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점 (18)
재임이 이상설과 안창호에게 적극적으로 나설 것은 주문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도 곧바로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재임은 가장 우선적으로 미 정부를 상대로 벌어지는 한인 단체들의 교통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밑에서부터의 정리는 각자의 이권(?)이 걸린 일이기에 아무리 한인교민회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봤다.
그래서 재임이 선택한 방법은 위에서부터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다시 트루먼 부통령과 만난 재임은 이제부터 미 정부의 창구를 한인교민회로 단일화해줄 것은 부탁했다.
“하하하~ 드디어 나서기 시작했구나? 언제까지 빼고 있으려는지 궁금했단다.”
트루먼의 핀잔 아닌 핀잔에 재임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빼고 있었다기보다는....”
“농담이다. 네 입장을 뻔히 아는데 뭐~ 아무튼, 이제라도 제대로 나서기로 했다는 다행이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니겠죠?”
트루먼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걱정하기에는 좀 늦은 거 아니니? 허허~ 괜찮아. 일선에서 혼란이 문제가 되었던 건데.... 앞으로 네가 확실히 중심을 잡고 해나갈 거라면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야. 마침, 상황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고....”
“상황이라면.... 일본말인가요?”
재임의 물음에 트루먼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떻게든 통제를 해보려고 하는데.... 도무지 먹혀들지 않네. 아직도 가능성을 열어두고는 있지만, 적어도 나는 부정적이야.”
“그렇다면....”
“아마도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재임의 미간이 찌푸려 들었다.
“유럽 전선의 상황도 좋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일본도 문제라면 우리도 곤란하지 않나요?”
“뭐~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나도 걱정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도 그렇게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테니까. 더구나 금수 조치로 인해 압박을 가하고 있기도 하고.... 정부 내에서도 아직은 통제범위 안에 있다고 예측하고 있으니까 조금 더 지켜봐야지. 오히려 문제는 유럽이야.”
“참전하기로 했나요?”
트루먼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 일단 대통령께서 뉴펀들랜드 오거스터 만에 있는 미국함정에서 처질 수상과 회담을 진행했거든, 일단 거기에서 영토의 불확대, 불침략, 무역과 자원에서의 기회균등, 경제협력, 공포와 결핍에서의 자유, 해양의 자유, 군비 축소, 집단안정보장체제의 확립 등 8개 항을 합의한 뒤에 대서양헌장이라고 발표를 하셨어. 아마도 이 헌장이 미국의 기본입장이 될 거야.”
“그렇다면.....”
“그래. 조만간 참전을 결정하게 될 것 같아. 여론의 동향에 따라서 일정의 변화는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 유럽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도버해협에 길이 막힌 독일이 소련으로 방향을 돌린 점인데....”
“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고 했죠?”
“바르바로사 작전이라고 칭했다더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1세의 상징이었던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에서 유래한 작전이라고 하던데.... 내 생각에 이 작전이 기점이 될 것 같아.”
“기점이요?”
“그래, 소련으로서는 날벼락 같은 일이겠지만, 우리로서는 시간을 번 셈이지. 영국에서 시선이 돌려진 틈을 타서 우리 대통령과 처칠 수상이 회담을 열고 이후 지원 방향까지 합의할 수 있었으니까. 반대로 독일로서는 비록 서부전선을 대부분 장악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영국이 건재한 상황에서 새롭게 소련을 상대로 전선을 두 개로 만들었으니, 전력이 분산되었다고 볼 수 있지. 만약에 이 상황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의 참전으로 반전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거야. 물론 아직은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겠지만 말이야.”
재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브루클린 프로젝트를 비롯한 미주 내 한인 문제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이에 세상이 급변하고 있었다는 점을 새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트루먼의 눈치를 살피던 재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흠.... 사실 독일은 잘 모르겠지만, 저희 사람, 아~! 한인교민회 사람들 말이에요. 아무튼, 그들 중에는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음.... 아무래도 일본과 상대해봤던 사람들이 많으니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제 느낌이에요.”
“그래, 아까도 말했잖아. 나도 같은 걱정을 하는 부류라고 말이야. 그래도 설마 무슨 일을 저지를까 싶다. 일본도 중국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가 우리를 상대해야 한다면, 전선이 두 개가 되는 셈이니 말이야. 상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런 일을 함부로 진행하지는 못하겠지.”
트루먼의 말에 재임은 쓰게 웃었다.
‘상식이 없는 이들이라고 말하던데.....’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아무리 자신이 루스벨트의 가장 큰 후원자 중의 하나이고 트루먼과 친분이 깊다고는 해도 미국 정책에까지 관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재임은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미주 한인 문제는 이제 한인교민회의 통해 주세요. 충칭에 있다는 임시정부와도 곧 협의에 들어갔으니 대표성도 확보할 수 있을 거예요.”
“알았다. 하지만 아직은 미국 내 친일인사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이고 말이야. 어느 정도 배려는 해줄 수 있지만, 너무 정치적인 문제에 나서는 것은 곤란해.”
“네. 저도 그렇고 싶지는 않아요. 일단 미주 한인들의 문제에 집중할게요. 다른 문제는 좀 더 상황을 보기로 하죠.”
“상황을 본 다라.....”
“왜 그러세요?”
문득 재임을 바라보던 트루먼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정말 제대로 나설 셈이로구나?”
“네. 그동안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어디까지 바람을 따라줄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도 책임져보려고요.”
“하하하~ 그래 잘 생각했다. 그래도 네가 미국인이란 점을 잊지 말렴. 알았지?”
“그럼요. 저가 누구겠어요.”
“그래, 그럼 된 거다. 참! 미리 귀띔해주는 건데.... 참전에 대비해서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거다.”
“준비요?”“한인들 말이야.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독립부대 형식이 될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니, 사람들을 지켜지고 살리려면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거야. 물론 우리도 훈련을 해서 보내겠지만.... 너도 경험해봐서 알잖니?”
“.... 그렇죠. 전쟁은 언제나 시간을 부족하게 만들죠.”
트루먼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안 할 거라면 모르겠지만, 하기로 했다면 어느 정도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거야. 무슨 일이 있으면 알려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고맙기는..... 우리의 가장 큰 후원자를 챙기는 일인데, 나야말로 고맙지.”
눈을 찡긋한 트루먼은 이내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재임은 여러 상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준비해야 할 때란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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