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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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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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2.11.11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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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칠흑의 꽃. 제 10막. 진실을 알아챈 고양이.

DUMMY

‘그 자’라는 말에 샤를리즈는 눈썹을 까딱이고는 비밀서고의 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아픈데, 그 자리에 프리실라가 가는 것이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그 자가 누구길래 프리실라가 직접 병문안에 나선단 말인가? 요즈음 사교계에서 고위 귀족들 가운데 몸이 불편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도 공작의 명을 받아 프리실라가 직접 나서야 할 정도의 위인은 더욱이 없었다. 하긴, 문제는 지금 그것이 아니다. 고작 병문안 때문에 폭발을 한 공작부인이 공작이 가장 즐기는 시간에 터뜨린 모양이다. 자신의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공작이다.


오죽하면 샤를리즈나 에드리안조차도 공작의 개인적인 시간에는 약속을 안 잡으려고 노력을, 노력을 하는 편이었다. 화를 많이 낼 것이다. 샤를리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맞았다. 치를 떠는 듯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작 그 따위 일로 지금 저들의 앞에서...”


“그 따위 일? 그 따위 일이라고요?”


공작부인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다 못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동안 둘 사이에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숨이 막힌다. 제 3자로써 몰래 듣고 있는 샤를리즈에게도. 공작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에드리안 그 애를 정식으로 인정하겠다고 했잖아요. 그걸로 일은 끝난 거였잖아요.”


뜻밖이었다. 저들의 대화에 에드리안이 등장한 것이. 에드리안이 공작위를 계승할 때 공작부인이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무언가 거래가 있었기 때문이었던가? 그녀는 단순히 란과 프리실라가 결혼을 하게 되면, 공작 가문을 이을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작부인이 에드리안의 존재를 허락한 것인 줄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리안은 총명한데다가 직계의 유일한 남자 아이이다. 거기다 만일 에드리안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라니언 공작가문의 모든 재산과 영지는 란과 프리실라가 결혼함으로써 왕실에 복속되는 것이니까.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샤를리즈는 빈트뮐러 상단 총수의 양녀로 입양됨으로써 그라니언 가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 되었지만 에드리안은 달랐다. 그러고 보면 에드리안은 공작의 성에서 단 한 번도 천대받은 적이 없었다. 공작부인은 처음부터 에드리안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건가?


에드리안은 당연히 남자아이라서 그런 대접을 받는 줄로만 알았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일에 대해 최대한 기억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의심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지.”


공작부인과는 달리 공작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하지만 그것이 분노를 꾹꾹 억누른 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샤를리즈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무엇이 그를 저토록 화나게 만들었는가? 샤를리즈도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로써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그리고 아마 그것은 어쩌면 앨런조차 모르는, 그라니언 가문의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이 지금 밝혀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가빠온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서리가 끼칠 정도로 불길한 기분이 든다.


“당신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직도 몰라? 내 인생을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뜨린 게 누구지? 당신과 알렉시스. 난 너희 둘을 죽어서도 용서 못해.”


공작의, 저렇게 감정이 담긴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 같아 낯설다. 그녀가 알고 있는 공작이 아닌 것 같다. 그는 마치 에드리안이 지난 번에 얘기해줬던 젊은 시절의 괴짜 공작과 같았다. 믿지 않았었다. 공작에게 다혈질이었던 과거가 있었다는 점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저것이 진짜 공작의 모습인 것처럼 익숙해보인다. 그리고 그를 일깨운 것은 알렉시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얼마 전 에단이 말해준 정보 속의 인물이었다. 알렉시스 드 그라니언이 곧 죽을 지도 모르는 중병에 걸려 있다고 했었던가?


알렉시스 드 그라니언. 그라니언 가문의 이름을 받은 몇 안 되는 자였다. 머나먼 방계 출신으로 그라니언의 피는 거의 희석되었다 해도 무방한 자. 그 자의 이름이 어째서 여기서 거론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정도로 파급력이 있는 인물이었던가? 하지만 듣기로, 그의 성품은 유약하고 음험한 구석 있으며, 학식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고 들었다.


그런 자쯤 공작이 요리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데 마치 공작의 저 말은 공작부인과 알렉시스 드 그라니언에게 뭔가를 당했다는 말이 아닌가? 공작부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이 다르잖아요.”


“알렉시스는 다시는 그라니우스를 밟지 못하게 되었고, 그라니언 가문의 이름을 박탈당했지. 그리고 그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곳에서 홀로 늙어가고 있어. 한 때는 공작의 자리를 넘봤던 자가 말이야. 얼마 전 서신이 왔더군. 곧 죽어, 그는. 죽을병에 걸렸다더군. 그런 주제에 내게 뭘 요청했는지 알아? 가족을 보고 싶다더군. 나는 그와 가족이라 할 정도로 가깝지 않으니, 가장 가까운 그의 가족이 가야하지 않겠나?”


‘그의 가족’이라는 말에 샤를리즈의 사고가 정지한다. 이게 지금 무슨 말인가? 누가 그의 가족이란 말이지?


“죽기 전의 부탁이라는데 들어줘야지. 안 그래?”


공작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공작부인이 애원하듯 말했다.


“거기서 말하는 가족은 당신이잖아요. 안 그래도 그 사람, 당신에게 속죄하려고 안달이 난 작자잖아요. 마지막으로 당신을 보며 속죄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당신이 가면...”


“그만하지. 프리실라, 그 애도 제 아버지를 볼 권리가 있어. 천륜이 아닌가?”


“그 입 닥쳐요!”


공작부인이 소리쳤다. 샤를리즈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아서. 샤를리즈와 프리실라가 태어난 날은 같은 날이다. 그러나 샤를리즈와는 달리 프리실라는 칠삭둥이이다. 열 달을 채 채우지도 못하고 나온 아이.


그래서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고, 그 때문에 많은 하인들의 관심을 받아온 공작가문의 아가씨. 그리고 그 아가씨와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가씨에게 가야할 기운을 빼앗아 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만으로 멸시를 받았던 샤를리즈.


어렸을 때는 그게 진짜인 줄 알고, 정말로 자신이 죄를 지은 줄 알고 앨런이나 어머니에게 자주 묻곤 했었다. 그럴 때 제 어머니는 그런 게 아니라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줬고, 앨런은... 화를 냈었던가? 왜 그가 화를 냈었지?


“내가...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그 날, 우리가 결혼하고 맞은 밤에, 당신이 날 버렸다고 생각해서 난 그 때 이성을 잃었었다고. 다, 당신도 알다시피 알렉시스와 당신은 목소리도 거의 비슷하고, 체격도 비슷해서... 그 때는 방도 어두워서 정말로 당신인 줄 알고... 그와 잔 건 절대 의도한 게 아니라고...”


공작부인이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어갔다. 곧 울 것 같은 목소리이다. 그에 반해 공작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알아. 그러니 내가 알렉시스는 내쳐도 당신은 내치지 않았잖아. 그리고 프리실라를 내 딸로 인정하는 대신, 작위 계승권은 주지 않겠다고 했지. 그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나?”


프리실라는 죄가 없다는 말에 샤를리즈는 크게 숨을 들이 킨 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프리실라는 죄가 없다. 그래, 프리실라는... 죄가, 없다.


“그리고 그 대신 에드리안, 그 애가 공작의 작위를 받는데 힘을 쓰겠다고 했죠. 그리고 난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왜 굳이 프리실라가 알렉시스를 만나야 하냐고요.”


“왜냐하면 그는 프리실라의 친부이고, 그는 곧 죽으니까.”


공작의 간결한 답변에 공작부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확인사살이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공작부인이 이를 으득 갈고는 말했다.


“프리실라, 내 딸이 그 작자를 만나러 가게 된다면 난 결코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불행 중 다행이군. 이제야 치근덕거리는 게 떨어지는 셈이니까. 그리고 용서? 용서를 하는 주체는 당신이 아니라 나지.”


“....”


“내가 이렇게 망가진 것처럼, 당신도 망가지면 그 때는 용서를 해줄 지도 몰라. 하지만 그럴 일은 영영 없겠지. 당신에게는, 내 뮤리에만큼 소중한 게 없으니.”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공작이 방을 나가는 소리였다. 그리고 풀썩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공작부인이 주저앉은 모양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겠지. 그리고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도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들어온지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한다. 그러려면 공작부인이 나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샤를리즈는 일어섰다. 그러나 샤를리즈 또한 다리가 풀렸던 것일까? 금세 풀썩 하고 주저앉는다. 그 소리가 조금 컸다.


“...누가 있나?”


공작부인의 말에 샤를리즈는 얼어붙었다. 공작부인은 확실히 비밀서고에 대해 모른다. 하지만 샤를리즈가 방금 주저앉는 소리는 컸다. 누군가가 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 혹시나, 우연으로 비밀서고의 존재를 안다면? 그리고 공작과 자신간의 거래를 안다면?


샤를리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분명 큰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그녀가 안다는 것이 지금 밝혀져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두리번거리는데, 아까 열어두었던 창문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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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칠흑의 꽃. [외전]실수 +4 12.10.29 1,142 11 11쪽
111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7 12.10.28 1,410 16 12쪽
110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3 12.10.27 1,418 15 10쪽
109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6 12.10.26 1,287 1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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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7 12.10.21 1,364 1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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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7 12.10.07 1,310 16 11쪽
103 [100회 자축 외전]라제칸의 등대지기(4) +9 12.10.04 1,182 14 9쪽
102 [100화 자축 외전]라제칸의 등대지기(3) +3 12.10.04 1,022 11 12쪽
101 [100화 자축 외전]라제칸의 등대지기(2) 12.10.04 1,111 12 12쪽
100 [100화 자축 외전]라제칸의 등대지기(1) +3 12.10.04 1,180 13 12쪽
99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8 12.10.01 1,129 15 11쪽
98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6 12.09.29 1,182 1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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