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메이저리그 생활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스포츠, 현대판타지

새글

전성기
작품등록일 :
2024.08.01 13:24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연재수 :
50 회
조회수 :
572,047
추천수 :
14,055
글자수 :
239,400

작성
24.08.23 09:13
조회
11,681
추천
294
글자
10쪽

마이너리그의 법칙 #1

DUMMY

24화












“아무리 싱글A라도 이건 미친 기록이야.”


보라스는 여러 마이너리그 구단의 매니저들을 포섭해서 내부 정보를 빼내고 있었다.

마이너리그 구단 중에서도 싱글A 팀은 정말 열악했고 직원들의 급여도 형편없어서 내부 스파이를 포섭하기가 수월했다.

매니저들도 어차피 선수들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보라스의 주장에 현혹되어 죄책감 없이 정보를 빼돌렸다.

보라스가 주로 수집하는 정보는 유망주의 내부 평가와 경기 기록이다.

구단에서 공식 발표하는 선수의 스카우팅 리포트와 내부에서 공유하는 선수 평가자료는 달랐다.

스카우팅 리포트는 선수 판매를 위해 단점은 숨기고 장점을 과장하는 경향이 강했다.

보라스는 더 객관적인 내부 평가자료로 선수를 파악했고 코치, 감독, 동료, 직원들의 평가와 경기 기록을 종합 분석해서 돈이 될 유망주를 골라냈다.

보라스가 항상 다른 스카우트와 에이전트보다 한발 빨리 움직이는 비결이었다.


“12경기를 뛰며 볼넷이 0개라니...”


보라스가 싱글A 투수의 기록을 볼 때 가장 주목하는 것이 이닝당 볼넷이다.

다들 최고구속과 평균자책에 집착할 때 그는 볼넷에 집중했다.

볼넷은 투수의 제구력과 승부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다.

보라스의 경험에 의하면 하위 리그에서 구속이 아무리 빠르고 평균자책이 낮은 투수도 상위 리그로 올라가면 털리는 경우가 많았다.

리그 레벨이 올라가고 타자들 수준이 올라가면 대부분의 투수는 겁을 먹고 도망가는 투구를 했다.

그러다 망가졌다.

아주 소수의 투수만이 강해진 타자들에 맞춰 본인의 투구를 레벨업 하는데 이 기질을 [이닝당 볼넷]을 통해 알 수 있다고 믿었다.

타자를 피하며 무실점을 하는 것과 타자와 승부하며 얻어낸 무실점은 질적으로 달랐다.


[투수는 타자를 공격하는 사람이다. 어떤 위기에도 타자를 잡아내려고 하는 강인한 기질의 투수만이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는다. 최고구속보다 중요한 건 승부 능력이다.]


이것이 스캇 보라스만의 투수 평가법이었다.


“다른 멍청이들은 무실점에 감탄하겠지만 싱글A에서 그런 투수들은 가끔 있어. 이닝당 볼넷 제로야말로 정말 미친 기록이지. 백건우...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어.”


***


백건우는 보라스가 그 정도까지 자신을 연구하고 집착하고 있는 줄 몰랐다.

전생에서부터 구속이 빠르지 않은 언더핸드 투수로 완투를 하기 위해 타자를 상대하는 요령을 연구했던 노력이 지금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선발투수로 9회까지 완투를 하려면 같은 타자를 3~4번 상대하기 때문에 타순이 돌 때마다 투구 패턴을 바꾸어야 했다.

완투를 노리는 투수는 경기 전에 1회부터 9회까지 완성된 시나리오를 가지고 마운드에 올라가야 했다.

동시에 경기 중에 발생하는 돌발상황에 맞춰 그 시나리오를 수정하며 경기를 끝내야 했다.

백건우는 그 과정을 너무나 즐겼고 이 정점이 황룡기 결승전에서 달성한 노히트노런이었다.


전생에서 백건우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 취직에 성공했지만 결국 몇 년 버티지 못하고 퇴직했다.

1회부터 9회까지 모든 걸 책임져야 직성이 풀리는 완투형 투수인 그에게 대기업의 촘촘한 분업시스템은 맞지 않았다.

결국 경험도 없이 무작정 12평짜리 치킨집을 차려 혼자 청소부터 요리, 메뉴개발, 서빙, 접객, 계산까지 도맡아서 하자 그동안 답답했던 응어리가 풀렸었다.

백건우는 저녁 5시에 오픈해서 새벽 3시에 문을 닫는 치킨집을 홀로 운영하며 매일 1회부터 9회까지 완투한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가끔 연장전까지 가게 만드는 진상 손님들도 있었지만...


“맨날 애들과 부대끼다가 보라스와 사업 이야기를 하니까 어쩐지 기분이 들뜨네.”


이미 50년의 인생을 살아온 백건우가 클럽하우스에서 10대~20대 초반 애들과 어울리는 건 쉽지 않았다.

온갖 유치한 장난질과 시시껄렁한 농담이 지겨웠다.

그런 짓은 인생에서 딱 1번으로 족했다.


“투자할 테니까 회사 지분을 달라고 해볼까.”


간만에 보라스 같은 거물과 비즈니스 논의를 하고 났더니 사업가의 피가 끓어올랐다.

[보라스 코퍼레이션]이 앞으로 20년 동안 엄청난 성장을 하며 세계 최고의 스포츠 에이전시가 될 거라는 걸 알기에 지금 지분투자를 하기에 적기였다.


“일단은 메이저리그에 올라가고 생각하자.”


백건우는 불끈 솟아오른 사업 욕망을 애써 누르고 다시 20살 야구 청년으로 돌아왔다.


***


미드웨스트 리그 시즌이 단 3경기 남았을 무렵.

커널스 훈련장에 출근했더니 처음 보는 남자가 불펜에서 투구하고 있었다.


“찰리가 돌아왔어!”

“저 독한 녀석. 결국은 재활에서 돌아왔구나.”


코치들과 직원들이 그를 반겼고 훈련장 밖에는 그를 응원하러 온 팬들이 10여 명 있었다.

지역 신문 기자까지 옆에서 투구를 지켜보며 질문을 했다.


“저 사람이 누군데?”

“찰리 홀츠 몰라? 한때 날렸던 에인절스의 투수야. 어깨 부상을 당해 2년 6개월을 재활해서 이번에 돌아왔어. 30대 중반의 나이에 다들 은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단하지?”


나는 찰리가 던지는 걸 지켜보았다.

메이저리거의 투구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뻐어어어어엉- !

“나이스! 볼 좋고~”


공을 받아주는 포수는 에반스였다.

녀석도 메이저리거의 공을 처음 받아봐서 잔뜩 흥분했다.

가까이서 지켜보니까 확실히 좀 달랐다.

전성기가 지났을 텐데도 공이 묵직하고 살아서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구속은 대략 140Km 후반으로 보였는데 비슷한 구속을 던지는 싱글A 투수들과는 구위가 달랐다.


“싱글A에서 실전 몇 경기 뛰어보고 다음 시즌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합류한다나 봐. 공백이 길었지만 그래도 에인절스의 찰리 홀츠니까~”


투수 동료들이 모여 다들 떠드는 와중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흠칫 놀랐다.


“껀우! 어디가?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놔두고?”


나는 훈련장을 나와서 클럽하우스로 들어갔다.

서둘러 칼 앤더슨의 자리를 찾았다.


[마이너리그의 법칙 #1]

[1명이 들어오면 반드시 1명은 나가야 한다.]


앤더슨의 라커가 텅 비어있었다.


“아...”


키 2미터에 꾸부정한 자세, 비쩍 마른 녀석의 꺼벙한 얼굴이 떠올랐다.

없는 돈에 밀러 맥주를 사 와서 마실 줄도 모르면서 홀짝이며 나에게 도움을 청하던 녀석.

내가 알려준 횡 슬라이더를 장착하고 최근 나름대로 호투하고 있었는데.


“칼 앤더슨은 오늘 아침에 떠났어. 너희들 오기 전에 조용히 떠나고 싶다더라.”


돌아보니 매니저 스티브가 있었다.


“시즌도 다 끝나가고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한 시즌 내내 같이 고생했는데 선수가 마무리할 기회는 주어야죠.”

“마음에 두지 마. 건우. 여긴 마이너리그잖아.”

“앤더슨은 요즘 상승세였어요. 그런 투수를 왜...”

“요즘 상승세라서 방출하지 않고 겨우 팔 수 있었어. 찰리가 들어올 자리를 급하게 만들어야 했거든.”

“방출이 아니라 트레이드에요?”

“그래. 이건 앤더슨이 전해주라고 한 쪽지야.”

나는 쪽지를 건네받아 땀 냄새가 진동하는 의자에서 읽었다.


[나의 친구 GUN-WOO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서 미안해. 나는 커널스가 6번째 팀이라 어떻게 떠나는 게 서로에게 좋은지 알아. 서운했다면 미안해. 나는 이제 남부로 떠나. 더럽게 습하고 먼지가 많은 동네지.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아. 반드시 메이저리그로 올라갈 거야. 네가 알려준 슬라이더와 함께. 나중에 꼭 그곳에서 만나자. 고마웠어. 칼 앤더슨.]


나는 쪽지를 접어서 내 가방에 넣었다.

좀 놀랐다.

내가 인종도 언어도 다른 ‘외국’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전생에서 칼 앤더슨이 어떤 선수 생활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알려준 횡 슬라이더가 그의 이번 인생을 어떻게 바꿀지도 몰랐다.

오히려 야구를 그만두는 시기를 늦춰 앤더슨의 인생을 더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좋아. 앤더슨. 메이저리그에서 꼭 만나자.”


그가 나를 원망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우리는 빌어먹을 행복한 야구 중독자들이니까.


***


미드웨스트 리그 정규 시즌이 끝났다.

나는 시즌 중에 팀에 합류해서 총 25경기에 출장했고 86이닝에서 무실점을 기록했다.

평균자책 0.00 볼넷 0개.

평균자책 0.00은 싱글A에서는 가끔 있던 투수 기록이라고 했는데 볼넷 0개는 처음이라고 했다.

이에 관해서 지역 신문과 간단한 인터뷰도 했다.


커널스는 78승 62패로 웨스트 디비전 2위를 기록했다.

1위 리버밴디츠(79승)와는 단 1경기 차였다.


우리는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해서 이스트 디비전 1위 팀이자 리그 최다승(84승)팀 화이트캡스와 3전 2선승제로 경기를 하게 되었다.


“1차전 선발은 백건우다. 홈 팬들 앞에서 잘 던져라.”


애슬리 감독이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투수진을 불러놓고 발표했다.

시즌 내내 구원만 시키다가 플레이오프 1차전 첫 선발로 내보내다니.

게다가 상대는 리그 최강팀이다.


“오히려 좋아.”


나는 첫 선발 출전에 오랜만에 불타올랐다.


작가의말

구독, 추천, 좋아요, 재밌어요! 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슬기로운 메이저리그 생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제목을 변경했습니다] 49세에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 슬기로운 메이저리그 생활 24.09.09 277 0 -
공지 [연재시간 안내] 오늘부터 당분간 매일 18시에 연재됩니다. 24.08.30 462 0 -
공지 [또 업데이트] 후원 감사드립니다. 24.08.06 13,216 0 -
50 땅콩 더 줘 NEW +8 15시간 전 3,270 159 11쪽
49 남부의 환대 +11 24.09.17 5,402 195 12쪽
48 타격이 +10 상승했습니다 +11 24.09.16 6,321 225 12쪽
47 좋은 리듬이야 +7 24.09.15 7,295 232 12쪽
46 여기는 너의 놀이터가 아니야 +18 24.09.14 7,772 226 11쪽
45 로켓맨이 로켓 쏘는 소리 +9 24.09.13 8,347 231 12쪽
44 정말 끝내주는 너클볼 +16 24.09.12 8,928 298 12쪽
43 로페즈만 아니면 돼 +23 24.09.11 9,058 320 11쪽
42 이것이 강철 멘탈의 비결 +9 24.09.10 9,551 279 12쪽
41 배트보이까지 그를 따르더군요 +9 24.09.09 9,923 304 12쪽
40 왜 이름이 낯익지? +12 24.09.08 10,263 277 11쪽
39 건방진 뉴요커 녀석 +9 24.09.07 10,297 275 11쪽
38 매덕스와 하이킥을 +15 24.09.06 10,428 289 11쪽
37 로커와 세탁소 +10 24.09.05 10,412 295 12쪽
36 메이저리그 최악의 남자 +7 24.09.04 10,670 278 12쪽
35 마이너리그의 법칙 #3 +6 24.09.03 10,631 281 12쪽
34 종이 한 장의 공포 +9 24.09.02 10,815 275 12쪽
33 플로리다의 3월 하늘 +9 24.09.01 11,060 279 12쪽
32 언더핸드 투수의 평범한 패스트볼 +12 24.08.31 11,242 288 12쪽
31 마이너리그의 법칙 #2 +5 24.08.30 11,080 280 12쪽
30 기다려라. 내가 간다. 투수 왕국. +7 24.08.29 11,384 272 12쪽
29 이것이 대약물 시대 +9 24.08.28 11,338 273 12쪽
28 소금은 어디 있지? +14 24.08.27 11,179 294 11쪽
27 술탄 오브 스윙 +12 24.08.26 11,314 283 12쪽
26 불맛 콘치즈 +6 24.08.25 11,366 279 12쪽
25 빗속의 쇼생크 탈출 +7 24.08.24 11,446 302 10쪽
» 마이너리그의 법칙 #1 +5 24.08.23 11,682 294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