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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퓨전, 전쟁·밀리터리

세뇨리따
작품등록일 :
2013.04.05 22:16
최근연재일 :
2015.03.0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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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06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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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4

DUMMY

"벌써 몇일째지? 그들만 믿고 이대로 방관하는 것이 정녕 옳은가, 반 힐?"


세련된 수염이 인상적인 말끔한 중년남성이, 탁자앞에 앉아 점잖은 투로 으름장 아닌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반힐이라 불리운 자는 방의 온화한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장을 한채로, 중년남자를 등지고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밖은 별일 없다는 듯 평온한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반 힐은 잠깐 딴생각을 하는듯 하다가, 늦게 중년남성의 말에 반응했다.


"공公 이라는 호칭을 빼먹으셧소. 베.르.마.닐. 공!"


반쯤 고개를 돌려 말하는 반 힐 이라는 자는 꽤 젊은 인상이었다. 찬란한 금장발 머리칼에 우직하고 융통성없어 보이는 고집스러운 얼굴이었다. 사람의 기준 으로 상당히 준수한 외모임이 분명했다. 단지 얼굴의 왼쪽면만 보였지만 그정도는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었다.


"여전히 고지식하군, 반 힐 '공!'"


중년남자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유독 '공' 자를 힘줘 발음했다. 그러나 반힐 이라는 자는 아랑곳 않는듯 입을 열였다.


"왕이 되려는자가 자국의 병사를 믿지 못해 쓰나.. 믿으시오. 더구나 그들을 지휘하는 게르티스는 내가 가장 신용하는 부하중 하나요. 숱한 전장을 거치며 살아남은 자. 그의 경험으로 비춰볼때 인물 추격따위의 임무나 맡기에는 그 그릇은 아깝지."


반 힐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아마도 게르티스가 추격임무 '따위' 에나 나선것이 못 마땅한 듯한 눈치였다.


"뭐,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어보지. 천하의 반 힐 공께서 하시는 일이니 말이야. 그보다 자네 그렇게 처세술이 서툴러서야, 출세할수 있겠나? 난 곧 왕이 되실 몸인데 말이야. 잘못 보였다간 출세는 커녕 목이 달아날텐데?"


베르마닐이 차를 홀짝거리며 빈정거리는 투로 도발해왔다. 그러나 반 힐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당신 뜻대로..!"


그렇게 말하며 다시 반쯤 고개를 돌려 베르마닐과 마주친 반 힐의 눈은 오싹하도록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입으로 나온말과는 다르게 '할수있으면 해보라' 라는듯한 눈이었다. 베르마닐은 한동안 그 눈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거참.. 농이라곤 통하질 않는 자 로구만."


"시시덕 거리기엔 나는 할일이 많은 사람이요."


"하이고, 어련하시겠나. 선왕의 신뢰를 한몸에 받던 분이니 말이야."


여전히 차를 홀짝이며 비아냥 거리는 베르마닐의 이번 발언은 조금 다른 반응을 끌어낼수 있었다. 반 힐이 노골적으로 살기를 풍기는 한눈으로 베르마닐을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 거렸다.


"함부러 선왕을 욕보이지 마시오! 설령 그분의 친육이라 한들 머리간수가 힘들어질 터이니!"


"...거참."


새삼 베르마닐은 한숨이 나왔다. 이 썰렁하기 짝이없는 남자가 유일하게 건드리면 반응하는 역린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 이었다.


"형님을 그렇게 따랐던 자가, 선왕의 유지를 따르지 않고 공주를 반 하는 모반에 참여하다니 당최 이유가 궁금 하구만. 뭔가 꿍꿍이가 있는게 아닌가? 막판에 가서 내 목을 뎅강 날려 버린다거나 말이야."


"하...당신은 스스로가 벌인 일을 모반이라고 인정하는가?"


피식.


"새삼 스러울 거 뭐있나 반힐. 모반의 주동자 끼리만 있는데 애써 명분 찾을 이유는 없잖아?"


"당신의 싸구려 야망과 동급 취급 하면 곤란하외다. 베르마닐 공."


"하핫, 싸구려든 뭐든, 그걸 묻는게 아니지. 그래서.. 어쩨서 공주가 아니라 나를 택한거지 반힐공? 자네가 그쪽에 붙었다면 양상은 판이하게 달라졌을텐데."


반힐은 좀처럼 쉽게 입을떼지 않았다. 잠깐 망설이다 무겁게 입을 연것은 몇초 후였다.


"내가 선왕을 섬겼던것은, 그 말이 아니라 의지였소."


베르마닐은 별 기대하지 않았던 진지한 답이 나오자 잠깐 벙 찐 표정을 지었다. 반 힐은 그 표정을 볼수 없었기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떠받든 것 은 뭔가 하라 명하는 자잘한 말이 아니라, 나라를 키우겠다는 원대한 의지였고, 여전히 나는 그분의 말이 아닌 의지를 잇고 있소."


"....."


"당신은 분명히 선왕善王의 그릇은 아니외다. 방탕하고 직설적이며, 거리낌 없고 원칙을 싫어하지. 스스로의 죽음을 '뎅겅 목이 잘란다'느니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하고 힘을가진 부하에게 거리낌 없이 '배신할텐가?' 라고 우회하는 것도 없이 직접 묻지. 욕망을 표출하는데 한점 부끄러움이 없으며, 스스로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지만 반성하거나 후회하는 기색따윈 비추지 않소. 오히려 '잘못' 이 필요한때엔 서슴없이 그 '잘못'을 행사하지. 뻔뻔하기론 짝이없고 오만하기로는 따를자가 없지."


".. 그래서?"


분명 태반이 자신에대한 모욕이건만 베르마닐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다음 말을 재촉했다.


"나라를 키우는것은 선왕善王의 재능이 아니오. 자잘한 명분에 휘둘리지 않는 강인한 패왕이 나라를 키우지. 주변의 평판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듯이 온갖 도리를 어긋난 정치와 전쟁을 하지만 힘과 지혜만 뒷받침 된다면 그보다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왕의 재능도 없소."


"그래서, 나는 못된 놈 이니 못된짓 으로 나라를 키울것이다?"


"인정할 수 밖에. 그런면에 있어서 오로지 왕의 자질만 놓고 보자면.. 그대는 선왕先王 이상일테지."


"...,.."


베르마닐은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실성한듯이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하하! 이럴수가, 고작 신하된자가 감히 왕의 자질을 평가할뿐만 아니라 저울질까지 하다니, 앗하하하하!"


그는 진짜 미친사람처럼 웃어댔다. 그런 반응에 반 힐은 민망할만도 하건만 부동의 자세를 유지했다. 곧 거짓말처럼 장내에 퍼지던 웃음이 멈추더니 베르마닐은 웃느라 떨궜던 고개를 반쯤 치켜들었다.


"감히!?"


그리고 그의 눈은 지금까지의 베르마닐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만큼 강렬한 위엄과 살기가 섞여있었다. 그러나 반힐은 위축됨 없이 여전히 고개를 살짝만 돌려 그의 눈을 마주했다.


"...."


다시금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베르마닐은 지그시 눈을 감더니 다시 웃으며 말했다. 실로 놀라운 표정변화였다.


"음하하하핬, 내가 반힐이라는 남자를 그래서 신뢰할수 있지. 사람이 아닌 나라에 충성하며, 그에 도움이 되는자는 섬긴다는 명목으로 나라를 발전시키는데 이용한다. 그게 설령 왕의 이름을 달고 있더라도 말이야. 그래서 자네는 묘한 신뢰를 주지."


홀짝.

베르마닐이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능력있는 자에겐 등을 돌리지 않는다는 믿음."


의미심장한 미소까지 띄운채였다. 반힐도 이번에는 피식 웃으며 응대했다.


"..아까는 배반하지 않을테냐 묻더니, 이번엔 신뢰한다니. 퍽이나 믿음을 주는 말이군요."


"뭐, 내게 믿는 수밖에 도리가 있나? 믿지 않으면 자네 허리춤의 칼이 내 머리통을 뎅겅 날려버릴 텐데 말이야."


홀짝.

버릇처럼 차를 홀짝이는 베르마닐의 말에 반 힐은 새삼 자기의 허리춤에 체여진 검을 내려다 봤다.


"...."


과연, 귀족의 자택에 객 되는자가 칼을 들여 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하물며 그것이 왕이될 자의 집무실인 바에야! 원칙상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반힐의 강박증 처럼 칼을 챙겨다니는 버릇을 알고있던 베르마닐은, 허리춤에 칼을 찬 그를 아랑곳 않고 안으로 들였다. 그것만으로도 베르마닐이 어떤형태로든 그를 신뢰 한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만큼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도 없는데 말이야. 곱상한 외모나 비상한 재치, 사리를 분별할줄 아는 관념이나.. 그냥 위정자로서 편하게 펜이나 굴리며 사교계나 전전하며 여인을 울리는게 자네한테는 더 어울리지 않는가?"


"......."


척.

그말에 반응하듯 반힐은 처음으로 몸을 돌려 베르마닐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피식. 반힐은 싱겁게 웃었다.


"새삼스러운 말을 하는구료. 베르마닐공."


빛을 등져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반힐의 오른쪽 얼굴이 베르마닐을 스쳐 출구로 나가려는 순간 모두 드러났다. 반 힐의 오른쪽 안면은 세로로 눈을 관통하는 커다란 흉터가 나있었다.


"........"


반 힐이 나가고 혼자남은 집무실에서 베르마닐은 독백처럼 웅얼거렸다.


"거참.. 저정도 외모면 흉터 하나쯤은 매력으로 소화해낼수 있는데 말이야.."


베르마닐은 아깝다는듯이 혀를차며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기사, 녀석이 가진 어떤 재능도, 전쟁의 재능과 맞바꾸기에는 아까울테지."


베르마닐은 다시금 음흉하게 웃으며 차를 홀짝일 뿐 이었다.







반 힐은 공작의 집무실을 나와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곳은 지금껏 있던 온화한 방과는 판이하게 다른 감옥이었다. 간수들의 경례를 받으며 반 힐은 감옥의 꽤 깊은곳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한곳에 멈춰섰다. 그러자 의외로 그를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여~ 이게 누구신가, 반 힐 경 아니신가? 바쁘신 몸께서 이런곳까지 행차를 하셧는가?"


목소리는 제법 늙그수름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죄수라고는 생각키 힘들만큼 고급스러운 차림의 노 신사가 앉아 있었다. 노신사는 반갑게 인사하고는 스스로

'아차!' 하며 놀란 행세를 했다.


"아이고, 내 정신좀 보게. 늙은 몸이 과분한 옥살이를 했더니만, 정신이 나가는군 그래.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공작 작위를 받으셧었지요?"


온화하게 말을 이어가던 노신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악마의 화신처럼 바뀐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대가 배신한 선왕에게서 말이외다!!!!"


노신사의 노호성이 감옥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반힐은 차가운 눈으로 노신사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 배신이라니 그건 듣기 거북하군요. 페르바체님. 왕의 명을 어겼을 지언정 그 의지로부터 등돌린것은 아니거늘."


"언제나 올곧은 소리만 하던 놈이 배반을 하더니만, 궤변이 늘었구나!"


"...그럼 내가 어쩨야 했소?"


"뭣?"


돌연한 질문에 노신사는 당황한듯 했으나 이내 이어지는 물음에 당당히 소리쳤다.


"내가 어찌해야 했는가 묻고있소."


"그걸 질문이라 하느냐!?"


"귀공께서 말하고자 하는바를 모르진 않으나, 또한, 귀공이 이나라에 바쳤던 충성과 정치적 공헌을 모르지 않으나, 귀공이 나라 안에서 뛰어나고 노련한 정치를 펼쳤던만큼, 나라밖에서 더럽고 잔인한 전장을 전전하며 맹목적으로 싸움만 해온 무식한 이 몸보다 모르는 것 도 있는 법이요."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으려는것이냐?"


노신사,페르바체가 반힐을 노려보며 으르릉 거렸다.


"만일 귀공의 말처럼 내가 왕녀님의 편에 섰다면, 왕녀님 께서는 대륙에 유일한 왕비가 되셧을테지요."


"그래서, 이놈! 여인을 왕으로 섬기는것이 그리도 못마땅 하더란 말이냐!? 그게 선왕을 배반한 이유냐는 말이다!"


"...그녀가 온실속 화초마냥 곱게 자라며 사교적 역량을 키워왔던, 여느 나라의 공주들과는 다르다는걸 알고 있소. 또한 선왕못지 않게 선한 통치로 민심을 바로하고 평온한 정치를 펼칠 인물 이라는 것 도 역시 알고있소. 만약 모반이 일지 않았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선왕의 말을 따라 그녀에게 충실히 나를 바쳤을거요."


"하, 퍽이나 믿음이 가는 변명거리 로구만."


"비아냥 거리지 마시오. 모반은 일어났고, 세력은 강대했소."


"허나 네놈이 똑바로 판단했다면..."


"알고있소. 그게 똑바른 판단인가는 보류해 두겠으나, 아까도 말했듯 만약 내가 왕녀의 편에 섰다면, 어려운 싸움이 되었던들, 결국은 왕녀가 이겼을테지. 하지만 그렇게 형제를 서로 죽이며 얻은 왕좌가 무에 의미있소? 또 의미를 따지지 않는다 한들 체르바키의 왕조가 얼마나 유지 되었을 것 같소?"


"...."


"당신은 전장의 끔찍함을 모르오.'적' 이라는 이름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지만,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죽이는게 유쾌할수는 없는법이요. 하물며 그게 호형호제 하던 가족같은 자들끼리의 싸움 이라서야..!"


옳은 말이었다. 내전이란 이득없는 소모였다. 결코 일어날수도 일어나서도 안되는 가장 최하의 싸움이었다. 내전이 일어 한쪽이 이겨 권력을 쟁취한다 한들, 그것은 나라 안에서의 이야기였다. 나라 밖에는 진짜 적들이 우글거리며, 약해진 나라를 어떻게 삼킬까 하는 궁리를 하고 있었다. 만약 반 힐이 왕녀측에서 싸웠고, 그렇게 새로운 왕비를 세운다 한들, 그들에게 있어선 힘들게 얻은 왕좌지만, 주변에서보기엔 먹기좋게 나눠진 빵조각에 불과했다. 반힐은 진정으로 선왕을 위한 길이 아닌, 나라를 위한 길을 찾은것이다. 그 진심을 모를리는 없기에 페르바체는 조금 누그러든 기색으로 그러나, 여전히 으르렁 거리며 물었다.


"그게 네가 그 못나고 간악한자를 택한 이유인가?"


"..그를 욕하는것은 상관없소. 나또한 당신 못지 않게 그를 욕하고 비판하지. 그러나 함부러 그를 속단하고 과소평가 하지 마시오."


"......"


"능력이 없는 자 였다면, 이만큼도 이루지 못할 일이였소. 당신은 내가 마음을 돌려 베르마닐의 편에 섰다고 생각 하겠지만, 베르마닐 이라는 자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치밀하고 교활한데다, 겁이 많아 좀처럼 스스로 나서려 하질 않아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일을 벌리지 않는 사람이오. 그는 애당초'나' 라는 적은 신경 쓰지도 않았을거요. 그의 모반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할지를 내심 짐작하고 있었을 테지요. 분명한것은 그가 당신이 알고있는, 그저 형의 힘을 업고 여기저기 깽판 치고 다닐 뿐이던 그 양아치 베르마닐은 아니라는 것 이오. "


".. 그가 스스로를 별거 없는 사람 이라도 되는 것 처럼 연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연기라고 하기는 표현이 틀리오. 정확히 말하면 남들에게 유능해보일 필요가 없었을 뿐 이고, 그저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체우던 남자였던 것 은 분명하지."


"...."


"귀공은 이일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모반이라고 보시오?"


".. 아니란건가?"


"글쎄, 적어도 내가보기엔, 우발적으로 일어난 모반치고는 너무 준비가 잘되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소. 그가 유능해 보일 필요가 없다고 느낀것은, 자신이 선왕의 후계자임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 반대 였는지도 모르지요."


"...자네가 내 머리와 가슴을 싸늘하게 할 요량으로 하고있는 말이라면, 인정하지. 자네는 매우 성공적으로 일을 수행하고 있네. "


"흥미가 생겼다니 다행이군요. 그가 느꼇던 확신은 오히려 '자신은 후계자가 되지 못할것' 일 거라는 거요."


"....선왕께서는 주살 되신게 아니네."


"그가 죽였다는게 아닙니다. 적어도 그는 선왕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만큼은 갖고 있었소. 다만 공주에겐, 조카라는 친육의 감정을 좀처럼 못느꼈을 뿐이지. 만약 그가 선왕을 주살할 만큼 인정이 없는 자였다면, 공주는 모의 과정에서 이미 죽었을 테지요. 더구나 그런일이 일어났다면, 나라의 조낭은 둘쩨 치고 내가 먼저 그자의 목을 베었을테지."


"....."


"대외적으로는 그가 왕이 될거란 설이 가장 유력했소. 모반이 모반인줄 아는 몇몇 고관대작들 께서는, 그가 왕위를 얻지 못했다는 분노에 우발적으로 일으킨 모반이라고 생각하지만, 공주의 음모를 조작한다는 것은 그렇게 짧은시간에 일어날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요. 그는 오히려 자신이 왕이 될거라는 그 대외적인 추측을 이용했소. 그가 의심받지 않기 위해선 그에겐 모반 따위를 꾸밀 시간은 없던것처럼 보여야 했소.

모두가 그가 왕이 될 거라고 믿는사이, 모순되게도 그 본인만큼은 자신이 왕이 될수 없으리라는 것 을 확신하고, 시간을 번것이오. 그 반전이 오히려 그를 보다 강한 왕으로 만들테지요. 그가 그냥 왕좌에 앉았더라면 할수없었던 일을, 모반 이라는 행동을 빌어 할수 있게 되었으니까."


"..무슨 소리지?"


"반대파 숙청!"


"...!"


"알고있겠지만, 당신을 선두로, 베르마닐의 집권을 그다지 좋지않은 시선으로 보는 무리들이 있었소. 나역시 그 무리중 하나였고. 대체로 그 무리들은 선왕과 나라에 대한 충정이 깊은자들 이었소. 전쟁을 싫어하고 변혁을 좋지않게 받아 들이는 온건파의 무리들.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높은 신분과 기득권을 갖고있어서 왕이 된다해도 건드리기 껄끄롭지. 그가 만약 왕의 유언을 따라 왕좌에 앉았다면, 그 무리들을 숙청하려 해도 명분이 없기에 불가능 했었을 거요. 그러나 그는 자칫 위기가 될수도 있는 상황을 기회로 빌어 공주에게 선왕 음해의 중대한 누명을 씌우는 동시에 그녀를 돕는것은 반역이라는 명분으로 순도 높은 온건파를 옭아냈소."


"......."


페르바체는 좀처럼 입을떼지 않았다. 반신반의 하는 듯 한 모습이었다.


"귀공께서는 내가 너무 확대해석 하고 있다고 생각 하시오?"


"...아니란 말인가?"


"현실을 직시 하시오. 지금 상황이 결국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시오. 그에게 남은것은 그를 지향하는 강경파 들이거나, 적어도 그에게 잘보일 필요를 느끼는 알량한 무리들이오. 결국 그의 왕권에 제동을 걸만한 그 누구도 남아있질 않소.그나마 그의 폭주에 제동을 걸만한 가장 유력한 사람이 고작해야 나 뿐이외다."


"...."


"그렇다고 내가 뭔가 할거란 착각도 접으셔야 할겁니다. 애시당초 그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할 만한 그릇 이었다면, 그리 큰세력을 일으키지도 못했을 것이고, 진작에 그를 베어 왕녀에게 왕좌를 바쳤을 것 이오. 그러지 않았다는것은 난 그 그릇의 선악을 떠나서, 그 크기를 인정 했다는 것이오. 인정할수밖에 없소. 그의 왕으로서의 자질은 선왕도, 공주도 넘을수 없소."


"....."


페르바체는 좀처럼 반박하지 못했다. 반 힐의 말이 맞다면 정말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가 왕권을 잡는다면, 분명 나라는 강해질것이다. 선왕도 공주도 해내지 못할 일을 해내리라. 그러나 그는 확신할수 없지만 은근히 믿고 기대는 바가 있었다.


"일찍이 선왕께서는 그 본신의 왕으로서의 자질은 둘쩨 치더라도,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갖고 계셧다."


"...."


이번에 침묵을 지킨것은 반 힐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판별하고 골라쓰는 눈이었다. 이 나라가 약해질데로 약해진 선왕대에도 유지된것은 온전히 그 힘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지.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가 여전히 여기 있지 않나?"


그순간 반 힐은 마음속 싸늘하게 올라오는 무언가를 느꼈다.


"힐데군트. 성조차 없던 미천한 아이에게 전신戰神의 이름을 하사하셧다. 최강의 가문이었던 힐데군트의 대가 끊기고 처음으로 그 이름을 받은자가 미천한 평민 고아라니.역사에서도 전례를 찾아볼수 없는 파격적인 인선 이었다. 주변에 반발이 엄청났으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에 걸맞는 무용으로 순식간에 안으로는 기강을 잡아 군을 추스르고 밖으로는 승전보를 울려 힘을 쌓았다. 곧 그는 체르바키에 없으면 안될 존재가 되었다. 명성을 잃었던 체르바키 기마병단의 부활을 만들어낸 장수였지."


".. 내마음을 괴롭게 하려던 거라면 성공하셧소이다. 그러나 품은 뜻은 변함이 없소."


"호라, 마음이 아픈줄을 알면 여전히 힐데군트의 이름을 등에 지겠다는 것. 선왕의 업적중 가장 큰 증거로서 살아서 역사를 쓰겟다는 것이 아닌가? 힐데군트 반 힐 이여."


"..그것은 등으로 하사받은 이름이 아니오. 선왕께서 칼로 심장에 세겨주신 이름. 지울레야 지울수없고 씻을레야 씻을수 없는 운명 그 자체요."


"그렇다면 그대도 인정하지 않는가? 선왕은 사람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단 한번도 실수한적이 없으셧지. 직접 이루신 이렇다할 업적이 없었는데도 그분을 칭송하며 마음 속 깊은곳 에서 부터 섬기는 자들이 있는 이유는 오로지 그 능력 때문 이었다."


"...."


"그런 그분이 내리신 결정이다. 왕비라니! 그런 터무니 없는 결정을 내리신것도 나도 그대도 보지못한 어떤것을, 왕녀님으로 부터 발견하신 때문 이리라! 언제나 그런 터무니없는 중용을 하셧고, 자네 또한 가장 그러 했던 경우였다. 그리고 결국 그 터무니 없는 선택은 안으로는 방패가되어 나라를 지키고 밖으로는 외적을 견제하는 칼이 될자를 길러 내셧지. 그런데 그대는 어쩨서 선왕의 결정을 믿지 못하는가?"


"...그녀가 비범하다는 것은 알고있소. 또한 선왕께서 내가 본 그 이상의 뭔가를 봤으리라는 믿음도 어느정도는 갖고있소. 사람을 본질부터 볼줄아는 선왕이 베르마닐 그자가 독립적인 힘을 갖지 못하도록, 정계의 중심에서 최대한 떨어 뜨려 놓으려 한것도, 베르마닐 그자를 파악하셧기 때문일테지."


"그런데?"


"하지만 베르마닐은 그런 선왕의 눈마저 속였소. 그 본질은 파악 당했을지 몰라도 그 그릇의 크기는 본질이 파악당한 순간 꽁꽁 묶어서 감춰버렸지. 결국 선왕이 생각했던것 이상으로 베르마닐은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잇엇고, 그것은 선왕조차도 보지못한 그 이상의 그릇을 베르마닐이라는 자가 갖추었기 때문이란거요."


그 말을 끝으로 힐데군트는 몸을 돌렸다. 그또한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페르바체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만약...!"


멈칫.


"만약에 그녀가 나나 너. 그리고 베르마닐이나, 그 선왕조차도 포착해내지 못했던 자질을 갖고 있다면.. 그렇게 판단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대는 어찌할텐가?"


힐데군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가만히 페르바체를 응시했다. '별소리 다하는군' 하고 말하는 듯한 시선 이었다.


"..그럴수 없을겁니다."


"어찌, 어찌 그리 확신하지!?"


"그녀에게 보낸 추격대의 대장은.."


힐데군트는 다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마치 사형선고를 하듯 죄책감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듯이.


"게르티스입니다."


"게르..!"


페르바체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이내 허탈하게 웃으며 꺼낸말은..


"허허,사람하나 쫒는것치고는 과한 노력을 했구만."


"나또한 그리 생각 하오만, 베르마닐은 그것 마저도 여전히 석연치 않다는 표정이오. 이번일에 내가 직접 나선다 한들 그리 놀라울건 없을 지경입니다."


"후우... 그런가."


그리고 이내 무심하게 발걸음을 옮기려다 다시 멈칫 하며, 희망을 상실한 듯한 페르바체를 향해 한마디 웅얼거렸다.


"그래도 만약 그녀가 게르티스로부터 살아남아 그 이상의 그릇임을 증명한다면.."


반힐은 말했지만, 페르바체는 그 웅얼거림이 너무 작아서 듣지 못한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말을 마음속으로 삼켜야했다.


'조금은.. 기대해볼까?'


힐데군트는 마음속에 이는 작은 이변의 싹을 지우지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싹을 키울지 지울지는, 그가 아니라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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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료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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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4 +2 15.03.02 312 10 10쪽
23 23 +1 15.02.27 209 11 12쪽
22 22? +2 15.02.25 195 7 8쪽
21 21 +3 14.03.10 193 7 17쪽
20 20 13.05.22 370 11 18쪽
19 19 +2 13.04.18 876 11 16쪽
18 18 +1 13.04.15 546 7 10쪽
17 17 13.04.11 1,276 11 17쪽
16 16 +1 13.04.09 1,209 11 26쪽
15 궁지에 몰린 토끼 13.04.06 1,158 11 15쪽
» 14 13.04.06 1,028 9 23쪽
13 13 13.04.06 973 8 8쪽
12 12 13.04.06 1,036 7 13쪽
11 11 13.04.06 1,669 7 21쪽
10 10 13.04.06 1,448 10 18쪽
9 9 13.04.06 1,484 12 14쪽
8 8 13.04.06 1,195 11 16쪽
7 허무하게 바스라지다 13.04.06 1,250 11 9쪽
6 6 13.04.05 1,265 15 10쪽
5 5 13.04.05 1,259 14 11쪽
4 4 13.04.05 1,368 11 11쪽
3 3 13.04.05 1,568 12 16쪽
2 2 13.04.05 1,747 17 10쪽
1 1 +1 13.04.05 2,135 20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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