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1)
미국의 석유금수 조치는 일본을 점점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초기 만주사변을 일으켜 빠른 시간내에 잘 마무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은 중국본토 역시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한다면, 쉽게 승리하고 점령하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중국 본토는 만주와는 달랐다. 전쟁이 전혀 예상같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쟁 초기는 예상대로였다. 일본은 중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중국군을 격파해가면서 쉽게 점령하면서 점령지를 늘려나갔다.
문제는 중국의 넓은 지역이었다.
일본이 아무리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했다고는 해도 근본적으로 중국의 넓은 지역을 하나하나 점령하기에는 인적, 물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100만명이 넘는 전력을 중국에 투사했지만, 넓은 면적의 농촌과 소도시까지 모두 일일이 점령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불러왔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전선에서 패한 중국이 전쟁의 양상을 유격대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전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전력에서 밀리는 중국은 게릴라전을 통해서 지속해서 일본의 전력을 소모시켜면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고 있었다.
문제는 중국과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중일전쟁은 일본의 계획과는 다르게 마치 늪처럼 전쟁물자를 소모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와중에 설상가상으로 미국이 중일전쟁을 문제삼으면서 고철을 시작으로 석유류에 대한 금수 조치를 취하자 일본은 석유재고부족이라는 이중문제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그동안 모든 석유류의 수입을 미국과 인도네시아, 특히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석유금수조치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전력에 한계를 가진 일본으로서는 그동안 압도적인 화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승리를 이끌어 왔는데, 당장 석유가 부족하다면 비행기와 탱크, 배의 운용시간을 제한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는 어쩔 수 없이 기동력과 화력, 즉 전력의 공백을 불러와 가뜩이나 지지부진한 전선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어떻게든 석유를 확보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였다. 미국이 제시한 석유금수조치 해제의 전제조건인 중일전쟁의 중단과 철수는 일본으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일본은 어떻게든 최대한 빠른 시간내에 중일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만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부득이 새로운 석유공급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주목한 곳이 바로 동남아시아, 즉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였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이미 일본의 석유 일부를 수입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고 석유뿐만이 아니라 고무 등의 풍부한 자원을 가진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현실적으로 석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문제는 미국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인도네시아에 전력을 투사하고 효과적으로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위치한 필리핀에 거쳐야했기에 이곳에 주둔한 미국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중국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일본 수뇌부는 결국, 미국과의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동남아시아의 유전을 확보하는 목표로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남방작전을 수립하였다.
이 당시 일본의 생각은 이랬다.
미국과 어느 정도 마찰이 생긴다고 해도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여 어떻게든 석유를 확보하고 최대한 빨리 중국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면, 이런 지역적 우위를 바탕으로 차후 다시 미국과 협상을 벌여서 사태를 잘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사실 이는 미국이란 나라와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일본의 오판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사실 서로 능력과 역량을 오판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미국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남방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필리핀도 필리핀이었지만, 실제로 가장 거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바로 미국 태평양 함대의 존재였다.
작전을 총괄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남방작전 이전에 미국 태평양 함대를 먼저 공격하여 전력을 줄여놓지 않으면 작전을 수행하는 내내 골칫거리가 될 것이 주장하면서, 선제조치로서 미국 태평양 함대의 중요거점인 진주만의 공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미국 태평양함대의 거점인 진주만을 공격,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력에 타격을 줌으로서 이후 남방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미국이 필리핀을 비롯한 태평양에 지원을 하는 것을 방해하겠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미국으로서도 필리핀이라는 아시아의 거점을 잃을 경우에 거리적인 문제로 인해서 태평양에 직접 전력을 투사하기 쉽지 않은 데다가 진주만까지 공격을 받고 태평양 함대에까지 큰 피해를 입는다면 이후 태평양으로 전력을 투사하는 것이 지체되는 것을 넘어 어려운 여건이 될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진정한 의도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의 거점이나 다름없는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미국에 경고하고 동시에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하여 이후 벌어질 미국과의 전면전이나 동시다발적인 미국의 공격을 잠시마다 막아 시간을 버는 것이 진정한 목표였다.
이는 사실상 중국에서의 철수를 고려하지 않는 일본으로서는 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한 유일한 카드라 볼 수 있었다.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내에서도 미국과의 전쟁에 두려움을 가지며 미국의 역량을 무시하지 말라는 이들과 이 이상 전선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수뇌부를 장악하고 있던 군부는 이런 의견을 모두 묵살했다. 군부는 그동안의 전쟁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미국과의 전쟁에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진주만 공격 작전을 감행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진주만에서 북서쪽으로 370km일 떨어진 곳에서 일본의 연합함대가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항진하고 있었다.
모든 공격 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공격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진주만에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최신 첩보에 출격을 망설이고 있었다.
당시 연합함대를 이끌던 나구모 제독은 미국이 공습을 눈치채고 항공모함을 진주만이 아닌 다른 곳에 배치한 것이 아니냐는 걱정을 했지만, 이제와서 더 이상 공격을 늦출 수는 없었다.
나구모 제독은 일본 항공대의 출격을 지시했다.
오전 6시경 1차 공격대가 항공모함을 이륙했고 한 시간 뒤에 2차 공격대가 연이어 일본 항모를 이륙하여 오아후섬의 진주만을 향했다.
당시 레이더가 없던 일본기들은 미국에서 직수입한 크루시(Kruesi)라는 라디오 방향 탐지기의 인도에 따라서 진주만으로 향하였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본기들은 호놀룰루의 라디오 방송이 제공하는 기상정보도 이용할 수 있었다.
오전 7시 30분 한 대의 낙오도 없이 오아후섬의 남서쪽에서 진주만 방향으로 크게 우회하여 접근한 일본 항공대의 비행기들은 비행 총대장 후치다의 두 발의 신호탄을 기점으로 진주만 공격을 준비하였다.
강하폭격대는 고도를 높여 급강하 준비를 하였고, 뇌격대는 고도를 낮춰 어뢰 발사 준비를 하였다.
더불어 수평폭격대는 맞바람이 좋기에 바람 아래쪽에 위치하고 제로센 제공대는 속도를 올려 앞으로 나가 제공 작전공격준비를 함으로써 진주만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오전 7시 49분 후치다 비행 총대장은 멀리 눈앞에 보이는 진주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페하 만세), 전군 돌격!!”
이 공격 신호를 기점으로 일본 항공대는 평화로운 진주만의 일요일 아침을 유린하였다.
이후 4여년간의 걸친 태평양 전쟁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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