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 호랑이가 농장에 막 들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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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티헹
작품등록일 :
2024.07.29 17:23
최근연재일 :
2024.08.0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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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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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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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우당탕탕 이사 (2)

DUMMY

효재는 잠시 얼어붙은 표정으로 랑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랑이의 작고 둥근 어깨가 조용히 떨렸다.


“랑아.”


책의 가장자리는 닳고 헤져 있었다.

테이프를 붙이려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흔적이 역력했다.


효재가 그곳을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만졌다.

더 이상 붙지 않아 떨어지기 직전인 테이프에서 랑이의 애정과 노력이 느껴졌다.


저 작은 손이 얼마나 열심히 움직였을지, 그 모습을 상상하자 효재는 가슴이 먹먹했다.


“너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랑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꼭 쥔 주먹 속에 아이의 간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용서해줄 거야?”

“······ 응.”


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과할 필요도 없어. 내가 잘못한 건데.”


그 순간, 랑이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다리를 끌어모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다행이다아아아.”

“야. 갑자기 왜 그래? 울어?”


랑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배시시 웃었다.


“화해해서 다행이야.”


진심 어린 목소리가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사과하는 거, 되게 두근거리는구나. 그래도 화해하길 잘했어. 선생님하고 어색해지기 싫었거든.”


효재는 랑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 맑은 눈은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도 않았고 매사에 당당한 용기가 막처럼 덮여 있었다.


“나도 소리 질러서 미안해. 그리고···.”

“응?”

“··· 아무것도 아냐.”


차마 고맙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효재는 더 추해지지 않기 위해서 턱 끝까지 차오른 부끄러움을 속으로 숨겨야 했다.

그나마 어른답게.


“화해할래?”


효재가 랑이에게 손을 뻗었다.

큰 손에 담긴 작은 손이 위아래로 힘차게 움직였다.


“좋아!”


***


“으으음. 맛있당!”


책상과 옷가지, 그리고 잡동사니가 마구 엉켜 있는 가운데. 그들은 앉아서 과자를 먹고 있었다.


화해하면 무조건 ‘잔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랑이에게 꿀밤을 놓고 과자를 꺼냈지만, 계획에 걸려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어쨌든 화해는 했으니까 된 건가?

의문을 품으며 효재가 응급 처치된 책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까 페이지 순서대로 붙였네? 너 큰 숫자 셀 줄도 알아?”

“아니! 다른 책보고 따라 했어.”


랑이도 과자 손톱을 늘리는 데 열심이었다.


“선생님은 숫자 셀 줄 알아?”

“당연. 세는 거야 어렵지 않지.”

“오오. 역시 똑똑해.”


퍼억, 효재가 무심코 꼬깔콘 탑을 무너뜨렸다.


“무슨 짓이야?!”

“아, 미안. 자동으로 손이 나가버렸어. 앞으로 그 단어 금지야.”


책에 적힌 필기를 다시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쓸모없는 것까지 열심히도 적어놨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후두둑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가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과자가 한 움큼 집혔다.


“하하하. 선생님이 먼저 시작한 거다!”

“내가 내 무덤을 팠군.”

“다시는 마녀를 무시하지 말라구.”


랑이가 30cm는 되어 보이는 꼬깔콘 손톱을 들이밀며 웃었다.


“이 세상에 마법은 없어.”

“있어! 빗자루랑 검은 고양이가 있잖아.”

“흐으음.”


효재가 장난을 칠 요량으로 말끝을 길게 늘였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성공의 연금술]. 아까 랑이가 분명 꽂아놨지만, 언제부턴가 바닥에 다시 놓여 있었다.


“그럼 저건 뭔데?”

“헉.”


랑이가 무지개색 책을 재빨리 감쌌다. 


“이거 마법 책이야.”

“거짓말.”

“하지만, 하지만 랑이가 들었단 말이야. 얘가 선생님한테 사과하라고 했어.”

“거짓말 마. 그건 자기 계발서야.”


랑이가 강하게 항변했다.


“거짓말 아니야!”

“마법이라··· 주문이라도 걸어보든가?”


효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얄밉게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크게 떴다.


랑이는 그 표정을 보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책을 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가며 진지해졌다.


“함부로 하면 안돼. 마법부에서 잡아가.”


효재의 장난에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그럼 그건 자기 계발서야.”

“아니라니까!”


처음으로 랑이를 골리는 데 성공하고 속으로 쌍 따봉을 날리는 박효재.

나이를 허투루 먹은 인간이 좋다고 흥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랑이는 전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책 앞에 무릎을 꿇고 속삭였다.


“진짜야.”


랑이가 조심스럽게 두꺼운 표지를 잡았다.


“진짜로 마법 책이야.”


펄럭, 책장이 넘어갔다.

랑이가 놀라움에 가득 찬 눈으로 입을 벌렸다.


한편 바깥에서 쓰레기를 정리하던 효재가 조용해진 안쪽을 바라보았다.


“후후. 이제 깨달았겠지?”


13살이 될 때까지 마법 학교에서 입학 통지서가 날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상처받을 바에는 미리 냉엄한 현실을 깨닫는 편이 나았다.


물론, 박효재가 짓는 음험한 미소는 그 외에도 다른 목적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세상에 마법은 없다니까.”


설마 울고 있지는 않겠지, 아니. 우는 편이 더 귀여울 것 같았다.


놀릴 생각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어라?”

“애옹.”


고양이 한 마리가 책 위에서 배를 까고 누워 있었다.


아무도 없이.

얘 혼자.


[성공의 연금술] 주변에는 보란 듯이 과자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우당탕, 엉덩방아를 찧은 그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하지만 아픈 것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어. 총각! 어딜 그렇게 뛰어가나?”


대문 앞 할아버지를 지나치면서 말이다.


“선생님. 갑자기 가버렸어.”


반짝이는 키보드를 만지작거리던 랑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더냐. 그 쌤이란 게 저 총각이었어?”

“할아버지도 선생님 알고 있었구나?”


도망치는 효재와 랑이를 번갈아보던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랑이 니 쌤 앞에서 변신한 건 아니지?”

“절대 안 그랬어. 약속 지켰어!”


***


“랑아! 호 랑!”


효재가 애타게 소리치며 마을을 뛰어다녔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가 됐어.


아무리 싸구려 책이라지만, 이름이 ‘호 랑’ 인 애를 고양이로 만드는 건 너무하지 않나.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며 ‘진짜’ 랑이를 찾고 있는 와중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쌤, 여기요!”


언덕 밑에서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사 벌써 다 끝내신 건 아니죠. 곧 도와드리러 갑니다.”

“네? 도와주신다고요?”

“할아버지 못 보셨나. 고양이 델꼬 다니는 할아버지.”


그런 거였나···.

효재가 속으로 한탄했다.


“랑이네 할아버지거든요. 그 양반 고양이, 순해 보여도 승질 드러우니까 조심하셔요.”


대체 뭘 생각한 거냐 박효재.

맥이 빠진 채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주변은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붉은 해가 서서히 산 너머로 사라지며 시골 마을의 들판과 논밭도 따뜻한 기운을 내뿜었다.


효재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랑이와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총각! 왔구먼.”

“선생님!”


랑이가 키보드를 들고 폴짝폴짝 뛰었다.

할아버지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서 있었다.


“미안하여요. 얘가 워낙 까칠해서. 다치진 않았나?”

“요거 나 줘.”


요 꼬맹이를 할아버지 앞에서 쥐어박을 수도 없고.


“할아버지 여긴 어떻게···.”


효재가 물어보기도 전에, 옆에서 할머니가 나타나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우리 도와주러 온겨.”

“네?”


그가 놀라서 할머니를 바라보는 사이,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까 마주쳤던 아주머니가 손에 접시를 들고 오며 활짝 웃었고,


“내가 쑥으로 떡 했거든. 맛 좀 봐봐요.”

“어?”


못 보던 사람도 있었다.


“뭐야. 차은우라더니, 잘생겼네.”

“어?”


효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낯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산하던 집 앞이 점점 북적였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정겹게 말을 걸며 웃음꽃을 피웠다. 누군가는 새로 이사 온 효재에게 인사를 건넸고, 누군가는 마을의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제 준 배추 달더라.”

“몇 포기 더 줘?”


노을의 따뜻한 빛이 사람들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추며, 집 앞에 모인 이들의 표정을 더욱 환하게 밝혔다.


“선생님이 알려줘야지. 물건 위치.”

“어? 으···응.”


랑이가 효재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네가 부른 거야?”

“누구를?”

“여기··· 마을 사람들.”


랑이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안 불렀어. 이삿짐 차 보고 도와주러 온 거지. 큰일은 다 같이 하면 금방 끝나잖아.”

“하지만··· 지금 드릴 게 없는데.”


뒤에서 머뭇대는 그를 향해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총각, 안 오면 우리가 다 가져간다.”

“아아! 그건 안 되죠!”

“하하하. 우선 물건은 집에 들여놓으면 되나?”


돈을 받고 일하는 기사님도 아니었고 도와달라 부른 친구도 아니지만. 이사는 보기 드무니까, 흔쾌히 도우러 와준 마을 사람들.


효재는 그들과 함께 집을 정리했다.


떡 내음과 함께 시골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마당에서 효재가 만족스럽게 기지개 켰다.


청소도 끝났고, 짐 정리도 마쳤다.

호들갑스럽게 코를 벌렁거리며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니, 이보다 더 개운할 수 없었다.


“시골로 오길 잘한 것 같네.”


잘못된 길에서 많이 방황했지만, 이번만큼은 좋은 선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도.”


효재가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움직이며, 잠깐 멈춰 섰다가 다시 천천히 글자를 입력했다.


[당분간 시골에 있을게요.]


간단한 한 문장 쓰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한 문장에 담긴 무게감이 시골의 평화로운 아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효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잘 한 거겠지?”

“랑이도 읽을래.”


여느 때처럼 불쑥 튀어나온 랑이가 효재의 다리에 매달렸다.


“안 떨어져?”

“매앰- 매앰-.”

“이 웬수같은 꼬맹이.”


힘껏 털어내는 효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선생님. 할아버지가 못 일어나.”


랑이가 던진 말에 된장국을 먹던 효재가 쿨럭대며 밥알을 뱉어냈다.


“뭐?! 지금?”

“응. 허리 디스크가 터졌대.”

“깜짝이야. 난 다른 거 생각했잖아.”


잠시 안도하던 효재는 숨을 돌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많이 안 좋으셔?”

“응. 수술받는데 한동안 움직이기 힘들 거래. 그래서 농사를 도울 사람이 필요해.”

“어···.”


효재가 두 눈을 끔뻑이며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농사를?”

“할아버지가 알바비도 준대.”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별 볼 일 없는 근육을 끌어모으고 효재가 쿵쿵쿵 랑이네로 향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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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당탕탕 이사 (1) 24.07.31 85 5 9쪽
2 집에 막 들어오는 호랑이 24.07.30 126 8 12쪽
1 실패한 고시생의 귀촌길 24.07.29 140 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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