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혁신과 진보의 시대 (1)
"... 위르겐, 돈은 있는지 모르겠구나."
"예?"
"네 토지가 얼마 남지 않았던데, 괜찮은가 해서 말이다."
힌덴부르크는 정말로 걱정되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물론 네가 똑똑한 건 안단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더구나."
"일부러 판 거에요."
"... 일부러?"
"예."
내가 가지고 있던 땅은 알짜배기 그 자체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애초에 프리드리히 대왕이랑 짝짜꿍하던 게 내 조상이잖나. 합법적인 호의 - 내 조상 때는 받는 게 정상이었다 - 가 마구마구 들어왔다고.
근데 말이다.
이 발전의 시기, 성장의 시기에 부동산만 매달고 있을 필요가 있나?
독일은 부동산은 불패라고 말해도 '당연한 거 아니냐'는 대답만 돌아오는 한국이 아니다. 게다가 어차피 전쟁 지면 폴란드 땅 된다고.
그렇기에, 나는 3년 전부터 동쪽 영지를 천천히 팔았다.
남은 땅은 진짜 알짜배기들, 그러니까 현대 독일의 국경선 안 쪽에 있는 땅 중에서 고르고 고른 땅들이고.
그러면 땅을 판 돈은 어디다 썼느냐?
"제 이름으로 도이체 방크에 가시면 회장처럼 대우해줄걸요?"
당연히 투자에 썼지.
군인이 왜 돈 벌 생각을 하냐고?
지금 동부의 땅이란 땅은 죄다 가지고도 아직도 만족 못해서 러시아계 폴란드인을 거의 무임금으로 부려먹는 융커들을 모욕한거냐? 응?
꼭 그런게 아니더라도, 비리 군인이 되기 싫은 이상 투자를 열심히 해야 한다.
돈도 없는 놈이 '성의'를 받지 않으면... 흠, 성의 받는 게 일상인 장성들이 퍽이나 좋아하겠구만. 내 진급길 막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하여간, 나는 나름대로 성공적인 투자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막 시작한 태동기 산업에 투자할 돈 정도는 있었다는 얘기다.
"아, 맞다. 엔진 회사 사장이랑 만난다던데."
"예. 맞아요."
"흠, 내가 아는 너라면 새로운 혁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구나."
그, 이 시기의 혁신이라고 해봤자 아이용 수면제(아편 포함) 같은 거니까 그렇죠.
그에 비하면 자동차는 완벽한 혁신이지. 교통사고 정도가 부작용이겠지만, 솔직히 낙마 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적을걸?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다못해 말 타는 걸 참 좋아하는 나조차 낙마한 적이 몇 번 있는데다, 괴물 그 자체인 이성계조차 낙마해서 죽을 뻔 하기도 했었잖나.
아무튼, 얘기가 좀 새긴 했는데... 마이바흐씨랑은 오늘 만나기로 했다.
원래는 마이바흐랑 다임러 둘 다 보려고 했는데, 다임러씨가 갑자기 못 오겠다고 하더라고. 몸도 아프고, 회사의 방향과 본인이 원하는 방향이 달라서 반목하고 있다나 뭐라나.
근데 내 기억으로는 다임러는 벤츠 설립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모르겠다. 아무리 독일의 근현대사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해도 회사의 역사를 배우지는 않으니까.
"... 아쉽구나. 대화 내용이라도 좀 들어보면 좋으련만."
"일 하시느라 바쁘신거잖아요. 어쩔 수 없죠."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그럼, 먼저 일어나보마."
음, 시간이 좀 비는데 커피나 마시고 있을까.
앞으로 1시간 정도는 집에 나와 사용인 정도만 있을테니 책을 좀 읽는 것도 괜찮아보이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다 말았는데, 그거 좀 읽고 있으면-
"도련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 마이바흐씨인가요?"
"예."
뭔 1시간이나 빨리 오고 그러십니까.
됐다. 아직 책을 꺼내지도 않았으니 차라리 괜찮겠구만.
"들여보내주시죠."
커피를 홀짝이며 향을 즐기는 사이, 마이바흐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새파랗게 어린 애였군. 나는 청년을 생각하고 왔는데."
"그런 소리 종종 듣습니다. 어른스럽다는 칭찬으로 듣죠."
"... 화 낼 줄 알았는데, 의외군."
"참을성은 자신 있어서요."
그딴 말에 타격이 오겠냐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저런 건 욕도 아니잖아. 저 정도면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할 법 한 가벼운 농담이잖아.
한 순간에 부모님이 관측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양자역학의 나라에서는 저런 가벼운 말에도 화내면 오래 못 산다는 얘기다. 대단하다, 대한민국!
"... 참을성은 자신 있다고?"
... 이건 좀 긁히네.
내가 아무리 내 맘대로 살아온 것 같아 보여도, 전부 생각하고 개기는... 스읍, 개기는 것부터 참는 게 아니구나. 할 말이 없네. 이게 프로이센의 기동전...?
"아무튼,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라고 하네."
"위르겐 폰 자이틀리츠입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나자, 마이바흐는 순식간에 나를 향한 눈빛을 뒤바꿨다.
사업가의 눈빛이 아닌, 엔진에 미친 발명가의 눈빛으로.
"거두절미하고 하나만 묻지. 자네는 왜 자동차 산업에 관심이 있나?"
전차를 만들어야 제가 말 타고 돌격 안 해도 되서요.
하지만 이런 진심을 말해봤자 미친 놈 취급 받을거다.
사실 미친놈이 맞기도 하고. 트랙터에 장갑 두르자는 또라이 같은 발상은 대체 어떻게 하는거야? 영국은 홍차에 아편이라도 타먹나?
"대답하기 어렵나?"
"아뇨, 한 문장으로 줄이기 어려워서요."
"그래서, 지금은 줄였나?"
"예."
자동차라는 물건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고 생각한다.
"더 빠르고 안전하며 덜 숙련되도 끌 수 있는 마차니까요."
자동차 관리 비용이 비싸봤자 말 만 할까.
기계보다 사람이 쌀 수는 있어도, 말이 기계보다 쌀 수는 없다. 당장에 나만 해도 말 기르느라 나가는 돈만 얼마인지 모르겠다고.
거기에 말은 생물이라 컨디션도 챙겨줘야 하고, 병나면 또 며칠동안은 마차 운용도 못하고... 애로사항이 한 두개가 아니다.
하지만 자동차는 기름만 넣으면 어지간해서는 굴러간다.
심지어 엔진이 고장나면 갈아 끼우면 그만인데다, 완전히 박살나도 어떻게 어떻게 되살릴수도 있다! 고철도 자동차로 만드는 평화로운 땅, 파키스탄이 그 증거다.
그리고 이 말을 다시 요약하자면 이런거다.
"앞으로 저는 각 가정마다 자동차 한 대 씩을 끌고 다닐거라고 믿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잘 팔릴거라는 얘기지.
헨리 포드씨가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부자가 된 건 우연이 아니다. 자동차는 돈이 되니까 부자가 되지 않았겠어?
"... 지금 노동자의 평균 월급이 얼마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인가? 자동차는 커녕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게 노동자일세."
역시 마이바흐다. 고아원에서 태어난 동류라서 그런가, 현실을 기가 막히게 직시하는구만.
별로 놀랍지 않은 사실이지만, 보통 융커들은 '노동자들이 월급이 부족해서 물건을 못 사는구나!' 라는 생각 안 하거든. 역시 융커야.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니까.
"지금 평균 월급으로는 무리겠죠. 그러니까 우리 회사라도 월급을 많이 줘야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이 시기 기준 마르크스가 놀라고 엥겔스가 벌벌 떠는 빨갱이거든.
다시 말한다. 지금 독일제국은 융커가 1인 200표인 선거를 '민주적'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반동 보수주의 국가다. 나 정도면 진짜 빨갱이로 몰려도 할 말이 없다고.
"아무튼, 제가 보는 미래는 그렇습니다."
"... 음, 나도 본말이 전도됐군. 미안하네. 자동차 얘기로 돌아가지."
마이바흐는 능숙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은 다른 곳에도 충분히 많은데, 왜 굳이 나를 찾았는가?"
"그야, 엔진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으신 분은 마이바흐씨와 다임러사 뿐이니까요."
"너무 띄워주는군."
사실 자동차만 보고 움직였으면 벤츠씨랑 얘기하는 게 맞지.
근데 나는 전차가 필요하고, 전차의 핵심은 주포도 장갑도 아닌 엔진이다. 엔진 기술이 없으면 말을 따라잡기는 커녕 행군 속도도 못 맞춘다고.
물론 벤츠가 나중에 전차를 생산하는거로 알고 있긴 한데...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아는 게 없어서 장담을 못 하겠다. 이런 미시사는 배우지 않았단 말이다!
"뭐... 자네의 진심은 어느정도 알겠네."
"그래서 말인데, 투자를 조금 하려고 합니다."
"... 투자?"
"예. 한 100만 마르크 정도?"
100만 마르크면 되게 큰 돈이다.
물론 융커들이나 루르 산업지대의 자본가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돈이겠지만, 나 같이 가난한 고아한테는 엄청 큰 돈이라고. 내가 쓸 수 있는 최대 한도의 돈이기도 하고.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이 정도 돈이면 다임러 사의 지분은 넉넉하게 챙겨갈 수 있을거다.
애초에 큰 회사도 아니고, 되게 위험한 사업이잖아. 돈을 어떻게 벌 지부터 막막한 사업에 모든 걸 쏟아붇는 투자자가 어디 있겠어? 지금이 21세기도 아니고 말이야.
"다임러의 시작 자금이 40만 마르크였는데...."
마이바흐씨는 눈 앞이 캄캄해진 모양이다.
아무래도 돈의 개념이 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도 고아원 출신이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한 끼에 3천원 넘으면 무리하는거였던 나랑 다르게, 한 끼에 보통 만원씩은 기본으로 깔고 갔으니까.
하지만 이미 부르주아가 된 양반이 저러면 어쩌자는건가.
진짜 부르주아는 저 돈에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게 아니라,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지. 역시 마이바흐는 사업가보다는 기술자가 어울리는 사람인가.
"마이바흐씨."
"어, 음. 투자 하겠다고?"
"예."
"잘 됐군. 지분은 사측과 얘기해봐야겠지만-"
에헤이, 이 사람이 진짜. 왜 돈 얘기만 해?
물론 내가 돈 벌려고 투자하는 건 맞지만, 진짜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개발에 관여할 수 있는 권력이란 말이다.
"아, 하나 미리 말씀드리지자면, 저는 단순 투자만 할 게 아닙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밥먹듯이 무시당하는 규칙이라 잘 모르겠지만, 사실 투자자가 경영권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다못해 기업 국가의 시초 쯤 되는 동인도 회사들조차 주주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게 한 두번이 아니라고. 다른 기업들이야 당연히 더 하지.
근데도 내가 굳이 이렇게 얘기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경영에도 간섭할 생각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은데."
내가 어리니까.
어린 놈이 뭣도 모르고 경영에 간섭했다가 다 말아먹으면 누가 책임지겠나. 괜히 귀찮은 상황을 만들면 안 된다는 의미지.
"회사 경영은 몰라도, 개발쪽은 좀 관여를 하고 싶은데요."
그래서 나도 타협안을 제시했다. 경영에는 전혀 관심 없지만, 기술 개발은 관여하겠다고.
그리고 타협이라는 게 늘상 그렇듯, 자연스레 협상으로 넘어갔다.
"자동차 개발에 관심을 가져주는 건 좋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사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을걸세. 나 또한 반대-"
"대가로 슐리펜 참모총장이 마이바흐사의 신차를 타게 해드리죠. 홍보 효과를 노릴 수 있을겁니다."
"... 돈으로 나를 사려고 하는겐가? 그런 얄팍한 수는-"
"확실히 모자라긴 하죠. 제가 원하는 걸 개발해주시면 군납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지만, 나는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음, 이건 상호간의 신뢰를 위해 제 생각을 공유해드리는 겁니다만, 짐마차에 엔진을 달면 운송업까지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마이바흐의 얼굴을 슬쩍 확인했다.
이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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