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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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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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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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2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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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6쪽

(막간) 무게

DUMMY

처음 이렇게 어둠 속에 몸을 뉘여 밤하늘을 올려다본 게 언제였는지 벤은 기억할 수 없다. 그의 머릿속에 이성이란 개념이 자리 잡은 뒤로 가장 오래된 기억이 무엇인지도 좀처럼 떠올릴 수 없다. 오직, ‘유년’이라는 시간의 대부분을 지니고 있었던 작은 오두막의 하늘은 이렇게 답답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그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기억의 파편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뭇잎으로 반쯤 가려진 달빛은 더 이상 얼굴로 쏟아지지 않는다. 눈을 거스르지도 않으며, 주변 모든 것에 절반의 색을 입혀주지도 않는다. 이곳의 숲은, 이곳의 하늘은,

벤에게 안식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예상했으면서도 이곳에 누워있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론크리스 브린타이나국왕의 초대에도 몸 상태를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그를 대신하여 왕의 술잔을 받을 수 있는 이는 토우칸이나 자히르를 포함하여 많이 있었으니까.


“.......”


결국 그는 기름진 살코기 대신 침묵을 씹는다. 노골적으로 안식을 찢으며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소리에도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발소리의 주인공이 슬쩍 그의 시야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 때까지도, 그는 표정이 없었다.


“찾았잖아. 여기서 뭐 해?”


달빛을 등지고 있음에도 색이 바래지 않은 바닷빛의 눈동자. 숲바람과 함께 닿아오는 그녀의 숨결엔 미세한 포도주의 향기가 남아있었다.


“그냥.”


다른 이가 들었다면 시덥지 않은 변명이라 생각할 무심한 대답. 그러나 고도는 그의 ‘그냥’은 언제나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왜 병영에 있지 않고?”


“시끄러우니까.”


“너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소리로?”


“나에 대해?”


대답에 앞서 고도는 벤의 곁에 몸을 내려놓는다.


“모른 척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거야?”


“.......”


역시나 머리는 움직이지 않는 채로, 먹색 시선만을 움직여 고도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벤. 고도는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네 지휘, 명령......., 아니, 네가 저지른 일이라고 해야 하나? 전사자만 6천이 넘어. 부상자도 그 정도 되고. 워낙 전선이 개판 난 상태에서 입은 손실이라 전사자수습만 하더라도 한 달이 걸릴 거 같다더라.”


“흐응.”


감흥이 없다는 듯한, 짧은 수긍의 콧소리.


“겉으로 보이는 결론만 놓고 보면 승리지만, 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 너의 의도된 계획과 명령으로 인해 우리의 전쟁도 아닌 남의 나라 전쟁에서 6천이나 되는 아군이 죽었지. 근데 정작 3군단은 궤멸은커녕 멀쩡히 돌아갔고.”


“말했잖아. 카이우스 드레브냑은 무너질 거야.”


“그래? 그걸 누가 증명해주는데? 누가 알아주는데?”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한 게 아니야.”


“오늘 죽어간 병사들과 기사들, 마법사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거야?”


마침내 벤이 시선을 거둔다.

그는 깍지를 낀 채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거두고, 팔꿈치를 기둥 삼아 몸을 일으켜 고도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언제부터 그렇게 인정이 많아지셨데?”


“........”


벤의 말이 단순한 비웃음이 아니라는 건 고도도 잘 알고 있었다.

제르나비 고도가 누구던가.

자신의 성취와 이득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공인썅년’이었다. 그 기질을 꿰뚫어 본 학회장에 의해 직접 제지를 받았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그 고집은 선임전투마법사직을 맡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이 직책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전투마법사란 직책은 고도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바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지도하고, 자신을 보조하던 부하가 눈앞에서 찢겨져 나가는 광경은 그녀가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였다.


“누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나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아주 간단한 계산이지. 6천 명을 희생시켜서 브린타이나라는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라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어.”


“그럼 왜 같이 술잔을 들고 그 선택에 대한 축하를 주고받지 않고 있는 건데?”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속죄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그래야 할까?”


“적당히 해.”

결국 견디다 못한 고도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네 친구처럼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 아니면 나처럼 모두에게 등을 돌리고 싶어? 그럼 이런 곳에서 자빠져있지 마. 그건 도망치는 것뿐이야. 수많은 죽음을 짓밟고 서서 아예 당당해지든가, 눈물을 흘리든가 확실하게 정하란 말이야. 어설프게 선에 걸쳐 있으려고 하지 말고.”


“네, 멘티의 소중한 조언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영혼이 없는 감사와 함께 다시 밤하늘을 향하는 벤의 눈동자. 고도는 그런 그를 향해 다시 입술을 움직이려고 하다가, 끝내 말을 삼키고 어둠 속으로 돌아선다.

때문에, 그녀는 어째서 벤이 이곳에 있었는지, 그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만약 그녀가 남아있었다 하더라도 심연에 물든 그녀의 눈빛으로는 이 빛을 알아차릴 수 없었겠지만.


“........”


황금빛으로 빛나는 네 쌍의 날개. 그러나 그 빛은 선명함을 잃었고, 날갯짓에는 확신이 없다. 터무니없이 커다란 에메랄드색의 눈동자도 평소와 같은 광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벤은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비명을 들었어.”

파르르, 간신히 움직이는 페어리의 입술. 그녀의 목소리는 벤을 향한 시선만큼이나 흔들리고 있다.

“숲의 비명을, 나무와, 꽃과, 푸른 생명들의 비명을 들었어.”


“........”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를 불태우고 있는 화염은 한결같이 너를 가리키고 있었고.”


“.......”


“말해봐. 정말로......., 정말로 너야.......? 네가 그랬어? 네가, 네가 세뮈엘님의-”


“그거 기억나?”

말이 잘린 아이데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벤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오두막을 짓기 위해서 그 작은 손으로 나무의 밑동을 도끼로 내려찍고 있을 때 네가 나타나 말했지. 숲의 생명을 인간의 탐욕을 위해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고.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할 땐, 세뮈엘을 향해 용서를 구하고 나를 위해 사라지는 생명을 위해 기도하라고.”


“.......”


아이데아는 확인한다.

만약 지금 벤이 마음의 장벽을 전개하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은 이 녀석의 마음을 절대로 읽어낼 수 없을 거라고.


“말해봐. 내가 기도를 했을까? 내가 기도를 했으면, 숲의 사도가 나를 용서해주었을까?”


“.......”


“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하는 것’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거지? 인간? 사도? 내가 99그루의 나무를 불태우면 용서받을 수 있지만, 100그루의 나무를 불태우면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거야? 내가 만약 나무를 불태우지 못해서 수많은 생명을 잃게 만든다면, 그땐 세뮈엘이 나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을까?”


“.......”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단어들이 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아이데아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불경이나 탐욕의 문제가 아니었다.


“.......왜 네가 우는 거야?”


벤의 말대로, 커다란 페어리의 눈동자에서 샛노란 빛덩어리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눈물과는 달리 그 빛덩이는 바닥을 적시는 대신 공중으로 흩뿌려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슬픔의 무게는 다르지 않았다.


“가여워서.......”


“뭐가.”


“이제부터 네가 짊어져야 할 무게가........”


아이데아는 누워있는 벤의 얼굴 위로 사뿐히 내려앉아,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쓰다듬어준다. 작은 손길, 번지는 빛과 눈물. 하나하나가 모두 연민이었다.


“내 선택이니까.”


벤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 담담함의 기저가 무지였는지 용기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데아는 그의 코끝에 입을 맞추고, 달빛처럼 묵직한 빛을 흩뿌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숲의 이름으로, 당신의 앞길을 축복합니다, 필멸자여.”


“세뮈엘에게 안부나 전해줘.”


마주하는 짧은 미소. 그 끝에서, 빛은 사라지고 침묵이 남는다.

벤의 먹색 눈동자가 다시 밤하늘을 담는다.

처음 그랬을 때처럼,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담담하게 하늘을 담는다.





=====================





“왜 그래?”


“아, 아냐. 아무것도.”

지나의 부름이 있고 나서야 로빈은 창문 밖을 향하고 있었던 멍한 시선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마즈다힐의 하늘은 이미 새벽에 가까운 어둠을 품고 있었지만, 로빈과 지나가 마주앉아있는 침대 주변은 여전히 환한 조명,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종이들과 함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벤 쪽은 어떻게 됐으려나.”


“뭐야, 뜬금없이.”


“아니 그냥, 문득 생각이 나서.”


“당장 우리 내일이나 걱정하시죠, 폐하.”


이스누시아 원정과 후속 조치에 대한 회의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오로메와의 지난 대화 이후로 온갖 어지러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로빈이었지만, 피로에 불평할 여유 따윈 그에게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대충 입장정리는 끝난 것 같은데, 문제는.......”


몇 번이나 검토한 보고서엔 이제 고칠 점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보고서만으로는 정리할 수 없는 내용이 남아있었기에, 로빈은 그대로 지나의 샛노란 눈동자를 바라본다. 물론, 지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곧바로 알아차린다.


“어윈과 줄리아를 그냥 냅두고 온 거 말이지.”


“귀족당과 시민당이 세차게 물어뜯을 거야.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관대하고 허술한 생각이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만약 줄리아와 어윈이 배신해서 다시 제국 쪽으로 붙어버리면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지? 이 보고서고 뭐고 죄다 의미 없어지는 거다?”


“알아알아. 사실, 난 보고서들보다 이스누시아에 남기고 온 줄리아가 우리 입장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보는데?”


“.......뭐어?”


당장 내일 의원들 앞에서 발표해야 할 보고서보다, 저 멀리 이스누시아를 맡기고 온 적국 출신의 장교가 더 도움이 된다? 이 연관성을 찾아내지 못한 로빈은 어안이 벙벙할 뿐. 지나는 그런 로빈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새빨간 혀끝을 깨물어 보이며 귀엽게 웃는다.


“두고 봐. 기막힌 연출이 될 테니까.”


“연출.......? 지나야, 난 네가 그렇게 쓸데없이 당당할 때 너무너무 불안하단다.”


“아아, 그러셔?”

로빈의 턱 아래로 자신의 금빛 정수리를 들이미는 왕비. 로빈은 그대로 지나의 목을 휘감아 뒤로 함께 넘어간다.

“꺅.”

예상치 못한 반격에 지나는 로빈의 팔뚝을 깨물려고 했지만, 왕은 이미 그녀의 의도를 읽고 있었다. 단단한 피부 대신에 베개가 지나의 입을 틀어막았고, 그 위로 얼굴을 꺼내기 위해 그녀는 잔뜩 몸부림을 쳐야 했다. 그런 지나의 얼굴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로빈의 입술. 웃음이 새어 나오는 키스가 이어지고, 로빈의 손은 어느새 지나의 잘록한 허리를 탐하고 있었다.

“야이, 색골왕아! 우리 네 시간 있으면 회의실에 서야 하는 거 알고 있어?”


“응? 오늘 잘 생각이었어?”


“변태!”


“무슨 소리시죠, 왕비님? 전 보고서검토와 순수한 토의를 뜻한 거였습니다만?”


로빈의 손이 허리의 곡선을 따라 겨드랑이로 올라섰고, 그 간지러움과 헐렁한 잠옷이 들춰지면서 침투하는 한기 때문에 지나는 꺄륵- 웃음을 터트려야 했다.


“자, 잠깐, 왕님아, 잠깐만.”


“뭐? 왜?”


“하기 전에 할 말이 있어.”


“하긴 뭘 해? 뭘 해줬으면 좋겠는데? 순수한 왕은 아무것도 모르겠네요.”


“아, 좀.”


장난스럽게 웃으며 로빈의 머리를 밀어내는 지나. 그에 로빈은 무릎을 꿇고 앉아 생글생글 그녀를 바라본다. 지나가 징그럽다며 베개를 던졌지만 그의 입가를 멈출 순 없었다.


“알았어, 뭔데? 말해봐.”


“.......”


지나는 이불과 베개를 끌어 올려 샛노란 눈동자만을 밖으로 꺼내놓는다. 자신이 머뭇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로빈이 이를 알아챌 리가 없었다.


“왜, 뭔데? 말을 해 요년아.”


“.......”

장난스럽게 기어오는 로빈의 검붉은 미소. 그에 지나도 베개 밑으로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 됐어. 나중에 말해줄게.”


“아, 왜? 뭔데? 궁금하게.”


“아무것도 아냐. 나중에 말할- 꺄악!”

외마디 비명만을 남기고 로빈의 손에 의해 이불 안으로 끌려 들어간 지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부드러운 미소와, 부드러운 미소를 이끌어내는 키스였다.

깊은 숨결의 끝에서, 지나는 자신과 같은 온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로빈의 눈동자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오직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고마워.”


갑작스러운 그 말에 로빈은 살짝 고개를 까딱이지만, 묻지는 않는다. 그저 헝클어진 지나의 머리를 쓸어 넘기고, 말끔하게 드러난 이마 위로 입술을 맞췄을 뿐.


“별말씀을, 나의 기사님.”


다시 깊은 키스를 나누기 전, 로빈은 위를 바라본다.

이불 속이었던 탓에 보이는 건 흐릿한 창문의 형상뿐이었지만,

그의 검붉은 눈동자는 똑똑히 하늘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북쪽의 하늘을 향해 있었다.





======================





똑같은 시간, 똑같은 밤. 하지만 깊이가 다른 어둠.

깊이를 알 수 없는 숨소리와 구역질 나는 냄새만이 가득한 어둠 속에서 쥬넨 니바르토, 아니, 쥬넨이 고개를 든다. 지하감옥은 두 개의 조국을 배신한 그에겐 처참하면서도 딱 걸맞은 장소였다. 시간과 빛이 허락되지 않은 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행동과 사고라고는 회상과 예측, 그 무한한 반복뿐이었으니까.

상상은 망상이 되고, 망상은 흐릿한 이성 속에서 절반의 현실이 된다. 무너진 육신만큼이나 그의 정신도 피폐해져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상태일지라도 하나의 확신은 가질 수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고, 올 수 없어야 할 시간과 장소.

그 멈춰버린 어둠을 가로지르는 발자국 소리와 옅은 피비린내.

심연에 익숙해진 시야는 조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쥬넨은 조용히,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다가오는 그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


존재 자체가 암흑인 것처럼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로브였다. 코 아래까지 뒤덮은 로브 때문에 그 얼굴을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쥬넨은 그 얼굴을 보았더라도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피냄새가 짙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 출처가, 저 그림자의 손이라는 것.

빛을 반사하지 않았기에 무슨 무기인지는 알아볼 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무기가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가 없다. 누구의 피를 머금었는지, 누구의 피를 머금을지도 알 수가 없었다.


“쥬넨 니바르토.”


젊은 여성의 목소리. 한걸음,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


말라버린 입술과 목은, 곧바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아버님께서 찾으신다.”


한걸음, 다시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마치,

처음부터 쇠창살 따윈 없었던 것처럼.


“.......아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눈앞에 섰을 때, 마침내 쥬넨은 목소리를 짜낼 수 있었다.

“.......니바르토가.......아니다.”


“그래, 실례했군.”


허공을 가르는 손짓.

쥬넨의 몸이 무너진다. 하지만 새로운 피비린내가 풍기는 일은 없었다. 단지, 쥬넨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족쇄와 사슬들이 사라진 탓이었다.


“누......., 누구.......”


“질문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랜 감옥살이 때문이 아니었다.

쥬넨은, 말 그대로 허락받지 못했음을 납득한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저, 이 여인의 목소리가 세포 하나하나를 움직이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는,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감각.



이 감각.

기억이 되살아난다.




.......베르달의 숲이었다.




“귀환을 환영한다. 바빠질 것이다.”


정말로 환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기에 쥬넨은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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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3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8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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