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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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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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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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0.05.22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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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칠흑의 꽃-제 1막. 검은 꽃 인장의 주인(2)

DUMMY

로스는 그나마 마약 시장이 열리는 지하와 가장 떨어진 3층 끝의 접대실로 빈트뮐러의 사자, 에단을 이끌었다.


본래 귀빈을 모시는 2층의 접대실과는 달리 3층의 접대실은 작은 상단들을 상대하는 곳이었기에 총수 대리를 접대하기에는 초라했지만 저 쪽도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로스는 애써 신경을 끄기로 했다.


하긴, 지금 접대실의 질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겠느냐마는. 로스는 중앙의 의자를 권했으나 에단은 고개를 저은 뒤 '연통도 넣지 않은 채 온 주제에 그런 호의를 받을 수는 없다'며 정중하게 거절한 뒤 중앙의 의자가 아닌 바로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예의가 전혀 없는 자인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로스는 그가 앉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중앙의 의자에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로스였다.


"이렇게 총수 대리 분을 뵙게 되어 얼마나 놀랐는지. 정말로 연통이라도 하셨더라면 제가 이런 식으로 접대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연통도 없이 들이닥친 점이라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보다 총수께서는 여전히 수완이 좋으시더군요. 그 '라캄'족 간의 무역을 성사시키시다니 말입니다."


라캄족은 왕국의 남해, 외딴 섬에 뿌리를 내린 소수 부족이었는데 타인에 대한 경계가 매우 심하여 그 어떠한 나라와도 교역을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얼마 전 왕국, 그것도 일개 상단이 그들과의 교역을 성사시켰고, 라캄족 특유의 비단이 왕국으로 유통되었다.


왕국은 물론, 전 대륙이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이 교역을 성사시킨 상단이 바로 빈트뮐러 상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해냈으면 조금 잘난 척을 하거나 혹은 미소를 지으며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라고 얄미운 말을 해도 좋으련만, 에단은 그 어떠한 표정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총수께서 워낙 다재다능한 분이니까요."

"그래서 말입니다. 그 대단하신 빈트뮐러 총수께서는 언제쯤 모습을 드러내십니까? 소문으로는 흉측한 화상이 있는 사내라던가... 아하하. 최근에는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도 들었지요. 아아, 또 아예 존재도 하지 않는 자라는 소문도 돌았지요. 실제로는 20여 년 전 폐위되신 선왕께서 살아계셔서 복수를 도모하신다거나..."

"뵙고 싶으십니까?"


에단이 어떻게 해서든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기이한 소문들을 내뱉던 로스는 에단의 물음에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장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물론이지 않습니까? 그 누가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곧 뵙게 되시리라는 것,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에단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로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짙은 회색 눈은 로스의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순간 로스는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로스 자신은 사람을 접대하는 상인이고 그렇기에 많은 이들의 눈을 보아왔다. 하지만 저 눈은 그가 여태껏 단 한 번도 상대해보지 못한, 아니 그러할 필요성이 없는 자들의 눈이었다.


살인자의 눈. 그 짙은 회색 눈은 분명 살인자의 눈이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일을 제법 크게 벌이셨던데 설마하니 이쪽에서 냄새를 맡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바켄바우어 본부의 눈을 속이셨을지언정 본래 그 근거지를 남부에 두고 성장해왔던 빈트뮐러를 무시하고 계셨다니 조금 자존심에 상처도 받았습니다만, 뭐, 그러한 사사로운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겠지요."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통 못 알아듣겠습니다."


로스는 손에 식은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에단은 마치 그러한 로스의 초조함을 꿰뚫고 있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연다.


“프루덴스의 냄새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무는 법이지요. 너무 일을 오래 끄셨습니다, 남부 지부장.”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아래층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사내들의 비명소리들. 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리를 치려고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그 뒤의, 고함을 지르는 행동은 이어지지 못했다. 시퍼렇게 선 칼날이 그의 목을 살짝 그었기 때문이다.

검의 주인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저 로스를 노려보았다.


“장미와 같으신 분입니다, 그 분은.”


순간, 이 사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로스는 알 수 없었다.


“그 분의 가시에 찔리지 않길 바랍니다. 바켄바우어의 남부지부장.”


쾅! 하고 그들이 있던 접대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로스로써는 난생 처음 보는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들을 에워쌌다. 분명 처음 보는 자들이었으나, 로스는 그들의 정체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하나같이 4장의 꽃잎을 가진 검은 꽃이 수놓아 있었으니까.


에단은 여전히 검을 로스의 목에 겨눈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내들에게 명했다.


“이 시각 이후부터, 바켄바우어 남부지부의 모든 상권을 빈트뮐러가 접수한다. 이는 남부지부장의 의사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스 씨.”




* * *



왕국의 남부에 위치한 그라니언 공작령은 매년 한 번씩은 엄청난 폭우에 시달렸다. 앞이 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굵고 매서운 빗줄기가 3일 내내 내리는데, 이 폭우를 견뎌낸 과일과 곡식들은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았기 때문에 이 폭우는 곡식의 신이 내린 시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즉 이 폭우는 그라니언 공작령의 상업을 마비시키는 고질병임과 동시에, 그라니언 공작령의 곡식과 과일의 질을 높여주는 축복인 양날의 검이었다.


하여튼 이 폭우가 내리게 되면 그라니언 공작령의 모든 이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3일 혹은 그 이상을 집안에서 허비하곤 하였다. 그렇기에 그라니언 공작령의 중심, 즉 그라니언 공작가문의 성이 있는 그라니우스의 길거리는 단 한 마리의 개미새끼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땅을 내리치는 빗방울소리만 사방을 울릴 뿐이었다. 그 때, 그 폭우를 뚫고 한 마차가 제법 빠른 속도로 그라니우스의 길거리를 달렸다.


그 마차는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웬만한 백작가문의 마차만큼이나 컸으며, 마차의 문에는 금으로 장식된 4장의 꽃잎이 그려진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왕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그 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


바로, 왕국 3대 상단 빈트뮐러의 인장이었다. 왕국의 다른 3대 상단, 바켄바우어와 슈드레거의 남부지부가 그라니언 공작령의 각기 다른 도시에 있음에 반해 빈트뮐러의 남부 지부는 그라니우스에 있었다.


본래 그라니언 공작가문은 대대로 상단과 손을 잡는 것이 천한 짓이라 생각하여 자신들의 본거지인 그라니우스에는 그 어떠한 상단의 지부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4년 전, 빈트뮐러의 남부지부가 그라니우스에 발을 붙이게 된 것은 왕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었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그 세력이 미미했던 빈트뮐러가 대 상단이 되고, 그라니우스에 입성하게 된 것은 모두가 현재 빈트뮐러 상단 총수의 수완이었다.


"멈춰라!"


폭우를 뚫고 달리던 검은 마차가 마침내 멈춰선 곳은 빈트뮐러의 남부지부가 아닌 그라니언 공작가문의 성이었다.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비 사이에서도 경비를 서고 있는 경비병들이 평일의 그 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라니언 공작가문이 얼마나 혹독하게 그들을 부려먹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그라니언 공작가문의 성이다. 한낱 남부지부의 상인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썩 물러가라!"


경비병인 주제에 위세가 대단했으나, 마부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멍하게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 울컥한 경비병이 들고 있던 창을 마부에게 겨누었다. 그럼에도 그 마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모습에 경비병의 창이 움직이려던 찰나 드르륵 하고 마차의 창문이 살짝 열렸다.


손바닥 반 정도밖에 열리지 않은 창문이었으나, 적어도 안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는 만큼이다. 경비병은 안에 있는 자를 보자마자 당황하여 창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경비병은 감히 마차의 주인을 바라보지조차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마치 죽을죄라도 지었다는 듯. 그에 반해 마차 안에 있던 자는 별 대수롭지 않은 사건을 말하듯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되었으니 성문이나 열게. 시간은 금보다도 더 귀중한 법."


여인의 목소리인 주제에 묵직한 톤을 내려고 애를 쓴 티가 역력했다. 그러나 경비병은 그러한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소리쳤다.


"예, 예! 서, 성문을 열어라!"


경비병의 외침에 굳건히 닫혀있던 성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하였다. 마차의 주인은 창문을 닫은 뒤 조용히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맞은편에서 씁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소년에게 투덜거렸다.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노력해도 저 성문의 소리는 소름 끼치는구나."


경비병에게 말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다정한 어투였다. 장미보다도 더 붉은 머리칼을 세련되게 틀어 올린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는 짜증이 섞여있었다.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옅은 화장, 한창인 나이인 주제에 사내들이나 입을 법한 검은 정장을 입은 그녀는 분명 보기 드문 고풍스러운 미인이었다.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어 무릎에 올렸다. 그 자세마저도 흠잡을 곳이 없다.


"그건 누님이 이 성을 싫어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저는 저 성문의 소리가 무척이나 좋은데."


그녀와 꼭 닮은 붉은 머리칼에 녹색 눈을 가진,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에 반해 그의 누이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너와는 달리 나는 이 성에서 당했던 일을 잊을 수 없는 몸이니 그런 것이겠지. 그러니 네게는 저 소리가 너를 반기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내게는 나를 칠흑같이 어두운 감옥에 쳐 박아두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구나."


다정한 어투와는 달리 쌀쌀맞은 내용에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는 누님은 무슨 심통이십니까? 이런 날 공작각하를 뵙자고 하다니. 수도에 계실 때 만나 뵈면 될 것을 굳이 이런 날씨에 공작 각하를 성으로 불러내신 건 누님이 아닙니까?"


공작이 세간의 눈을 속이고 남부지방을 감찰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급히 약속을 잡은 그녀의 심술을 염두에 두고 한 청년의 말이었다. 그가 정곡을 찌르자 그녀는 빙긋 웃었다.


그녀의 오랜 버릇이었다. 당황할 때면 그 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로 미소 짓는 버릇. 하지만 그녀의 친동생인 그가 그러한 속임수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 또한 그가 알아차렸다는 걸 눈치 채고는 미소를 지우고 코웃음을 쳤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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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4 김생백궁
    작성일
    10.10.16 20:42
    No. 1

    비가 많이 내리면 보통 과일의 단맛이 빗물에 흘러내려 상당히 맛 없는 과일이 되는데요. 곡식은 모르겠으나 과일은 아닙니다.

    좋은글을 오랜만에 찾아서 한자 적어보고 갑니다^^
    건필하세요. 계속 달리겠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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