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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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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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27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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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DUMMY

에단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면 눈앞의 사내는 기사단의 실질적인 일인자라고 했었던가? 다른 이였다면, 적당히 봐주고 졌을 것이다. 어차피 승률에는 들어가지도 않는 번외 경기였으니까. 문제는 저 상대가 자신이 라제칸의 등대지기였던 시절, 한 번 쓰러뜨린 적이 있었던 사내라는 것이었다.


사실은 죽일 작정이었다. 글렌 아치볼트와 싸운 것은 샤를리즈와도 만나기 전인 10년 전의 일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면, 그는 아직까지도 젊다. 아무리 많이 봐줘봐야 서른 살인 그의 외형이다. 아마도 이름을 날리던 글렌 아치볼트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 것은 에단이다.


그러니 그가 에단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애초에 그를 알아보고 도전을 하러 온 것이었다. 마치 벼르고 있었다는 듯. 10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 인간은 비정상적인 존재이다. 똑똑한 여자를 마녀사냥으로 죽이는 시대인데 늙지 않는 인간을 죽이지 않을 리는 없다.


그래서 마지막엔 발이 아닌 검으로 얼굴을 노릴 작정이었다. 진검을 꺼내든 것은 저쪽이 먼저이다. 그러니 실수로 사람이 죽어도 죄가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되겠지만 말이다. 만일 대련 중 글렌 아치볼트가 자신에게 ‘당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하지.’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를 죽였을 것이다.


에단은 아직까지 얼굴을 매만지고 있는 글렌을 바라보았다. 입이 무거운 사내이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 쉽게 입을 열거나 하진 않으리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 일에 대해서는 샤를리즈와 함께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다.


샤를리즈 생각에 에단은 이마를 짚었다. 촉새처럼 잔소리를 쏟아낼 그녀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는 것 같다.


“저, 에단 씨.”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에단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분명 에드리안의 친구라던 엘루이즈였다. 그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태자 저하께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따르시죠.”


“아, 예.”


뭐라고 불러야할지 고민하다 그냥 호칭은 생략하기로 했다. 최대한 과묵한 컨셉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태자에게는 어떤 예법을 취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궁정식 절이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궁정에 들어갈 일이 없었던 그였으니 당연히 모른다.


일전에 샤를리즈가 상식이라며 알아두라고 했었는데 건성으로 들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에드리안을 만나고 가겠다고 하면 이상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태자가 보인다. 어쩔 수 없었다. 일단, 그가 아는 한 가장 예의 있는 절을 하는 수밖에.


상당히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태자를 향해 그는 절했다. 그 모습에 태자는 빙긋 웃은 뒤 손을 들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모두 물러갔다. 손으로도 명령을 하는구나 싶어 감탄하고 있는데 태자가 입을 열었다.


“경의 실력은 잘 봤소. 우리 왕국의 기사단 가운데 가장 실력이 있다고 정평이 난 글렌 아치볼트 경을 그렇게 손쉽게 이길 줄이야. 그런 자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소.”


“과찬이십니다.”


“헌데, 경과 아치볼트 경은 아는 사이인가? 어째서 그가 경에게 덤벼든 것인지 아직 원인을 몰라서 하는 소리네.”


그 말에 에단은 어떻게 대답할까 망설였다. 글렌은 분명 자신과의 비밀을 지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는 척을 했다간 어째서 아느냐고 물을 테고, 그럼 10년 전 싸움까지 이야기해야할 것이다. 에단은 기껏해야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이다.


10년 전에 싸워서 글렌과 이겼다면, 그는 적어도 10대 후반에 왕실 기사단을 이긴 셈이니 말이 되지를 않는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한들 그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에단은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뒤 그 질문에 답했다. 그가 생각하는 한 최선의 대답으로.


“모릅니다.”


“그런가? 하긴, 경이 경기장에서 싸울 때를 보니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도 알 수 있었어. 그러니 아치볼트 경도 흥미가 생겨 경에게 시비를 건 것일 수도 있지. 부하의 무례함을 용서하게. 무인의 호기심이었다고 생각해주게.”


“불편하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군. 내 생각엔 다른 이들은 모두 기권을 할 것 같은데...”


“그에 대해 저하께 긴히 청할 것이 있습니다.”


청이라는 말에 태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에단은 잘 되었다 싶었다. 딱 봐도 사람이 좋게 생긴데다가 말에서 나오는 온화한 분위기는 분명 소문 그 이상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느니 차라리 이게 낫다 싶었던 것이다. 에단이 말했다.


“훈장은 받되, 기사단에는 입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훈장은 받되, 입단은 싫다?”


태자가 되묻자 에단이 그렇다 답했다. 그에 태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는 다시 묻는다.


“어째서인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대답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이유가 밖으로 새나갈까 두렵습니다.”


“비밀로 해달라는 거로군. 말해보게.”


“제게는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저는 어떠한 돈과 명예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지금의 제 주인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 분에게 많은 빚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경기에 참여한 것은 제 주인이 그라니언 가문과의 친분을 유지하고 싶어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라니언 가문의 도련님은 서자 출신인지라 귀족들 사이에서의 입지가 곤란하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참석한 것뿐입니다. 훈장만 받고 기사단에 입단하지 않은 선례가 있다고 들었으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고요.”


“허나, 경은 조금 다른 경우지. 기사단의 일인자를 쓰러뜨렸네. 경이 입단하는 것 외에는 기사단의 명예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 말에 에단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젊은 시절-젊은 시절이라고 해봐야 외형은 그대로이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도전자들을 받아들였던 제 과거가 이런 식으로 저를 발목 잡을 줄은 몰랐다. 태자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끝장이 났다 싶었는데 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청을 그냥 들어주기에는 내가 짊어질 부담감도 커. 그러니 거래를 하도록 하지. 경의 청을 들어주는 대신 말이야.”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이번에 경, 아니 그라니언 가문의 후계자가 따게 될 훈장의 이름은 내 아들의 이름일세. 혹여 그 뜻을 알고 있는가?”


“검만 잡은 몸입니다. 어찌 윗분들의 의중을 알겠습니까?”


“수호자. 수호자라는 뜻이네. 내 아내가 그 아이의 미래를 보았는데, 그 미래와 가장 맞닿아 있는 이름이라 생각해서 지은 것이네. 뭐, 다른 의미도 있지만, 자네의 관심 밖일 테니 생략하도록 하고. 아무튼 아들이 그러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면 부모 된 도리로 최대한 그 아이의 길이 쉬워지도록 후원하고 싶네. 그래서 말인데, 내 아들이 크면 자네가 내 아들의 무술을 가르쳐줬으면 하네.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듯 나는 내 아들의 스승이 이 왕국에서 가장 강한 자였으면 좋겠어.”


그 말에 에단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본래 글렌 아치볼트의 도발에 넘어가준 이유도 자신의 늙지 않는 몸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위티시라는 꼬마는 이제 갓 태어난 아기이다. 적어도 검을 배우려면 수년은 기다려야 한다. 그 때 동안 그는 늙지 않을 것이다. 태손의 스승이 늙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은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차피 청을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던 왕실과 그는 관계가 생기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단 시간을 미루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혹시나 모른다. 정변이 성공하여 태손의 입지가 매우 약해져 검술을 배울 수 없게 될지도 모르고, 자신의 이 몸이 서서히 늙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모면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순간, 에단은 머리가 지끈 거리는 것을 느꼈다. 샤를리즈가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마는 인생을 살아온 그이다. 그런데 오늘은 하루 종일 선택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 선택이 옳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중에 샤를리즈와 대화를 나눠봐야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날아오는 잔소리도 감내해야 하리라. 그는 새삼 부총수의 일을 로버트가 맡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 하겠습니다.”


“고맙네. 이는 무인과 무인의 약속이니 굳이 증표를 남기거나 하지는 않겠네. 오직 경의 양심에만 맡길 것이야. 그리고 보아하니 주인의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으니 내 경을 배려해 먼저 자리를 떠났다고 말해주지. 저 쪽으로 가면 될 걸세.”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태자의 호의는 확실히 고마운 일이었기에 에단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왕실 마법사인 칼라일 시모어 경이 자네와 긴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들었네. 나가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으니 놀라지는 말게. 그럼 어서 가보게. 사람들이 곧 몰려 올 테니. 그라니언 가문의 후계자에게는 따로 일러두겠네. 훈장 수여식이 끝나는 즉시 자네에게 갈 수 있도록 말이야.”


“황공합니다. 그럼 이만 물러 가보겠습니다.”


에단은 절하고 태자를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이다. 풍겨 나오는 느낌과 약간의 대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랫사람, 그것도 평민을 상대로 이렇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왕족은 드물다는 것을 에단은 잘 알고 있었다.


작가의말

다음 편이 위티시 훈장 마지막 편입니다.
그 다음에는 충격과 공포의 외전을 한 편 할 것 같네요.
인물간 갈등 상황에 대해서는 절정 1,2위를 다툴만한 막이 제 10막이 될 것 같습니다.
외전은 그를 위한 토대로 준비했어요.
그래서 충격과 공포의 외전이라고 쓴 건데... 사실 그렇게 충격과 공포일 지는 모르겠습니다.

p.s. 에단과 싸운 글렌 아치볼트는 라제칸의 등대지기 외전 1화에서 잠깐 언급이 되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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