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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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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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13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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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의 꽃. 제 10막. 진실을 알아챈 고양이.

DUMMY

오늘은 그라니언 공작이 후원하는 이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그 또한 표면상으로는 그의 후원을 받는 영민한 평민이었으므로 그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후원을 받음에도 모임에 나오지 않는 건방진 젊은이로 낙인찍히는 것은 사양이다.


게다가 오늘은 공작의 저택에 프리실라가 없는 날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공작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셈이다. 공작이 후원하고 있는 이들은 정말로 뛰어난 이들이니, 그에게 꼭 필요한 인재들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과도 미리 친분을 쌓아둘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므로 이번 모임은 그에게 있어서 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란은 외투를 걸치고 제 새카만 머리칼을 매만진 뒤 급히 나가려고 했다. 칼라일의 살롱에서의 일이 생각보다 훨씬 길어져서 지금 가면 조금 늦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공작이 주최하는 모임인지라 분위기가 꽤 무거운 편이었는데, 그런 자리에 지각을 하게 되다니.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어색하게 자리에 앉는 자신을 생각하니 끔찍하기만 하다. 그 숨막히는 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지금부터 걱정이다. 이 바쁜 와중에 누군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저하.”


낯익은 목소리에 란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몇 달 전 제 영지로 돌아가 자금을 운용시켜보겠다던 콘라드 드 해치필드가 그곳에 서 있었다. 꽤 급하게 온 것인지, 날씨가 제법 쌀쌀함에도 그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라니언 공작의 모임에서 지각생으로 단단히 낙인이 찍히겠다, 싶다. 그럼에도 그의 세력 가운데 꽤 힘이 있는 해치필드에게 냉대할 수는 없어, 란은 그를 보고 빙긋 웃는다. 샤를리즈만큼이나 표정 연기에는 능숙한 그이다.


“오랜만이네, 해치필드 경.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인가?”


“소식을 듣고 막 오는 길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소인이 대업에 앞서 영지를 재정비하느라 수도의 상황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해서, 태손의 이름의 의미를 직접 여쭙고자...”


그 말에 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훈장의 이름이 밝혀진 순간 그의 세력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그를 찾아왔었다. 그는 웃음을 멈추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위티시 말인가?”


“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위티시의 뜻이 맞는지도 솔직히 의심스러운 상황이고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네가 알고 있는 그 뜻이 맞네. 형님이 내 편에 서겠다는 뜻이야. 더 없이 믿을 수 없는 증표를 주신 셈이지. 자네가 없는 동안 나는 형님을 만났네. 형님은 왕위에 뜻이 없어. 그래서 거래 같은 걸 한 걸세. 형님은 내게 형님의 자리를 주겠다고 하셨고, 나는 그 대가로 형님과 형수님의 안위를 보장한다는, 뭐 그런 거래 말이지. 자네도 알다시피 형님과 형수님은 다른 나라에서조차 유명한 분이야. 그들을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것은 없네. 하지만 그들의 지지를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저하와 태자 저하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허나, 지금의 왕은 태자 저하의 부친이십니다. 아무리 태자 저하와 왕과의 사이가 그리 좋지만은 않다지만, 그렇다고 척을 지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그럴 테지. 헌데, 그 일에 대해서는 지금 생각하지 않기로 했네. 폐하께서 조만간 날 보자고 하셨거든. 폐하의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네.”


“폐하를 뵙는다고요?”


믿지 못하겠다는 콘라드의 되물음에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


“저하, 보나마나 함정일 것이 분명합니다. 혹은 변명이라도 하려는 것이겠지요. 현왕이 얼마나 악독한 자인지 모르십니까? 그 자는 선왕 폐하를 무참히 살해하고...”


“그만.”


란이 이번에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선왕의 죽음에 대한 말만 나오면 저도 모르게 예민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콘라드 또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죄의 의미였다. 그에 란은 한숨을 살짝 내쉰 뒤 타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라니언 공과 함께 갈 것이니 걱정 말게. 자네도 알다시피 현 귀족들 중 가장 세력이 강한 그라니언 공이네. 그의 앞에서 현왕이 내게 무슨 짓을 한다면, 그라니우스에 있는 전 병력이 왕도로 향하겠지. 내란이 일어나는 걸 바라지 않는 이상 현왕이 내게...”


“허나, 그것이 저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콘라드가 통탄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글쎄? 그라니언 공정도라면 크로이츠 왕가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권력자가 아닌가? 어쩌면 크로이츠 왕가가 그라니언 왕가로 변할 수도 있겠군. 그라니언 공은 능력이 있는 자니 이 왕국을 잘 이끌어 줄게야.”


“저하!”


“농담이네. 아무튼 그라니언 공의 중재아래 이뤄질 것이니 걱정은 하지 말게. 이런. 약속에 늦었군. 난 이만 가보겠네.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여기서 더 붙잡혀 있다가는 몇 시간 동안 콘라드에게 설교를 들을 것 같아 란은 그가 뭔가 말하려는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쌩 하고 살롱에서 나왔다. 칼라일 시모어의 저택과 그라니언 가문의 저택은 그리 멀지 않아 여유 있게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건 지각을 한 수준이 아니다. 그냥 약속을 깜빡했다가 방금 생각나서 도착했다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을 정도로 늦었다. 지금 도착하면 공작이 분명 짜증 섞인 목소리로 늦은 것에 대해 추궁을 할 것이다. 그 자리에서 공작은 그에게 돈을 대주는 입장이고 그는 그 돈을 받아 공부를 하는 학생의 입장이니까 그의 직위에 대해 배려를 해줄 리 없다.


안 그래도 시간에 있어서는 칼과 같은 공작이 아닌가? 잔소리를 엄청 들어먹겠군, 싶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걷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프랜시스를 시켜 주변의 동태를 잘 살펴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랬으면 오늘처럼 콘라드에게 시간을 빼앗기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요즈음 프랜시스 드 블라레트 조차 그에게는 우호적이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즈음 프리실라와 관련된 일은 모조리 프랜시스에게 다 떠맡긴데다가 태자의 일과 왕의 일까지 합세되어 폭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세력 중 일부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왕,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귀족들은 더욱 반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현왕과 만나는 일을 말이다. 찬성하는 것은 그라이언 공작과 시모어 경 외 몇몇뿐. 특히 반대를 하는 귀족들은 그라니언 공작에게 비난을 쏟아 부었다. 이처럼 그가 그의 세력의 분열을 감수하면서도 현왕을 만나려고 한 이유는 바로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의 세력들 중 강경파가 주장하는 현왕의 정책들은 현왕의 집권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가령, 여인들에게 글을 금지시킨 것만 해도 그랬다. 현왕이 보위에 오른 지 20년 만에 이것이 과연 이토록 견고하게 금지될 수 있는 것인가? 신관의 권위가 급속도로 약화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5년 전부터였다. 태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것을 막아섰던 블라레트 후작을 필두로 한 강경파.


그리고 이제 그들은 현왕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것은 바로 그라니언 공작. 그는 선왕의 총애를 받던 총신임과 동시에 현왕의 벗이었다. 그리고 현왕이 선왕을 죽였음에도 그의 곁에서 끝까지 남았다. 과연 그것이 후에 등장할 자신을 위한 계획이었을까? 아니면, 그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렇게 했던 것일까? 혹은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을 다 알 것만 같은 칼라일 시모어도, 이 일에 대해 그가 살짝 미끼를 던지면 유난스럽게 발을 빼곤 했었다. 그리고 태자는 현왕과 선왕이 살던 시절을 기억할 만한 나이가 아니다. 그러니 직접 물어야 한다. 현왕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태자만큼이나 다정했다던 현왕이 왜 그의 아버지를 죽였는지.


그렇게 제 생각만 하다가 문득 란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첩첩산중이구나 싶어 한숨을 내쉰다. 이게 문제였다. 상념에 빠지기만 하면 주변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가끔씩은 아는 이들의 인사조차 무시하고 걷지 않았던가? 오해를 쉽게 사는 버릇이다.


고쳐야지, 고쳐야지 하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20여 년간 굳혀진 버릇이다. 지난번에는 프리실라 마저도 보지 못해 그녀를 달래는데 일주일이나 걸렸었다. 이래서 프랜시스를 옆에 끼고 다니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현왕을 보고난 후까지는 그 스스로가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나마 가장 빠른 길인 그라니언 저택의 뒷문으로 가야겠다, 다짐한다. 그렇게 저택의 뒷문으로 가기 위해 코너를 도는데 뜻밖의 인물이 멀리서 보인다.


저 붉은 머리칼을 어떻게 못 알아보겠는가? 항상 단정하게 묶고 다니더니 오늘은 풀었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었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항상 걸음걸이에 자신감이 있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뭔가 오묘하다. 저택의 담을 짚고, 고개는 왜 저렇게 푹 숙였는지.


란은 아는 척 하려는 것을 관두고 그리로 걸어간다. 예민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지척에 다가가도 고개를 숙인 채 있다가 그가 말을 걸자 그제야 고개를 든다.


“샤를리즈 양?”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이건 진짜 표정. 그녀는 그 표정을 채 숨기지도 못한 채 제 머리칼을 매만지고는 눈을 깜빡이다 겨우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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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칠흑의 꽃. [외전]실수 +4 12.10.29 1,142 11 11쪽
111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7 12.10.28 1,411 16 12쪽
110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3 12.10.27 1,418 15 10쪽
109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6 12.10.26 1,288 1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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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7 12.10.21 1,364 1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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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100회 자축 외전]라제칸의 등대지기(4) +9 12.10.04 1,182 14 9쪽
102 [100화 자축 외전]라제칸의 등대지기(3) +3 12.10.04 1,022 11 12쪽
101 [100화 자축 외전]라제칸의 등대지기(2) 12.10.04 1,112 12 12쪽
100 [100화 자축 외전]라제칸의 등대지기(1) +3 12.10.04 1,181 13 12쪽
99 칠흑의 꽃. 제 9막. 위티시 훈장 +8 12.10.01 1,130 1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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