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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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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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

DUMMY

카자크 놈들은 겨울임에도 땀을 한바가지씩 흘리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어릴 적 악연을 맺은 상대가 상관이 되어 돌아왔으니 야코가 팍 죽어버린 것이다.


“킴 소위······ 님께서 소대장으로 오셨을줄은 몰랐습니다.”


“제1생도군단에 진학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 이야기 밖에 못 들었나?”


하바롭스크 생도군단에서 온 자원병들.


내가 제1생도군단에 진학할 때만 해도 시베리아 생도군단의 하바롭스크 예비학교에 불과했지만, 몇 년 전 승격되어 사관생도를 키워내게 된 곳이다.


극동에 존재하는 유일한 생도군단이다보니, 우리 고향의 카자크들은 자연히 그리로 진학하기 마련.


비류코프 인맥을 타고 이 시대 가장 위대한 학교 제1생도군단까지 간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


- 애교심은 알겠는데 너무 과한거 아니냐.


“중국 원정 때도 활약하셨다는 이야기나 비행기 개발로 귀족이 되셨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이었습니까?”


이고르 스미르노프라는 이 녀석은 쭈뼛쭈뼛 내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풀네임은 까먹었지만, 뭐 상관 없겠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나?”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이참에 옛날의 원한이라도 풀어줄까 싶었지만.


- 딱히 당한거 없지 않냐?


맞아.


내가 시비거는 녀석들을 짱돌로 찍어버린 적은 있어도, 딱히 맞고 자라진 않았다.


정 따지자면 군부대 앞에서 괜히 시비털고 영업방해한 정도가 소소한 원한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걸 무슨 부모의 원수라고 이날 이때까지 품고 있겠나.


나에게 가장 중요한건 부대 장악이지 그런 옛날 일이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를 대하는 것치고는 태도들이 섭섭한데. 긴장 풀고 편하게 대하라고.”


“······진심이십니까?”


“그럼, 그럼.”


물론 진짜 편하게 대하란 소리가 아니다. 그런 놈이 사회생활 하겠냐?


옛날 일 때문에 경계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얘기나 나눠보자는 소리다.


주로 이 우수리 카자크 부대원들이 품고 있는 불만 같은 것 말이다.


아까 안내해준 부사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문제가 있어보이는데 말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문제를 파악하려면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갓 들어온 신병에 불과한 이 햇병아리들을 구워 삶는 수밖에 없다.


고참들이 뭘 믿고 새파란 소대장에게 다짜고짜 그런 얘기를 털어놓겠나.


“너희들은 다른 병사들과 달리 훗날 장교가 될 제국의 동량들이니까. 분명 부대의 실정을 잘 알고 있겠지?”


녀석들은 눈알을 굴리더니 ‘그런가?’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에게 그런 소리까지 들은 마당에 쉽사리 모르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리고,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리라.


- 아무래도 카자크 출신들이니까 말이야.


최소한 아버지나 형한테 들은 이야기라도 있을 것 아닌가.


“카자크인들에게 불만이 많다고 들었는데.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선처하도록 하겠네.”


역시나 쭈뼛거리던 녀석들 중에서 이고르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 * *



19세기, 극동으로 몰려와 정착하기 시작한 카자크들의 삶은 빈말로라도 딱히 좋은 팔자라고 할 수 없었다.


강제 정착, 과중한 세금, 홍수, 저염병, 흉작, 부족한 보조금 등등 온갖 재난들이 정착민들을 덮쳤고, 카자크들의 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수십 년에 걸친 현지 정착과 적응, 농장 개척을 통해서야 경제적 상황이 차차 나아지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다른 정규 부대들은 필요한 군복과 장비들을 국가에서 지급받지만, 저희 카자크들은 제복부터 무기까지 직접 챙겨야 합니다.”


그리고 군 복무를 위한 카자크의 장비는 매우 비쌌다.


“얼마인데 그래?”


“말값까지 포함하면 330루블 쯤 합니다.”


“······.”


나한테야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들어보니 카자크 성인 남자가 1년에 버는 돈이 보통 33루블 수준이라니 꼭 열 배.


즉 군 복무를 하려면 자기가 10년 벌 돈을 털어넣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정도면 장비를 구해서 나온게 신기한데.”


“그러게.”


베틀리츠의 말에 나는 격하게 동의했다.


“보통은 다른 사람이 쓰던 장비를 사든지 집안에서 물려받습니다.”


“말은?”


“원래 카자크들은 필수적으로 전마를 구비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따로 농사용 말을 살 형편이 안되니 평시에는 농사 지을 때 쓰고 전시에는······ 보시다시피 전투에 끌고 나오지요.”


“거기다가 지금은 겨울이라 망정이지, 시간이 더 끌리면 농사까지 공쳐버릴 상황입니다.”


“나라에서 지급되는 보조금도 없고?”


“전쟁이 시작될 때 선심 쓰듯이 100루블 정도 뿌리긴 했는데, 그걸 누구 코에 붙인단 말입니까?”


한번 말문이 트이자 녀석들은 끊임없이 흥분한 목소리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국가를 위해서 전쟁에 앞장서라면 서겠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저희도 애국심에 자원했지만, 솔직히 이런 대접까지 받아야하나 싶습니다!”


“잠깐, 소대장님 앞에서 뭐하는 짓들이야?”


“아니 됐어. 내가 먼저 허심탄회하게 털어놔보라고 했으니.”


들으면 들을수록······ 카자크 얘네, 전투민족이라기보다는 그냥 더럽게 불쌍한 놈들인데?


‘전쟁 싫어 평화 좋아’를 외치는 카자크들을 보고 있자니 내 상식이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들어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긴 했다.


- 장비도 지원 안해줘, 전쟁에 끌려나간 놈들 생계도 책임 안져줘, 싸우러 나갔다가 남자고 말이고 죽어버리면 집안이 도산할 판. 이거 러일전쟁 때 잘 싸운게 신기할 정도인데.


의화단 전쟁으로 돈 만들고 빽 만든 나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였지만, 그럴 기회조차 없던 카자크들에게 전쟁은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의화단의 난 때 소집되어 피해가 막심했던 극동 카자크들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의화단 전쟁과도 스케일이 달랐다.


극동 카자크들이 처음 겪는 대규모 전면전.


러일전쟁은 수십년간 쌓아올린 이들의 성과를 완전히 무효화시키고 파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직 가계 사정이 와닿지는 않을 코흘리개들이 이정도라면, 실제로 복무 중인 병사들의 불만은 팽배할 것이 눈에 선했다.


“루슬란, 너 이거 알고 있었냐?”


“아니. 그럴 리가.”


전방으로 보내달라고 하긴 했지만, 굳이 우수리 카자크 부대를 콕 집어서 거론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쿠로파트킨 장군이 일부러 우리를 이런데 던져넣은거 같은데.”


“설마?”


베틀리츠가 경악했지만 나는 찜찜하기 짝이 없었다.


쿠로파트킨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진 확실하지 않지만, 전쟁장관까지 한 양반이 정말 모르고 있을까- 하는 심증.


‘나한테 엿 먹어보라는 뜻인가.’


망하면 마음에 안드는 나를 쳐낼 수 있고, 잘되어도 나를 이곳에 보낸 자기 덕이니까.


설마 대장까지 단 양반이 소위 하나한테 그렇게 쪼잔하게 굴까 싶지만.


- 이봐, 장군한테 너무 환상을 갖지 말라고. 별들도 똑같은 사람이거든.


자기가 장군 못달았다고 그렇게 깎아내릴 필요는 없는데.


나는 아우성치는 귀신을 살포시 무시하고 있을 때, 베틀리츠가 알았다는 듯 이마를 탁 쳤다.


“이거 어쩌면 시험이 아닐까?”


“시험? 무슨 시험?”


“당연히 쿠로파트킨 장군의 시험이지! 우리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 보려는거야! 이 의욕없는 자들을 이끌고 전공을 세워 온 페테르부르크의 영애들이 우리 이름을 외치도록······.”


- 네 친구 바보인거 같은데.


“너무 머릿속이 꽃밭인거 아니냐.”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그렇게 말했다. 베틀리츠에게 들린건 내 말 밖에 없겠지만.


간단하게 생각하자. 쿠로파트킨의 진짜 의도가 뭐든 간에 내가 해야할 일은 딱 정해져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 소대원 전원, 지금부터 정확히 30분 후에 막사 뒤로 집합한다. 늦는 인원 있으면 전원 얼차려라고 전달해.”



* * *



우수리 카자크 기병 연대는 6개 중대, 각 100명 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루슬란 킴, 그리고 세르게이 베틀리츠가 지휘하게 된 부대는 그 중 2개 소대.


당연하게도 그들은 신임 소대장의 집결 명령을 받고 나서 도저히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잖아도 사기가 바닥을 치는 판에 카자크도 아니고, 나이도 어린 소대장의 부름이 아닌가.


“새로 오신 소대장이 훈시라도 할 모양인데.”


“훈시라고? 그 자식, 카자크 출신도 아니라며?”


“고작 열 다섯 살이라. 하, 내 막내동생이 딱 그 나이라고.”


이곳 우수리 카자크 기병 연대의 장교는 둘 중 하나다.


처음부터 카자크 부대에서 복무했거나, 아니면 퇴역한 카자크 출신 장교들이 군 예비역 대신 편입된 경우.


그러나 카자크 출신도 아닌 이들이 갓 임관한 소위랍시고 왔으니 그들의 태도는 불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끓어오르던 러시아 제국에 대한 불만은 고스란히 루슬란을 향했다.


‘내 자식만한 놈을 따라서 참호로 돌격하라고?’


‘이 나라는 우리를 뭘로 보는거지?’


설령 정식 임관한 카자크 소대장이 오더라도 고참들과 은근한 기싸움이 벌어지기 마련인데,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 병사가 준비를 마치고 집결지에 도착했을 때는, 원래 집결 시각에서 한참 지난 상태였다.


그러나 새로 온 소대장은 짝다리를 짚고 침을 퉤 뱉는 카자크 병사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어린 나이답지 않게 체구가 단단해보이는 소대장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은 사비로 장비를 구비해서 복무했다고 들었다. 맞나?”


“예.”


“그렇지 말입니다?”


병사들 사이에서 ‘설마 그거 물어보려고 모이라 했냐’는 투덜거림이 퍼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소대원들은 일동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우리 소대만큼은 필요한 장비를 내가 무상으로 제공한다. 망실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


“······예?”


입을 떡 벌린 채 소대원들이 멍청하게 되물었지만, 루슬란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단, 일부러 빼돌려 팔아먹는 경우가 발생하면 기존 장비값까지 청구하고 영구적으로 혜택을 박탈한다. 알아듣겠나?”


“그, 그러면 장비 사라고 받은 보조금은 어떻게 합니까?”


“나라에서 받은 돈은 그대로 집에 갖다줘라. 말했듯이 모든 장비는 내가 책임진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자크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그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루슬란은 부대 사정을 듣자마자 곧바로 최재형에게 편지를 날렸다.


만주군 군납 줄을 쥐고 있는 최재형 입장에서는 쌓아놓은 재고에서 2~30명에 불과한 소대원 장비 좀 빼주는거야 무리할게 없으니, 아마 무난하게 승낙을 받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카자크들 입장에서는 이 순간.


하늘이 열리고 동앗줄이 내려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장비 문제만 해결되었다 뿐, 아직 한해 농사를 망칠 예정인 본가 걱정이 남아있었지만······.


“더하여 우리 소대가 세우는 전공에 따라 내 사비로 보너스를 추가 지급할 예정이다. 이제 싸울 마음이 좀 드나?”


‘새로 오신 소대장님!’


‘그는 신이야!’


역시 어린 소대장이고 나발이고 돈이 짱이었다.

그렇게 카자크 병사들이 감동의 쓰나미에 휩쓸려가고 있을 때.


“전파사항은 이걸로 끝이다. 질문 더 없으면······.”


루슬란은 시계를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총원 대가리 박아.”


감동은 감동이고, 할건 해야지.


기준은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인원이 늦은 시간만큼.


며칠 후, 최재형이 직접 요양에 도착했고.

루슬란은 소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

작중 나온 극동 카자크들의 고충은 고증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군 복무에 대한 지출과 관련 간접 비용은 평균 카자크 가정 수입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이 시기 카자크 인구의 성인 남성 1인당 평균 수입은 연간 33루블 58코페이카였고, 군 복무로 인한 평균 지출과 농장 손실은 성인 남성 1인당 16루블이었습니다.

가정 내 카자크 한 명의 복무에 필요한 장비와 말을 갖추기 위해 가족 전체가 오랜 기간 동안 일해야 했고, 새 장비를 구입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친척들에게서 빌리거나 퇴역 카자크들에게서 중고 장비를 구입했습니다.

여기엔 카자크들의 경제력이 낮은 탓에 부담이 커진 감도 있습니다. 이 시기 빈민층을 분류하는 수입 기준이 36루블 미만이고, 극동 지역 가정부의 수입이 50-120루블이었다고 하니 33루블이면 상당히 적은 금액이죠.


러일전쟁에 참전한 카자크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혁혁한 전과를 세웠지만, 그 대가로 많은 카자크 가정이 완전히 파산했습니다. 이 때문에 1905년 러시아 혁명 때도 극동 카자크들 사이에서 제법 호응이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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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들통 +16 24.09.17 5,409 335 11쪽
23 치욕의 날 +28 24.09.16 5,720 376 11쪽
22 혈서 +23 24.09.15 5,802 368 12쪽
21 전야 +13 24.09.14 5,853 361 12쪽
20 반응 +13 24.09.13 5,667 362 11쪽
19 이륙 +37 24.09.12 6,121 407 14쪽
18 이륙 준비 +18 24.09.11 5,949 32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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