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 4
“ 제게 무슨 말을 묻고자 하시는지요? ”
서문인걸이 엷은 미소를 머금고, 몸을 가까이 한 황보정에게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 공자, 지금 이 나라의 국경은 변방 유목민들의 잦은 도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
“ 예? 아하, 예. 국경의 수비가 잘못되면 나라에 누란(累卵)의 위기가 닥칠 염려도 있습니다. ”
말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 못한 황보정은 서문인걸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둘러댔다.
“ 그렇겠지. 조정은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많은 예물을 바쳐 달래곤 하지. 그런데 그 중요한 국경을 지키는 야전군의 총사령(總司令)이 누구지 공자는 알고 계시는가? ”
서문인걸이 말하는 야전군이란 지금 조정의 주된 병력이다. 그 군의 총사령은 지금 조정의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있는 조평환의 아들 조익균이었다.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으나 그냥 소홀히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 가만, 지난번 한림학사원에서 난행이 벌어지던 날, 이 어른은 조익균을 훈계하는 척하면서 목숨까지 뺏으려 했다. 그런데도 그는 부친의 힘으로 대군을 책임진 총사령이 되었다.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죽이려 했던가? 헌데, 조정의 형국을 들먹여 내 생각을 묻는다. 대체 이 어른이 말을 꺼낸 속내가 무언가? ’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황보정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 다음 달 초순에 가친께서 제남의 천불사(天佛寺)로 출타를 하신답니다. 동생이 그일 때문에 저를 찾아 왔었습니다. ”
서문인걸의 물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대답이었다.
“ 동생이 부친께서 전할 말을 가져온 겐가? ”
“ 예, 어르신. 가부께서는 천불사 방문길에 저도 동행하기를 원했습니다. ”
순간 서문인걸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빛이 번쩍였다.
“ 상서 대인께서 제남에 중요한 볼일이 있으신가 보구먼. 그래, 함께 갈 요량이신가? ”
은근히 황보정의 행보를 물었다.
“ 아닙니다.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
“ 모처럼 부자가 함께 여행을 하며 마음을 나누고자 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공자는 굳이 동행을 거절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터! ”
허나 황보정은 서문인걸의 말에 즉답은 않고 슬쩍 변죽을 울렸다.
“ 어르신, 지금 조정의 모든 군력은 변방 국경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집결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병력을 지휘하는 자가 조평환대인의 아들인 조익균입니다. 그 황당한 사실을 모르는 이 나라 백성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 일을 제게 묻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
황보정의 물음에 이제는 오히려 서문인걸이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 그··· 그건. 으음, 내 말하지. 군권을 손에 쥐고 온갖 권력을 자신의 사욕을 위해 휘두르는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오직 아들이라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능력도 재주도 없는 인간에게 국방의 대임을 맡긴 것을 공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걸 묻고 싶었네. ”
황보정이 입가에 야릇한 웃음이 흘렀다.
“ 어르신, 그게 궁금하셨습니까? 말씀드리지요. 제가 가부와 동행을 거절한 이유는, 이 급박한 현실에서 도피해 일신의 안온(安穩)만 지키고자 하는 아버님의 마음가짐 때문이지요. 힘에 억눌려 불의를 외면하고 오로지 자리만을 보존코자 하는 그 어른의 나약함이 추하게 보여 얼굴을 마주하기가 싫었습니다. ”
“ 오호, 그런 마음이었던가? ”
“ 그 어른, 비록 저의 아버님이시지만··· 그런 인물이 조정의 수장으로 앉아 계시니 조익균과 같은 필부가 그 중요한 총사령의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었겠지요. ”
울분에 찬 토로처럼 들렸다. 기회라 여긴 서문인걸이 황보정의 속마음을 떠 보려 한마디를 던졌다.
“ 이보게 황보공자. 자네의 부친이 나약해서가 아니라 수중에 힘이 없으니 용기를 내지 못하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
“ 용기라? 수중에 힘이 없어 용기를 내지 못하는 거라 하셨습니까? 후후후, 어르신. 용기는 힘으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지요. 굳고 강건한 마음 말입니다. ”
비분강개한 목소리가 내실을 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문인걸이 또다시 슬쩍 변죽을 울렸다.
“ 이보게, 상서대인께서는 공자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사신 분이네. 대인 나름대로 세상을 사는 처세가 있지 않겠는가? ”
“ 처세? 푸하하하··· 맞습니다. 자리를 보전하려는 얄팍한 처세겠지요. ”
하루하루를 좌불안석(坐不安席)하며 힘겹게 자리를 지키려 온갖 행태를 다 보이는 부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아는 황보정이었기에 그의 입에서 공허한 웃음이 터졌다. 그런 황보정의 감정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던 서문인걸이 중얼거리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
“ 국경의 병력을 황보공자가 통솔을 하면 좋으련만! ”
“ 예? 방금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
느닷없이 서문인걸의 혼잣말에 황보정이 움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 그게 말일세. 공자처럼 영민한 인재가 그 자리에 있으면 훨씬 나라가 안정되지 않겠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해본 소리라네. ”
순간 황보정이 긴장했다.
‘ 으음, 이 어른.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무슨 의중으로 흘리는 말일까? ’
서로 자신의 속내는 묻어두고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려 속 깊은 생각을 나누는 척했다. 그런 와중에 비록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으나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뱉은 말은 아닐 터. 흥분되는 마음을 지그시 누르고 기색을 살피는 황보정에게 서문인걸이 또다시 의외의 말을 입에 올렸다.
“ 공자! 우리가 조익균을 제거하고 변방의 병력을 접수하면 어떨까? ”
“ 예?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
“ 공자가 군사를 통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 ”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뱉는 말이긴 하나 깊은 심계(心計)를 지니고 있는 서문인걸의 말이 아닌가? 분명 마음속에 어떤 복안을 숨기고한 말이라 생각한 황보정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 어르신, 무슨 방도라도 있으신지? ”
“ 으음 방법이라. 황보공자! 만약에··· 만약에 말일세! ”
“ ······? ”
서문인걸이 어렵게 입을 열고는 말에 뜸을 들였다.
“ 국경 너머에 유목족들이 변방을 어지럽히는 이때, 강호의 모든 방파가 힘을 합해 황궁을 들이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
“ 황궁의 근위병만으로는 고전을 면치 못하겠지요. 예에? 황궁을? ”
무심코 대답하다 눈을 둥그렇게 뜬 황보정에게 서문인걸이 손을 잔잔히 흔들며 말을 계속했다.
“ 놀라지 말고 조용히 듣게. 그리 된다면 조익균은 제 아비 조평환이 있는 황궁을 좌시하지는 않을게야. ”
“ 하지만 어르신, 국경의 병력은 외침을 염려해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
“ 아니야. 그놈은 나라보다 제 아비의 안위가 우선인 놈이야. 그를 붙들어두려면 국경에서 전투가 벌어져야 해. 그러면 그 전장(戰場)에서 꽁무니를 빼지는 못하겠지? 헌데 말일세. 국경에 외적이 침범한다면 조익균의 능력으로 그들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을까? ”
“ 전투에서 패하거나 도망을 친다면 조대인에게 누(累)가 되겠지요. 그러니 우선은 침공을 막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겁니다. ”
황보정은 서문인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도무지 마음속을 짐작할 길이 없어 적당한 대꾸를 하자 서문인걸이 무릎을 탁치며 말을 뱉었다.
“ 맞아,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겠지. 그런데 말일세. 그 전쟁에서 어쩌면 조익균이 전사를 할 경우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야. ”
“ 헉! ”
목숨을 잃을 경우를 언급한다. 그렇다면 분명 전투중 전사를 하지 않으면 조익균을 암살할 수도 있다는 의미의 말이 아닌가? 갑자기 머리를 쇠망치로 두드리는 충격에 황보정은 숨이 턱 막혔다.
“ 어르신, 그 말의 진정한 뜻은? ”
“ 어허, 뜻은 무슨 뜻.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게지. 그런데 그 싸움을 우리의 힘으로 승리로 이끌고 황실까지 압박을 한다면 조평환을 탄핵 할 수 있겠지? ”
맞는 말이기는 했다. 그러나 지금의 서문인걸이 마음먹은 대로 변방 국경에서 때맞춰 전투가 일어나주겠는가?
“ 그래도 쉬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비록 잦은 약탈은 있다고 하나 그들도 군사를 움직여 국경을 넘을 형편은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조익균과 같은 무능한 인간이 그 자리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게지요.”
“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 전쟁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
“ 예? 뭐라 하셨습니까? ”
“ 아니, 아니. 혼잣말일세. ”
이제는 서문인걸의 말에 섬뜩함까지 느껴져 전신에 오싹한 기운까지 들었다. 그러나 황보정의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기대감이 동시에 다가왔다.
‘ 이 어른, 무서운 지모를 가진 사람이다. 내가 이러한 사람과 대적을 한다면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
속으로 궁리하던 황보정이 슬쩍 운(韻)을 띠웠다.
“ 어떻게, 어떻게 전쟁을 만들어 냅니까? ”
“ 약탈과 방화. 이 나라의 군사들이 먼저 국경을 넘어 저들을 침공해 약탈과 방화를 저지른다면 저들이 어찌 나오겠는가? ”
“ 그리하자면 우리를 따를 병력도 만만찮게 있어야 하는 일, 저는 도저히 감당 못할 계략일 뿐입니다. ”
자신과 서문인걸, 단 두 사람이 저지를 만한 사안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도 서문인걸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말을 뱉어놓고는 한동안 입을 꾹 다물자 두 사람 사이에는 숨이 막힐 듯 적막히 흘렀다. 그 적막을 견디지 못한 황보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어르신, 답답합니다. 어찌 대체 복안이 뭡니까? ”
그런 황보정을 지그시 노려보던 서문인걸의 입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복안이라···. 황보공자, 지금부터 정녕 날 믿고 따르시겠는가? ”
“ 예. 그 길이 모두를 위하는 길이라면 두말없이 어르신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
“ 좋아! 모든 계획이 완벽해 지면 공자에게 그 뜻을 전하겠네. ”
“ 예? 지금이 아니고 다음에 알려주신다는 말씀입니까? ”
“ 오래진 않을 게야. 계획하는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 자세히 말해줌세. ”
“ 어르신, 저도 그 계획에 동참하겠습니다. 그러니 지금 알려주셔도 무방할 겁니다. ”
“ 아니야, 지금은 일러. 나중에···. 그보다 화령아, 너는 황보공자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말고 공자를 돕도록 해라! ”
그 말은 화령에게 자신을 감시하라는 명이 아닌가. 놀림을 당한 것처럼 황당했다. 그러나 섣불리 말을 뱉을 서문인걸은 아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한 황보정은 서문인걸의 말을 곰곰이 되씹으며 자리를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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