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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림.
그림/삽화
백림
작품등록일 :
2024.07.24 12:14
최근연재일 :
2024.08.09 10:00
연재수 :
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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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321

작성
24.07.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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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만남

DUMMY

갈색 머리의 기사는 지시대로 마차의 가림막을 걷어 젖혔다.

조금 전 전투의 여파로 마차 안 짐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구석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밖은 어둑했지만, 시야 분간이 안 갈 정도는 아니었다. 유리는 그제야 바깥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말들도, 마차의 주인도 모두 죽었다.

유리는 바람에 섞여오는 피비린내에 치솟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은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신 차려 신유리. 지금도 위험한 건 똑같아.’



유리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마차에서 내리고 두 남자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이기도 했지만, 마차의 주인과 일행이 아니라고 분명한 선을 긋기 위해서였다.

유리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가 일순 멈칫했지만, 그뿐이었다.



“제국의 1 기사단, 헤이든 에드몬드입니다.”



유리는 기사단이라는 말에 내심 안도했다.

수배자, 추격대, 기사단 중에서 가장 신뢰 되는 집단이 아닌가.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자신이 수배자와 한패가 아님을 입증해야 했고, 이후엔 신변도 챙겨야 했다.



“수배자를 체포 중이었습니다. 경위를 들을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저도 얼마 전까지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거든요. 일어나보니 마차 안이었어요.”



유리가 내놓은 적절한 답에 헤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이 갔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수배자의 경로에선 중년의 남자와 여자, 둘 뿐이었다.

목격지점에서 여기까지는 숲과 들판만 가득한 길이라 중간에 합류한 일행이라 보기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물론 가능성이 작을 뿐,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닌지라 의심을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게······.”



유리는 잠시 말을 골랐다.

부디 먹히길 바라면서.



“기억이 나지 않아요.”


“네?”


“기억을 잃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지금껏 진지하던 헤이든의 얼굴이 단번에 풀어졌다.

당당한 유리의 말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들어본 적 있었다. 심한 충격을 받으면 간혹 기억에 문제가 생긴다고.

유일한 아들을 잃은 롤린 백작 부인이 한동안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었던 것도 그 일환이 아닌가.

아들의 사망이란 기억을 잃은 것.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어찌 대응해야할지 몰랐다.

머뭇거리는 헤이든을 보며 유리는 더 자세히 설명했다.

유리의 입장에선 설득에 가까웠다.



“그들은 제가 숲에 쓰러져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도적을 만나 도망치거나, 승마 중 길을 잘못 들었을 거라 하더군요.”



유리가 입은 슬림한 검은 바지와 흰 셔츠.

부족하지만 승마복이라고 주장할 정도의 옷차림은 되었다.



“한패가 아니라는 증거는?”



지금껏 헤이든 뒤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잘 나가는 중이었는데······.’



유리는 반쯤 넘어온 헤이든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제가 한패라는 증거도 없죠.”


“그건 기사단이 조사해봐야 알 일이지.”



복면의 사내를 공격하고 아직 거두지 않은 검이 유리를 겨눴다.

검에 묻어있는 피가 뚝, 뚝, 한 방울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에 유리는 지금 자신이 시신들의 앞에 서 있단 사실을 자각했다.


부모님도 조부모님도 모두 제 손으로 떠나보냈건만, 모두 단정히 염을 마친 모습뿐이었다.

이런 현장이 익숙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찌됐든 조금 전까지 살아서 자신과 말을 나누던 사람들이었다.

자신이라고 저곳에 함께 누워있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두려움을 떨치고자 유리의 목소리는 한층 날카로워졌다.



“조사하셔도 마찬가지예요. 제 말이 사실이니까요.”



그들에겐 당연한 심문과정이었다.

수배자와 함께인 것도 의심스러운데 기억상실까지 주장하는 여자의 말을 다짜고짜 믿을 순 없는 노릇이니.



“······.”



유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는 뒤로 팔을 휘둘러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검은 곧바로 남자의 허리춤에 매인 검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검집 밖으로 나와 있는 검의 손잡이, 그 끝에 조각된 푸른 매가 아직 그녀를 겨누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직접 모셔라.”



그는 헤이든을 향해 고갯짓했다. 뒤의 일은 일임하겠단 뜻이었다.

헤이든은 자신의 상관의 뜻을 이해했다.


그녀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조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제국의 기사단이 정식으로 그녀를 보호할 수도 없었다.

비밀리에 진행되는 임무인 데다 그녀는 너무··· 눈에 튀었다.


남은 선택지는 당연히 하나뿐이었다.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당분간 저희 저택에서 머무시겠습니까?”



그녀가 기억이 온전했더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완전한 혐의가 풀릴 때까진 그들의 감시망 아래 있었을 것이다.



“정말이요?”



유리의 눈이 일순 커졌다.

그의 의도가 어찌 됐든지 간에 당장 머리를 베고 누울 곳에 없는 입장에서, 헤이든의 제안은 구명줄과 같았다.


유리는 당장이라도 그의 손을 잡고 ‘당연하죠!’라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긴장됐던 몸이 풀어졌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



급격히 몰려온 탈력감에 그녀는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 * *


정신을 차린 건 꼬박 하루가 다 지나고 난 다음이었다.

침대에 누운 유리는 매우 고급스러운 천장을 보면서 지난 일을 떠올렸다.


이 방은 그 기사의 저택인가.

아직 여기인가.


그리곤 다시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리라 기대하면서.



‘꿈이 아닌가. 아님 아직도 꿈인 건가.’



처음엔 꿈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 종종 꾸던 꿈처럼 생생한 경험을 하고, 그리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 믿었다.

동화 같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성인이 된 만큼 좀 잔혹해진 경험을.


정확하진 않았지만 대략 삼일 가량은 그렇게 잠만 잤다. 눈을 뜨면 곧바로 다시 감았고, 잠에 빠졌다.

도피라도 떠나듯이.


눈을 뜨고, 감고. 그렇게 한참을 반복하다 더는 잠이 오지 않을 때,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갈 수 없음을.



그렇게 유리는 꼬박 보름을 앓아누웠다.



* * *



“유리아 님. 유리아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제는 익숙해진 이름에 유리 아니, 유리아는 멍한 눈빛을 바로잡았다.

‘유리아’는 이름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서양식으로 대충 둘러댄 이름이었다.

최대한 낯선 느낌을 덜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 도움이 된 것 같진 않았지만



“정말 필립이 저에게 관심이 있나요?”



구구절절한 사연 끝에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마주 앉은 소녀는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이었다. 유리아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섣불리 다가가진 마세요. 성급함은 일을 망치는 주범이니까요.”



양 갈래머리의 하녀가 눈을 반짝였다.


필립은 우유 배달원이었다. 그의 마음은 매일 아침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만 봐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수줍어하는 필립의 마음을 당사자만 모를 뿐이었다.

하지만, 하녀는 대단한 계시라도 들은 양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맞아요! 함께 시내에 가자 할 때도 탐탁지 않아 했어요.”


“걱정 마요. 조만간 기쁜 소식이 올 거예요.”



원하는 대답을 들은 하녀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뛸 듯이 기뻐하는 하녀의 옆에 나란히 앉은 또 다른 소녀, 다리야는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야! 인제 그만 나가. 유리아 님 독서에 방해되잖아.”



그리고 곧바로 사랑에 빠진 친구의 팔을 잡아끌었다.

소녀는 끌려나가는 와중에도 유리아를 향한 감사 인사는 잊지 않았다. 멀리서 ‘정말 감사합니다. 유리아 님!’ 메아리치듯 들렸다.


문밖으로 친구를 내쫓듯이 떠민 다리야는 곧 돌아왔다.



“죄송해요, 유리아님. 워낙 호들갑 떨어서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데려왔더니.”


“괜찮아.”



다리야는 유리아가 에드몬드 백작 저택에 머무는 동안 배정된 시녀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지방 한미한 귀족의 장녀인 그녀는 타고난 호기심 덕에 퍽 아는 것이 많았다.

그녀에게 받은 도움에 비하면 이 정도는 매우 사소한 수준이었다.



“외출하실 거죠? 준비해놓을게요.”


“그래. 고마워.”



유리아는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비젠트 제국.

명실상부한 대륙의 패자. 대륙의 주인.

어둠이 대륙을 침식하여 온 세상이 그림자로 덮일 때 어둠을 물리친 대륙의 구원자.

제국을 건국한 이래로 그 위상은 변함없었다.


몇 번의 흔들림은 있었지만 모두 제국의 뛰어난 위인이 위기를 극복했다.

그리고 그 위인은 모두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졌다.



‘나처럼 말이지.’



그래서인지,

조금 전 소녀처럼, 사람들은 유리아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유리아는 에드몬드 백작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제국에서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이가 의미하는 바를 아십니까?’


‘신성하게 여긴다고는 들었어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제국민은 시황제 로스테론 폐하는 신의 현신, 서르하 님은 신의 사자라 여기고 있습니다.”


‘신의 사자요?’


‘네. 이후에도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이는 위기에 빠진 제국을 구했습니다. 십 여 년 전쯤 승하하신 황태후도 마찬가지죠. 그분들이 모두 신께서 제국을 위해 보낸 사자라 보는 제국민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유리아 님을 그렇게 보는 이도 있겠지요.’


‘······.’


‘그러니 다른 이들에겐 ‘아란’국 출신이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란국이요?’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북방의 소국. 부족에 가까운 작은 나라. 문명을 거부하는 나라.

누구도 정벌하지 못한 불가침의 나라.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

만물의 어머니를 모시는, 신비한 힘을 가진 부족장과 깊은 통찰력을 가진 아란국 사람들.


아란국을 칭하는 수식어는 매우 많았지만 정작 아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무성한 소문과 잔뜩 부풀려진 미신만이 가득한, 미지의 나라.



‘건국 영웅 서르하가 정착한 곳입니다. 그녀와 같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이가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현재로썬 가장 설득력 있는 추리였다.

에드몬드 백작의 생각도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껏 누구도 그녀의 존재를 몰랐다는 사실 설명되지 않았다.


제국의 영웅담은 다른 나라에서도 유명했다.

유리아를 알았더라면, 그들은 분명 유리아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제국을 경계하는 수단으로 그녀를 이용했을 것이다.

유리아는 정치적으로 좋은 패였으니.



‘아란이라······. 묘하게 한자 같단 말이지.’



그리고 유리아는 지금 아란국에서 제국을 방문한, 에드몬드 백작이 모시는 손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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