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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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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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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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2.1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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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52)

DUMMY

그녀의 입술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벨린은 떨림이 느껴질 정도만 살찍 키스를 하고서는 입술을 땠다. 가지고 노는 것도 여흥이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목적을 달성하고자 연극을 시작했다면 재미를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몇 초가 흘렀다. 화들짝 놀란 아리엘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는 입술에 손을 댔다. 그녀의 눈망울이 파르르 떨렸다. 옛날 기억이 나서였다. 그녀의 주인이 술김에 순결을 빼앗아 버렸을 때, 그 여운이 떠오르면서 경직되어 있던 그녀의 몸을 천천히 녹여놓기 시작했다.

벨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아버지가 약초 우린 물을 끓이기 위해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넣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벨린은 생각했다. 그러나 욕망이 생긴 이상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


"너."

벨린이 자그맣게 놀리듯이 말했다.

"입술은 제법 예쁜걸."

아리엘은 부끄러워 눈을 마주치지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술에 잔뜩 취했던 주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때와 지금이 비슷할까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주인이 다시 한번 입을 맞추는 바람에, 그녀는 부끄러워 눈을 꼭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분위기를 단번에 녹여놨다. 자신이 정한 금기를 깨어 본 벨린 데 란테는 그리 나쁘지는 않군 하고 그녀의 혀를 맛봤다. 짭쪼름하면서 달콤한 맛. 아리엘이 두 손으로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반면 상대가 어떻든, 벨린 데 란테는 즐길 건 다 즐겨가면서 시선은 결코 아버지 쪽을 놓치지 않았다. 여흥도 중요하지만 본래의 목적을 잊어서는 안되었다. 그가 지금껏 보여온 이 달라진 모습의 본질을 꿰뚫을 이는 오직 아버지 뿐이었다.

어디 한번 맞춰보시지. 벨린은 아리엘의 입속을 범해가면서 아버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약초우린 물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오자 눈을 감았다. 진실이 담긴 차가운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인기척이 느껴지자 벨린 데 란테는 약간 놀란 척 입술을 땠다. 기진맥진한 아리엘이 콜록 거리다 뒤를 보았다.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빈센초 데 란테가 서 있자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신사가 되려면 아직 멀었구나, 벨린."

빈센초는 두 남녀에게 약초우린 물을 주었다. 그들은 잠자코 물을 마셨다.

빈센초가 팔짱을 끼며 유쾌하게 말했다.

"하긴 총사가 신사가 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이겠냐. 나 때도 너처럼 그랬단다. 총을 다루다보면 뭔가 과시하고 싶어진다니까."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벨린이 너스레를 떨듯 말했다. 그리고는 다정히 아리엘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녀를 감쌌다. 아리엘은 눈물 범벅에, 황홀감과 두려움이 반씩 점철된 얼굴로 주인의 아버지를 올려보았다.

빈센초가 아리엘을 내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히스파니아 여인은 아니구나. 아르메니아 출신이라고 했느냐?"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란테 방언이 아닌 평상적인 히스파니아어라서 아리엘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리엘이 주인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주인은 그저 웃고 있었다.

"네."

그녀가 대답했다. 자기 딴에는 지극히 밝은 목소리를 내어보았지만 좀 떨리는 어조였다.

빈센초가 자리에 앉아 아들의 신부감을 유심히 보았다. 유순하고 상냥해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가냘픈 손목과 손도 살폈다.

문득 빈센초가 그녀의 오른손목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의 차가운 손에 아리엘이 흠칫 했다. 빈센초는 막 그녀의 치부를 본 참이었다. 그녀의 손목에 각인된 이교도의 아랍글자로 쓰여진 노예의 표식 부분을, 빈센초가 뭔가 홀린듯 심각한 얼굴로 꽉 잡았다.

상처를 들킨 아리엘이 숨을 멈췄다. 벨린은 눈을 치켜 뜨고 아버지의 반응을 살폈다. 짐작한 대로였다. 아버지의 낯에 순간 연민의 감정이 서리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빈센초가 사과했다. 그는 아들을 돌아보았다. 벨린 데 란테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진지하게 말했다.

"까살라에서 그녀를 구했죠. 그녀의 신분이 어떻든 저한테는 중요치 않아요."

아버지가 너그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지금부터라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의미로 가볍게 손을 저으려는데,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찬 바람이 오두막 속으로 밀려들었다. 벨린에게 한 마디 하려던 빈센초가 시선을 문가로 고정했다. 벨린을 빼닮은 날카로운 이목구비의 여인이 망토를 휘날리며 서 있었다.

"왔구려, 여보."

빈센초가 말했다. 사이프러스의 키리네가 우아하게 주문을 읊조렸다. "인 바스 프로비눔." 라투니스어로 꾸며진 그 주문 한 마디에 그녀를 중심으로 발산되던 찬 기운이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빈센초가 차가운 마력기운에 다 식어버린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애원하듯이 말했다.

"내가 집 안에서는 축지법을 쓰지 말자고 했잖소."

벨린의 어머니가 바로 쏘아붙였다.

"이건 축지법이 아니라 데 블라키스트 인트(여행자를 돕는 바람)이라구요. 아무렴 사랑하는 우리 아들이 돌아왔는데 그딴 게 대수겠어요?"

"알겠소. 맘대로 하시오."

빈센초 데 란테는 더 이상 언쟁을 하기 싫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이 이교도 마법사는 어떤 분위기였는지 아무 것도 모른 채 벨린과 아리엘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벨린, 오랜만에 실력발휘를 해봐야겠다."

그녀가 재빨리 부엌으로 사라졌다. 벨린은 슬그머니 부엌으로 눈길을 훔쳤다. 그의 어머니가 아궁이 속에 손을 대고 주문을 읊조려 불길을 세게 만들고서는 요리를 만들 채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란테 지방 사투리로 알아들을 수 없게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장작을 더 구해와야겠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아들에게 푹 쉬고 있으라고 다정히 한마디 하고서는 밖으로 나섰다.

부모님이 각자의 일에 바빠 사라지자 벨린 데 란테는 이 정도면 순조로운 시작일 거라고 여기며 곰 가죽 깔개에 편히 누웠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리엘이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그런 아리엘을 벨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적응하든 적응하지 않든 이제 그것은 그녀의 사정이니까.

* * *

날이 어두워졌다. 빈센초 데 란테의 오두막 안은 보통 가옥과는 달리 은빛 불이 발산되고 있었다. 빛의 입자가 천장 위를 떠 다니며 진수성찬이 차려진 거실 위로 둥둥 떠 다녔다.

벨린 데 란테는 와인을 마시며 생각했다. 저 마법은 임페리움 데 란토(빛의 고귀함)잖아. 어머니가 부리는 마법은 종류가 꽤 많았다. 주로 서 에우로파에서는 구전이 끊어진 4원소마법들이긴 했지만, 저 마법은 분명 4원소 마법이 아니었다. 도리어 서 에우로파쪽의 성직자들이 쓰는 성마법으로, 아무래도 어머니가 최근 들어 서에우로파의 성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빛의 입자들 때문에 저녁 식사의 식탁 위는 대낮처럼 환했다. 벨린의 어머니는 타이트한 바지에 실크셔츠 차림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흥에 겨운 듯이 빛의 입자를 띄워내고 있었다. 그녀는 왼손에 와인이 담긴 은잔을 들고, 오른 손에는 마력을 담아 진주알 크기의 입자들을 손바닥에서 띄워냈다. 어머니는 즐거운 표정으로 주문을 계속 읊조리고 있었지만 주문구현이라는 것이 실은 고난이도의 지능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끔찍스럽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것을 느긋하게 하고 있으니 어머니의 지적 능력은 지금도 상상을 초월하는 듯했다.

벨린은 질 좋은 와인과 식탁에 차려진 오리고기 요리에 흥취되어 있었다. 식사 내내 어머니는 계속해서 요리의 맛이 어떤지 파이는 잘 구워졌는지 물었다. 벨린은 밝게 웃으면서 어머니의 말에 대꾸했고 계속해서 포도주를 마셨다. 임페리움 데 란토 마법만 봐도 어머니의 마력은 여전히 강력해보였기에 안심이 되었다. 어머니의 마력, 그것은 벨린이 고향으로 돌아온 숨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아리엘은 저녁식사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낮의 일과 긴 여행의 피로 때문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오두막의 내실에서 일찍 잠이 들어 있었다.

아리엘이 없는 편이 벨린에게는 더욱 편했다. 그는 부모님께 지난 몇년 동안의 일을 꾸며서 말했다. 대략 총사 시험에 여러번 낙방했는데 돌아올 엄두가 나지 않아 계속 도전했더니 총사대 장교까지 되었고, 30년 전쟁에 파견되어 아리엘을 만나 혼인까지 할 생각이라고 거짓말을 한 거였다. 그 가운데 진실된 이야기는 딱 절반 뿐이었고, 이것은 벨린이 애당초 의도한 바였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빈센초가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는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온 아들에게 건배를 했다.

이미 오랫동안 음주를 했기 때문인지 두 부자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 세상이라는 게 그리 쉽지는 않지. 하지만 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걸 보니 사는 법을 깨우치긴 깨우친 거야. 그렇지 않니?"

"딱히 별 거는 없더군요."

벨린이 태연히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정말 별 것 없었다. 그저 운이 좀 좋았을 뿐이었다. 이 운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던 간에, 그는 지금까지는 잘 나갔다.

"키리네?"

빈센초가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와인을 많이 마신 그녀는 어느새 술에 취하여 빛의 입자를 천장에 남겨둔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좋아, 내가 재미난 거 하나 가르쳐주랴?"

술기운에 얼굴이 달아오른 전직 총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노예출신의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하는 말인데, 이건 네 어머와 엃힌 네 출생의 비밀이란다."

"그거 재밌겠군요."

벨린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사실 이 아비가 네 어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전장에서 살아남고자 했던 생존본능 때문이었단다."

"그래서 저렇게 아름다운 이교도 처녀를 얻었던 건가요?"

벨린이 의자에 기대 잠이 든 어머니를 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였냐면..."

빈센초 데 란테가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고 속삭이듯이 털어놓았다.

"실은 네 어미 손에 죽기 싫어서 그렇게 된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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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베나레스의 총사(40) +21 06.11.02 7,748 14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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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베나레스의 총사(38) +24 06.10.31 8,159 1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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