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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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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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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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0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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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0)

DUMMY

포레스트스톡의 시장, 유비르 베리는 세 가지의 이유로 심기가 불편했다.

첫째는 카나반군의 등장이다. 난데없이 제국을 향한 길을 열라며 등장한 이들 덕분에 평화로웠던 국경이 들썩이기 시작했고, 덩달아 그녀 또한 병사들을 소집하여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평화와 안식에 이별을 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의 방문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아이반스톡과 포레스트스톡 사이를 그대로 돌파해버린 카나반군의 움직임. 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눈치를 보고 있던 베리에게 뜻밖의 인물이 찾아온 것이다. 물론, 베리는 스스로를 ‘베이어’라 소개한 그 남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베리 자신은 그의 명령이 아닌 다른 이의 명령으로 이 땅에, 이 도시에 시장으로서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을 내세우는 베이어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저항 따윈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카나반군의 후방을 겨냥하여 직접 군을 이끌고 나서야 했다.


.......그리고 셋째.


“크악!”


짧고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피를 흩뿌리는 몸뚱어리가 비탈길을 따라 굴러떨어진다. 베리는 굳이 그 시체를 뒤집지 않아도, 자신이 정찰을 위해 산길로 올려보냈던 부하임을 알 수 있었다. 벌써 다섯 번째 똑같은 장면을 맞이하는 중이었으니까.


“또냐? 도대체 어떤 새끼가 장난질을 하길래 그거 하나를 못 잡아?”


도시 근처의 숲속에 카나반의 정찰대가 있다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들이 어떤 정보를 수집했는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어 통신을 교란하고 포위섬멸작전을 펼치기로 한 베리였다. 그녀의 기습은 주효하여 적들을 산 위로 몰아넣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생각보다 카나반군의 철수가 단호하고 신속했기에 섬멸까진 실패하고 말았다.

남겨진 주둔지의 수준으로 보건데, 그들의 규모는 적어도 중대급 이상. 물론 이번 출정 자체가 꺼림칙했던 베리에게 다급함이 부족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뒤에 남겨두고 가기엔 애매한 숫자의 적이었기 때문에 베리는 이들을 확실하게 섬멸한 뒤에 나아가기로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산 위의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 보낸 정예기사들이 계속해서 시체가 되어 돌아오고 있는 상황. 바로 이 상황이, 베리의 심기가 불편한 세 번째 이유였다.


“시장님, 그냥 이대로 한꺼번에 밀어붙이는 게-”


“멍청아, 전투보고 못 들었어? 우리가 잡은 스무 명이 허접하기는 해도 모두 기사였다잖아. 만약 남아있는 년놈들 전부가 허접하지 않으면? 좁은 곳, 그것도 고지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백 명이 넘는 기사들을 상대로 대책 없이 들이박자는 거냐?”

해결사 출신인 자신과는 달리, 전투에 따라나선 부관들은 기사의 피를 지니고 있을 뿐이지, 경험 면에서는 신병이나 다름없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의도하기도 한 베리였기에, 이런 한심한 얼굴들을 향한 그녀의 목소리에선 깊이를 알 수 없는 짜증이 담겨 있었다.

“아마 나머지가 태세를 정돈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솜씨 좋은 몇 명이 수작을 부리고 있는 모양인데, 정석대로라면 그냥 포위한 채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지만.......”


“그럼 기다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아, 씨부럴.”

부하들은 베이어의 존재,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모르기에 이렇게 한가로운 소리를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러나 굳이 재촉의 목소리가 직접 들려오지 않아도, 베리는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그’의 시선을 너무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불쾌감은, 평소의 그녀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지를 가져다준다.

“데려와.”


주체가 없는 베리의 짧은 명령에, 어리버리한 부관들이 아닌, 경호원의 모습으로 잠복 중이던 그녀의 ‘진짜’ 부하들이 움직인다. 잠시 후 그 부하들이 데려온 것은, 다름 아닌 만신창이가 된 채 포박당한 세 명의 카나반 생도였다.


“크흣......”


여기저기가 잔뜩 부어오른 얼굴과, 부러지거나 베여나간 사지들. 굳이 포박이 필요 없어 보일 정도의 상처들이었다. 베리는 직접 우락부락한 팔로 그들을 넘겨받아 하나씩 자신의 앞으로 내팽개친다. 겁에 질린 세 표정을 자신의 아래에 두고, 베리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지금 장난질하고 있는 카나반 기사들! 들리지?!”

물론, 메아리치는 베리 본인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대답이 없다. 그러나 베리는 멈추지 않는다.

“협상을 하자! 한 명만 보내서 협상만 하면, 이 세 명 모두 살려줄게! 그렇지 않으면, 얘들 전부 죽이고 당장 전군을 동원해서 쳐들어갈 거야!”


“.......”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부관과 병사들의 시선은 깔끔하게 무시하고서, 베리는 얇은 미소를 머금은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베리의 알 수 없는 확신에 대한 부하들의 불신이 극에 다다르는 순간,


“.......핫!”

시장의 웃음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탄식, 또는 흥미 깊은 감탄이 흘러나온다. 작고, 얇은 그림자 하나가 비탈길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림자의 주인은 망설이지 않고 사거리의 경계선까지 내려선다. 영력이 없는 일반적인 목소리도 닿을 수 있는 거리. 베리의 두꺼운 입술이 먼저 움직인다.

“이름은?”


“.......”


“뭐라고? 잘 안 들려!”


“.......유진 가슈펠라르.”


“아, 그래. 유진. 나와 줘서 고마워. 너를 협상을 위한 대표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지?”


“.......”


“지금 산꼭대기에 너네 애들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어. 이것저것 보려고 부하들을 보냈는데, 보내는 족족 죽여주시더군. 고맙기도 해라.”


“.......”


“근데 말야, 내가 보낸 애들은 지금 내 뒤에서 얼타고 있는 애들이랑은 다른, ‘진짜배기’였거든. 시간을 벌기 위해 너 같은 실력자들이 버티고 있는 거겠지. 그래서 궁금한데, 시간 벌어주는 애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그걸 내가 알려줄 거 같아?”


“아니, 사실 알려줄 필요 없어. 이미 알았거든.”

베리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다.

“그건 그렇고, 얘네 누군지 알고 있어? 둘은 냇가에서 잡았고, 한 년은 내가 직접 조져서 잡았는데. 하긴, 알고 있으니까 나온 거겠지?”


“.......”


“작별인사나 하셔.”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베리의 손동작.

어느새 그녀의 손에서 번뜩이고 있는 장검과,

흙바닥으로 추락하는 세 개의 머리.


유진은 입술을 씹는다.


“내가 왜 계속 죽어 나갈 줄 알면서도 하나씩 부하를 보냈는지 알아? 뭔가 느낌이 이상했거든. 그리고 확신을 얻기 위해 한번 꼬득여 봤는데, 네 몰골을 보아하니 내 예상이 맞았다는 걸 알겠네.”


“.......”


곳곳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전투복과, 얕은 상처들에서 배어나온 피로 얼룩진 제복. 최대한 정돈했으나 아직 거친 호흡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유진의 외견에서 베리가 얻어낸 결론은 간단했다.


“너, 혼자지?”


“.......”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재빨리 몸을 돌려 산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을 뿐이었다. 부관들을 향해 뒤돌아선 베리의 입가에 확신의 미소가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공격 시작해. 아,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첨언은, 그녀의 ‘부하’들을 향해 있었다.





“저년 목 깨끗하게 잘라서 가져와. 베개로 쓰게.”




================




“어떡하지? 이제 뭘 어떡해야 해?”


“지원군은 오는 중이겠지?”


“무전은? 통신 쪽은 왜 아무도 안 보이는 거야?”


무성한 나뭇잎들의 파도에 묻혀있을 뿐, 능선 위의 상황은 선명한 혼란과 절망이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흐르는 부상병의 신음과 갈팡질팡하는 생도들의 고함소리. 마치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혼돈을 수습하기 위해 치체와 캄포가 나서 애를 쓰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치체! 뭐 좀 해봐!”


“캄포 쪽은 아까 목책을 만들던데, 우리도 그래야 하는 거 아냐?”


“멍청아, 지금 목책 따위가 무슨 소용이야? 치체, 일단 포위가 더 단단해지기 전에 내려가서 활로를 뚫어야 하지 않을까?”


“.......”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목소리의 홍수 속에서도 치체는 자신의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칼처럼 올곧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침착함에 귀족출신의 생도들은 더더욱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사실 치체는 침착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답을 내놓을 수 없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캄포 쪽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목책을 만들려면 다 같이 해야지, 이쪽에만 세워 두면 무슨-”


“치체는 애들이랑 반격을 나간다는 거 같던데?”


“반격? 미쳤나, 그건 자살이지!”


“아냐, 캄포! 우리도 따로 움직여서 반격하는 게 낫지 않아? 그, 왜, 교, 교란도 되고!”


“.......”


크게 놓고 본다면 두 파벌로 갈라져 있는 생도들이었지만,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그들은 저마다의 목소리와 저마다의 두려움으로 어지럽게 뒤얽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치체! 어떻게 할 거냐고?!”


“캄포! 뭐라고 결정을 좀 해줘!”


침묵하는 ‘지휘관’들. 그들의 침묵에 조급해져 가는 생도들.

결코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혼돈의 가운데로,

익숙한 목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울려 퍼진다.




“아가리 닥쳐 이 개병신같은 새끼들아!!!!”




적에게까지 닿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외침. 그리고 그 외침에 담겨 있는 상스러운 욕설들. 그러나 모든 생도들의 혀를 마비시키고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이런 외침의 크기나 욕설의 내용이 아니었다.

바로,

외침의 주인공이었다.




“개씨발 듣자듣자 하니 도저히 못 들어주겠네! 야이 좆같은 쫄보새끼들아! 니들이 그러고도 기사냐? 뭘 어떡해야 하냐고? 니들이 거시기에 털도 안 난 꼬맹이야? 그걸 일일이 다 가르쳐 줘야 해?! 이러려고 씨이팔 좆빠지게 훈련받았냐? 앙?”

바위 위에 올라서서, 자신의 시야 아래 있는 모든 동기생들에게 폭언을 쏟아내는 에두. 그와 가까운 곳에 있던 에이미가 적에게 들릴지도 모른다며 에두를 만류하려 했지만, 그의 고함은 멈추지 않는다.

“반격? 지금 우리가 여기 올라온 게 적의 약점을 찾으려고 올라온 거냐? 시간을 벌려고 올라온 거지? 정신 좀 차려라 빡대가리 새끼야. 그리고 목책? 야이 븅신아 우리 여기에 있다고, 여기 공격하면 된다고 적한테 광고라도 할 생각이야? 아니, 애초에 씨발 생각이란 게 있긴 하냐?”


“에두, 그만-”


“지금 아래에선 근위대 한 명이 우리한테 시간 벌어준답시고 개똥줄을 타고 있는데, 고작 생각하는 게 이 정도야? 나랑 장난하냐, 씹버러지 병신들아? 야, 치체, 캄포. 내 앞에서 존나게 온갖 잘난척은 다하더니 고작 이거야? 이러려고 그 지랄 한 거야? 웃기지도 않네요, 씨발년놈들아.”


“.......”


직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 치체와 캄포였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 에두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한숨에 가까운 신음을 뱉는다.

그리고 떠오른 그의 눈동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캄포. 애들 데리고 주변의 흔적 지우고 쉽게 올라올 수 없도록 진입로 죄다 헤쳐 놔. 나무 위 곳곳에 활이나 총 잘 쏘는 애들 심어놓고. 퇴로는 북동쪽과 북쪽 둘이다. 퇴각 시 엄호는 교대로.”


“.......뭐, 뭐?”


당황한 캄포의 표정과 목소리를 묵살하며, 에두는 치체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치체, 애들 시켜서 중상인 애들 바로 후송할 수 있게 퇴로 근처에 준비시켜놓고, 안 다친 새끼들 중에 발 빠른 애들 몇 명 골라서 장비 가볍게 해둬. 나랑 같이 내려간다.”


“잠깐, 뭐라고? 내려가다니, 어딜?”


“어디라니, 뻔하잖아, 병신아.”

치체가 자신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에두의 팔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돌아온 것은 여전히 날이 서있는 에두의 표정과 시선이었다.




“씨발, 선배 구하러 가야 할 거 아냐.”





===========================





“-!”


있는 힘껏 뒤로 허리를 구부렸지만, 검끝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사선으로 얇게 그어지는 상처. 살짝 피가 배어 나왔지만, 이어질 행동을 마비시킬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끄...끄륵......”


동맥과 기도, 그리고 목뼈를 한꺼번에 꿰뚫린 기사의 입에서 피거품과 함께 소리가 새는 비명이 흘러나온다. 물론 그에 그치지 않고, 유진은 손목을 뒤틀어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힌 적에게 확실한 죽음을 선사한다.


“...헉......허억.....”


두꺼운 나무를 등받이 삼아 기대서는 유진. 세 명을 연달아 베었지만 언제 다시 이어질지 모르는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그녀는 다시 검을 들어 보인다. 이미 입술은 말라 터졌고, 어떠한 습기도 머금지 못한 입안에선 단내가 나기 시작했지만, 그 검끝 만큼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이야, 여덟 명째인데. 독하다, 독해.”

그리고 그 검이 향하고 있는 곳에서, 포레스트스톡의 시장, 유비르 베리의 미소가 떠오른다.

“나도 해결사 하던 시절에 한 독기 했는데, 너도 만만치 않구나. 결국 내가 직접 나서게 만드시네.”


“.......”


당장 보이는 것은 베리의 그림자뿐.

그러나 좌측으로 두 명, 우측으로 세 명의 움직임이 유진의 피부로 와 닿는다.

눈앞의 상대는 일종의 여흥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쓰러진다면, 저 여자는 망설이지 않고 전군에게 돌격명령을 내리겠지.


“어디 한번 놀아보자.”


어느새 반대편 허리에서도 검을 뽑아내어 쌍검으로 달려드는 베리. 우직한 도약이었지만, 유진은 짧게 숨을 내쉬었을 뿐, 물러서지 않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목의 양 측면을 노리고 들어오는 두 검을 고개를 숙여 피해낸 후 비어있을 베리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지만, 유진의 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금속재질로 번쩍이는 베리의 무릎보호구였다. 검의 궤도가 비틀리고, 고갈된 체력의 영향으로 살짝 흔들리는 유진의 무게중심. 베리는 그 찰나의 팀을 놓치지 않는다.


“커흑!”


그렇지 않아도 단단한데 보호구까지 덮여있었으니, 무릎에 복부를 가격당한 유진은 비명소리와 함께 뒤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정신력으로 검을 놓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다가서는 베리의 미소를 앗아갈 체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야, 너 가까이서 보니 꽤 반반하구나?”

의도적으로 검을 쥔 유진의 손을 짓밟고서 가까이 허리를 숙이는 베리. 동시에 그녀의 시선이, 반쯤 풀어 헤쳐진 유진의 가슴팍으로 향한다.

“크으, 가슴도 엄청 크고 얼굴도 이쁘네? 내 취향인 걸? 참고로 알려주자면, 난 맛있기만 하면 남녀 가리지 않거든.”


베리가 두 자루의 검을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면서, 유진의 전투복과 제복도 조금씩 조금씩 찢겨나간다. 유진은 몸부림을 쳤지만, 양팔이 모두 베리의 발아래 묶여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얕은 상처만 늘어갈 뿐,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는 중이었다.


“야, 풍!”


“예.”


베리의 부름에, 근처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남자가 대답하며 모습을 드러낸다.


“어때, 몸매 죽이지 않냐?”


“네, 그러네요.”


“먼저 먹어볼래?”


“헛, 그래도 됩니까?”


순간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면서, 유진은 더러운 욕망의 뒤틀림을 볼 수 있었다. 두려움보다는 구역질이 먼저 솟아올랐지만, 여전히 팔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저런 도시에 박혀있느라 고생한 상이다. 네가 언제 이런 빵빵한 아가씨를 먹어보겠냐?”


“헤헷, 그럼 사양하지 않고-”


남자가 더러운 미소와 함께 허리띠를 푸는 순간,



“잉?”


유진이 허리를 튕겨내 그 반동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다리를 휘두른다. 사타구니를 맞지 않기 위해 베리는 검을 쥔 유진의 손을 짓누른 채로 옆으로 비켜섰지만, 검이 없는 유진의 손은 자유와 함께 남자의 발목에서 단검을 낚아채어 그에게 남자로서 맛볼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선사해준다.


“끄....끄아아악!!”


통째로 잘려나간 자신의 그곳을 붙잡은 채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남자. 유진은 그에 그치지 않고, 더러운 피가 묻은 단검을 휘둘러 그때까지도 검을 쥔 손을 짓누르고 있던 베리의 발등에 꽂아 넣는다. 짧고 굵은 비명. 마침내 풀려난 유진이 뒤로 도약하여 호흡을 정돈한다. 베리의 장난질 덕분에 가슴 한쪽이 훤히 드러난 상태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발등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는 베리의 뒤로, 짙은 그림자가 가득 모여들었으니까.


“아이씨, 아프네. 야, 풍! 괜찮냐?”


“아으....그어....어어어어.....”


“안 괜찮나 보네. 어쩔 수 없지. 네 거시기의 원한은 우리가 대신 풀어줄게.”


고통으로 살짝 일그러진, 비릿한 미소. 그리고 그런 미소를 베리와 모든 부하가 공유하기 시작한다.


“.......”


복부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어느 정도 호흡을 되찾기는 했지만, 마침내 검끝마저 떨려오고 있다. 자꾸 흐려지는 시야의 가장자리. 수차례 고개를 흔들어봐도, 분열되는 초점은 좀처럼 제대로 돌아오질 않는다.


“그만해라. 서있는 게 고작이면서. 응? 그만하고 무기 버려. 그럼 그 크고 예쁜 가슴 실컷 조물딱조물딱 귀여워 해줄게.”


자신이 내뱉은 말처럼 품위 없는 손짓과 함께 다가서는 베리.


유진은 그런 그녀의 접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상처와, 상처에서 스며 나온 피.

그 피로 반질거리는, 자신의 살결을 바라본다.


마른 목소리와 함께, 유진은 미소를 짓는다.


“.......그놈의 가슴, 가슴.”


“어? 뭐라고?”


“이 가슴이 그렇게 좋아?”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유진의 말에 베리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지! 그런 크기와 예쁜 모양이면, 내가 여태까지 먹었던 년들 중에서도 거의 최상급-”


“그래? 그럼 이럼 어때?”


유진이 검을 내린다.

아무도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유진의 자신의 검을, 천천히 그녀의 허리춤으로 끌어내린다.

그때까지도, 아무도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휙.




실로 짧고, 간결한 손동작.

목표를 완벽하게 베어낸 유진의 검은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고,

묵직한

살덩어리가

더 이상 여성성이나 매혹의 상징이 아니게 된 그 살덩어리가,

솟구치는 피와 함께 군화 옆으로 추락한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 유진이 무슨 짓을 했는지 눈치챈 사람은 베리 혼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온몸에 엄습하는 소름을 주체할 수가 없어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어때? 아직도 날 먹고 싶어?”


엄청난 출혈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새빨간 눈동자.

그 시선과 똑바로 마주하였기에, 베리는 떨리는 미소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저 미친년, 진짜 독하네.”





경악하는 무리와

벌어지는 간격.


나무 위에서 숨을 죽인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에두.

바로 그가 노리고 있었던 기회의 순간이었다.





“지금이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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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25막) 탈태(奪胎) (6) +4 17.01.22 492 11 14쪽
271 (25막) 탈태(奪胎) (5) +4 17.01.17 388 9 18쪽
270 (25막) 탈태(奪胎) (4) +10 17.01.12 542 11 18쪽
269 (25막) 탈태(奪胎) (3) +8 17.01.07 426 14 18쪽
268 (25막) 탈태(奪胎) (2) +8 17.01.02 425 12 20쪽
267 (25막) 탈태(奪胎) (1) +8 16.12.28 479 12 16쪽
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265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8 12 18쪽
264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4 12 23쪽
263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70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20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1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7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2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9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2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8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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