이후 갑자기 동양어로 말하는 외국인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처럼 세계를 넘어오면서 머리를 크게 부딪쳐 뇌의 잠재능력이 개화된 게 아닐까?


전부터 언어적 감은 좋았다.

제2외국어를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항상 좋은 점수를 받았고, 다른 언어 습득에 어려움은 없었다.


심지어 프로그래밍조차 수월했다. 그땐 기계어라 그런가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어쩌면, 꼴이 불쌍하니 신께서 이거라도 가져가라며 준 능력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유리아에겐 감지덕지이다.

덕분에 조금 살 길이 보였다.


이 능력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평생 백작 저택에 눌어붙어 살 순 없지 않은가.

그녀의 기억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었으니까.


유리아는 다리야가 준비한 케이프를 두르고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얼굴이 제법 가려졌다.

유리아의 마크인 머리와 눈도.



‘독립 자금을 마련해야 해.’



오늘은 그러기 위한 외출이었다.




* * *




제국 최대의 상업 도시답게 거리는 북적였다. 시장은 상인과 구경꾼들로 소란스러웠다.


시장의 정중앙엔 반원 형태의 극장이 있었다. 정확히는 극장이었던 고대 유물이었다. 어둠이 내려앉고, 제국이 건국되기 이전의 위대한 문명.

극장의 관객석도, 마주보는 무대도 반파됐지만 제국은 고대 유적을 보수하지도, 허물지도 않았다.

비슬리의 다른 유적지인 첨탑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찬란했던 고대마저 정복 한 것처럼. 제국은 고대의 흔적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유리아는 극장을 뛰노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길을 찾는 모습이 꽤 익숙해보였다.



[브링스 길드]


유리아는 지점장과 눈인사를 나누고, 봉투를 건넸다.

그는 말없이 장부를 꺼내 이번 의뢰비를 기장했다.


유리아 전용 장부.

유리아의 계좌엔 상당한 금액이 쌓여있었는데, 정말 소처럼 일한 결과였다.


언어 능력을 자각한 이후 유리아는 온갖 번역을 도맡았다.

처음엔 미심쩍던 지점장도 빠르고 정확한 그녀의 일 처리를 겪은 후부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제국 전역의 일을 끌어와 그녀의 성의에 보답했다.


유리아는 지점장이 준 영수증을 보고 있노라니 뿌듯했다.


그때, 딸랑거리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들어왔다.



“번역을 좀 맡길까 하는데.”



지점장은 유리아를 힐긋댔고, 그녀는 그 의도를 파악했다.

유리아는 기다렸다 이 일까지 받아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길드의 의뢰는 비공개가 원칙이었기에 의뢰주도, 의뢰를 맡은 자도 서로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유리아가 한 발짝 물러서려던 찰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군청빛이 도는 흑발에 머리색보다 좀 더 밝은 푸른 눈동자.

로브로도 가려지지 않은 다부진 어깨는 그의 큰 키와 어울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는데, 과하지 않은 느낌의 담백한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남자를 본 순간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집 밖으로 보이는 푸른 매 한 마리가 유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엔 빠질게요.”



유리아의 반응에 지점장은 당황했다.

지점장은 남자가 누군지 아는 기색이었다.

그가 직접 길드에 찾아올 정도면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했다.

현재 길드에는 유리아를 대체할 인력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설득에 유리아가 마음을 바꿀 리 없음은, 그가 먹은 눈칫밥이 말해주고 있었다.



“적절한 번역자를 구할 때까지 기다리셔야합니다. 기한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점장은 정중하게 안내했고, 남자는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꽤 흥미로워하는 듯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약간의 과장이 섞여있었다.



“그래도 생명의 은인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뜻밖의 상황에, 뜻밖의 재회였다.

남자의 시선이 모자 밖으로 새어나온 유리아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그때 일은 감사했습니다.”



유리아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목례로 답했는데, 그 행동이 꽤 느긋해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아는 더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자리를 뜨려 걸음을 내디뎠지만, 뒤이은 그의 말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상당한 실력자이신가봅니다. 기억에 없는 언어를 번역할 정도로.”



아, 이 사람과는 왜 매번 이런 식인지.


날카로운 질문에 유리아가 뒤를 돌았다. 그는 매번 정곡을 찔러왔다.



“언어 구사는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서요.”



그리고 유리아는 매번 뻔뻔하게 굴었다.



“그럼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제가 참 바쁘네요.”



마주 본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유리아가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 눈빛처럼.


유리아는 묻어 두었던 그 날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당장 앞만 생각하느라 정신없이 지나갔지만, 그 때 겪었던 긴장감과 절박함. 죽음과 섬뜩함은 평범한 이가 겪기엔 가혹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중 일정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남자와는 더 이상 엮이기 싫었다.



“어찌하면 기분을 푸실는지요?”


“별로 풀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요.”


“그럼 말을 바꿔보죠. 번역자님께선 어찌해야 의뢰를 맡으시겠습니까?”



그는 유리아의 무례할 정도로 단호한 태도에도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계속해보라는 듯 종용하는 느낌이었다.


유리아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손안의 종이가 구겨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조금 전 받은 영수증이었다.


‘차라리······.’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에드몬드 백작 저택에 머무는 한 접점은 계속될 것이다.

자신은 잠재적 요주인물로 분류됐겠지.

남자의 태도를 보니 쉽게 바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쪽도 이득이 있어야지.



“100배요. 원래 의뢰금의 100배면 할게요.”



번역은 주로 고등 교육을 받은 이들의 업무였다. 그래서 단가가 높았다.

원금의 100배면 평민의 몇 개월, 심하게는 1년 생활비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유리아의 파격제안에도 남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것은 점장 쪽이었다.

점장은 말리지도 못하고 끼어들지도 못한 채, 뻔뻔하게 길드 안에서 뒷거래를 협상하는 풍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대신 사흘 내로 해드릴게요.”



일단 지르고 보았지만 거절해도 그만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예상 외로 남자의 고민하는 모습이 제법 진지해보이자 유리아는 혹할만한 조건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읽어 줄 수 있었지만 일부러 기한에 여유를 두었다.

물론 다른 번역자에 피하면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이틀로 하죠.”



남자는 카운터 위에 올려두었던 봉투를 집어 유리아에게 내밀었다.


일이 확실하게 처리된다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터무니없는 금액일지라도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에 비한다면야.


대체 어떤 언어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배짱을 부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유리아의 자신만만한 기세를 보아하니 믿는 구석이 있어보였다.



“좋아요.”



유리아는 과거의 일은 모두 잊기로 했다.

이제부턴 비즈니스 관계일 뿐. 업무에 개인적 감정은 배제해야지.


유리아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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