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 호랑이가 농장에 막 들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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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티헹
작품등록일 :
2024.07.29 17:23
최근연재일 :
2024.08.09 23:34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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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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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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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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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우당탕탕 이사 (1)

DUMMY

이삿짐 트럭은 아침에 도착했다.


기사가 짐이 가득한 비닐봉지를 마루 위에 옮겨두었다.


“적을 줄 알았는데 짐이 생각보다 많네요. 자잘한 짐들이 많아서.”

“이제 얼마나 남았나요?”


거실에는 이미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사가 안쪽에 남은 공간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세 개 남았거든요. 밀어 넣을 수 있긴 한데 어차피 정리하실 공간도 필요하니까.”

“그러면 마당에 놔 주세요.”


부르릉

한결 가벼워진 이삿짐 트럭을 떠나보내자 집에는 효재와 수북이 쌓인 짐들만 남았다.


“이걸 언제 다 하냐.”


혼자서 정리할 생각에 막막했지만, 그래도 힘을 내면 오전 안에는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효재가 목장갑을 끼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좋았어!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벌써 힘차구나? 선생님.”


와삭와삭, 과자 먹는 소리와 함께 쳐들어온 불청객. 효재가 애써 끌어올린 기운이 풍선 바람처럼 빠졌다.


“쟨 집에 안 가나 봐···.”

“우와아! 비닐봉지가 엄청 커다랗다!”


말릴 새도 없이 랑이가 봉지 안에 들어가 책 사이로 몸을 숨겼다.


“치직. 타깃 포착. 응답하라, 오바.”

“나도 바빠. 얼른 나와.”

“타깃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비상, 비상!”


효재가 랑이의 팔을 붙잡고 내보내려고 하자, 랑이가 버둥대며 항변했다.


“에잇. 기껏 도와주러 왔는데!”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 나도 하기 싫어 죽겠어.”


대문 밖으로 내보낸 랑이는 그대로 돌아와 돌돌 말려있는 비닐봉지의 입구를 열었다.


“그러면 랑이가 일할게.”

“함부로 만지지 마!”


막상 소리 질렀지만, 효재 입장에서도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운을 뗐다.


“가벼운 건 들 수 있지?”

“응!”


랑이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마당에 있는 책들을 저기 평상에 놔두고 두꺼운 거랑 얇은 거랑 나눠봐.”

“그 정도는 간단하지.”


효재가 안에서 정리하는 동안 랑이도 함께 책을 옮기기 시작했다.


욕심껏 드는 바람에 생각보다 무거워 힘겨워했지만, 퍽 진지한 얼굴을 하고 낑낑대며 걸어갔다.


“응. 거기 놔두면 돼.”


편도 1번을 완수한 랑이가 뿌듯한 표정으로 5권의 책을 바라보았다.

뒤로 100여 권이 남아있었지만, 이 세상의 무엇도 랑이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헉. 이건 뭐야?”


주의를 이끌긴 누구보다 쉬웠지만.


[성공의 연금술]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은 다른 책보다 표지가 유독 빤딱해서 햇빛을 받으면 글씨가 무지개색으로 빛났다.


어린이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열심히 하는 거지?”


랑이가 한참 동안 서서 비닐봉지 안을 들여다보고만 있자 효재가 한 마디 던졌다. 그러자 아이는 책을 두 손으로 꼭 잡고 달려왔다.


“선생님, 마법 책이 있었어?”

“그 눈빛은 뭐지. 자기계발서야.”

“연금술은 무슨 뜻인데?”

“청소하랬더니 요 녀석이.”


전형적인 표지만 화려한 싸구려 자기계발서.

한창 미래가 안 보여 답답할 때 샀던 책으로 버리기 아까워서 들고 있는 건데 아이의 눈에는 대단한 비밀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옛날에는 납으로 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성공도 조합하면 대충 된다는 건데, 내용은 완전 싸구려야.”

“허어어어.”


랑이가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책을 성전처럼 들었다. 눈망울에 콕콕 박힌 반짝이가 어찌나 올망졸망한지 장난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책꽂이 아래에 꽂아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책을 들고 서 있던 랑.


“그러다 너가 금 된다.”


효재의 말 한마디에 표지를 넘기려던 랑이 깜짝 놀라 그만두었다.


제자리에 꽂아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당으로 나갔다.


***


“어어. 들어오지 마. 여기 나사 많아.”


책상을 조립하던 효재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랑이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교재 하나를 집어 들고 그 안에 빼곡하게 적힌 필기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책장을 넘겼다.


“선생님. 책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팔락 팔락


“고시 공부는 기출 문제도 풀어야 하고 인터넷 강의도 많이 듣거든.”

“호오-.”


랑이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책장을 넘겼다.


“해마다 공부한 교재를 안 버리다 보니 많아진 거야.”

“호오-!”


깜지 수준의 페이지를 보며 더 깊은 감탄사를 내뱉는다. 이내 표정이 공허해졌다.


“고시 공부라···.”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


책에서 시선을 뗀 이후에야 랑이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이장 아저씨가 그랬어. 인생 망치기 딱 좋은 길이라고.”

“팩트 폭력은 그만!!”

“선생님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좌절하는구나!”


OTL 자세를 한 효재를 보고 랑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고시 공부는 재미있어?”

“재미없어. 아주 재미없지.”

“그러면 왜 하는 거야?”


효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컴퓨터 연결 작업에 집중하면서 말했다.


“귀찮잖아. 다른 길을 가기가.”


별로 생각하고 싶은 질문은 아니었다.


20대를 보내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면. ‘왜’ 라는 이유를 가져다가 붙이는 순간, 하고 싶은 것보다 하기 싫은 게 더 많아진다는 것.


왜 살아야 하는지. 왜 공부해야 하는지.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등 떠밀려 여기까지 온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걸 하려면 또 고민해야 하는데. 엄청 힘들고 귀찮은 일이거든. 그러니까 하던 것만 하게 되더라고.”

“호오오오. 선생님 대단하다. 랑이는 빠삐코도 질리는데.”


랑이가 이해하지 못할 메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똑똑한가 보다.”


하지만 효재는 그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뒤통수 뒤로 면접관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 학생 같은 지원자 너무 많이 봤거든.

- 집안 좋고 학력 좋고.

- 그럭저럭 공부도 하는 애들.


“아참. 이장님이 저녁 어땠냐고···.”


랑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 책을 덥석 집어서 반으로 찢었다.


아이는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믿지 못하고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열심히 공부했잖아!”

“됐어. 저건 이제 필요도 없어.”

“자기 책인데!”


그는 찢어진 페이지들을 한데 모아 단숨에 구겨 넣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모르면서 아는 척 하지마.”

“잠깐!”


랑이의 다급한 외침을 뒤로하고 효재가 밖으로 나갔다.


“선생님!”


***


진짜 최악이다···.


문제가 있는 건 난데.

애를 상대로 화를 내다니.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어서 집 뒤에 있는 텃밭에 쪼그려 앉아있는 몹쓸 어른.

실로 처량한 모습이었다.


문득 생각이 나 휴대폰을 꺼내 봤다.

역시 엄마에게서 또 문자가 와 있었다.


[너 방 뺐다면서. 지금 어딘데.]


한숨을 깊게 내쉬며 휴대폰의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그저 눈을 감고 침묵 속에서 그 순간을 견디려 했다.


“하아아. 나는 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지.”


설날에도 그랬다.

불합격했다는 사실을 혼자만 알고서 가족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건 상당한 고역이었다.


- 그 정도로 지원해줬으면 이제는 붙어야지. 안 그래?


월세, 인강, 학원비, 교재. 전부 아버지 돈이었다. 해본 알바라고는 고작 학부생 때 했던 과외가 끝.

그마저도 다섯 달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뒀다.


- 효재한테 그런 거 시키지 마. 얘 공부만 할 줄 아는 바보야. 음식 맡겼다가 사고 날 일 있어?


백면서생으로 살아온 지 어느덧 30년.

박효재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친척의 말마따나 교과서 암기와 문제집 풀기가 유일하다.


그 공부마저도 이젠 내세울 게 못 됐다.


‘나 진짜 아무것도 해둔 게 없네.’


책임감도 없고 꿈도 없다.

말없이 밥을 깨작이고 있는 그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준 건 고모뿐이었다.


- 박효재 너 말이야. 공부 즐거워서 하는 거니?


“뭘 즐거워서 해. 세상 사람들 다 즐거운 것만 했으면 이미 나라 망했겠다. 다들 자의식 과잉이라니까.”


그가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 다리를 흔들었다.

박자에 맞춰서 발까지 탁, 탁, 구르다 보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이제 들어가야지.”

“올 거야?”


랑이가 눈을 반짝이며 앞에 서 있었다.


“···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자의식 과잉이라는 게 뭐야? 자식이 많다는 거야? 다자녀 주택?”


효재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떨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은 모양이다.


“왜 왔어. 미안한 마음 들게 말이야.”

“······?”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효재를 보며, 랑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이 왜 미안해? 랑이가 자꾸 물어봐서 선생님이 싫어한 건데.”


랑이가 뒤에 숨겨두었던 책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래서 책을 다시 붙여봤어.”


찢어진 책에는 엉성하게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다.


“열심히 붙여봤는데. 잘못했을지도 몰라.”


고사리 같은 손에는 노고의 흔적처럼, 끈끈이가 남아 있었다. 랑이가 책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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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비와 씨앗 (1) 24.08.09 15 2 10쪽
9 농사 아르바이트 (5) 24.08.08 27 2 10쪽
8 농사 아르바이트 (4) 24.08.07 24 2 10쪽
7 농사 아르바이트 (3) 24.08.06 33 3 12쪽
6 농사 아르바이트 (2) 24.08.05 38 3 12쪽
5 농사 아르바이트 (1) 24.08.02 42 4 9쪽
4 우당탕탕 이사 (2) 24.08.01 56 4 11쪽
» 우당탕탕 이사 (1) 24.07.31 85 5 9쪽
2 집에 막 들어오는 호랑이 24.07.30 126 8 12쪽
1 실패한 고시생의 귀촌길 24.07.29 140 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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