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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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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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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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2.1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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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53)

DUMMY

빈센초 데 란테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벌써 30년 전 일이구나. 제국의 수도 한 복판에서 네 어미에게 머스킷총을 가지고 직격을 날렸지. 그때 네 어미는 이교도 마법을 가지고 상당히 무서운 짓을 저질러버리고는 했어. 그때 궁전의 한쪽 첨탑이 폭삭 주저앉았지. 네 어미가 부린 데우스 머시기인가 하는 원소마법 때문이었지. 그럼에도 용케 다친 사람은 없었단다. 나 말고."

이전 시대의 모험담을 듣고 있는 벨린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내가 아무리 날고 기던 총사였다 해도 생판 처음 보는 마법을 난사하는 강력한 마녀에게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니? 내 생각에 키리네는 한 국가에 몇 명 있을까 말까한 연대급(regimental) 마법사보다도 갑절은 쌔 보였어. 이 말은 빌랜드어인데 마법사를 아직도 군대 편제에 넣는 빌랜드인들이 대마법사를 보고 머스킷보병 연대 이상의 위력을 발휘한다고 해서 만든 별명이지. 순수 마법사가 귀한 우리야 대마법사를 전쟁터에 투입시키는 그런 미친짓을 하지는 않지만 섬나라 청교도 놈들은 곧장 그런 짓을 하거든."

아버지가 잔을 마저 비웠다. 벨린은 차츰 흥미를 느꼈다. 생판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황당무계한 소리 같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런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히스파니아 제국의 국제적인 수도 아스티아노는 그런 일이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도시였다. 게다가 이 히스파니아라는 나라에서 총사인 아버지가 이교도 처녀를 얻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사건이었다.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이 이야기를 네게 해주면 네 어미가 화를 낼 게다. 서로 싸우게 된 데는 긴 사정이 있건만, 아무튼 이차저차 해서 나는 네 어미를 산 마르틴 광장까지 유인해서는 12파운드 중포로 날려버렸지. 그것도 바로 네 어미가 대포의 코 앞까지 도달한 거리에서 직격을 쏜 거야. 그건 정말 극적인 함정이었단다. 솔직히 그때 죽었길 바랬어. 중포 이상의 물리적인 충격을 방어할 수 있는 마녀는 없다고 여겼지. 그런데 네 어미는 살아 있었단다. 성벽을 뚫고 제국 도서관 담장에 쳐박혀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때 네 어미가 일시적으로 마력을 몽땅 잃어버리는 수모를 당했지. 좀 미안하긴 했지만 총사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슬쩍 붉은머리칼만 보이고 테이블에 업드려 자고있는 어머니를 살폈다. 그녀는 술에 좀 많이 취했는지 쿨쿨거리며 잠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자존심 상한 니 애미가 급히 출동한 황실 용기병들의 손에 묶여 생포당해서는 무릎이 꿇려 앉혀지는데, 세상에 놀랬다. 그렇게 예쁜 마녀일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 그 자리에서 네 어미는 라투니스어 통역을 통해서 자기네 나라 법도에는 전투에서 지면 노예가 되는 법도가 있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겠니?"

"그래서 잘도 드셨군요."

벨린이 중얼거렸다. 빈센초가 소리내어 웃었다.

"나는 그때 내 선택을 후회 안 한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야망을 이뤄본다해도 시간 지나면 다 허사가 아니겠냐. 나는 이미 모든 걸 경험해봐서 안다. 그런 것은 조강지처에 비할 바 아니야."

빈센초 데 란테가 술을 비웠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천천히 말했다.

"물론 네 어미가 최근에 하는 짓은 좀 심하긴 했지. 새로운 회춘술을 개발해서 10년이나 나이가 젊게 다닌다는 자체가 신의 섭리를 거스르겠다는 뜻이 아니겠냐? 네가 오년 동안 소식이 끊기고나서, 네 어미가 너를 찾아 방방곡곡 헤메겠다는 걸 내가 간신히 말렸지. 그건 늑대를 잡아다 도로 묶어두는 거나 다름 없는 짓이라고, 당신 아들 벨린은 히스파니아에서 가장 강력한 총사와 동방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마녀의 피를 타고난 놈이라고 말이야."

빈센초가 잠시 벨린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벨린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함정에 빠진 듯했다. 또 아버지에게 져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벨린, 나는 네가 지금껏 무얼 했는지 짐작한단다. 내가 옛날에 말한 적 있지. 너는 항상 내 손바닥에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러니 더 이상은 나를 속이려고 들지 말거라. 나는 네 애비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에 빠져있는지 네 눈만 봐도 알 수 있다."

벨린은 대꾸없이 가만히 있었다.

빈센초 데 란테는 아들이 한쪽 테이블 위에 올려둔 사브레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아들의 군도를 손으로 들어 만져보았다. 톨레도산 강철을 이용해 만든 대단히 훌륭한 검이었다. 밸런스도 완벽에 가까웠고, 곡선 또한 우아하고 날카로웠다.

검에 쓰인 글귀가 빈센초의 눈에 끌렸다.

'벨린 데 란테에게, 이 검을 받은 이는 짐을 위해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임. 이사벨 데 아라고른, 제국 섭정'

빈센초가 검을 빛의 입자에 비춰보며 감탄했다.

"대단히 훌륭하구나. 다니치산 검도 이보다는 못할 거다."

"저만을 위한 검입니다. 이 검을 받기 이전부터 저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지났죠."

벨린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가면은 집어던진지 오래라는 듯, 평소의 그와 다름이 없었다.

"아니다."

빈센초가 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권력 따위 말이다. 그건 일종의 늪지대나 다름 없다.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헤어나오기가 힘든 게야. 신의 가호 따위는 바라지 못하고 평생 저주를 받아야 한다."

벨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일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이 맛이 들었어요. 저는 적을 사냥하는 대가로 제 주인께 피를 맛보게 해드릴 겁니다. 그런 식으로 쾌락을 즐기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즐거워지기 시작했거든요."

빈센초는 할 말을 잃은 듯, 측은한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오랜 총사생활의 경험을 통해 선견지명이 생긴 그는 아들의 설득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말했다.

"네 어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아무리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정도로 비상한 머리를 지녔다 해도 네 어미는 이쪽으로는 쑥맥이란다."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벨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1년 전에 어머니의 선물을 다 써버렸죠."

"결국 그것 때문에 온 것이냐?"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벨린이 말했다. 빈센초가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망설이다 천장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말거라. 내게 아직 그 물건이 남아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빈센초가 넘겨 짚듯이 물었다.

"문득 이게 궁금하구나. 네가 집을 떠날때 데리고나간 그 늑대 녀석, 쭈는 어떻게 한 거냐? 이건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란다."

벨린은 그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대답을 망설이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구하는 대가로 바꿨죠."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빈센초가 술을 다 비우고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이 대화를 나는 사이 두 배는 더 늙어보였다.

빈센초가 물었다.

"좋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있을 셈이냐?"

"내일 당장 떠날 겁니다. 일이 바빠요. 아버지께서 도와주신다면 더 있을 필요도 없죠."

벨린이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좋아. 이것만큼은 명심하거라, 벨린. 너는 내 아들이다. 네가 설령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널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제 잠이나 자야겠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구나."

술에 취한 아버지가 테이블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어머니를 안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벨린은 조용히 포도주를 마저 비웠다. 이제 여흥은 끝난 듯 싶었다. 처음에는 이 여흥을 끝내기가 좀 망설여졌지만 막상 해치우고나니 마음이 편했다.

그는 거실을 밝히는 빛의 입자를 남겨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리엘이 짚단으로 만든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벨린은 쓰러지듯 그녀 곁에 누웠다. 란츠베르크에서 입은 전상이 욱씬거렸다. 그때 죽을 뻔했던 벨린을 구한 자코모 다빈치라는 그 의사는 술을 많이 마실 경우 후유증이 생길 거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그가 옆에서 새근새근 잠이 든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술에 취한 탓인지, 그녀와 같은 이미지의 누군가가 문득 떠올랐다.

'안젤라.'

벨린은 저주의 이름을 내뱉고서는 눈을 감았다. 그가 잠이 들기 전에 떠올린 마지막 생각은, 하필이면 그가 영원히 잊고싶은 뼈저린 기억의 파편이었다.

* * *

떠나는 길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벨린은 아침 일찍 아리엘을 깨우고 짐을 챙겼다. 일찍 일어나는 사냥꾼의 습성이 몸에 벤 빈센초 데 란테가 따라 일어나 마중을 나섰다. 두 부자는 무언의 협의를 한 듯, 사이프러스의 키리네를 깨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양자 간에 상처를 줄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빈센초가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부쩍 차가워졌다. 어쩔 수 없이, 실망의 감정이 그의 뇌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벨린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가 숨길 필요없이, 언젠가는 아버지도 알게 될 일이었다.

아버지는 벨린과 아리엘이 란테지방을 떠나는 길목에 들 때까지 따라나섰다.

얼마 후 갈림길에 이르자, 벨린이 모자를 벗고 아버지께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챙겨왔다. 소싯적에 네 어미가 내게 줬던 것을 좀 남겨뒀던 거란다."

빈센초 데 란테가 아들에게 탄약 가방을 하나 던져 주었다. 벨린은 그것을 열어보았다. 기름종이로 싼 머스킷 소총용 탄약이 다섯 발 들어 있었다. 그는 이 탄약들이 강력한 동방의 마법사인 사이프러스 키리네의 화신과 다름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벨린은 그것을 어깨에 둘러맸다. 아버지가 천천히 그에게 등을 돌렸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사냥꾼이 하루 사냥을 포기할 수는 없잖니. 다음에 꼭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럼 이만."

벨린이 말없이 아버지께 고개 숙여 절을 했다. 아리엘이 슬픈 얼굴로 벨린의 마지막 인사를 지켜봤다.

작별인사가 끝났다.

주인이 수도로 가는 길을 향해 몸을 돌리며 묵묵히 말했다.

"가자, 아리엘."

"네, 주인님."

아리엘이 대답했다. 그녀는 주인이 다시금 냉랑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벌써 목적을 달성했고, 이제 더 이상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몇 발자국 걸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을까. 별안간 등 뒤에서 빈센초 데 란테가 소리쳤다.

"몸 조심하거라, 벨린!"

그는 대답없이 갈 길을 떠났다.

앞으로 진행될 새로운 싸움에서 빈센초의 마지막 말을 지킬 수 있을지 벨린은 확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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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장 '란테 지방에서'가 끝났습니다. 2장부터는 뭐, 새로운 전쟁이죠.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닌 좀 새로운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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