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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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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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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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1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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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DUMMY

“누구신지요.”

늦은 시간이었기에, 노크에 답하는 오로메의 목소리엔 약간의 의아함이 담겨있었다. 마지막으로 의회에 참석한 뒤로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심지어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로빈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있던 그녀다. 이런 노골적인 태도를 뚫고 이 여관방에 노크를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그녀의 비서관뿐. 하지만 그는 이미 두 시간 전에 퇴근을 알리고 물러갔다. 오로메는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까지도 밖에 서있는 자가 누구인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

살짝 문을 열어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오로메.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문을 닫아 걸쇠를 푼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죄송해요, 오로메 경.”


“아닙니다, 폐하. 저야말로 몸이 좋지 않아 부르심에 응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지금은 좀 괜찮아지셨나요?”


로빈의 등 뒤에서 샛노란 눈동자가 떠오른다. 걱정스러운 그 표정에, 오로메는 인자한 미소를 품으며 부부를 안으로 모시기 위해 한걸음 문에서 물러난다.


“나이트 마제스티.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그녀의 미소에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지나는 환하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서는 로빈의 뒤를 따른다.

로빈은 지금까지 오로메가 마즈다성 본궁에 마련된 귀빈용 숙소를 마다하고 외곽의 여관방에 들어온 이유를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활짝 열려있음에도 어떠한 도시의 소름도 흘러들어오지 않는 잔잔한 창문의 풍경과, 그 아래 마련되어 있는 조그마한 탁자 위의 조그마한 찻잔들. 그 어떤 장식도 문양도 없는 새하얀 침대보 위에는 방금까지 그녀가 읽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시집이 두 팔을 벌린 채 거꾸로 누워있다. 자신이 모시는 왕족의 위엄은 드높아야 한다며 치켜세우면서도, 정작 본인은 귀족대표답지 않은 수수함을 즐기는 이런 모습이야말로 왕당파대표 라즈팔라무스 오로메라는 여인의 조용한 멋이리라. 로빈은 언제나 공적인 자리에서만 그녀를 접해왔기에, 소매 넓은 붉은 비단옷의 기품 아래 감춰져 있던 밋밋한 소복차림의 모습이 꽤나 신선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이제 갓 두 번째로 우려낸 것이라, 맛이 깊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느긋하면서도 익숙한 움직임으로 향이 피어오르는 주전자를 살짝 흔드는 오로메. 곧이어 뜨뜻한 찻잔 두 개가 탁자 위에 올라왔고, 로빈과 지나는 한번 눈을 마주치고는 살짝 입술을 댄다.


“와, 맛있네요. 저는 솔직히 차보다는 술 쪽인데, 이건 정말 맛있어요.”


솔직한 지나의 감탄에 오로메의 미소가 짙어진다.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두어 번의 향과 함께 찾아오는 잔잔한 침묵. 먼저 반 정도 남아있는 잔을 내려놓은 것은 로빈이었다.


“오로메, 돌리지 않고 말할게요.”


“저번 의회에서 있었던 일 말입니까?”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풀지도 않은 오로메의 즉답이었다.


“예. 물론, 왕당파라 해서 무조건 제 의견에 동조하고 지지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에게 그런 자격도, 그런 능력도 없다는 건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어요. 이스누시아 침공 건에 대해서 사전에 오로메에게 상의하지 않은 것도 분명한 제 잘못이고요. 다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오로메 경의 의도였어요.”


“예, 맞습니다. 그때 파병 건을 반대했던 제 논지는 반쯤은 억지였습니다. 애초에 군사전문가도 아닌 제가 이스누시아의 전력이나 블라고슬로바의 움직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 리 없었지요.”


“그렇다면 왜-”


“폐하.”

차향처럼 피어오르려던 로빈의 흥분을, 오로메는 잔을 내려놓는 것만으로 단숨에 흐려놓는다.

“이번 원정의 주목적이었던 철광석을 얻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줄곧 이곳에 틀어박혀 있었으면서도 전선의 보고서는 모두 간파하고 있었던 것인가. 역시 반평생을 귀족대표로 살아온 그녀의 내공은 느긋한 겉모습과는 달리 만만하지가 않다.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예.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요, 폐하의 선택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네?”


로빈의 의문에, 오로메는 마침내 주전자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부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다.


“그때 제가 폐하께 반기를 든 이유를 물으셨지요. 그 대답 전에, 제가 거꾸로 폐하께 여쭙겠습니다.”

차오르는 찻잔. 마른 입술을 적시고 나서, 오로메의 눈동자가 빛난다.

“폐하께서는, 란다 가슈펠라르와 아델 대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란다 경과 아델?”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오자 로빈은 물론이고 지나까지 미간을 일그러트린다.


“란다 가슈펠라르는, 본래 가슈펠라르 가문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입니다. 계승서열에서도 한참이나 밀려나 있던 그가 공화국 대표가문의 가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선대 가주 윌리안의 실각 덕분이었지요. 란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불안정한 자신의 입지와 반란으로 인해 무너져가는 가문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하여 취임 초기에는 폐하께 상당히 협조적이었습니다.”


“네, 그랬죠. 그래서 오로메도 그걸 잘 이용해서 귀족당에게 우위를 점하라고 조언해주셨잖아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변방에서 더러운 뒤처리나 하면서 가문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던 그가, 어떻게 이리도 빠른 시간 내에 가문을 수습하고 다잡을 수 있었을까요? 반란의 순간 몰락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가문이, 선대 가주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새 니바르토 가문을 제치고 귀족파의 중심이 되어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이 모든 게 란다라는 사람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것 외에 다른 답이 있습니까?”


어느새 로빈과 지나의 얼굴에선 차를 즐기는 여유 따윈 사라져 있었다. 도시의 밤은 조용하고, 세 사람의 숨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오로메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닫는다.


“반란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모든 세력을 잘라내었다 하더라도, 아직 가슈펠라르엔 윌리안의 색깔이 짙게 남아있습니다. 란다 경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죠. 그런 가문의 중심으로서 자리 잡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윌리안이 란다 경을 변방에 두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자신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 피. 그리고 그 피의 기원이 가져다주었던 모든 좌절과 역경. 아직도 그 감각이 생생하게 손끝에 남아있었기에, 지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로빈의 손을 잡고 있었다.


“폐하, 그리고 나이트 마제스티. 여러분께서는, 란다 경이 감옥에 수감 되어있는 윌리안과 몰래 주기적인 만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


만약 지나가 찻잔을 들고 있었다면, 찻잔은 그대로 바닥을 향해 추락하며 아름다운 소리와 함께 조각이 났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자신의 손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로빈의 온기 덕분에 오로메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가 어째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죄수와 밀담을 나누는지, 그리고 그 밀담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변방 귀족이었을 뿐인 란다 경이 어떻게 이처럼 빠르게 지지를 끌어들이고 기틀을 다잡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이와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란다 경이 윌리안의 이름을 앞세워 가슈펠라르 가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보시는 겁니까?”


로빈의 물음에 오로메는 담담히 고개를 젓는다.


“그것뿐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만, 제가 걱정하는 부분은, 란다 경이 단순히 윌리안의 이름을 빌린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를 이어받기로 다짐했을 가능성입니다.”


“.......윌리안의 의지?”


윌리안 가슈펠라르의 의지.

그가 가슈펠라르 가문의 가주로서 마지막으로 내린 결정과 의지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폐하께서는 이스누시아 원정을 제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귀족당과 시민당에게 약속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철광석의 채굴권과 무기의 제작 및 유통권이었습니다. 그들이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선 스스로 돈과 무기를 쥐어주시겠다 약속하신 겁니다. 바로 윌리안 가슈펠라르의 이름을 잇는 자와, 과거 가슈펠라르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던 소녀에게요.”


“아녜요! 아델은 아니에요!”

다소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나. 로빈은 다급히 잡았던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다시 의자에 앉히지만, 지나의 목소리는 낮춰지질 않는다.

“그 아이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걔는 더 이상 가슈펠라르도 아닌-”


“저도 윌리안 가슈펠라르가 절대 그런 짓을 벌일 리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분위기를 짓누르는 오로메의 목소리와, 그녀의 무표정.

“하지만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윌리안이 변방에 란다 경을 남겨 놓은 것이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었다면, 아델 양의 제3당이 양분된 의회의 새바람을 위함이 아닌, 처음부터 2:1로 왕당파를 제압하려는 계획이었다면......., 폐하, 사태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될 겁니다.”


“아델은 아니라니까요! 애초에 시민당은 총리님의 생각을 로빈이 승인해준 거잖아요?”


“아델 양이 마누앙 총리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총리의 눈이 어두워졌을 수도 있는 거지요.”


“그건 억지에요!”


당혹감을 넘어, 이제 지나의 샛노란 눈동자엔 분노마저 스며있다. 하지만 오로메는 지나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심지어는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녀의 그윽한 시선은, 오직 침묵을 지키고 있는 로빈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쯤이면 제가 그날 보였던 태도에 대한 답이 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


의혹과 추측일 뿐, 확실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로빈은 오로메와 상의를 하지 않고 일을 진행시킨 것에 대해 후회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로빈? 정말로 아델이 그런 애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지나는 로빈의 침묵이 불안했던 모양. 그에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굳게 잠갔던 팔짱을 푼다.


“오로메, 저도 아델이 가슈펠라르의 의지를 지닌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번 원정건을 제외하고, 시민당은 귀족당을 견제했으면 견제했지 동조한 적은 별로 없으니까요. 실제로 그녀로부터 시작된 ‘서출차별금지법안’은 슬슬 긍정적인 방향으로 효과가 드러나는 중입니다. 그런데....... 란다 경의 경우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윌리안과 만남을 갖고 있었다는 게 정말이라면.......”


“폐하, 어쨌든 이건 본국에 돌아가서 다루어야 할 사안입니다. 당장은 내일 회의 때 하실 말씀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귀족당과 시민당 모두에게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가져오지 못했지요. 왕당파 내부에도 귀족당과 시민당에게만 특혜를 베푼 것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가 있는데, 그건 저번 회의 때의 제 태도로 어느 정도 무마시킬 수 있을 겁니다.”


“아, 그거에 대해서 말인데요. 사실, 이번 원정에서 저희가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예?”


크게 눈썹을 치켜뜨는 오로메. 그에 로빈은, 자신의 찻잔을 비우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사실, 이번 원정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




“왜 움직이지 않은 거예요?!”


포진을 설명하고 있던 디미르는 물론이고, 상석에 있던 크리스, 그리고 모든 장군들과 영관급 장교들까지, 지휘소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고함을 지르며 쳐들어온 벤에게 집중된다.


“어......., 나도 반가워. 들어와, 변수.”


“카이우스가 우리 쪽에 나타났다는 보고는 받으셨잖아요?! 절호의 기회였는데, 왜 움직이지 않은 거예요?!”


“.......모두 나가봐. 회의는 점심 먹고 이어서 하겠다.”

디미르의 명령에 지휘관과 장교들이 우르르 천막을 빠져나간다. 그들은 입구를 빠져나가면서 그 앞에 목발을 짚고 서있는 벤을 한결같이 흘겨보았지만, 벤은 그런 그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짜증이 담긴 얼굴로 디미르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와 벤, 그리고 자신만이 천막 안에 남게 되자, 디미르는 새로운 잔을 꺼내 와인을 담고 벤을 향해 내민다.

“한잔할래?”


“됐어요. 왜 움직이지 않았는지 대답이나 하세요.”


“왜 우리가 움직여야 했는데?”


“.......네?”


생각지도 못한 디미르의 반문에, 벤은 자신의 무릎이 불편하다는 사실조차 잊고 한걸음 디미르를 향해 다가선다.


“카이우스를 도발한 거, 너지? 여태까지 코빼기도 안 보이던 인간이 네가 우익을 맡자마자 움직였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제가 도발한 게 아니에요. 그 인간이 절 떠본 거라고요. 아니, 그 문제를 떠나서, 애초에 우리가 도발한 거라 움직이지 않겠다니, 까먹으셨나 본데, 저희 같은 편이라고요! 나보고 우익을 맡으라고 한 건 당신이었다고!”


“카이우스가 없었으니, 쉽게 중앙을 돌파할 수 있었을 거다-?”

얇은 미소와 함께, 디미르는 자신이 채웠던 술잔을 스스로 비워낸다.

“야, 변수. 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네?”


뒤늦게 찾아온 고통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디미르의 느긋한 웃음 때문이었는지, 벤의 미간이 깊게 뒤틀린다. 디미르는 그런 그에게 의자를 하나 내주었고, 벤은 이 호의를 받아들였다.


“이해는 해. 여태까지 네가 싸워봤던 군단장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광기의 꽃잎’과 ‘붉은 장미’였으니까. 그들의 가진 절대적인 ‘힘’과 그에 편승하여 이루어지는 작전과 편제. 그들 개인의 붕괴가 곧 군단의 붕괴였지. 너는 그 특징을 잘 파악해서 그들과 맞상대를 해왔고. 하지만 카이우스 드레브냑은, 제국의 3군단은, 네가 상대했던 다른 군단들과는 달라.”


디미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탁자 중앙에 펼쳐진 전술지도를 가리킨다. 그제야 그 존재를 깨달은 벤이 천천히 지도와 지도 위에 그려진 모든 정보를 훑었고, 마침내 이것이 댄 스파인이 제공했다던 3군단의 모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벤은 디미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우리의 생각이 틀렸어. 3군단은 오직 군단장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전투집단이 아냐. 군단장인 카이우스는, 단지 선택권을 지닌 한 명의 ‘지휘관’일 뿐이지. 이 집단의 전투력은 카이우스 개인의 영력이 아닌, 다른 군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훈련된 병사들과 그런 병사들을 움직이는 유기적인 지휘체계에서 비롯돼. 우리처럼 양익과 중앙군, 예비대, 그리고 각 전선을 담당하는 1진과 2진으로 나눠져 있지 않아. 끽해야 분대단위, 많아봤자 백 명 단위의 독자적인 부대로 이루어진 집단의 연속이지. 알겠냐? 카이우스가 군단을 지탱하는 뿌리라고 해서, 그 줄기도 오직 하나라는 소리가 아니라는 거야.”


“.......”


댄 스파인이 브린타이나에 제공한 정보와,

쥬넨 니바르토가 카나반에 제공한 정보.

벤은 이 정보들이 각각 3군단을 와해시킬 수 있는 수단의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들은, 3군단을 무너트리기 위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었던 것이다.


“알겠어? 카이우스를 딴 곳에 유도해놓고 그 사이 내가 직접 창을 잡고 나가봤자 놈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아. 병사들은 기사에 의존하지 않고, 기사는 지휘관에 의존하지 않는 게 바로 제국의 3군단이라고. 우리가 괜히 오랫동안 서로 노려보면서 간만 보고 있는 게 아냐. 우리 대왕님이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 게 바로 저놈들이다. 전혀 틈이 없어.”


“그래서 어쩌시겠다는 건데요? 이렇게 계속 서로 노려보기만 하실 거예요?”


“이런 싸움은 먼저 이빨을 드러내는 쪽이 불리해.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상태가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우리에게 더 불리하다고 생각했어. 우리 쪽 ‘정보원’의 말이 맞았다는 게 증명되면서 확신했지. 그런 와중에, 네가 온 거야.”


‘미소’의 음흉한 미소. 마침내 벤은 헛웃음을 뱉는다.


“설마, 제가 먼저 움직여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요?”


“제3의 세력이니까! 지겹게 서로 간보고 있던 우리와는 달리, 너는 네 이름대로 이 전장에서의 새로운 ‘변수’야. 카이우스 그 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직접 너를 재보려고 했던 거고. 이미 한번 그렇게 했으니, 또 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잖아?”


“.......즉 정리하자면, 당신네들은 우리가 놈들의 전투력을 측정하기 위한 미끼가 돼주기를 바라는 거네요?”


“에이,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나쁜 놈인 거 같잖아.”


“.......”

목발을 턱받이 삼아, 천천히 눈동자를 내리까는 벤. 그의 먹색 시선은 전술지도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았어요.”


“아, 정말? 또 해줄 거야?”


디미르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벤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벤은 무표정이 번진 얼굴로 일어나 목발을 옮길 뿐이었다.


“미끼든 방패든 뭐든 해줄 테니까. 때맞춰서 움직여주기나 해요.”


“그건 걱정 마! 실컷 날뛰어주라고!”


손을 흔드는 디미르를 향해 작은 고개짓만을 남긴 채, 벤은 그대로 천막 밖으로 사라져버린다. 여전히 미소를 품고 있는 디미르가 마저 잔을 비우고 내려놓자,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크리스의 입술이 움직인다.


“정말로 저 인간이 그대로 움직여줄까?”


“핫하! 그럴 리가!”


시원하게 부정해버리는 디미르를 향해,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감싼다.









“뭐래?”


아직도 남아있는 자국이 신경 쓰이는지, 카니아가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천막에서 나온 벤을 맞이한다.


“움직이지 않을 모양이에요.”


“카이우스가 다시 이쪽에 나와도?”


“네.”


“그럼 어떡해?”


카니아의 물음에 벤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목발을 멈춰 세운다. 지휘천막을 비롯해, 주변 브린타이나군의 진영을 크게 훑는 그의 먹색 눈동자. 동시에, 그의 머릿속은 방금 자신이 안에서 보고 나왔던 전술지도를 허공에 그려넣고 있었다.





“움직이기 싫다면, 억지로라도 움직이게 만들어야죠.”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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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265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8 12 18쪽
264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3 12 23쪽
263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69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19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0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7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1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8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1 13 17쪽
»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8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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