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 총사(44)
반달형 방어 시설을 점령한 척탄병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성벽뿐이었다. 척탄병들은 적과 싸우는데 지친 병력을 교대해가며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이미 새벽이었고, 그들은 이 요새를 해가 뜨기 전에 점령할 사명이 있었다.
벨린 데 란테는 소대를 다시 추슬렀다. 완전히 새로운 보충병들이 전사한 전우의 빈자리를 채웠다.
척탄병들이 노획한 대포를 반달형 방어시설까지 끌고 오는 동안, 벨린은 반달형 방어시설 속에서 무기를 점검하고 마지막 돌격을 준비했다. 그들의 임무는 척탄병들이 중앙의 적과 상대하는 동안 성벽을 신속하게 점령하고 그 위에 히스파니아 깃발을 꽂는 거였다.
척탄병들이 점령한 방어시설 곳곳에는 수비군과 공격군의 시체가 즐비했다. 양쪽에서 치열하게 총검으로 찌르다보니 난자당한 시체들 가운데는 멀쩡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최후의 공격을 준비하는 병사들은 그 시체들을 내려다보면서 지금까지 자신을 살려준 신에게 감사를 표했고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벨린은 물론 기도를 하지 않았다.
청동제 경포 세 문이 적의 성문에 포격을 가했다. 이 경포는 반달형 요새 시설에 있던 중화기로, 불과 두 시간 전만 해도 아군 척탄병을 향해서 포화를 뿜었던 것들이었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척탄병은 이것을 노획했고, 이제는 적의 성문을 부수는데 활용되어 적들을 큰 곤란에 빠트리려는 찰나였다.
포탄이 성문을 연속적으로 때리자, 견고하게 만들어진 나무 성문이 서서히 뒤틀리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성벽의 대포가 필사적으로 아군을 향해 포격을 가해봤지만, 반달형 방어시설의 견고한 석벽 구조 때문에 아무런 피해도 입힐 수 없었다.
몇 번에 걸친 포격 끝에, 적의 성문이 완전히 무너졌다. 그것이 신호였다. 벨린 데 란테가 검을 뽑아들고 소리쳤다.
“돌격!”
척탄병과 총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순간 밤새도록 총안에 대고 총을 쏘던 요새 수비병들조차도 공포에 얼어붙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파도처럼 요새를 향해 밀고 들어갔고, 이윽고 그들은 요새의 건너편에서 이열대형으로 늘어서 있는 요새 수비군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경직된 얼굴로 총을 겨누고 서 있었다. 허나 문제는 그들이 일제사격을 한방 먹이는 순간, 저 거대한 물결이 그들을 단번에 집어삼킬 거라는 사실이었다.
수비군은 돌격해오는 공격군을 향하여 일제사격을 한방 먹이고서는 똑같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총탄이 벨린 데 란테를 스치고 지나가서는 돌격해 들어가는 척탄병들 일부를 쓰러뜨렸다. 그러나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요새 내부로 진입했다. 해가 뜨기 전에 요새를 점령할 길이 열린 것이었다. 반면 수비군은 배수의 진을 친 격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었다. 이곳에서 죽던지 저들을 물리치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이들의 기세가 서로를 향해 충돌했고, 곧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벨린은 총사소대를 이끌고서는 요새 내부의 계단을 올랐다. 적의 성벽 맨 꼭대기에 히스파니아의 깃발을 올리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것은 이 요새가 히스파니아군의 손에 들어갔다는 상징이었고, 히스파니아군이 이 전투를 이길 수단이었다.
그들은 수비병들이 버리고 간 50파운포의 포대를 지나쳤다. 이것이 더 이상 불을 뿜지 않는다는 것으로도, 평야에 있는 남은 적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이다. 그들은 거포들을 지나쳐 성벽의 맨 꼭대기로 올라갔고, 군데군데에 우왕좌왕하는 수비병들을 하나씩 총으로 쏘아 죽였다.
벨린의 소대가 요새 성벽의 맨 꼭대기 지휘대로 다다를 무렵이었다. 그곳은 요새의 중앙부였고, 사방이 성벽과 총안으로 둘러 싸여 있는 요새의 중추지점이었다.
별안간, 방어 지점에서 그들을 향해 기습적인 총격을 가했다. 적들이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벨린의 양 옆에 서 있던 총사들이 총격을 맞고 바닥으로 뒹굴었다.
“전진!”
그는 반대편 문으로 손살같이 뛰어갔다. 사방에서 총탄 세례가 쏟아지는 가운데, 통로를 달리는 총사들이 또 여러명 쓰러졌다. 그러나 지금은 부상병들을 돌볼 때가 아니었다. 신속히 이 통로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모두들 전멸당하고 말 것이다.
벨린이 반대편 통로로 몸을 틀려는 순간, 그의 눈앞에 불빛이 번쩍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몸을 틀었고, 심장을 겨눈 적의 권총 탄이 대신 그의 왼팔에 맞았다. 치명적인 일격을 피한 벨린은 적병에게 달려들었고 검을 뽑아 권총을 쏜 수비군의 목을 단번에 따버렸다.
그의 코트와 삼각모를 비롯하여 온몸에 피가 튀었다. 또 다른 적병이 달려들었지만, 몰려들어온 총사들이 그들을 대적했다. 난전이 벌어졌다. 총사들은 권총을 쏘아대면서 검을 휘둘렀고, 미늘창으로 무장한 적 수비대원들은 무자비한 창날을 휘둘러대며 저항했다.
벨린은 아픔도 모른 채 왼손으로 권총을 여러 개 뽑아 쏘았다. 이 시대의 권총은 한 발을 쏘면 재장전에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여러 개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뽑아 쓰는 것이 정석이었다.
왼팔을 제대로 못 움직이는 부상을 당했지만, 벨린은 아픔을 참고 권총을 쏘아가며 적들과 상대했다. 오른손으로는 검을 휘둘러 적을 닥치는 대로 베었고, 그의 검술은 대련 때처럼 예리하거나 우아하기는 커녕 무자비하고 우직했다.
다섯 번째 적의 목을 찔러 죽이자, 그의 검이 부러졌다. 권총을 다 썼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무기를 구해야만 했다. 머스킷총을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잠시 생각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돌격대의 대장이 된 이후로 그에게는 머스킷총을 쓸만한 임무가 별로 없었다.
그의 눈앞에 히스파니아 깃발을 든 기수가 적의 일격에 쓰러지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깃발이 뺏기면 큰일이었다. 그는 무기 없이 적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이리의 목을 으스러뜨리는 사냥꾼처럼, 깃발을 빼앗으려는 적을 바닥으로 쓰려뜨서는 목을 짓이겨 밟았다.
그를 가로막는 적군은 더 이상 없어보였다. 벨린은 숨을 헐떡이며 깃대를 들었다. 그는 천천히 성벽의 맨 꼭대기로 올라갔고, 사방이 훤한 그 요새 꼭대기의 마지막 거점에는 단 한명의 적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장교처럼 보였다. 아니, 장군이라고 해도 어울릴 법한 차림새였다. 이 요새의 사령관인 것일까. 그는 40대 초반의 키가 큰 사내였다. 하얀 가발에 멋있는 훈장달린 군복을 차려입었고, 머리에 쓴 삼각모에는 깃털이 달려 있었다. 그는 벨린을 보고서도 별로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전쟁터에서 오래 보낸 군인이 그러하듯 생기 없이 냉랑했다.
벨린이 한손으로 히스파니아 깃발을 들어올렸다.
“미리 경고하지.”
그가 요새 꼭대기에 나부끼는 적의 깃발로 걸어가며 말했다.
“자비를 구하지 마라. 너희들이 구할 자비는 마르덴부르크의 자비뿐이다.”
장교는 히스파니아어를 알아듣는 모양인지 얼굴을 찡그렸다. 구교도들 사이에서 ‘마르덴부르크의 자비’라는 뜻은 아주 유명했는데, 이것은 신교도들이 구교파인 다니치의 마르덴부르크를 점령하면서 온 시민들을 학살한 것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벨린이 적의 깃발에 손을 대려는 찰나였다. 적의 장교가 벨린에게 권총을 겨눴다. 깃발에 손이라도 댄다면 쏘아 죽일 듯이, 그가 냉랑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란츠베르크의 공작이다. 내 앞에서 우리 가문의 깃발을 내리는 꼴은 두고 볼 수 없지.”
벨린은 협박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잠시 공작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깃발로 팔을 뻗었고, 그와 동시에 공작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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