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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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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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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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0.2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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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32)

DUMMY

벨린은 문득 그 돈으로 투자라는 것을 해볼까 생각했다.

투자는 말 그대로 돈을 벌기 위해 이 돈을 어딘가에 몽땅 내놓는다는 소리다. 히스파니아의 군인들 가운데는 이미 목돈을 만지기 위해 여러 곳에 돈을 투자한 군인들이 많았다.

물론 기껏해야 장사일이다. 본국이라면 주식이나 은행 같은 곳에 투자를 했겠지만, 까살라에서는 기껏해야 무역이 전부다. 까살라의 저렴한 물가를 이용하여 값비싼 물건을 잔뜩 사두고 있다가 히스파니아로 돌아가면 비싼 값에 되파는 일이다. 까살라의 여러 곳에서 창고업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군인들이 돈을 공동 출자하여 한몫 챙기기 위해 물건들을 잔뜩 사두면서 비롯된 일이었다.

어느 날 오후, 벨린은 까살라 시내를 거닐다 조안을 만났다. 그는 요즘 군인들에게서 성행하는 그 물건 투자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인하고 수익을 5대5로 나누기로 했어. 나는 자금을 내고, 그 상인은 물건을 사서 히스파니아로 선적하는 거야. 만약에 내가 전쟁터에서 죽을 때는 공증인이 내 돈을 가족들에게 보내주기로 하고 말이야. 어차피 국가에서 지급하는 월급은 꾸준히 쌓이고 있는데, 이럴 때 단단히 한몫 챙겨보는 것도 괜찮은 일일 거야.”

“주로 무슨 물건을 사지?”

“곡물하고 육류 같은 거야. 특히 요즘에는 밀을 많이 사두고 있지. 까살라에서 밀은 남아돌지만, 히스파니아에서는 턱없이 부족하니까 좋은 장사가 되는 거야.”

조안과 헤어진 뒤, 벨린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말이 투자지 문득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한다는 게 상당히 우습게 여겨졌다.

‘돈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벌 수 있어.’

하긴 그는 굳이 장사를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먹고 살 능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총사가 된 것은 삶을 한번 제 멋대로 살아보기 위한 목적이 아니던가.

벨린은 결국 괜찮은 물건을 하나 사기로 했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는 데는 낭비벽이 심했지만 옷이나 가구, 액세서리 같은 물건들은 거의 사지 않았다. 그건 단지 그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물건이 히스파니아에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까살라의 시장에 쓸만한 물건이 있다면 그는 남은 돈을 전부 지불하더라도 반드시 사고 말 성격이었다.

* * *

벨린은 까살라의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까살라 도시의 시가지는 유서 깊은 란툰 제국의 문화가 전래되어 대리석으로 지어진 아치형의 건물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었다. 어떤 것은 지금도 사람이 살거나 위엄 있는 관공서로 남아 있었지만, 어떤 것은 고대의 유물로 대리석의 잔해만 남아 있기도 했다. 그는 그 고대의 건물들을 지나가며 사람이 북적거리는 시장의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비록 전시 중이었지만 까살라의 시장에는 온갖 물건들이 다 있었다. 옷이나 음식 같은 생필품은 물론이요, 포도주, 맥주, 리퀴르 따위의 주류와 아편 같은 기호품들이 풍성했다. 거리는 온통 사람으로 북적거렸고 이런 물건들은 까살라의 시민들이나 외국에서 파견 나온 군인들에게 성황리에 팔려나갔다.

많은 상인들이 벨린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호객행위를 했지만, 그는 한번 본 물건은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란툰 반도에도 그의 마음에 드는 물건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도자기나 대리석 조각상의 파편 같은 고대 란툰 제국의 골동품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장의 끝까지 들어갈 무렵, 벨린은 그곳에서 생전 처음 보는 자리를 보았다. 그의 눈길을 확 끄는 장소였다. 아니,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 자리에서는 한번씩 구경을 하고 갈 법했다.

그곳은 단번에 어디인지 판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곳은 마치 농장처럼, 울타리가 쳐진 개방지에 여러 건물들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울타리 안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벨린은 그곳에서 꽤나 흥미로운 광경을 보았다.

터번에 이교도 옷을 입은 자들이 일련의 사람들 앞에서 흥정을 하고 있었다. 허리에는 하나같이 반월도를 차고 있었고,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일부는 피부가 까무잡잡했지만, 지중해 바다 건너편의 흑인들도 섞여 있었다.

벨린이 잠시 그쪽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삼각모를 쓴 하급 병사처럼 보였다. 히스파니아 군복에 머스킷총을 어깨에 멘 차림이었는데, 술에 취했는지 눈은 흐리멍텅했고 코가 새빨갰다.

그가 벨린의 견장달린 제복을 알아보고 경례를 올렸다. 벨린이 물었다.

“저들은 누군가?”

“이교도 상인들입죠.”

병사가 당연한 것을 물어본다는 투로 대꾸했다.

“말은 상인이라고들 하는데, 실상은 동지중해의 해적들일지도 모르죠. 까살라는 바다와 인접해 있어서 저런 이교도들이 노예를 사러 자주 오거든요.”

“지금 뭘 산다고 했지?”

벨린이 다시 물었다. 병사가 태연히 대답했다.

“노예요. 노예시장 처음 와보십니까?”

벨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병사가 술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히스파니아에서는 노예매매가 불법이지만, 란툰 반도에서는 가능해요. 이곳 법에 따르면 국가가 인정하는 확실한 소유권이 있는 노예라면 매매가 가능하거든요.”

“알려줘서 고맙네.”

병사가 손에 쥔 술병을 들어올리더니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벨린은 노예시장에 자리 잡은 여러 ‘상품’들을 보면서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이곳은 노예를 매매한다는 것만 빼면, 마치 어느 소시장이나 가축시장을 방불케 했다. 노예들은 거의 모두가 바다 건너편의 노예 해안에서 잡아온 까무잡잡한 흑인들이었고, 그런 흑인들을 이교도나 다른 에우로파인 주인에게 팔아먹는 노예상인들은 란테 지방의 소장수들처럼 가죽 재킷에 징이 박힌 장화 차림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많은 노예를 거느린 노예상인들은 벨린에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하급 장교들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이곳의 노예들은 대부분 이교도 상인들이나 부유한 귀족들에게 도매 급으로 팔려나가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하여튼 그곳은 나름대로 부티 나고 돈 많은 손님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외국 군인들은 별로 없었지만 부유한 란툰 반도의 신사들이 꽤나 많았다. 한쪽에서는 노예를 차례차례 단상 위에 올려놓은 채 경매가 벌어지고 있었다.

벨린은 그곳에 있는 상인들을 쭉 둘러보다 어느 한곳에서 멈췄다. 그 울타리 안에 무언가 색다른 노예가 손에 쇠사슬을 묶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갈색 머리를 기른 젊은 여자였다. 그녀가 벨린의 눈에 띤 이유는 그녀가 흑인이 아니라 에우로파 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맨발에, 갈색의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노예상인이 상품을 관리하기 위해 씻는 것은 허락해준 모양인지 그리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손과 발에는 쇠사슬을 차고 있었지만, 험하게 다루지는 않은 모양인지 상처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갈색 머리 여자는 울타리 바로 옆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벨린이 그곳에서 그녀를 보고 있자, 키가 작고 살이 뒤룩뒤룩 찐 노예상인이 채찍을 들고 나왔다.

“우리는 경매제가 아니라 직불제요. 대신 값은 다른 데보다 비쌀 거외다.”

벨린이 손가락으로 갈색 머리 여자를 가리키며 사무적으로 물었다.

“저 물건은 어쩌다 저기로 들어왔지?”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다만 다니치의 어느 귀족장교가 허겁지겁 돈으로 바꿔서 가져가긴 했소. 아마 포로가 되서 몸값을 지불하느라 그랬을 거요.”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됐소?”

“이제 한 일주일 됐지.”

“흥미를 느낄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벨린이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노예시장에서 에우로파인의 노예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저런 노예는 대다수가 북에우로파 오지의 기독교를 믿지 않는 야만인 출신이었는데 북 에우로파의 신교도들 소유인지라 남 에우로파에서는 흔치 않았다.

“사람들이 흥미야 많았지. 하지만 당신 같은 치들은 값을 너무 싸게 불렀소. 귀족들은 마나님이 두려워서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말이오. 저렇게 괜찮은 물건은 보기 드문데 재미난 일이오. 아마 처녀는 주인에게 잃었겠지만 말이야.”

벨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상태가 괜찮은지 보고 싶군.”

벨린은 모든 것을 꼼꼼히 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의 첫 재산이 될 지도 모르는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아무렇게나 사고 싶지는 않았다.

가죽 재킷을 입은 노예상인이 울타리를 넘어 그녀에게 걸어갔다. 그녀의 주변에 있던 흑인 노예들이 두려움에 떨며 다른 쪽으로 갔다. 벨린은 울타리에 너머에 바짝 붙어, 그녀와 일 미터 떨어진 곳에 섰다.

“일어나, 이 갈보년아!”

노예상인이 징 박힌 장화로 여자 노예의 허벅지를 쳤다. 그 바람에 그녀는 잠에서 깼고, 곧 겁에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벨린은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였다. 그녀는 보통 키에 예쁜 축에 드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은 갈색이었고, 오랫동안 잘 먹지 못했는지 좀 마른 체격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용모에 히스파니아 총사는 무언가 감흥을 받은 듯한 눈빛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노예상인이 계속 호통을 쳤다.

“뒤로 돌아서! 저 신사 분께서 네 모든 걸 봐야하니까!”

그녀는 노예상인의 말을 알아듣는 모양인지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겁에 질려있던 터라 감히 상인의 말에 대답은 하지 못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뒤를 돌았다. 노예상인은 그녀의 사정은 봐주지 않고, 몸소 거칠게 그녀의 넝마 옷을 벗겨버렸다. 그녀의 몸에 다친 곳이나 상처가 나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나신으로 한 바퀴를 돌았다. 그녀의 엉덩이와 마른 몸매, 젖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상처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좀 마르기는 했지만 분명 몸 상태가 건강한 것은 틀림없었다.

벨린이 그녀의 몸을 한바퀴 다 둘러보자 노예상인이 말했다.

“이년은 우리말도 잘 알아듣소. 계집애라 먹는 것도 적게 먹을 테니 이보다 좋은 물건도 없을 거요.”

그녀가 겨울새처럼 떨며 자신의 옷을 들어 젖가슴을 가렸다. 벨린은 줄곳 차가운 표정으로 묵직한 은화 주머니를 꺼냈다.

“가격이 얼마지?”

“육천 페소요. 흥정 따위는 없소.”

그것은 벨린이 물건을 사려고 반으로 나눈 돈의 전액이었다. 벨린은 탁자에 가지고 있던 은화 주머니 두 개를 올려놓았다.

노예상인이 종들을 불러 모아 은화를 세기 시작했다. 벨린은 그가 은화를 다 셀 때까지 기다렸고 그 동안 그녀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떨면서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노예상인이 돈을 다 확인했는지 고개를 끄덕 했다.

“그럼 이만 물건을 가지고 가도록 하지.”

울타리가 열렸다. 노예상인의 시종이 그녀의 수갑과 연결된 쇠사슬을 당겨서는 갈색 머리 여자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녀는 발에 달린 족쇄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노예상인이 벨린에게 노예소유서와 함께 족쇄와 수갑의 열쇠를 주었다. 벨린은 그 열쇠로 여자의 족쇄를 풀었다. 하지만 쇠사슬과 연결된 수갑은 풀어주지 않았다.

벨린이 그녀를 끌고 시장을 나서려는데, 노예상인이 낄낄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젊은 친구가 돈이 많군. 뭐, 앞으로 저 물건을 어떻게 써먹을지는 뻔하지만 말이야.”

“그저 투자목적일 뿐이오.”

벨린은 뒤를 돌아 한 마디 하고서는 그녀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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