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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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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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08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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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DUMMY

술잔을 이리저리 기울임에 따라 진갈색의 숙성된 향이 얼음과 함께 찰랑인다. 24년 동안 참나무통에서 간직해온 깊은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빛깔이었다. 굳은 입술은 다시 한 번 한 모금, 브랜디의 색으로 갈증을 적셔보지만, 그 입가는 결코 만족스럽게 벌어지지 않는다. 침묵만이, 그의 모든 안주였다.


“실례합니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그의 안식은 의외로 허망한 목소리에 의해 깨지고 만다. 그는 고개를 살짝 뒤틀어, 목소리가 들려온 서재의 입구를 향해 씁쓸함이 남아있는 혀를 움직인다.


“뭐냐.”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구도 들이지 말라 했을 텐데.”


“그게-”


벌컥, 서재의 문이 무례하게 입을 벌린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난처한 표정의 늙은 집사와, 익숙하면서도 달갑지 않은 미소였다.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카이우스 장군. 하지만 근처를 지나는데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요.”


목소리만큼이나 앳된 얼굴. 붉은 기운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눈빛과 기다랗게 말아 올린 희미한 머리카락. 군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하얀 피부와 왜소한 체구였지만, 그 이름은 그 누구보다도 카이우스의 미간을 찌푸리기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베이어 경.”


“하핫, ‘베이어 경’이라뇨? 낯간지럽습니다. 예전처럼 그냥 ‘대령’이라고 불러주세요. 상급자이시지 않습니까.”

베이어라 불린 청년은 카이우스보다도 먼저 집사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펄럭이고는 과감히 서재로 침범해 들어온다. 그는 벽난로 위의 브랜디병을 보자 화색을 띄우며 잔을 집어 들었고, 망설임 없이 얼음과 내용물을 채운다.

“앗, 죄송. 제가 너무 멋대로 했나요? 비싸 보이는데, 한잔해도 되겠죠?”


자신의 맞은편에 앉고 나서야 양해를 구하는 그의 뻔뻔함에 카이우스는 무표정으로 되받아친다.


“내가 거절하면 드시지 않을 텐가?”


“하하핫, 농담도.”


베이어는 카이우스의 말을 곧바로 농담으로 치부해버린 채 잔을 기울여 혀를 적신다. 이어지는 그의 노골적인 감탄에도, 그리고 경박한 손짓에도, 카이우스는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3군단장의 입이 열린 것은, 베이어가 연이은 감탄과 함께 잔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


“여긴 왜 온 겁니까?”


“헛, 말씀 낮추시래도.”


“여긴 왜 온 겁니까?”


슬슬 목소리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한다. 베이어는 은은한 미소를 유지한 채, 결국 잔을 내려놓는다.


“아, 우선, 안톤 대위의 일은 정말 안됐습니다. 유망한 청년이었는데. 위로의 말씀을-”


“감사합니다. 그게 용건의 전부십니까?”


“아뇨아뇨, 그럴 리가요. 전 그저 걱정이 돼서요.”


“.......걱정?”


카이우스의 얼굴이 그의 은빛 시선과 함께 꿈틀거린다.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아니었다. 그저, 맞은편 청년,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과 역겨움이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도 뭐하지만, 장군님. 장군님께서는 요즘 주변에 들리는 소문을 아시나요?”


“소문 따윈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 네. 물론 그러시겠죠. 헌데 그 단순한 소문인 줄로만 알았던 것들이 중앙에까지 건너와버렸습니다.”


“.......”


“예상하셨겠지만 그리 좋은 내용은 아니더군요.”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잔을 채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베이어.

“듣자 하니, 충분히 협상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가 처형당하는 걸 방관하셨다고.......”


“.......”


“게다가 그 부하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장군님의 증손자, 안톤 대위였다고 하던데요.”


“내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군율에서 벗어난 대우를 해줄 수 없었을 뿐이오.”


“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들리는 바에 따르면, 예,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입니다만, 장군님께선 상대방이 직접 찾아와 포로에 대한 처우를 물어왔을 정도로 충분히 협상에 응할 여유와 상황이 되셨음에도 칼같이 무시하셨다고 하던데.”


“그래서, 작전 중에 의도를 알 수 없는 적의 현혹에 걸려들지 않았다고 절 보직해임이라고 하겠다는 겁니까?”


송곳처럼 찌르고 들어오는 카이우스의 대답에, 베이어는 잠시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폭소를 내뱉는다.


“아하하핫! 설마요! 무슨 말씀을! 제국방위의 중심 3군단의 수장이신 데다가 차기 좌검성에 가장 근접하신 분을 누가 무슨 수로 내치겠습니까?”


“글쎄, 마음만 먹는다면 불가능할 건 없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몰래 중간에 개입해서 저와 3군단의 전투에 훼방을 놓는다던가-라는 식으로 말이지요.”


“흐음?”


도리어 흥미롭다는 듯, 베이어는 허리를 앞으로 숙여 시선을 가까이한다.


“이번 전투 내내 위화감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군단의 편제, 배치, 작계 모두가 노출되어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전투력에선 결코 밀리지 않는 부하들이 불합리한 요소들로 인해 패배해야 했습니다.”


“어허, 이건 장군님답지 않은-”


“변명? 예, 그렇게 말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제가 느낀 바를 묘사했을 뿐.”

베이어의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카이우스는 시선의 냉정을 잃지 않는다. 대신, 그는 단번에 잔을 비우더니 깨질까 염려가 될 정도로 강하게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그건 그렇고, 베이어 경이야말로 요새 특이한 자들을 거두어들인다고 들었습니다만. 쥬넨과 댄 스파인이라고 했던가요? 카나반의 배신자들?”


“.......”


줄곧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던 베이어의 눈가로 미세한 떨림이 스친다. 카이우스정도 되는 기사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뭔가 우연치고는 상당히 시기가 미묘하게 맞아떨어지는군요. 제가 브린타이나에서 복귀하자마자 카나반 출신의 기사 둘을 안으시다니.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우리 제국군의 위상이 참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괴물, 망자에 이어서 적국의 배신자라니.”


“그러게요. 뭐어,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만, 하핫.”


베이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수 카이우스의 잔을 채워준다. 그리고 수 초간,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브랜드의 향을 음미한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는 24년의 향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직, 눈앞의 존재를 파고들기 위한 수를 계속해서 고민할 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찾아오셔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중앙군부에서 절 좋지 않게 보고 있다고? 그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닐 텐데요.”


“하하, 무슨 말씀을. 문제는 중앙이 아닙니다. 제가 우려하고 있는 건, 장군님 부하들의 장군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점점 흐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내 부하들은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계속 저흴 자극하는 모양새로군요.”


“어허, 자극이라니, 오해-”


“그대의 아버님은 어떻습니까?”


마침내 카이우스는 베이어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을 앗아가는 데 성공한다.


“.......”


“그대의 아버님께서 저는 물론이고 다른 군단장들을 그리 좋게 보고 있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입장에서 이번 저의 실패가 꽤나 큰 이득이자 즐거움이 됐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이 심하시군요. 그분은 위대한 제국의 우검성이십니다. 제국 군인들의 죽음과 희생을 기뻐하실 리 없지 않습니까?”


“그래요? 그럼 제가 실패하자마자 경을 비롯한 경의 형제자매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 건 우연입니까?”


“.......”


“어쩌면, 혹시 말입니다만,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국 역사상 이처럼 좌검성의 자리가 길게 공석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황제께서 침묵하고 계신데다가, 마땅히 그 자리를 물려받을 ‘드리브달’의 이름도 없는 지금 상황을, 누군가는 마침내 군부를 독재의 형태로 장악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흐음.”


아까와 마찬가지로, 흥미롭다는 듯 깍지 낀 손을 턱에 받치는 베이어. 하지만 그의 미소는 한층 더 굳어있었다.


“그리고 그 좌검성의 자리를 가장 믿을 수 있으면서도 경쟁을 통해 입증된 자에게 맡길 수 있다면, 모든 일이 수월해지겠지요.”


“재미있는 의견이시군요.”


“재밌자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만.”


검을 뽑은 것이라 착각될 정도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베이어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잘 마셨습니다. 다시 한 번, 안톤 대위의 일은 유감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떤 게 유감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카이우스는 그 비릿한 뒷맛을 알고 있으면서도 베이어가 서재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


배웅하는 집사의 인사는 쳐다보지도 않고서 베이어는 성큼성큼 저택의 대합실을 지나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 사이를 파고든다. 그의 굳은 얼굴을 가장 먼저 알아챈 이는 댄 스파인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 허락 없이 나에게 질문을 하지 마라.”

영력은 깃들어 있지 않았지만, 그 어떤 검날보다도 시린 베이어의 목소리. 댄을 포함한 무리는 결국 한발자국 물러나 그에게 길을 터준다.

“.......건방진 늙은이 같으니. 가장 먼저 치워주지.”


아무도 듣지 못한 신음 같은 그 목소리만이, 베이어가 저택에서 남긴 마지막 울림이었다.





============================





“의도적으로 패배를 유도하여 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었고, 거기에 남아있는 삼천의 아군마저 미끼로 쓰기 위해 주변의 숲을 불살랐습니다. 편제에 없던 북부군을 멋대로 징발하여 전투에 참전시켰음에도 적 3군단을 궤멸시키지 못하고 결국 적은 전력을 온전히 보존한 채 후퇴.”

막힘없이 혐의자의 죄목을 읊어 내려가던 로빈이 잠시 숨을 고른다. 마지막 한 줄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주변의 분위기를 한번 훑어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공화국의 전투도 아닌, 브린타이나 왕국의 영토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드높고 웅장한 교회의 내부. 정면을 장식하는 커다란 창이 교회의 천장과 벽을 장식하고 있는 붉은 숲의 그림을 따스하게 비춰준다. 하지만 그 빛을 등진 채, 홀로 외롭게 강단 위에 서있는 벤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바라보는 기준에서 왼편엔 로빈을 비롯한 교회의 인사들이, 그리고 오른쪽엔 군관계자들이 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판이라기보다는 청문회에 가까운 구조였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몇몇 증인과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교회 전체가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비공개라는 사실이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특이한 점은, 이 모든 인간들의 논쟁에 대해 판결을 내려줄 존재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사제는 로빈과 함께 앉아있었고, 검성을 심판할 수 있는 배심원 따윈 자리도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황금빛의 대야만이 벤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을 뿐이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저 대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 이제 제 차례인가요?”

기우뚱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고 있던 벤의 첫마디. 그 느긋함에,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고도의 입가로 살짝 미소가 스며든다.

“뭐 우리끼리니까 솔직히 하죠. 격식 따윈 버리고.”


“무슨 결례를-”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항의하려던 대사제 레기라의 목소리를, 벤은 목발을 들어 묵살해 버린다.


“결례? 예의를 아시는 분이 공화국의 최고사령관을 성문에서 곧바로 연행합니까? 게다가 전 중상까지 입었는데?”


“그대의 죄를 생각해보시오!”


“죄라-, 저는 제가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흥, 그러시겠지.”


레기라가 콧방귀를 끼며 자리에 앉는다. 흥분할 이유가 없다. 이미 사실은 명백하게 수면 위로 드러났고, 그가 벗어날 길은 없으니까.


“제가 의도적으로 패배를 유도했다고요? 예, 맞습니다. 의도적으로 만 명의 희생을 일으켰냐고요? 예, 맞아요. 그런데, 제가 죽어가는 부하들과 병사들을 보면서 즐거워했냐면, 그건 아닙니다.”

벤은 결국 목발을 쓰러트리고, 대신 단상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아 흔들리는 몸을 지탱한다.

“제가 삼천 명의 아군을 희생시키려 했다고요? 맞습니다. 적의 발을 묶기 위해서 숲을 불태웠냐고요? 맞아요, 맞아. 그런데 제가 좋아서 그랬냐고 물으신다면,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


“혐의를 인정한다는 말씀입니까?”


기계적인 로빈의 물음에 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제가 한 행동과 제가 내린 명령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 뜻까지 변질시켜 브린타이나의 숲에서 희생된 병사들의 명예까지 더럽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그 뜻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여기 계신 사람들 중에 한 번이라도 군을 지휘해보신 분이라면 잘 아실 겁니다. 군을 지휘한다는 건, 언제나 승리를 염두에 두고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그리고 가장 의미 있는 결과를 낳기 위한 방법이자 과정일 뿐이죠. 간단히 말해서, 언제나 목표를 승리로 삼을 수 없는 법이고, 언제나 승리를 목표로 삼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답이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그런 ‘답’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지휘관이란 존재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설령, 그게 승리가 아닐지라도.”


“패배와 희생이 이어졌지만,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말씀입니까?”


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네.”


“하지만 그건 검성 본인의 판단일 뿐이잖습니까. 결과를 말씀하셨으니 결과를 보도록 하죠. 만 명이 넘는 사상자와 함께 계획에 없었던 북부군까지 투입했지만, 적 3군단을 궤멸시키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적은 전력의 7할 이상을 보존하여 본국으로 돌아갔을 뿐이에요. 여기에 어떤 최선의 의도가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도는 가능하다면 휘파람과 함께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만큼 로빈의 표정은 진지했으며, 그가 내뱉는 말도 비수처럼 로빈의 얼굴에 박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도 이에 지지 않는다.


“희생당한 병사들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는 게 바로 이겁니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았다면 제 명령에 불복하고 당신들이 바라는 상황을 만들어줬겠죠. 하지만 그들은 저를 믿었습니다. 목숨을 다해서요. 심지어 제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명령을 내렸던 보르케 중위도 지금 저를 변호하기 위해 저 자리에 앉아있지 않습니까. 대사제와 폐하께선 지금 그들의 희생을 개죽음이라 말씀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결과를 말씀하셨죠? 제가 이번 전투에서 원했던 결과는 적의 궤멸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건 불가능했어요. 지금 당장 전투보고서를 읽어보세요. 그들의 규모가 어떠했고, 그들의 전투력이 어떠했는지.”


“그렇다면 애초에 대적할 수 없는 상대와의 싸움에 왜 자발적으로 참전하신 겁니까?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 전투는 저희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네, 브린타이나 왕국의 싸움이었죠. 하지만 곧 우리 동맹의 싸움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결과 중의 하나가 바로 브린타이나였습니다.”

벤이 품고 있던 종이 하나를 꺼내 대중 앞에 펼쳐 든다. 브린타이나와 카나반, 그리고 제국의 남서쪽이 그려진 전술지도였다.

“지금 우리 공화국은 제국에 맞서 니에브공국-브린타이나왕국으로 이어지는 동맹선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저번 브린타이나 내전 당시 이 동맹을 지켜내기 위해 론크리스 여왕을 도와 반란세력을 진압했지요. 하지만 검성이 교체되고, 내전이 종식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브린타이나의 국경은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뒤에서 은밀히 내전을 부추겼던 3군단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죠. 만약 우리의 도움, 우리 병사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브린타이나는 그대로 무너졌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동맹의 기틀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당장 팔루뎀이 제국군의 시선에 노출됐을 테죠. 아시겠습니까? 만약 사태가 그렇게 번져나갔다면, 일만 명은커녕 팔루뎀에 주둔 중인 통합군과 북부군 전체를 희생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었다면, 병력증원을 요청하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니들-, 아, 아니, 폐하께서 신나게 마즈다힐에서 싸우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본심이 그대로 튀어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참아내는 벤. 결국 고도는 고개를 숙이고 끅끅 웃음을 참는다.

“통합군은 물론이고 북부군도 재편과 사령관이 바뀌는 등 어수선한 상황이었습니다. 두 개의 전선을 한꺼번에 감당할 수 있는 전력과 보급로는 아직 우리 공화국에 마련되어있지 않아요. 특히나 동쪽의 블라고슬로바라는 변수도 신경을 써야 했으니까요.”


“잠깐 이야기가 너무 나가버린 것 같은데, 일단 정리를 좀 해보죠. 즉, 검성께서는 아군 만 명을 희생시킬 정도로 브린타이나 존속에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셨던 거고, 부하들은 그 판단을 믿었기에 그대로 따라주셨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렇다면 포로를 처형하신 건 뭡니까?”

이번만큼은, 고도도 웃음기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이건 검성께서 직접 보고서에 올리신 내용입니다. 포로의 이름은 안톤 드레브냑. 제국 3군단장 카이우스 드레브냑의 증손자로, 중상을 입은 채 사로잡았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검성께선 본국은커녕 부관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멋대로 그를 끌고 나가 카이우스가 보는 앞에서 처형을 하셨죠.”


“코르드조약을 말씀하시는 거면, 200년 전 ‘학살의 검성’에게 먼저 여쭈어보시죠. 최근엔 멋대로 로즈를 납치해갔던 놈도 있었네요.”


“그 의도를 묻고 있는 겁니다.”


“의도라-.”


벤이 드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하지만 로빈은 틈을 줄 생각이 없었다.


“코르드조약을 떠나서, 일국의 검성이 개인적인 보복을 위해 포로를 처형한 것이 아닌가를 묻고 있는 겁니다.”


“개인적인 감정?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제가 카이우스 드레브냑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질 이유가 없어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번에 제가 실패했다고, 그리고 병사들의 희생이 의미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처형의 이유가 뭡니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적을 무너트리는 데에는 물리적인 공격 외에도 방법이 많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의 증손자를 눈앞에서 처형하는 것이, 카이우스 드레브냑을 무너트리는 방법이라는 건가요?”


“네, 다만 이에 대한 확답은 드리기 어렵습니다. 당장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니까요.”


“결국, 확신도 없이 외교적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는 포로를 처형하셨다는 거군요.”


“뭐, 굳이 그렇게 평가하고 싶다면야.”


어깨를 으쓱하는 벤.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는다.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 로빈은 속으로 불편함을 달래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뭐, 처음부터 우리 증언은 필요 없었던 거 아냐?”


불특정다수를 향한 카니아의 중얼거림에, 고도를 포함한 일원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증인들의 증언을 듣기 전에 먼저 여쭤보고 싶군요. 그렇다면 숲을 불태운 것은 어떤 의도였습니까?”


이제, 남은 것은 ‘대사제’ 레기라의 몫. 벤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린다.


“의도라뇨? 이미 다 말씀드렸잖아요. 적의 발목을 묶어두기 위한-”


“정말로 그렇습니까?”


“.......예?”


오히려 이쪽이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는 모양.


“정말로, 숲을 불태운 의도가 그것뿐이었습니까?”


“아니, 그럼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제가 추워서 불이라도 땐 줄 아십니까?”


“장난치지 마십시오, 여긴 신성한 나무의 땅이자 법정입니다.”

레기라의 질책이 아니었다면 증인석에서 몇몇 웃음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제가 묻고자 하는 건, 검성께선 공화국의 뿌리이신 세뮈엘님에 대한 존경이 결여되신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공화국의 검성을 맡고 계시면서도 세뮈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셨고, 심지어 아스트로바톰 내에 악마까지 하나 두고 계시지요. 검성께서 통합군의 선임전투마법사로 임명한 제르나비 양이 어떤 계약을 했고 어떤 마법을 운용하고 있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 씨부려 놓고는 뭘.......”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궁시렁거리는 벤. 레기라의 걸걸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일국의 검성, 군을 통괄하는 지휘관인 자가 세뮈엘님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그분과 대적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대사제로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검성께서 이 자리에 서게 되신 그 모든 연유가, 어쩌면 이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저 혼자만의 의심이 아니지요.”


‘이렇게 나오시겠다?’


벤이 씁쓸한 입맛을 다신다. 그러나 그가 반박할 기회는 없었다. 레기라가 갑자기 청중을 향해 뒤돌아서더니,


“잠시 휴정한 후에,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선언해버린 탓이다.

곳곳에서 의자 끄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지는 와중, 오캄푸스가 고도의 귓가로 목소리를 흘린다.


“역시 종교재판의 색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는군요.”


“그러게요.”


“우리들의 증언은 어디까지나 지휘관으로서의 검성님을 보조하는 것일 뿐, 종교적인 의미로는 그를 보호해줄 수가 없습니다. 뭐, 온몸이 혈마력투성이 망자인 저는 특히나 그렇겠지요.”


“.......”


고도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악마라는 단어 때문에 자신이 지금 벤이 서있는 곳에 있었던 때를. 그리고 그때, 벤이 자신을 위해 해주었던 일을.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음에 고도는 짜증이 나고 있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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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막간)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쉽게 아무는 건 상처가 아니라고. +3 17.04.19 384 11 14쪽
288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1) +3 17.04.14 336 12 21쪽
287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0) +3 17.04.09 319 11 19쪽
286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9) +5 17.04.04 328 8 14쪽
285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8) +6 17.03.29 326 9 13쪽
284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7) +4 17.03.24 313 12 16쪽
283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6) +2 17.03.19 339 10 16쪽
282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5) +2 17.03.14 344 10 17쪽
281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4) +4 17.03.09 360 8 15쪽
280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3) +4 17.03.04 369 13 14쪽
279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2) +4 17.02.27 423 10 17쪽
278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 +6 17.02.21 403 13 16쪽
277 (막간) 이 구역의 미친개는 나야 +4 17.02.16 367 10 18쪽
276 (25막) 탈태(奪胎) (10) +8 17.02.11 553 6 16쪽
275 (25막) 탈태(奪胎) (9) +4 17.02.06 379 10 20쪽
274 (25막) 탈태(奪胎) (8) +6 17.02.01 383 10 17쪽
273 (25막) 탈태(奪胎) (7) +4 17.01.27 471 6 17쪽
272 (25막) 탈태(奪胎) (6) +4 17.01.22 492 11 14쪽
271 (25막) 탈태(奪胎) (5) +4 17.01.17 388 9 18쪽
270 (25막) 탈태(奪胎) (4) +10 17.01.12 541 11 18쪽
269 (25막) 탈태(奪胎) (3) +8 17.01.07 425 14 18쪽
268 (25막) 탈태(奪胎) (2) +8 17.01.02 424 12 20쪽
267 (25막) 탈태(奪胎) (1) +8 16.12.28 479 12 16쪽
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265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8 12 18쪽
264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4 12 23쪽
»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70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19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0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7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1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8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1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8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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