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 호랑이가 농장에 막 들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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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티헹
작품등록일 :
2024.07.29 17:23
최근연재일 :
2024.08.09 23:34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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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글자수 :
48,471

작성
24.08.0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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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제비와 씨앗 (1)

DUMMY

할아버지가 허리를 살짝 굽힌 채 경사를 올라왔다.


“다녀왔습니다.”


감자밭 옆 트레일러에서 일하던 진주는 목소리를 듣고, 서둘러 신발을 구겨 신고 나왔다.


“할아버지, 오셨어요? 좀 어떠세요?”

“괜찮아, 괜찮아. 이제 많이 좋아졌다.”


할아버지가 의자에 천천히 몸을 낮추며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허리는 금방 나았는데, 고혈압 때문에 치료가 조금 더 걸렸지. 자, 선물.”


안에는 곶감이 잔뜩 들어있었다.


“우와. 맛있겠다! 얼른 내려가서 먹어요.”

“다 같이 먹어야지. 총각은?”


진주가 감자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는 효재를 가리켰다.


어느새 밭일에 제법 능숙해진 그가 힘겹게 포대를 들어 올려 어깨에 메고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일하나 보네.”


***


“짠짠짜라란 나비 같은 그대여~.”


모두가 오랜만에 모여 거실에 둘러앉아 TV를 보았다. 각자 손에 곶감을 하나씩 들고 씹으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아쉽지만, 6번 참가자는 탈락입니다.”


랑이가 입에 곶감을 물고 TV를 가리켰다.


“에엥! 완전 잘 불렀는데!”

“그러게 말이다.”


할아버지가 병실에서 내내 응원하던 가수였다. 부엌에서 마실 것을 들고나오던 진주도 결과 화면을 확인하고 아쉬워했다.


“70점 대 72점? 아깝다.”


재능있는 이가 많을수록 점수 차가 진짜 살얼음판이었다.


“그러고 보니 태수 오빠가 1차에 붙었으면 지금쯤 우리가 저런 관중석에 있을지도 몰랐겠다.”

“다음 경연은 언제여? 태수가 나갈 수 있나?”


효재가 곶감을 한 입 베어 물고 랑이에게 슬쩍 하나를 더 건넸다.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열심히 연습하고 있으니까 되지 않을까요? 뭐, 농사일도 하면서 준비하긴 어려워도···.”


곶감을 넙죽넙죽 받아먹은 랑이가 입에 감 씨앗을 물고 집중하더니, 갑자기 무엇인가에 자부심을 느낀 듯 입꼬리를 올렸다.


깔끔하게 바른 씨앗을 입에서 꺼내며 번쩍이는 눈빛으로 효재에게 내보였다.


“선생님! 봐라! 랑이가 잘하는 거!”

“설마 나 주는 거야?”

“아니. 이건 산새들 먹이야.”


랑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통에 감 씨앗을 담았다. 물기가 없는 깡통 안에는 그간 모은 다양한 씨앗들이 모아져 있었다.


“새들이 배고파하거든. 랑이라도 쉴 때 챙겨주려구.”


산에 자주 다니더니 그런 것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쉰다니까 생각났다.”


소파에 누워있던 할아버지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효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농사 일 하느라 고생했지? 한숨 돌릴 겸 어디 놀러 갔다 와라.”

“아직 할 일이 남았는걸요.”

“거의 다 했는데 하루 쉬는 것쯤이야.”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차를 타고 나가지 않는 이상 주변에 놀러 갈 곳이 없었다.


“놀러··· 어디를요?”


똑똑-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동시에 이장님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도어락을 잠가두지 않으니 초인종은 장식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효재를 제외하고는 그런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어이쿠. 우리 마을의 이장님이 오셨네.”

“욕보셨습니다. 이제 좀 괜찮으세요?”


할아버지는 몇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대체 어떻게 안 것인지. 효재는 이 마을의 정보망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는 중이었어!”

“저는 향교 가는 길이었어요. 애들 개학 시즌에 맞춰서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

“오, 마침 잘됐네.”


할아버지가 내심 기대하는 눈빛으로 효재를 바라보았다. 신호를 알아들은 이장의 흔쾌한 제안이 이어졌다.


“효재씨 산책도 할 겸, 같이 안 가실래요?”

“향교요?”

“어차피 랑이도 이따가 가야 하니까요. 랑아, 까먹진 않았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랑이가 감 씨앗이 담긴 통을 주섬주섬 어깨에 메고서 일어났다.


“난 이제 7살이니까!”


손이나 닦고 말하라고 꿀밤을 박아주고 싶어질 지경이었지만. 


뭐, 따라가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


“항교라면 학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하.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교습소라 생각하시면 돼요.”


랑이는 팔과 다리를 신나게 흔들며 두 사람을 앞질러 행진하는 중이었다.


통에서 씨앗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옛날에 향교로 사용되던 곳을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어요. 이 근방 아이들은 학원에 다니기 어려워서 초등학교 입학 전에 글자도 못 떼는 경우가 많거든요.”


효재는 이장의 설명을 들으며 저 멀리 보이는 항교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오래된 전통의 흔적을 간직한 향교는 멋들어진 기와지붕이 낮게 기울어져 있었다. 목재로 된 기둥과 문틀은 자연스러운 갈색이지만 사각형 창문이 알록달록한 전통 색상으로 장식되어 있어 확 튀었다.


작은 서당 같은 느낌이었다.


“작네요.”

“학생은 전부 합쳐서 다섯 명밖에 안 되니까요.”


이장이 하하하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섯 명이요?!”

“7살이 3명, 6살이 2명이에요. 그것도 옆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아이들도 있어요. 이 동네 아이들은 재혁이랑 랑이 뿐이거든요.”


아이들은 이미 삼삼오오 모여서 즐겁게 뛰어놓고 있었다. 재잘거림과 발랄한 웃음소리가 향교의 고요한 경치를 밝혔다.


“얘들아! 내가 선생님 데려왔어!”


랑이가 활짝 웃으며 뛰어갔다.

그러자 아이들이 와아아-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며 효재에게 달려들었다.


“공부 잘하는 선생님이다!!”

“포위해라!”


아이들이 효재를 둘러싸고 맥락 없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효재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간신히 이장님이 아이들을 저지했다.


“어허! 효재 선생님이 곤란해하시잖아.”


그러면서도 흐뭇하게 웃는다.


“인기인이시네요. 저와 달리.”

“이장님이 여기 담당자셨어요?!”


대체 이 분은 안 하는 게 뭐람. 역시 직책을 맡는 사람은 하나만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뭐 하러 온 거야? 공부하러 왔어?”

“선생님, 선생님. 나도 김치전 만들어줘!”


끊이지 않는 질문 공격에 효재의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생겨먹은 정보망입니까···.”

“저도 들은 게 많습니다. 혼잣말을 많이 한다는 둥.”

“그런 것까지!”


하긴 할아버지의 퇴원 소식도 몇 시간 만에 이장의 귀에 들어갔는데, 이방인 즈음이야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깃거리일 테다.


‘오지 말 걸 그랬나.’


효재가 은근히 부담을 느끼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랑이가 뒤에서 얼굴을 퍼억 박았다.


“선생님, 놀자!”

“우앗!”


허리 디스크가 분명 찌릿- 한 것도 같았다.


“호랑, 갑자기 달려들지 마!”

“헤헤헤. 이거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지.”


랑이가 발을 높이 들어 제기를 차올렸다.

제기는 공중으로 튕겨 나가며 밝은 색깔의 장식이 달린 면이 반짝였다.


“오오.”

“하나, 둘, 셋, 넷!”


숫자가 늘어나는데도 랑이의 자세는 흔들림이 없었다.


“뭐야, 너희들 제기 찰 줄도 알아?”

“응. 특기야.”


랑이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제기를 계속 차면서 효재의 시선에 즐거워했다.


이장이 랑이가 가는 길에 박힌 돌덩이를 미리 집어 던지며 말했다.


“항교는 인원수가 적으니까 기다려서 할 필요가 없어요. 제기든, 대나무 춤이든 뭐든 금방 배웁니다.”

“그렇군요.”


일종의 태권도장 같은 곳이구나.


“그러면 이장님은 제기차기도 엄청나게 잘하시겠네요.”


당연히 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자 사범님 같은 존재라고 예상하고 물었는데. 왜인지 이장님이 대답이 없었다.


“······.”


끝까지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 이장님?”

“그쵸. 제가 가르쳐 준 셈이 되겠군요. 으음.”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는 이장님.

하지만 궁금해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랑이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와아아아앙.”

“!?”


한 아이가 헐레벌떡 달려와 이장님의 옷자락을 이끌었다.


“선생님~. 랑이랑 재혁이가.”


제기를 차던 아이들은 어느샌가 치고받고 싸우는 랑이와 재혁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효재가 다급하게 달려가 랑이를 떼어냈다.


“랑아! 그만해!”

“으아앙! 재혁이가. 재혁이가!”


랑이가 이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닭똥만 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재혁이가 제비를 죽였어. 싸울 거야! 랑이 싸울 거라구!”


재혁은 주먹을 내리지 않았지만, 막상 랑이가 펑펑 우니 당황한 듯싶었다.


“그럼 좀 어때서! 쟤넨 새똥이나 싸잖아!”

“나빠! 나빠!”


나무 아래에는 돌에 맞은 제비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피를 흘려 생을 돌이키긴 어려울 것 같았다.


‘어린애들이 더 잔인하다니까···.’


효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제비가 너 제기를 물고가서 떨어뜨려 준 건데.”

“부탁한 적 없어! 랑이는 그딴 부탁 하지 않아!”


어수선한 소란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곰곰이 고민하던 이장님이 효재의 곁으로 다가와 먼저 중재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전 교사도 아닙니다만.”

“어쨌거나 이 동네의 선생님이시니까요.”


이걸 거절하기도 애매하고.

효재가 끄응- 머리를 굴렸다.


애들 싸움은 떼어내면 그만이지 않나, 싶지만 막상 고민해 봐도 참고할만한 교육자의 자질이 떠오르지 않았다.


학창 시절 때 선생님들이 어떻게 했더라?


서로 마주 보고 손잡고 억지로 미안해- 사과하게 한 후 포옹으로 마무리? 하나도 소용없었는데···.


그렇다고 새를 죽인 걸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경험상 아이들에게는 은근한 협박(?) 이 더 잘 통하는 법이었다.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른 효재가 흙바닥을 뒹구는 랑이와 재혁에게 다가갔다.


호주머니에 손을 꽂고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박재혁. 너, 벌 받을 거야.”


깜짝 놀란 재혁이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벌인데? 청소시키는 거면 나는 안 해.”

“아니. 그런 벌 말고.”


효재가 귀신의 집 알바가 할 법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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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와 씨앗 (1) 24.08.09 15 2 10쪽
9 농사 아르바이트 (5) 24.08.08 26 2 10쪽
8 농사 아르바이트 (4) 24.08.07 24 2 10쪽
7 농사 아르바이트 (3) 24.08.06 32 3 12쪽
6 농사 아르바이트 (2) 24.08.05 37 3 12쪽
5 농사 아르바이트 (1) 24.08.02 42 4 9쪽
4 우당탕탕 이사 (2) 24.08.01 56 4 11쪽
3 우당탕탕 이사 (1) 24.07.31 84 5 9쪽
2 집에 막 들어오는 호랑이 24.07.30 126 8 12쪽
1 실패한 고시생의 귀촌길 24.07.29 139 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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