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 호랑이가 농장에 막 들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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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티헹
작품등록일 :
2024.07.29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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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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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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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농사 아르바이트 (2)

DUMMY

질문은 태수 쪽에서 날아왔다.


“한동안 여기서 지내는 거면 계획이 있는 건가 싶어서-.”


할아버지가 눈치를 찌릿 날렸다.


“-요.”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골이나 도시나 밥상머리에서는 어른의 말씀이 법인 모양이다.


효재가 웃음을 터뜨릴 뻔한 표정을 숨기려 애썼다.


“좀 쉬려고 내려온 겁니다. 그리고 다 큰 성인이 부모 허락받고 움직이지는 않잖아요?”

“허락받지 않은 것과 못한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집 사정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대답이 영 시원찮았는지, 태수는 곧 관심이 시들해져 도로 밥 먹는 데 집중했다.


“그렇습니까.”

“예.”


마지막 대답을 주고받을 땐 효재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먹었던 흰 쌀밥이 속에 콱 얹히는 기분이다. 효재가 괜히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건 랑이 뿐이었다.


***


“요 방을 쓰면 돼!”

“와- 넓다.”


훈훈한 연기가 시골 밤을 데울 무렵이었다.

랑이는 효재에게 당분간 머무를 방을 소개하며 기다란 베개를 건넸다.


“이불은 장롱에 있구 베개는 랑이꺼 빌려줄게. 할아버지 베개 딱딱해.”

“호랑이···.”


효재가 족히 100cm는 넘는 호랑이 캐릭터 모양의 베개를 집어 들었다.


중간중간 침 자국이 묻어있는 것을 보아하니 랑이가 껴안고 자는 애착 베개인 듯했다.


“네가 쓸 거는?”

“같이 베고 잘 거니까 괜찮아!”

“나 혼자 잘 건데.”


랑이가 효재의 불만을 가뿐히 무시했다.


“할아버지 도와드리고 올 테니까 기다려! 선생님 자면 안 돼!”

“난 다른 사람하고 같이 안 잔다니까.”

“자면 안 돼!”


랑이는 문을 닫는 척했다가 열어서 효재가 눕지 않았음을 두어번 확인한 후 멀어졌다. 도도도, 달려가는 작은 발소리가 들릴 때쯤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하-. 배부르다.”


그가 대자로 팔다리를 쭉 폈다.


“··· 밥 진짜 맛있다.”


식사가 끝난 후에도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흰 쌀밥과 잘 익은 김장김치.

적당하게 맵고 짭짤한 김치는 말한 것도 없고. 밥은 씹을수록 이빨 사이에서 고소한 풍미가 새어 나왔다. 


효재는 입맛을 다시며 부푼 배를 통통 두드렸다.


등 따습고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 틈에 오늘 공부 좀 해둬야겠다.”


효재가 가방에 손을 뻗어 챙겨온 교재를 꺼냈다.

단기 알바를 한다고 해서 손에서 공부를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얼굴을 찌푸리며 책을 코앞으로 가져갔다.


‘이게 무슨 냄새지?’


차갑고 비릿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


편의점 냉동창고에서 나는 듯한, 도시의 잔향.

그 속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 아들, 밥은?

- 편의점에서 먹었어요.

- 김밥집이라도 가지.


자취를 시작한 이후 엄마는 자주 전화를 걸어 밥을 먹었냐고 안부를 묻곤 했다.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요.


효재라고 냉동 도시락이 맛있진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냉동 밥에서 나는 쉰내가 역해 먹다가 뱉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밥 먹는 시간을 줄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공부 시간을 확보할 방법이 없었다. 고시는 궁둥이를 오래 붙이고 앉아있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으니까.


- 합격하면 맛있는 거 같이 먹어요.


효재가 꿈지럭 일어나 휴대폰의 꺼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답 안 왔겠지. 그래. 실패한 아들을 신경이나 쓰겠어?”


허공에 대고 구시렁댔지만, 표정은 점점 긴장감으로 굳어갔다.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켰다.


1이 사라졌을까? 당장 돌아오라고 화낼까? 아니면 읽씹?


짧은 순간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어찼다. 하지만 재수 없는 박태수 앞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기 위해서라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효재가 긴 심호흡을 하고 메시지창을 클릭했다.


[네트워크가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나왔어! 선생님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이놈의 시골, 좌절한 효재가 중얼거렸다.


***


날이 밝은 후에도 효재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할아버지가 그를 여러 번 부른 후였다.


“박효재!”

“아. 네!”


효재가 부리나케 휴대폰을 넣었다.


할아버지는 어제보다 상태가 더 악화한 듯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지만, 짜증 내는 기색 하나 없이 씨익 웃으며 뒤편을 가리켰다.


“먼저 밭을 보러 가자.”

“예!”

“랑이도 따라갈래.”


랑이가 그들을 쫄래쫄래 따라왔다.


할아버지는 주력으로 벼농사를 지었다. 여름철이 되면 넓은 논에 푸른 별가 무성하게 자라곤 했다.


하지만 겨울과 봄에는 벼를 심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감자 농사를 짓는 것이 일상이었다.


감자밭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있었다.


“논은 물을 충분히 공급받아야 해도 감자는 물이 많이 필요 없거든. 조금 높은 땅에서 재배하면 되지.”

“여기 앉으세요.”


효재가 의자를 발로 끌고 와 할아버지를 앉혔다.


“아이고. 젊은 게 좋긴 좋구먼.”

“꺄우웅! 밭이다!”


도착하자 랑이가 정신없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효재는 고생한 허리를 펴고 넓은 밭을 바라보았다.


애들 장난이 아니라는 것쯤은 밭 크기를 보고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여기는 몇 평 정도예요?”

“300평. 생각보다 쪼끄맣지?”

“이게요···?”


할아버지가 아직 정돈되지 않은 땅을 가리켰다.


“퇴비랑 살충제는 뿌려놨으니까, 두둑을 만들고 비닐을 덮어서 씨감자를 심으면 되겄어. 씨감자 자르는 방법은 진주한테 배우도록 하고. 하라는 대로 따라 하면 감자가 잘 자랄 걸세.”


효재가 상자에 담긴 씨감자를 들여다봤다.

못생긴 씨감자에 자잘하고 찌그러진 싹이 비틀거리며 돋아나고 있었다.


“얘를 심는 건가요?”

“이래 봬도 강원도 토종감자야. 심으면 더 클 게다.”


순간 할아버지가 씨감자를 손에 들고 눈을 가늘게 뜨며 콧김을 뿜었다.


감자에 깊은 애정이 담긴 듯,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씨감자를 천천히 돌려보았다.


“눈이 제대로 박혀 있고 껍질도 매끈해서 멍이 없어. 둥글고 균형이 딱 맞아 아주 잘생겼지! 음! 좋은 감자로 자랄 거다! 우리 딸도 좋아할 거야!”

‘엄청난 농부의 눈빛···.’


효재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언덕 위를 올라오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만.”

“응? 나?”


언제 왔는지 랑이가 옆에서 고개를 기웃거렸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으며 주차하고 있는 차를 가리켰다. 그러자 랑이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아주머니! 아저씨이이!”

“우리 딸하고 사위야.”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 부부가 랑이를 반갑게 맞았다.


“장인어른 안녕하세요.”

“랑이 안녕~ 그새 많이 컸네.”

“저번에도 요 정도는 됐었어.”

“아잇 딱 봐도 더 컸잖아. 아저씨 보는 눈이 완전 꽝이네. 그치 랑이야.”


아주머니가 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랑이는 기분 좋은 듯 아주머니의 손에 뺨을 비비적대며 말을 따라 했다.


“아저씨 완전 꽝이야!”

“옳지 잘한다.”

“애한테 참 좋은 거 가르쳐.”


부부는 투덕대면서도 무척 사이가 좋아 보였다.

뒤에 선 효재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아주머니? 아저씨?’


아무리 요즘 애들이 가족 호칭을 어려워하긴 하지만, 그래도 3촌 어른에게 아주머니 아저씨라니?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도 별로 내색하지 않는 모습이 이상했다.


“아빠 도와주시기로 하셨다면서요. 고마워요. 저희 부부가 일로 바빠서···.”

“아닙니다.”


떨떠름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효재가 할아버지를 배웅했다.


“그럼 뒷일은 잘 부탁허요.”

“네에!”

“다녀오세요.”


떠나는 순간까지도 아주머니는 남편을 끝까지 놀릴 작정인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랑이에게 물었다.


“랑이야. 이 아저씨가 뭐라고?”

“완전 꽝!”


하하하, 경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지갑에서 돈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휴게소에서 알감자 안 사줬다고 너무 그러네.”

“랑이 나중에 또 보자~. 효재씨도 무리하지 말고 해요.”


부부는 떠나는 순간까지 시끄러웠다. 뒷자리에 앉은 할아버지만 이 상황이 익숙한 듯 귀를 틀어막았다.


부르릉-

자동차가 흙먼지를 휘날리며 멀어졌다.


“후후. 이것이 아이의 삶.”


랑이가 만원 세 장을 부채처럼 펼쳤다. 


“어때? 랑이 부자 같아?”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부채를 팔랑팔랑 흔드는 모습이 참 해맑았다.


‘그러고 보니 랑이네 부모님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네···.’


물어보기도 그렇고, 애매하다.

효재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랑이가 고개를 들었다.


효재가 화들짝 놀라며 눈길을 피하자, 랑이는 빈약한 돈 부채와 그를 마주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폐 한 장을 쓰윽 건넨다.


“가지고 싶으면 말하지.”

“내가 애들 돈 뺏을 사람으로 보이냐!”

“그러게!”


***


트랙터 엔진 소리가 감자밭 위로 우렁차게 퍼졌다.


진주가 운전석에 앉아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트랙터를 몰았다.


뒤따르는 로터리가 땅을 갈아엎으며 두둑을 만들고 있었다. 흙이 트랙터 바퀴에 차오르며 두둑이 길게 이어졌다.


한편, 효재는 두둑이 완성되는 대로 비닐을 씌우는 작업에 열중했다.


트랙터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피며 적당한 거리에서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지?”


비닐 멀칭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커다란 비닐 롤을 옆에 두고, 한 손으로 비닐을 잡아당기며 다른 손으로는 흙을 덮어 고정해야 했다.


“랑아. 저기 좀 잡아줄래?”

“응! 맡겨만 줘.”


효재가 비닐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닐이 흔들리며 제멋대로 날아가려 했지만, 효재는 이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흙으로 눌러 고정했다.


중간중간 비닐이 주름지거나 찢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작업을 진행했다.


진주는 트랙터를 몰며 가끔 뒤를 돌아보았다.

효재가 비닐 멀칭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보단 바람에 날아가진 않았는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오빠! 할 수 있겠어? 바람이 많이 부는데, 내일 할까?”

“아니야! 하고 있어! 걱정 마!”

“하··· 하···.”


효재의 우렁찬 목소리에 진주가 떨떠름하게 웃었다.

생긴 건 똘똘해도 막상 일을 시키면 물가에 애를 내놓은 마냥 불안불안했다.


걱정을 한 몸에 받는 박효재는 손발이 무기임을 증명하듯 통째로 날아간 비닐을 뒤집어썼다.


“으악!”

“아하하하!”


만신창이가 된 효재를 보며 랑이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쪽 조금 더 당기고.”

“웅.”


실컷 웃은 랑이의 머리 위에 자그마한 혹이 나 있었다.


‘농사는 씨뿌리고 수확하면 되는 거라 생각했는데 준비 과정부터 만만치 않네.’


아직 바람이 차가운데도 송골송골 맺힌 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장 힘든 건 허리 통증이었다.

안 그래도 장기간 앉아서 공부하느라 약해진 허리가 숙였다 세웠다 반복하니 아주 뻐근했다.


“으하.”

“오빠! 이쪽도 조금 더 당겨야 할 것 같아!”

“응. 갈게!”


효재가 허리를 스트레칭하며 이마를 닦았다.


말을 놓은 지 얼마나 되었더라. 반나절 만에 진주는 벌써 그를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답장··· 안 하셨겠지?’


중간중간 휴대폰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오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이 깊어질수록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헐렁한 비닐을 다시 팽팽하게 당겨 흙으로 고정하고 트랙터 뒤를 따라가며 비닐을 씌우는 작업을 반복했다.


세 사람의 호흡은 점점 맞아갈수록 문자고 행시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흙과 인간. 둘 뿐이었다.


마침내 감자밭 전체가 깔끔하게 비닐로 덮어졌을 때, 효재는 뿌듯한 마음으로 한숨을 돌렸다.


당장 들어가면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맛에 농사하는 걸까-


“수고했어, 오빠. 이제 감자 심는 일만 남았네.”


진주가 트랙터에서 내려와 환하게 웃었다.


“150kg 면 충분하겠어.”

“쿨럭.”


바람 잘 날 없는 박효재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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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농사 아르바이트 (5) 24.08.08 26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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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농사 아르바이트 (3) 24.08.06 32 3 12쪽
» 농사 아르바이트 (2) 24.08.05 38 3 12쪽
5 농사 아르바이트 (1) 24.08.02 42 4 9쪽
4 우당탕탕 이사 (2) 24.08.01 56 4 11쪽
3 우당탕탕 이사 (1) 24.07.31 84 5 9쪽
2 집에 막 들어오는 호랑이 24.07.30 126 8 12쪽
1 실패한 고시생의 귀촌길 24.07.29 139 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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