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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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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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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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47)

DUMMY

벨린은 잠시 이해할 수 없었다. 재산이 도망치지 않고, 도리어 그를 구해줬으니 좋은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십중팔구 도망치기 마련일 텐데. 어째서 아리엘은 위험을 감수한 것일까. 벨린이 그렇게 그녀를 잘 길들였던 것일까. 아니다. 그러기에는 기한이 너무도 짧았다.

그러다 문득, 벨린은 갈색머리를 끈으로 묶은 아리엘의 이미지에서, 마음 속 깊이 잊고 지냈던 그녀의 이미지를 교차시켰다. 그러자 벨린의 마음은 점차 가라앉았고, 그 이후부터는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 * *

자코모 다빈치는 매우 실력이 뛰어난 의사였다. 그는 벨린이 의식을 잃은 사이 외과수술을 집도했다. 총상을 칼로 도려내고 각종 기구를 이용하여 몸에 박힌 총탄을 찾는 수술이었다.

그렇게 다빈치는 벨린의 몸 안에서 일그러진 납탄 두 발을 적출하는데 성공했고, 덕분에 벨린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는 효능이 굉장한 약을 처방해주었는데 그 약은 복용하면 통증이 완화되고 상처부위가 곪지 않으면서 잘 아무는 복합적인 효능을 지닌 물약이었다.

그 즈음 벨린은 한 가지를 눈치 채게 되었다.

“당신 마법사군요.”

벨린이 짐작했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이런 마법의 약을 자주 만드셨죠. 마법 약에는 항상 후추가 들어가거든요.”

자코모 다빈치가 웃어보였다.

“란툰 반도에서는 마법사를 현자라고 부른다네. 현자라는 단어는 모든 것에 있어 다재다능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

“황녀 마마께서 당신을 불렀습니까?”

마법사 겸 의사는 그저 고개를 끄덕 할 뿐이었다.

“나는 황실 주치의일세. 최고의 의사를 구하려다 보니 내가 오게 된 거지, 뭐.”

그가 황녀에게 얼마나 큰 보수를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물론 벨린이 급속도로 빠른 회복을 보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그렇게 며칠 동안 치료를 받고나자, 마침내 그는 일어서서 간단한 산책을 다닐 수도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이사벨 황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전후 협상을 위하여 먼 곳에 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있는 이 천막은 필시 이사벨이 이용하던 황실의 것임에 틀림없었다. 곳곳에 놓인 가구는 여성의 취향을 반영한 물건들이었고, 심지어 그가 누워 있던 침대에서는 이사벨의 체취까지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는 아마 애를 태우고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듯이 말이다.

그 동안 벨린은 진상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그는 산책이라도 나가듯이 밖으로 나섰다. 아리엘이 부축해주겠다고 했지만 일부러 거절했다. 아리엘 몰래 그녀가 정말 자신을 구하였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왼쪽 팔을 붕대로 고정해서 몸놀림은 서툴렀지만 다리를 다치지는 않았기에 걷는 것은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아리엘이 그를 구한 것은 사실이었다. 목격자들이 여럿 있었다. 해가 뜰 무렵, 히스파니아 진지에 있던 총사들은 아리엘이 란츠베르크 요새로 뛰어가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녀는 포격을 피해가면서 요새 입구까지 뛰어나갔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 벨린을 질질 끌고서는 20분 만에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탈진한 나머지 피투성이 주인을 안고 쓰러져서 병사들은 그녀마저도 부상당한 줄 알았다고 했다. 허나 놀랍게도 아리엘은 멀쩡했고, 기운을 되찾자마자 그를 간호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벨린은 진지를 돌아다니며 생각했다. 어떻게 아리엘이 나를 발견한 것일까. 해가 뜬 덕택에 그의 초록색 제복이 보였던 걸까. 아니면 순전히 여자의 직감 덕분인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일이 아리엘의 마음이 보인 기적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실만큼은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벨린은 천막 안으로 돌아왔다. 막사 가운데의 철 난로는 지글거리며 달아올라 있었고, 아리엘은 대야를 놓고 빨래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피가 묻어 지저분한 벨린의 빨랫감을 열심히 잿물로 문대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벨린이 노획한 란츠베르크 가문기가 놓여 있었다. 그 깃발 역시 벨린의 피로 물들어 있어 좀 섬뜩해보였다.

벨린이 기를 들어올리자 아리엘이 빨래를 멈추고서는 조심스레 말했다.

“저, 그것도 빨까요? 주인님께서 목숨 대신 가지고 오신 것 같아서….”

“아니. 틀렸어.”

벨린이 란츠베르크의 군기를 난로 속으로 던졌다. 순간 아리엘은 깜짝 놀랐다. 노획한 군기를 불태우다니. 그것을 지니고 있으면 란츠베르크 요새를 함락시킨 주역으로 영광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졸립군.”

벨린은 낮잠을 자기 위해 침대로 걸어갔다. 이사벨은 언제 쯤 돌아올까. 그동안 무료한데 몸이 완치될 때까지 무엇을 하고 놀까. 그는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옆으로 누워 아리엘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그의 작은 비밀 가운데 하나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벨린의 마음을 흥분케 했다.

* * *

자코모 다빈치가 처방한 약 덕분일까. 그는 빠른 속도로 몸이 회복되었다. 이제는 왼팔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됐고, 걷는데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그의 얼굴과 왼쪽 팔, 옆구리 부분에는 전상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흉터가 남았다.

그때까지도 이사벨은 오지 않았다. 전후 협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이번 전투의 승리로 인해 신교도들은 교두보를 잃어버렸지만 아직 그들은 고집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루기 전까지는 협상이 성사되어선 안 되었다.

늦은 밤, 벨린은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아니 사실은 그녀에 대한 꿈 탓이었다. 그의 꿈과 순수함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비극적인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되다니.

아리엘은 주인이 잠에서 깬 줄도 모른 채 옷 수선을 하고 있었다. 벨린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제야 그가 즉흥적으로 저지른 일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확연히 구분이 갔다.

그래, 지금 생각해보니 상당히 치졸한 여흥이기는 했다.

“아리엘.”

벨린이 물 한잔만 갖다 달라고 말했다. 아리엘은 군말 없이 컵에다 물을 담아 주었다. 그는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오늘 따라 몸에 힘이 나는 것 같았다.

“밤이 늦은 것 같군. 이제 너도 자야 될 것 같은데.”

“네, 그래야지요. 저 그런데, 주인님….”

그녀가 무언가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벨린이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봐.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아.”

아리엘이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만 결국에는 말을 꺼내었다.

“저, 주인님께서 잠꼬대를 약간 하시는 바람에….”

“그래?”

벨린은 최근 들어 꾸기 시작한 꿈을 떠올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실은 부상을 입으셨을 때도 똑같은 소리를 계속 되풀이 하셨거든요.”

“혹시 내가 이름을 말하지 않던가?”

벨린이 정곡을 찌르자 그녀가 놀라면서 말했다.

“네. 여자 이름이었는데….”

“안젤라.”

벨린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너는 알 필요가 없는 이름이야.”

그가 자신의 물건에게 손을 까닥했다. 다가오라는 뜻이다. 그녀가 주인님께서 무엇을 시키나 싶어서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몇 발짝 가까이 다가오자, 벨린은 더욱 가까이 오도록 했고, 마침내 그녀가 침대 앞까지 붙어 서자, 별안간 그녀의 팔을 잡아채어 침대로 쓰러뜨렸다.

그녀가 벨린의 품안으로 쓰러지며 외마디소리를 냈다.

“아아, 주, 주인님!”

“정말 나쁜 년이었지. 너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악한 여자였어.”

“죄송해요, 주인님. 용서해주세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내 안목이 옳았어.”

벨린은 그녀를 침대에 뉘어놓고는 그 위로 누워 앉았다. 그녀는 저항을 하지 않았다. 마치 저항을 하면 벌을 받을까 겁나서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원하는 게 있어 가만히 있는 모양새였다.

“훌륭한 투자였지.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까. 자 이제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봐. 나는 네게 자유를 줄 수도 있어.”

“아, 아니요.”

아리엘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건 주인님께서 제게 주시는 가장 심한 벌이 될 거예요.”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아.”

벨린이 딱 잘라 말했다.

“설령 그 대상이 내 목숨을 구해준 여자라고 해도 말이야.”

“그럼 마음속으로….”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눈빛을 보이며 벨린을 바라보았다.

“간직하고 있어도 될까요?”

벨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녀의 얼굴로 천천히 입을 가지고 갔다. 순진한 아리엘은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꼭 감았고, 두 사람은 천천히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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