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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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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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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의 쇼생크 탈출

DUMMY

25화












“비가 많이 오네.”

“날씨가 이 모양인데 오늘 경기를 할까.”


플레이오프 1차전 당일 아침.

커널스의 홈구장 [베테랑 메모리얼 스타디움]에 가을비가 쏟아졌다.


“당연히 하지. 때려죽여도 하지. 여기가 마이너리그라는 걸 잊었냐?”


마이너리그 그것도 싱글A 경기는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속행되었다.

경기에 투입되는 심판, 수행원, 직원 등 인건비가 아까웠고 무엇보다 상위 리그 운영이 번거로워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창으로 변한 그라운드에서 나의 역사적인 첫 포스트시즌 선발 등판이 이루어졌다.


“건우라고 했지? 올 시즌 엄청난 기록을 올렸더구나. 내년에 더블A에서도 잘하도록 해. 이렇게 꾸준히 잘하면 내년 가을쯤에는 메이저에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 하하하.”

“덕담 감사합니다. 미스터 홀츠. 그런데 아직 우리들의 시즌은 끝나지 않았어요. 화이트캡스를 물리치고 리버밴디츠에게 복수하고 반드시 우승할 겁니다.”

“...”


전직 메이저리거 찰리 홀츠가 나를 미친놈 보듯 했다.

‘뭐지 얘 좀 똘아이인가?’

그에게 이런 깡촌에서 벌어지는 싱글A 플레이오프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는 애들 장난이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이 동네에서 받은 진심 어린 응원 때문에라도 나는 반드시 우승하고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오하이오주 시더래피즈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중계해드리는 커널스 대 화이트캡스의 1차전입니다. 비가 엄~ 청 나게 옵니다. 진짜.]

[커널스 구단주는 원통하겠어요. 오늘이야말로 핫도그 매출을 올릴 절호의 기회였는데요. 이렇게 비가 오는데 누가 보러 오겠습니까?]


비 때문에 모든 식전 행사가 취소되었다.

옥수수 경주도 못 보게 되었다.

망할.


“이왕이면 이겨라. 하지만 절대. 절대로 무리하다가 다치지 마라. 너희들은 에인절스 구단의 재산임을 잊지 마.”


애슬리 감독이 우리 클럽하우스에서 마지막 연설을 했다.

마이너리그 싱글A 팀의 운영 철학을 함축했다.


“가자. 에반스.”

“응. 건우.”


나는 시즌 내내 호흡을 맞춘 에반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나의 놀라운 성적에 이 녀석이 20%는 기여했다.

특히 볼넷.

에반스의 교묘한 미트질이 없었다면 시즌 볼넷을 10개는 내줬을 거다.

프로에서 0과 10의 차이는 매우 컸다.


“어라...”


그라운드로 나온 우리는 당황했다.

아까보다 비가 더 내렸다.

과연 이런 빗속에서 야구를 할 수 있나 싶었는데.


“플레이 볼~!”


해야만 했다.

여기는 마이너리그이니까.


[이번 시즌 중반에 투입되어 경이로운 투구로 놀라운 기록을 세운 한국인 언더핸드 백건우가 첫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릅니다. 커널스 팬들이 지어준 그의 별명은 바로 ‘미스터 제로.’ 과연 이런 빗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완벽한 투구를 할 수 있을까요?]


관중석에 아무도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시더래피즈 지역 팬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무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이들과 손을 잡고 입장료 5불을 내고 아빠는 1.5불짜리 핫도그에 2불짜리 맥주를 홀짝이고 아이들은 1불짜리 솜사탕을 핥으며 “고! 고! 커널스!”를 외쳤을 텐데.

오늘은 옥수수 마스코트 인형 4마리(?)만 풀이 죽어 앉아있었다.


“하긴. 이렇게 비가 오는데 처마도 없는 관중석에서 어떻게 야구를 봐.”


나는 마음을 비우고 연습 투구를 시작했다.

벌써 유니폼은 물론이고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


“오히려 좋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언제나처럼 너클볼부터 하나씩 구종을 던져보며 오늘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건 타격이 크군.”


비 때문에 너클볼이 듣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나머지 구종으로 빠르게 타자를 잡아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저기다! 아직 시작 안 했어!”

“아빠! 빨리 와~”

“내가 말했잖아. 백건우가 선발투수라고! 오늘은 우리가 이길 거야!”


도착한 팬들이 우비를 입고 우산을 들고 하나둘 관중석으로 들어왔다.

한 100명쯤 될까 싶었는데 그래도 힘이 났다.


[하하하! 이게 바로 야구죠! 이 빗속을 뚫고 시더래피즈의 용사들이 속속 집결하고 있습니다.]


나는 첫 타자를 상대했다.


따아아악- !

[화이트캡스의 1번 타자 맥킨이 초구를 때립니다! 유격수 앞 땅볼! 인데... 더 구르지 않습니다. 세이프!]


유격수 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야가 이미 진창으로 변해서 공이 평소처럼 구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따아아아악- !

[다음 타자도 초구를 노립니다! 높게 뜬 타구~~~ 좌익수가 침착하게 잡아냅니다. 뜬 공 아웃!]

[역시 백건우에요. 그라운드 상태를 확인하고 바로 볼 배합을 바꿨어요.]


나는 커브와 스크류볼을 가슴 높이로 던져 뜬공을 유도했다.

평소보다 각을 줄이고 속도도 줄였다.

손목 움직임이 정반대라 번갈아 던지면 손목에도 무리가 가지 않고 뜬공을 만들기도 좋았다.

그러나.


따아아아악- !

[화이트캡스의 4번 타자 윌튼 마샬리스가 백건우의 높은 커브를 받아칩니다! 쭉! 쭉! 뻗어가는 타구~~~ 큽니다! 가운데 담장 넘어갔어요! 투런 홈런! 싱글A에서 첫 실점을 기록하는 백건우!]

[화이트캡스 2 대 0 커널스]


빗속을 뚫고 팬들의 탄식이 들렸다.

이 동네 사람들에게 [제로의 투수]가 있다는 건 자랑거리였다.

그런 투수는 어느 리그에 가도 찾기 힘들었으니까.


“오히려 좋아.”

[백건우가 다음 타자를 상대합니다. 이번에도 높은 커브!]

따아아악- !

[쳤습니다! 이번에도 큽니다~~~~~]


중견수가 담장 앞에서 뜬공을 잡아내며 1회가 끝났다.


“미안하다. 건우. 내가 땅볼을 잡았어야 했는데.”

“야. 로스. 왜 그래? 너는 약한 놈이 아니잖아.”

“뭔 소리야?”

“오늘 경기에서 그런 자잘한 실수는 문제가 안 돼. 지금 밖을 봐. 여기는 지옥이야. 지옥에서는 싸움법을 달리해야 해. 우리도 비를 최대한 이용해서 반격하자.”


동료들은 내가 첫 실점에 충격이라도 받을 줄 알았나 보다.

물론 보다시피 타격은 없었다.


1회말.

커널스 타자들이 끈덕지게 버티며 상대 투수를 괴롭혔다.

빠른 공과 준수한 커브를 지닌 투수였는데 불안한 제구력이 빗속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따아아악- !

[5구 쳤습니다! 스탠 로스~~ 우측 담장을 넘기는 역전 스리런 홈런! 다음 시즌에 다른 팀에 가서도 잘해주세요! 당신의 이번 시즌을 영원히 기억할게요~ 로스!]

[화이트캡스 2 대 3 커널스]


볼넷으로 주자 둘을 내보낸 상대 투수가 로스에게 홈런을 맞았다.

다음 회에도 커널스 타자들은 집요하게 버티며 볼넷을 고르거나 상대 투수의 실투를 노렸다.


따아아악- !

[쳤습니다! 3루수 살짝 넘기는 안타! 포수 에반스가 2타점 적시타를 때려냅니다! 점수 차를 늘리는 커널스!]


우리 타자들이 힘내는 동안 나는 상대 타자들을 빠르게 뜬공으로 잡아냈다.

마샬리스의 홈런에 흥분한 화이트캡스 타자들의 스윙이 거칠어졌고 업슛 궤적에 먹잇감이 되었다.


[커널스의 백건우가 6회까지 혼자 마운드를 지키는 동안 화이트캡스는 이제 3번째 투수를 올려보냅니다.]


우리의 공격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상대 공격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화이트캡스 야수들은 빗속에서 장시간 수비를 하며 집중력을 잃었다.


[3루수! 공 놓쳤어요! 서둘러 잡아서 1루로 송구! 아! 벗어납니다! 연속 실책을 저지릅니다! 이제 1사 주자 2, 3루!]


6회말.

‘거만한’ 스탠 로스가 상대 3번째 투수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또 멀리 날아갑니다! 우측 담장~~ 넘어갔어요! 홈런! 오늘 두 번째 홈런을 날리는 스탠 로스~~~ 시더래피즈 커널스의 역사에 이름을 새깁니다!]

[화이트캡스 2 대 7 커널스]


이 한방으로 화이트캡스의 추격 의지가 꺾였다.


“뭐야. 진짜로 하고 있잖아.”

“미쳤군. 선수들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마운드에 백건우가 있어.”


다음 회부터였다.

야구장 주차장으로 차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집에서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오늘 경기가 속행된다는 걸 알게 된 팬들이 차를 몰고 뒤늦게 찾아왔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당연히 경기가 연기될 줄 알았던 거다.

비가 쏟아지는 처마도 없는 관중석에서 어느새 커널스 팬 1천여 명이 우비와 우산을 쓰고 서서 나를 응원했다.


“이제 빗속에서 던지는 감각을 익혔어. 고맙다. 시더래피즈. 끝까지 나에게 경험치를 듬뿍 먹여주는구나.”


나는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가며 빠른 리듬으로 타자를 잡아나갔다.

내 평균자책 따위의 숫자는 상관없었다.

나의 팬들을 이 빗속에 오래 놔두고 싶지 않았다.

주심도 빨리 경기를 끝내고 싶다는 걸 눈치채고 좌우 존을 넓게 쓰며 타자를 괴롭혔다.


9회초.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1회에 홈런을 때린 마셜리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빗속에서 사람들의 응원 소리가 들려오고 나의 등줄기를 타고 빗물이 기분 좋게 흘러내렸다.

여기서 내가 던질 공은 하나뿐.


[백건우! 초구를 던집니다! 아! 너클볼이에요! 오늘 처음 던지는 너클볼! 마셜리스가 쳤습니다!]

따아아아악- !


“마이 볼~!”


나는 마운드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야구공이 9월의 비와 함께 내렸다.


[투수 잡았습니다! 아웃! 백건우가 9이닝 2실점으로 완투하며 시더래피즈 커널스에게 플레이오프 1차전 승리를 선사합니다.]


나는 빗속에서 하늘을 보며 두 팔을 펼쳤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나는 내가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작가의말

구독, 좋아요, 재밌어요! 선호작 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백건우의 분투는 주말에도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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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남부의 환대 +11 24.09.17 6,149 218 12쪽
48 타격이 +10 상승했습니다 +11 24.09.16 6,844 243 12쪽
47 좋은 리듬이야 +7 24.09.15 7,728 250 12쪽
46 여기는 너의 놀이터가 아니야 +18 24.09.14 8,136 241 11쪽
45 로켓맨이 로켓 쏘는 소리 +9 24.09.13 8,696 24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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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메이저리그 최악의 남자 +7 24.09.04 10,902 289 12쪽
35 마이너리그의 법칙 #3 +6 24.09.03 10,864 29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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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기다려라. 내가 간다. 투수 왕국. +7 24.08.29 11,618 281 12쪽
29 이것이 대약물 시대 +9 24.08.28 11,571 282 12쪽
28 소금은 어디 있지? +14 24.08.27 11,409 304 11쪽
27 술탄 오브 스윙 +12 24.08.26 11,549 290 12쪽
26 불맛 콘치즈 +6 24.08.25 11,593 288 12쪽
» 빗속의 쇼생크 탈출 +7 24.08.24 11,678 30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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