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혁신과 진보의 시대 (2)
밖으로 나가는 그 순간까지 마이바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앞으로 저는 각 가정마다 자동차 한 대 씩을 끌고 다닐거라고 믿습니다.'
미래에 대한 명확한 확신을 가진 아이는 흔치 않았고,
'예. 한 100만 마르크 정도?'
100만 마르크라는 거금을 이런 산업에 투자할 아이는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짐마차에 엔진을 달면 운송업까지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는 이 말 한 마디에서, 눈 앞의 소년이 천재임을 확신했다.
소년은 이미 짐마차가 대체되는 미래를 보고 있었고, 그 미래를 구현하기 위해서 강력한 엔진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소년이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앳된 아이라는 건 중요치 않았다.
본인부터가 천재기에, 이 세상에 천재들은 많다는 걸 누구보다 절실히 알고 있는 게 마이바흐 아니던가.
그렇기에 마이바흐는 다임러사에 빠르게 달려갔다.
"그런가?"
"예! 이 투자를 받지 못한다면-"
"이보게.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네. 일을 굳이 더 크게 벌일 필요가 없잖나."
회사의 3대 주주, 빌헬름 로렌츠(Wilhelm Lorenz)는 그런 투자를 받고 싶지 않았다.
당장에 다임러를 겨우겨우 쫓아냈는데, 벌써 새로운 경쟁자를 맞이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다.
"우리 빚이 아직도 40만 마르크에요! 이 투자는 거의 거저란 말입니다!"
"심지어 회사 경영에는 관여도 안 하고, 개발에만 관여하겠다는데 이걸 거부해? 너 주주 맞아?"
"로렌츠, 지분은 다 팔고 건설업이나 신경쓰시오. 당신이 날뛰는 꼴은 더 이상 못 봐주겠군."
결국 로렌츠는 수많은 사람들의 '권유'에 무릎꿇고 말았다.
"젠장, 그래! 투자 받으면 되잖소! 대신 내 지분을 먼저 팔겠소! 됐소? 응?"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다임러가 다시 복귀하고, 마이바흐와 다임러가 자동차 엔진을 뚝딱거리고, 회사 빚은 줄었으니 이 어찌 미래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다임러에 투자한 이후로는 진짜 별 일 없었다.
아니, 그렇잖아. 일 벌이지 말라는 교장의 전언까지 들은 입장에서 일을 더 벌리기가 좀 그렇다고.
당장에 다임러 투자 건도 내가 한 게 아닌 것처럼 꾸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변호사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나는 기력 없는 시체가 되어버렸을게 분명하다!
그렇게 1893년은 지나갔고, 새로운 새해가 밝았다.
그리고 새해의 4번째 날, 독일 제국 전역을 뒤흔드는 소식이 전해졌다.
[충격!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 군사 동맹 결성 완료!]
[둘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 제국을 두려워 하는가?]
[프랑스가 벌벌 떨고 러시아가 살려달라고 비는 독일 제국의 진짜 위대한 점은?]
... 독일은 사실 선천적으로 국뽕에 미쳐있는 게 아닐까?
독일 제국이 외교를 조진 결과물인데 국민들은 왜 이렇게 좋아하는 지 진짜 모루게소요... 몰라... 이게 뭐야... 무서워....
아무튼 저 동맹이 내포하는 의미는 이런거다.
이제 독일은 양면 전선을 외교적 해법으로는 해결 할 수 없다는 의미다! 크으윽, 참모 본부에서 잔뜩 입을 털어둔 게 전혀 의미가 없어졌어...!
... 생각해보니까 어차피 외교적 해법은 불가능하다고 했구나. 어차피 안 될 거였으니 아무튼 좋았쓰!
"허, 미치겠네. 진짜 정신을 놨나."
이게 전부 3대 영양소 부족 때문에 그렇다.
음, 역시 카페인이 들어가니까 기분이 좋아지는구만. 아직 어려서 알코올이랑 니코틴을 섭취하지는 못하니까, 최소한 커피라도 많이 마셔야지 않겠는가.
어릴적에 카페인 먹으면 안 좋다는 얘기가 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기는 했는데... 비소 페인트가 아직도 현역인 시대다. 그깟 카페인의 부작용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나저나, 여러모로 큰일 났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대형 사건이 터졌으면 슐리펜 할배가 내 집으로 찾아올 것 같은데.
"위르겐! 어디있나!"
이럴 줄 알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순식간에 신문을 덮은 내가 나가보기도 전에, 슐리펜 백작은 내 서재에 들어왔다.
"이미 알고 있었는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게지!"
미치겠네. 말투는 또 왜 이렇게 다급하셔. 이런 사람 아닌데?
"잠시 진정 좀 하시고-"
"지금 진정하게 생겼나!"
그렇게 말해놓고 차분히 앉아 커피를 들이키는 슐리펜 백작이었다.
"후우우... 자네가 부정했던 내 계획이 승인되었네."
"... 벌써요?"
"벌써는 무슨. 프랑스에 침투해있는 스파이가 몇인데, 그 징후조차 파악하지 못하면 정보부는 죄다 죽어야지."
그러면 본인 계획도 개판인데 돌아가셔야... 흠흠.
나는 내 머릿속의 블랙 유머 생성 장치를 끄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일주일 내로 파리까지 뛰어갈 수 있는 방안은 마련하셨습니까?"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러면 병사 피로도도 감안하지 않은 작전은 말이 됩니까?"
나는 대놓고 대답했다. 어차피 슐리펜 백작도 슐리펜 계획이 정상이라고 생각 안 할테니까.
우리 솔직해지자. 슐리펜 계획은 모두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자고.
유럽 최강의 참모부를 가지고 있으며, 국가의 천재들이란 천재들은 죄다 이과와 사관학교로 가는 독일 제국이 저 계획을 '완벽하게 정상적인 작계' 라고 생각했다는 게 말이 될리가 있나?
독일 제국의 외교관들은 죄다 손가락 자르고 자살해야 하는 수준인 처참한 외교를, 군사적으로 파훼하기 위해서는 슐리펜 계획 외의 계획이 불가능 하니까 그런거지.
간단히 말해서, 대안이 없다는 얘기다.
양면 전쟁이 싫다고 러시아에 꼬라박을 수는 없잖는가. 21세기 현대에도 러시아가 대놓고 지연전 하면 뚫을 수 있는 국가는 없는데 1차 세계 대전 시기는 오죽할까.
결국 프랑스에 꼬라박아야만 하고, 양면전쟁의 위협을 빠르게 최소화 할 수 있게 기동전을 펼쳐야만 하며, 기동을 위해서는 넓은 이동 공간이 필요하니까 벨기에를 침공하고-
"여전히 계획에 대해서는 부정적인가?"
"참모총장님도 계획에 대해서 부정적이시잖습니까."
"그건... 사실이지. 다만, 나는 확률적으로 가장 높은 계획을 짤 뿐이네."
그래, 저 말이 진실이다. 놀랍게도 저 정신 나간 방법이 가장 확률이 높다!
이게 놀라운 인간의 진보가 만들어낸 강철과도 같은 이성의 결과물이다. 프랑스와 러시아를 동시에 패기 위해 전성기 대영제국의 뺨을 때린다는 정신 나간 계획이.
"황제 폐하가 바뀔 가능성은 없고, 그렇다고 융커들이 바뀔 가능성도 없잖는가."
"... 본인도 토지 귀족이시면서 굉장히 비하적인 표현을 쓰십니다?"
"생각에 변화도 못 줄 놈들이면 융커가 맞지."
독하다 독해!
역시 인터넷 유머글은 믿을 게 못 된다. 이렇게 하고싶은 말 다 하는 탄산음료 같은 할배가 뭔 프로이센 장교의 표본이니, 무뚝뚝한 마초니 뭐니 하고 있어?
... 설마 나 때문에 성격이 바뀐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나이도 드실대로 드신 양반의 성격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다. 내 어르신도... 후우, 아니다.
"그래, 뭐. 전쟁이 벌어지면 이길 확률이 낮은 건 맞네. 하지만 전쟁 좀 잘못한다고 나라가 망하진 않을 거 아닌가."
망하는데요. 처참하게.
아, 물론 전쟁을 져서 망한 건 아니긴 하다. 평화협상 기준으로는 나라가 망한 후에 전쟁을 졌으니까 말이다. 근데 그게 의미가 있는지는... 몰루?
그나저나 그 슐리펜 백작마저 저 지경이면 진짜 희망은 없겠구만.
이 시대 사람들에 대한 기대는 진즉에 버렸지만, 적어도 각 개개인에 대한 희망은 가지고 있었는데... 다 포기하자. 전쟁 못 막겠다.
"... 대신 작전 계획에 수정을 좀 가할 생각일세."
"예? 어차피 그것 말고 답이 없는데, 작계라도 화끈하게 쓰셔야죠."
"아니, 내 계획이 박살났을 때를 대비한 다른 작계."
슐리펜 계획에 플랜 B가 있었나?
아마 없었던 것 같은데. 독일 전역의 열차 시간표를 초단위로 싱크로해서 만든 정신 나간 계획인데 플랜 B를 짤 여력이 있을리가 없잖아.
"이건 참모본부 내의 극비로 진행할걸세. 당연히 밖으로 샐 위험이 없게 최고위층 몇 명만 참여할거고."
"근데 그걸 왜 저한테...?"
"자네만이 내 후계자니까."
어우, 갑자기 브레이크도 안 밟고 돌진을 하시면 좀 곤란한데요.
이미 비스마르크를 통해서 들었던 얘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직접 듣는 건 좀 색다른 맛이 있었다.
"계획의 세부 사항은 어차피 다른 참모들이 할 수 있네. 중요한 건 계획이 노리는 방향성이지."
"그런 중요한 걸 청소년기 애한테 맡기신다고요? 말이 되는 말씀을 하셔야죠."
"자네는 분명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과 다른 세상을 보고 있으니까."
... 사실 생각 읽는 건 힌덴부르크의 고유 능력이 아니라 슐리펜 백작한테 전수받은 기술인건가?
내가 반 쯤 맛 간 생각을 하는 사이에, 슐리펜 백작은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 세상이 틀렸다면 상관 없네. 하지만 내가 본 천재들은 보통 자신들의 세상이 옳다는 걸 결과로 증명하고들 했네."
"누구 말씀이십니까?"
"빌헬름 1세, 비스마르크, 몰트케. 내가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 뒤에, 그들 같은 천재가 없어서 늘 불안했단 말일세. 헌데 자네가 나타났어!"
"아직 그런 분들과 비교되기에는-"
"저들 중 그 어떤 이들도 자네 같은 나이에 그 정도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네. 내 장담할 수 있어. 자네는 나폴레옹보다 위대한 사람이 될거야!"
미치겠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진심이 뚝뚝 묻어나서 견딜 수가 없다.
미묘함과 철면피를 무기로 삼아 살아온, 미래에서 온 나 같은 거짓말쟁이는 이런 진심에 너무나도 약하단 말이다.
"그런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자네 같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조국에 대한 헌신이란 말일세!"
"저, 그러니까 진정 좀 하시고-"
"위르겐, 위르겐 폰 자이틀리츠!"
그렇게 말한 슐리펜 백작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몇 초 뒤, 먹먹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나는 미래를 보지 못한단 말일세...! 조국에 대한 헌신이, 내 마지막 헌신이 이렇게 무너지는 꼴은 못 보네...! 나 때문에 조국이 망하면 안 된단 말일세...!"
아.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절박했던거구나.
이제서야 진실을 깨달은 나는, 드디어 눈 앞의 남자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보인 내 눈 앞의 남자는, 회한 많은 노병이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수많은 천재들을 눈 앞에서 지켜보며 자라왔으나, 그 자신은 미래를 내다볼 수 없었던 한 노인.
"부탁일세... 제발...."
그 미래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전장이라는 건 중요치 않았다.
이 노회한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뿐이니까.
"슐리펜 백작님."
그렇기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참모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제가 좀 알고 있어야 작계를 쓰던 말던 할 거 아닙니까."
나는, 이 노회한 군인에게 나름의 경의를 바치고 싶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기적으로 살기에는 너무 부족한 인간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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