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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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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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0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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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25막) 탈태(奪胎) (3)

DUMMY

“후보생을 팼다고요?”


“단순히 때린 게 아니라, 자신과 싸워서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면 전역시켜주겠다고 했답니다.”


“........그 후보생, 살아있죠?”


“네, 간신히.”


마누앙의 대답에 로빈은 들고 있던 펜을 놓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도 어지간히 튼튼한가 보네요. 엘라한테 처맞고도 살아있다니.”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폐하.”

그의 말처럼, 마누앙의 표정은 가벼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정말로 엘라론 경이 상처를 입고 해당 인원을 퇴소조치했다면, 또는 그 인원이 사망하기라도 했다면, 야당의 의원들과 언론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심지어 그 해당 후보생이 야당 측 귀족자제였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귀족자제였다면요?”

마누앙의 질책성이 짙은 목소리에도 로빈은 희미한 미소를 놓지 않는다. 아니, 그 미소야말로 오히려 질책에 가까울 정도로 차가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지금 엘라에게 맞은 게 평민이라 다행이라는 말씀인가요?”


“.......그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을 다른 후보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냐-이지,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는 상관없어요. 피해자의 신분은 더더욱 그렇고요. 잘 아시겠지만, 공화국엔 이미 차별금지법안이 발효되었거든요.”


발언의 실수는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총리가 아니었다.


“바로 그 차별금지법안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아무런 말도 나오고 있지 않지만, 처음부터 해당 사건에 대해 후보생들이 크게 반발했다면 징병제 자체에 커다란 균열이 일어났을 겁니다. 그리고 폭행을 당한 게 평민이라 다행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게 정말로 야당 측 귀족자제였다면, 그들은 역차별까지 운운하면서 어떻게든 이 부분을 물어뜯었을 테니까.”


“그래서 총리님은 어떻게 하시길 바라는 겁니까? 엘라를 사임시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요?”


“사임뿐만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지요. 후보생은 말 그대로 아직 ‘후보’인 존재입니다. 공화국의 기사가 민간인을 폭행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민간인.......”

마누앙의 마지막 단어를 곱씹으며 다시 펜을 집어드는 로빈. 그는 무의식적으로 펜을 돌리며,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위화감의 정체를 찾기 위해 시선을 집중한다. 덕분에, 그는 곧바로 그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뭐가 말입니까?”


“총리님 말씀대로, 그들은 아직 민간인이나 다름없어요. 그런데도 아직 이 사건에 대해서 반발이나 우려의 목소리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동기가 하나가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았음에도 말이죠.”


“.......”


“엘라 본인이 보고서를 제대로 올리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현장에 있었던 부관의 증언에 따르면 엘라는 해당 후보생을 ‘정말로’ 죽이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엘라라지만, 이제 막 입대한 후보생을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이려고 했을까요?”


“엘라론 경이 본보기를 위해 살인미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마누앙의 목소리엔 여전히 의문과 의심이 가득했다.


“뭐, 본인만이 알겠죠. 아무리 막무가내처럼 보인다지만, 그녀도 제국의 군단장까지 했던 사람이에요. 조금은 더 지켜봐도 좋지 않을까요?”


“........그게 폐하의 뜻이라면.”


수긍의 수면 아래 가라앉아있는 ‘반대’의 목소리. 로빈은 그 사실을 알아챘지만 굳이 이 이상 마누앙을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 또한 완벽한 확신 따위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던 탓이다.


“여태까지와 같은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벤도 이거에 동의했어요. 걔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이 ‘변혁’을 위한 인물로 엘라를 낙점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녀는 공화국의 그 누구보다도 제국군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훈련소를 지배하고 있던 방식이 이론과 규율이었다면, 엘라가 그걸 바꿔줄 겁니다. 제 기수도 그랬고, 실제로 과거엔 제대로 수료하기도 전에 훈련생도들을 차출해서 전방으로 투입하고 그랬잖아요? 덕분에 피해는 막심했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기사들은 지금도 공화국의 정예로서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죠.”


“........기사도 아닌 제가 이 이상 말씀드리기는 어렵겠지요. 이 안건에 대해서는 검성과 폐하의 뜻을 믿겠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타났을 경우도 대비하고 계셔야 합니다.”


마침내 순수한 의미의 미소가 로빈의 입가로 피어오른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셰르와 유진에게 잠시 훈련소에 지원을 나가라고 해두죠. 자, 다음 안건은?”


“예, 회임하신 왕비님의 대리기사 복무에 관한 내용입니다만.”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





“.......아으, 씨발.......”


눈을 뜨기도 전에 밀려오는 격렬한 통증.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는 통증은 그 근원을 알기 힘들 정도로 넓게 번져있었다. 욕과 분노로 중화시키려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 일어났네.”


가까이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에두는 그제야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 사이로 간신히 시선을 끄집어낸다.


“.......뭐야, 씨발?”


목소리의 주인공은 예상대로 케타르디노 상회의 에이미,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에두의 마지막 기억 속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남색의 정복. 그리고 깔끔하게 묶어 넘긴 단발머리.


“너 꼬박 이틀 동안 뻗어있었어. 다들 죽은 줄 알았는데 숨은 쉬고 있더라.”


말의 마지막을 장식한 짧은 웃음에 에두는 마침내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물들이고 있는 치욕까지도.


“그 씨발년을-!”


“가만히 있어라, 떨어진다.”


묵직하게 시야가 흔들리고, 가까운 곳에서 밋밋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동시에 에두는 깨닫는다. 자신이 푸른 제복의 등짝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을.


“씨발, 뭐야 이거? 놔!”


“........이제 내려놔도 되지?”


담담한 치체의 질문에, 곁에 있던 에이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치체는 짐짝이라도 내팽개치듯이 에두를 떨어트린다. 지면에 발이 닿는 순간,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통증의 원인이 얼굴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에두였지만, 고통의 신음보다는 역시 욕설이 먼저였다.


“씨발롬아, 뭐야 너? 오르막길에서 나한테 깝치다가 처발린 새끼 아니냐?”


“오트만 치체다. 이름 정도는 기억하지?”


“내가 왜 씨발놈아?”


“같은 분대니까.”


뒤틀리는 에두의 눈썹.


“분대.......?”


‘미친개’와는 이 이상 말을 섞기 싫다는 듯, 그대로 걸어가던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리는 치체. 그를 대신하여 입술을 움직이는 것은 에이미의 몫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우리의 ‘훈련대장’님께서 입소식이 끝나자마자 전원 완전무장행군을 명령하셨어.”


“행군?”

에이미의 설명과 함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에두의 시야에 들어온다. 에이미의 등에서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는 군장과, 그 위에서 양옆으로 뻗어있는 창. 에두는 황급히 몸을 돌려 앞서나간 치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는 양손으로 각각 군장을 들고 있었다. 에두는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섰고, 그의 접근과 그 의도를 눈치챈 치체는 말없이 왼손의 군장을 내민다. 물론 에두의 감사 인사는 없었다.

“그 썅년은 어딨어?”


“누구? 대장님?”


“대장이고 좆이고 그 씨발년말이야. 당장 죽여버릴-”


“적당히 해라.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고 싶지 않으면.”


주변을 둘러보던 에두의 불같은 눈동자가 비웃음을 따라 에이미의 얼굴로 박혀온다.


“개소리 말고, 너까지 뒤지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년 있는 곳 말해.”


“말하면? 또 덤비게? 네 그 무모한 도전에 대한 대가는 이제 우리 모두가 함께 받을 텐데?”


“씨발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고. 빨리 말하기나 해라. 내가 여자라고 봐줄 줄 아냐?”


“대장님은 여자라고 봐줘서 그렇게 털렸니?”


“이 좆같은-”


“눈치가 있으면 슬슬 알아채야지.”

에두가 재빠르게 다가와 주먹을 치켜들었음에도, 에이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네가 아르바티앙의 뒷골목에선 먹혔을지 몰라도, 여긴 그림자 밖의, 진짜 세상이야. 우리 같은 쩌리들과는 노는 세계가 다르다고. 너도 맞는 순간 알았을 거 아냐? 네가 살아서 여기 서있는 건 기적과 자비의 연장선 덕분이라는 걸.”


“........”


“네가 대들었던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아?”


“........씨발, 누군데?”


“엘라론 ‘패틀 오브 매드니스’ 니바르토. 통칭 ‘광기의 꽃잎’. 제국의 초대 검성이자 인류 최초의 검성 ‘아론 드리브달’의 직계후손이자, 제국의 군단장까지 했던 사람이라고. 넌 그런 사람한테 덤벼든 거야. 우리 모두가 지금 네 상태에 동의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다시금 밀려오는 고통. 에두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다.


“동의?”


“네가 처맞는 광경이 다들 통쾌했나 봐.”


“.......흥. 그러든지 말든지 씨발놈년들이.”


그가 훈련소의 언덕을 오르면서 했던 행동들. 그를 저지하려던 치체에게 했던 폭행을 포함하여, 에두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꽤나 많은 적을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에두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에겐 평생에 걸쳐 익숙해져 온 광경이었으니까.


“조용, 도착했다.”


앞서가던 치체의 말대로, 길게 이어지던 대열은 어느새 숲의 그림자를 만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강행군이었기에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자들도 있었고, 반대로 치체나 에이미와 같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뭘 벌써 퍼져?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리고 숲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엘라.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에두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가려 했지만, 에이미의 손길이 그를 막아 세운다.


“놔라.”


“말했지만, 너 때문에 우리만 피곤해진다니까.”


“좆도 상관 안 한-”


“어머, 안녕, 씨발? 일어났어?”


에두의 입술이 굳는다.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는 엘라의 미소.

체격은 에두가 훨씬 컸지만, 순간 그는 엘라의 먹색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내 이름은 씨발이 아니야.”


“저번에 물어봤더니 씨발이라며? 그리고-”

얇고, 아름다우며, 새하얀 손가락이

에두의 미간을 짓밟아온다.

“말에 존경을 담아야지, 훈련병?”


평소의 에두였다면 곧바로 그 손가락을 뿌리치고 여인의 턱에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에이미에게서 눈앞에 있는 여자에 대한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조금이라도 힘을 푼다면, 이 작은 손가락에 그대로 짓눌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친개’는 역시 ‘미친개’였다.


“존경을 담고 안 담고는 내가 정한다, 망할 년아.”


역병처럼 번져나가는 경악과 침묵. 그 끝엔 역시나 엘라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있었다.


“꺄하핫, 역시 맘에 들어. 좋을 대로 해. 아, 그저께 조건은 아직 유효하니까, 언제라도 덤비렴?”


“그쪽이야말로 긴장 놓지 않는 게 좋을걸.”


잇몸의 통증이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해맑은 미소와 함께 그런 에두에게서 뒤돌아 나아가는 엘라. 에이미는 그제야 참았던 긴장의 숨을 터트린다.


“자아, 너흴 여기로 끌고 온 이유가 궁금하지? 정규과정엔 없는 내용이니까, 많이들 당황스러울 거야.”

엘라는 산책을 하듯,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생도들 사이를 누비면서 영력 실린 목소리를 울린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는 사람? 너.”


갑작스럽게 지목당한 생도는 황망한 손짓으로 어설픈 경례를 올린다.


“예, 옛?”


“여기가 어딘지 알아?”


“저, 그....... 베르달 숲입니다.”


“맞아. 이곳의 영주는 크라트 니바르토, 늑대라고 불리는 사람이지. 그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너.”


“옛! 바, 바크달룬 성입니다!”


“맞아맞아. 자아, 그럼 너희들이 여기서 해야 할 일을 알려줄게. 간단해.”

엘라의 손가락이, 짙은 숲의 한가운데를 향한다.

“일주일 내로, 숲 전역에 걸쳐 경계 중인 베르달군에게 들키지 않고 바크달룬 성으로 잠입할 것. 이게 너희들의 첫 훈련이야.”

대답이나, 반응의 목소리는 없었지만,

모두가 경악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엘라는 그들의 불붙은 경악엔 아랑곳하지 않고, 한차례 다시 기름을 퍼붓는다.

“아, 참고로 베르달 군에는 너희가 온다고 공지하지 않았어. 즉, 저들 입장에선 너흰 정체 모를 침입자겠지? 너희들의 임무는 첫째로 저들에게 들키지 않는 것, 둘째로는 저들에게 죽지 않는 것, 셋째로는 저들을 죽이지 않는 거야. 그리고 일주일 내에 바크달룬 성에 도착하는 거지. 어때, 쉽지?”


쉽다?

상대는 카나반의 최정예라 불리는 베르달군이다. 그런 자들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베르달 숲에서, 들키지 않고 잠입하라고?


“저, 저기, 대장님!”


“으응?”


“저들에게 잡히거나 일주일 내로 성에 도착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어느 생도의 용감한 질문이었다. 그에 엘라는 잠시 턱을 짚고 고민하더니,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뭐 실수 한 번 했다고 퇴소라면 너무 잔인하잖아? 난 착하니까,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선택.......지?”


“첫 번째는 마즈다힐 주둔군으로 파견 나가서 실전경계임무에 참여하기. 두 번째는 저기 씨발이처럼 나와 1:1대련하기. 둘 중에 하나 선택하게 해줄게. 어때, 좋지 않아?”


깔깔깔- 드높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그러나 생도들 중 그 누구도 따라 웃는 자는 없었다.




“뭐해, 다들?”




그리고 그 웃음소리의 끝에서, 엘라는 톡톡, 자신의 손목시계를 두드린다.




“빨리 출발하지 않고?”





=====================





“흐음........”


재판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검성’으로서의 일정이다. 하지만 그 상징성보다는 다른 이유로 벤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 그 시선들 중에는 의심도 있었고, 원망도 있었으며, 연민도 있다. 이 모든 걸 삼켜야 한다. 무릎에서 올라오는 고통 따윈 이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벤, 아니, 검성님. 다 모였습니다.”


“아, 그래. 고마워요, 선임전투마법사.”

어색한 존칭과 경어를 나누는 벤과 고도. 그들이 있는 곳은 마법대학 아스트로바톰의 강의실로, 디쿠젠의 양해를 얻어 비공식적으로 마련한 장소였다. 그리고 그곳에 모여 있는 자들은 다름 아닌 통합군소속의 전투마법사들, 그중에서도 지휘권을 가지고 있거나 훈련을 맡고 있는 중견 마법사들이었다.

“먼저, 갑작스러운 소집요청에 응해주신 점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하고 싶은 말이나, 저에게서 듣고 싶은 말들이 많으시겠지만, 오늘은 일단 전달해 드릴 내용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할게요.”

책상을 줄이어 붙여놨기 때문에 강의실은 마치 회의실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벤은 말을 마치며, 그 책상 위로 두꺼운 종이뭉치 하나를 툭- 내려놓는다.

“모두들 한 번쯤은 읽어보셨을 겁니다. 아센 하파 경이 총집하고 재편한, 전투마법사훈련계획이죠. 그녀가 많은 곳을 손보기는 했지만, 그 기틀만큼은 여태까지의 공화국 전투마법사 육성방식과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숲을 수호하고, 자연 내성에 어쩌구저쩌구........ 무슨 말인지 아시죠?”


“.......”


예상대로 싸늘한 반응.


“사실, ‘전투’마법사라는 건 하나의 명칭일 뿐이죠. 내면의 마력을 본연의 내성을 거쳐 손끝이나 손바닥을 통해 현실계로 발현하는 거잖아요. 마법이란 과정과 현상을 간단히 설명하자면요. 우린 대대로 이 ‘과정’에 충실해 왔습니다. 세뮈엘을 받들어 숲을 수호한다던가, 혈마법을 배척한다던가 하는 것들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었죠.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전투마법사’라는 존재는 그 이름과는 달리 화력과 보호막을 담당하는 등, 전투에 있어서 그 뒤를 받쳐주는 존재가 되었죠. 왜냐, ‘전투마법사’는 직접적으로 마력을 다루지 못하니까요. 정신이 피폐해지고, 마음이 무너진다는 이유로 언제나 주문의 영창과 내성을 중요시해왔습니다. 이건 공화국만은 아니죠. 심지어 혈마법을 다루는 제국도 마찬가지니까.”

벤이 준비해놨던 다른 종이뭉치를 내려놓는다.

“이런 관념이 결과적으로는 마법사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옭아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로빈, 아니, 폐하와 이야기를 나눠봤어요. 다들, 이번 마즈다힐 원정과 이스누시아 정복 중에 있었던 사건들을 들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존재가, 바로 ‘덜린족’입니다.”

마법사들은 저마다 눈썹을 치켜올리거나, 의문의 신음을 뱉는다. 벤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은 그만큼 예상 밖이었으니까.

“왜 마법사는 전면에 나서면 안 되는 겁니까? 왜 마법사는 기사의 영력과는 달리, 가지고 있는 모든 걸 그대로 내뱉지 못하는 겁니까? 왜 마법사는 기사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불리하다는 편견에 갇혀있는 겁니까?”

저마다 종이뭉치를 손으로 들고 가 정독하기 시작하는 마법사들.

그들의 눈동자와, 그들의 표정에,

경악과 놀라움이 동시에 번지기 시작한다.

“거기 나와 있듯이, 이 내용은 방금 전까지는 폐하와 왕비, 그리고 저만 알고 있었던 극비내용입니다. 이걸 여러분께 공개하는 이유는,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벤이 의자에서 일어난다. 목발이 흔들렸지만, 그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린 ‘전투마법사’라는 개념을 완전히 바꿔버릴 겁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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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0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7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1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8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2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8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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