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 호랑이가 농장에 막 들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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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티헹
작품등록일 :
2024.07.29 17:23
최근연재일 :
2024.08.0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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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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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농사 아르바이트 (3)

DUMMY

“이렇게 씨감자는 싹이 있는 쪽을 위로 해서 절반으로 자르거나, 큰 감자는 4등분으로 잘라. 싹이 잘리면 안 되니까 조심해야 해.”


진주가 예시로 한두 개를 능숙하게 자르며 설명했다. 효재가 열소독 된 칼을 들고 물었다.


“감자는 씨앗이 아니라 씨감자로 심어?”

“응. 요 싹을 땅에 심으면 감자가 자라거든. 한 조각에서 여러 개의 감자를 얻을 수 있어. 신기하지.”


진주가 칼을 어설프게 쥔 효재를 바라보았다. 살면서 칼을 잡아본 적 없다는 데에 농가를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빠 할 수 있겠어?”

“선생님. 무리하지 마.”

“그래! 비닐 씌운 것만으로도 충분했어.”


효재가 미간을 좁혔다.


차라리 방에 들어가 있으라는 소리는 정말 한평생 질리도록 들었는데 지금까지 물러서고 싶진 않았다.


“깔보지 마! 이 녀석들아!”


효재가 파바박 감자를 잘랐다.

순식간에 열 몇개의 감자가 조각났다.


“봐라! 이것이 집중력이다.”

“오오오오.”


감자 조각을 받아서 든 진주와 랑이가 깔끔하게 잘린 단면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오빠 의외로 잘하는데?”

“짱이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짱이야.”


효재의 코가 하늘을 뚫을 듯 뾰족해졌다.


“역시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뭐든 잘한다더니. 이 정도면 혼자 충분히 하겠어!”

“선생님 역시 대단해.”


진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갑을 벗었다.


“그러니까 오빠 하고 있어. 나는 집에 다녀올게.”

“오냐. 맡겨만 둬.”


뿌듯함에 취한 효재는 진주가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럼 내일 봐!”


웃는 표정은 진주가 문을 쾅- 닫은 순간에야 사라졌다.


“······.”


랑이가 해맑게 효재를 올려다봤다.


“아아아. 내가 뭐라고 한 거야. 얄팍한 감언이설에 홀라당 넘어가다니.”


후회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차피 날은 저물었고 진주는 옆 농가에서 도와주러 온 입장이니 돌아갈 시간이긴 했다.


‘그래도 저걸 어떻게 혼자서 다 해···.’


상자 속에는 손질을 기다리는 씨감자가 150kg 남아 있었다.


효재가 벽에 머리를 박고 망연자실해 하는 한편, 랑이는 옆에서 부스럭대며 효재의 휴대폰을 살펴보고 있었다.


“선생님-. 이거 뭐야?!”

“응?”


효재가 돌아보았다.


“휴대폰이지. 여긴 통신도 안 터져서 문자도 안돼. 괜히 만지지 마.”

“호오-.”


랑이가 신기한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글자를 또박또박 읽었다.


“그럼 이건 뭐지? 엄마?”


랑이의 입에서 ‘그 단어’를 들은 순간 효재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얼어붙었으나 금방 달려갔다.


“잠깐만, 랑아! 받지 말아봐!”

“저요. 랑이는 알고 있습니다.”


랑이가 전화 오는 휴대폰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친구인 척 하면 되는 거지?”

“뭐?!”

“친구랑 같이 있다고 하면 되잖아. 어디서 봤어.”

“아냐. 기다려 랑아!”


랑이가 통화를 수락하는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효재는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안녕하세요. 네- 네. 선생님은 저랑 같이 있어요.”


아이가 음음,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그의 영혼이 한 줌씩 빠져나갔다. 하지만 도저히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휴대폰을 빼앗을 수도 없었다.


“네~. 안녕히 주무세요!”


랑이가 야무지게 인사까지 하며 통화를 끊었다.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차피 감자반 옆 컨테이너에서 떨어져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용기를 내고 물었다.


“뭐라셔···?”

“당장 짐 싸서 집에 돌아오라는데?”


랑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전했다.


“지금 네가 웃을 때냐?!”


***


“실례합니다.”


진주가 랑이네 집 문을 열며 들어왔다.


“오빠. 점심 식사도 가져왔어요.”


두리번거리던 진주는 처량하게 앉아있는 효재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효재의 열 손가락에는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히익. 어떻게 된 거야? 그 부상은 뭐고?”

“아냐. 아무것도 아냐.”


효재가 등 뒤로 손을 숨겼다.

애써 덮어보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랑이가 부엌에서 외쳤다.


“선생님-!”


랑이가 참혹한 살(殺) 감자 현장을 신문지에 싸서 들고 왔다.


“선생님이 썬 피투성이 감자, 어떻게 해야 해? 그로테스크해서 도저히 부엌에 놔둘 수 없어.”


효재가 진주를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아냐, 난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아! 난 한다면 잘하는 사람이라고!”


그제야 진주의 시선에 너덜너덜해진 장갑이 들어왔다. 아무리 장갑이 헤졌다지만, 감자 자르다가 피 봤다는 얘기는 농촌살이 26년간 처음 봤다.


효재는 필사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이건 피가 아냐! 케첩! 감자 깎다가 배고파져서 그런 거야!”

“오빠···.”


진주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가 묻었으면 칼을 다시 소독해야 한다거나, 싹이 난 감자는 먹으면 안 된다는 것 중 도시인에게 무얼 먼저 얘기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뭐야, 그 한숨은!”


하지만 둘 다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진주는 해탈한 표정으로 인자하게 웃었다.


“나머지는 내가 대신 할게요.”

“어?! 그래도 돼?”

“잘됐다. 선생님.”


효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집중은 안 되지, 손은 베였지, 감자는 망쳤지. 이러다가 할아버지 농사를 완전히 망칠까 봐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진주가 천사처럼 보였다.


“단! 할 일은 하고 가.”


진주가 피 묻은 칼을 들고 생긋 웃었다.

효재가 꿀꺽 침을 삼켰다.


“··· 그렇지···?”


***


효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비료를 실은 수레가 무거워 페달을 밟는 그의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평소 자전거를 타며 느끼던 가벼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작은 언덕 하나도 마치 산을 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아, 하아··· 이거라도 열심히 하자.”


평소 운동을 잘 하지 않는 그에게 이 무게는 꽤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감자를 그 모양으로 만들어둔 장본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효재가 빠르게 페달을 밟았다.


- 트랙터 로더가 고장 났어. 감자밭을 갈다가 그런 것 같아. 태수네 집에 가서 공구 좀 가져와 줘, 오빠.


진주는 지금 태수가 바빠서 내려와달라고 하기 미안하다며 효재를 보냈다.


- 비료는 할아버지가 태수네 집에 가져다주라고 한 거야. 이참에 함께 가져가면 되겠다!


그리하여 비료 배달부가 된 것이다.


경운기를 타고 가면 좋았겠지만, 진주가 핸들 조작에 익숙하지 않으면 뒤집어질 수 있다며 말렸다.


“여기서 왼쪽··· 이었지?”


태수네 집은 마을에서도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골에는 집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데다가 표지판도 없어서 진주가 알려준 길을 외워서 가야 했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첫 번째···. 거의 다 왔잖아. 어디 있는 거야?”


효재가 앞에 있는 무너진 농가를 바라보았다.


지붕은 주저앉고 벽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오래된 나무 기둥이 금이 가고 곳곳에 자란 잡초가 폐허의 틈새를 메웠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적막감이 주위를 감쌌다.


“설마 여기?”


설상가상으로 하늘에는 먹구름이 짙게 내려앉아 비가 한 두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잔해 사이를 스치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는 바람···.


“거기서 뭐 합니까?”

“아오! 깜짝이야.”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철강 자재를 들고 서 있는 태수는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심 자존심이 상한 효재는 크흠, 헛기침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었다.


“진주한테 연락받았어?”

“아뇨. 비닐하우스 고치는 중인데.”

“너희 집에 비료 배달 가고 있었거든. 그런데 가도 가도 안 나오더라고.”

“아아.”


태수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좀 더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랑이네 집에서 9km 정도 돼요.”

“여기서 더···? 난 여기가 너희 집인 줄 알고 놀랐잖아.”

“아뇨.”


태수가 무너진 농가를 바라봤다.


“여긴 저희 옛날 집입니다.”


그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효재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태수가 먼저 철강 자재를 어깨에 메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좀만 더 걸으면 우리 집이니까 따라오세요.”


천둥이 울리며 빗방울이 거세게 떨어졌다.


***


“효재 오빠?! 도착한 거지?”

“태수네 집에서 전화하는 거야.”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며 창문을 부술 듯 때렸다.


“미안. 돌아가는 시간이 조금 늦어질 것 같아. 아침에도 일을 빠지고···. 정말 면목이 없다.”

“그건 상관없어! 휴우.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엄청나게 걱정했거든.”


수화기 너머에서 진주가 가슴 쓸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수에게 진주 번호를 물어본 덕에 연락할 수 있었지만, 이동하고 비료를 놓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던 건 사실이었다.


날씨를 보며 많이 걱정한 모양이었다.


“최대한 빨리 갈게.”

“아니야. 비 좀 가라앉으면 내가 데리러 갈게.”

“어··· 응. 미안. 고마워.”


효재가 전화를 끊었다.


이대로 돌아가도 오늘 할 일을 못 했으니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진주는 일이 문제가 아니라는 듯,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안심했다.


가족도 아니고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인데.

동료가 빠지면 일이 늘어나는 거 아냐? 미안한 와중에도 효재는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똥---.”


그때 뒤에서 기합을 넣는 소리가 들렸다.


“침!!”


구령과 함께 날아온 손가락이 엉덩이를 파고들었다. 효재가 저항 없이 쓰러졌다.


“크윽.”

“아하하. 선생님이라더니, 허점 투성이구만!”


폭우 속에서도 비닐하우스를 순식간에 고친 태수가 빗물을 닦으며 말했다.


“박재혁! 똥침은 집에서 금지라고 했잖아.”

“시끄러-. 잔소리 대마왕.”


재혁이 눈을 아래로 뒤집으며 혀를 내밀었다.

태수는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턱짓했다.


“얼른 엄마 도와드려.”

“치잇.”


재혁이 툴툴거리며 비닐하우스로 뛰어갔다.


효재는 아직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주저앉아있었다. 태수가 살짝 고민하더니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제 남동생입니다.”

“알겠으니까 그냥 날 내버려 둬···.”


정신적 데미지가 훨씬 컸다.


태수네 집은 방울토마토를 주력으로 다양한 상품을 키우는 비닐하우스 농가였다.


효재가 비닐하우스 내부로 들어서자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토마토 덩굴이 길게 뻗어 있었고, 줄줄이 매달린 탐스러운 방울토마토가 눈길을 끌었다.


태수와 그의 가족은 각자의 위치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능숙하게 방울토마토의 상태를 점검하는 태수.

꽃상추, 미니 로메인, 버터헤드, 이자벨 등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유럽 상추를 손보고 있는 태수의 어머니.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아버지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빈자리를 메꾸듯 재혁이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했다.


‘랑이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저렇게 어린애도 일하는 거야?’


입구에서 주춤주춤 눈치를 보고 있자 태수가 어머니에게 손님이 왔다고 가리켰다.


쪼그려 앉아서 일하던 어머니는 턱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머. 선생님. 이삿날 이후로 처음 뵙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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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농사 아르바이트 (2) 24.08.05 38 3 12쪽
5 농사 아르바이트 (1) 24.08.02 42 4 9쪽
4 우당탕탕 이사 (2) 24.08.01 56 4 11쪽
3 우당탕탕 이사 (1) 24.07.31 84 5 9쪽
2 집에 막 들어오는 호랑이 24.07.30 126 8 12쪽
1 실패한 고시생의 귀촌길 24.07.29 140 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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