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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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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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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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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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DUMMY

“숲을 불태워서 적을 고립시키겠다는 의견은 제가 먼저 건의한 겁니다. 검성께서는 이를 승인해주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검성께선 이 임무가 자살에 가까운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경고해주셨고, 저를 포함한 부관들은 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작전에 임했습니다. 즉, 검성님께서 독단적으로 숲을 불태우고 3천 명의 아군들을 미끼로 내던졌다는 의혹은 진실이 아닙니다. 이는 전투보고서에도 분명하게 명시가 되어있는 바로-”


“하지만 최종명령권자로서 이를 승인해주었다는 건 본인이 이에 책임을 지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귀관을 포함한 부관들이 위험을 인지하고 작전에 임했다고는 해도, 이는 당시 정황상 절반쯤은 강압적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않았습니까. 이걸 부관들과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자살임무에 동의했다고는 보기 어렵지 않을까요?”


로빈이 곧바로 자신의 말을 끊고 치고 들어왔음에도 보르케는 안경 너머 깊은 눈동자를 꼼짝하지 않는다. 그는 살짝 목을 가다듬더니, 아까와 똑같은 높이의 음성으로 대답을 한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모두가 동의한 것입니다. 우리 통합군이 그곳에 간 목적, 바로 그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전략. 애국심으로 이걸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너도나도 이에 불복하고 도망쳤겠지요. 하지만 저흰 그러지 않았습니다. 폐하와 대사제께서 이 위대한 붉은 나무의 병사들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아무나 무작위로 호출하여 증인석에 세워 봐도 좋습니다. 하지만 병사들 모두 같은 대답을 할 것입니다.”


“네, 그건 저희가 알아서 판단하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로빈의 인사에 보르케는 경례로 답을 하고 증인석에서 내려와 교회 의자, 청중석으로 되돌아간다. 도중 이미 증언을 마친 카니아가 잘했다는 듯 걸쭉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보르케의 표정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다음 증인.”


“예이.”


느긋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증인석으로 오른 이는 얼굴이 없었다. 정확히는, 얼굴의 골격만이 남아있는 망자였다.


“본인 소개를-”


“전투마법사 제르나비 오캄푸스. 나이는 죽어있던 시간을 포함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하군요. 소속은 통합군 전투마법사사령부입니다.”


안구가 있던 자리엔 푸르스름한 마력의 흔적만이 남아있었으며, 구색을 맞추기 위해 목소리를 내뱉으며 덜그럭거리는 턱뼈는 대사제 레기라의 인상을 찌푸리는데 최적이었다. 레기라의 심기가 급속도로 불편해지는 것을 알아챈 로빈은 재빨리 먼저 앞으로 나서야 했다.


“경께서는 과거 아스트로바톰과 공화국을 대표하는 그랜드마스터셨지요?”


“경이라뇨, 하핫. 지금은 그저 일개 전투마법사일 뿐입니다.”


이쯤 되니 오히려 목소리와 어긋나는 턱뼈의 움직임이 기괴하게까지 느껴진다. 로빈은 결국 그의 턱과 웃음소리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들고 있는 보고서로 시선을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알고 싶은 것은 그랜드마스터로서의 의견입니다. 대학에 계시던 시절에도 줄곧 전투마법사들의 능률향상을 위해 애쓰셨다는 걸 압니다. 결국 그 때문에 파면당하셨지만, 지금 사안은 종교재판이 아니니 혈마법이나 악마숭배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로빈이다.

여전히 교회 단상에 서있는 벤은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이쪽에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사안을 딱 선을 그어 사전에 차단하다니. 그 나름대로의 배려겠지.

“그랜드마스터셨던 시절에도 여러 번 국경에서 활약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까?”


“활약까진 모르겠습니다만, 전투에 참여는 많이 했지요.”


“그렇다면 그랜드마스터로서, 지금 검성이 전투마법사를 육성하고 활용하는 방식에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요?”


오캄푸스의 두개골이 살짝 기울어진다.


“방식이라니, 정확히 어떤.......?”


“검성이 아센 하파 경의 뒤를 이어 전투마법사 육성을 도맡게 된 후 이들이 전투에서 보이는 능률은 크게 올랐습니다. 그만큼 활용폭도 넓어졌죠. 하지만 동시에, 아스트로바톰 재학생들의 전투마법사 진학률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다시 한 번 망자의 두개골이 갸웃했지만, 로빈은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는지, 곧바로 말을 이어나간다.

“바로 통합군의 전투마법사 훈련과 운용이 너무 가혹하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브린타이나에서의 전투는 바로 그런 소문이 사실임을 정확히 보여주는 꼴이었죠.”

로빈이 자신이 읽고 있던 보고서를 들어 청중을 향해 내보인다. 몇몇 눈이 좋은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그 빼곡한 글씨들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특유의 양식을 통해 그것이 사전에 모두에게 제공된 전투보고서임을 알 수 있었다.

“전투보고서, 그중에서도 사상자 부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 ‘거짓 패배’과정에서 전투마법사들이 입은 피해는 대전쟁 이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이는 검성이 고급인력으로 구분되는 전투마법사를 지나치게 소모성 병력으로 취급하여 전투에 임했기 때문인데, 굳이 의도적으로 큰 손실을 감안해야하는 전투에서 전투마법사들을 선두에 내세워 피해를 증폭시킨 상황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랜드마스터의 입장에서 듣고 싶은 겁니다.”


질문을 뱉으면서도 로빈은 씁쓸함이 입가에 남아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증인들에 대한 질문은 이미 대사제와 협의된 사항들이다. 그러나 로빈 자신도 한 명의 지휘관이었으며, 한 부인의 남편이다. 상대적으로 고급인력이라느니, 피해를 증폭시킨다느니 하는 말을 기분 좋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하, 폐하와 대사제께서는 지금 거짓 패배과정에서의 큰 손실이 검성님의 잘못된 병력운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레기라가 뭐라고 입술을 움직이기 전에 로빈이 먼저 대답을 해버린다. 레기라의 입장에선 다소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질문의 의도를 돌려버리면, 검성이 ‘거짓 패배’를 유도했다는 사실 자체는 묵인되는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 뭐어, 그 과정에서 검성님의 병력 운용이 가혹하지 않았다-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죠.”

상대가 망자라는 것도 잊은 채, 대사제의 입가로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오캄푸스는 그걸 방치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필요한 가혹함이었습니다. 만약 통합군이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포진과 움직임을 보였다면, 적은 이를 의심하여 그렇게 깊숙이 파고들지 않았을 테니까요. 검성님은 적이 진실로 ‘승리했다’라는 생각을 가지길 원하신 겁니다. 패배하여 죽어 나가는데 병사든, 기사든, 전투마법사든 가릴 상황이 되겠습니까? 이런 참혹함이 적의 선봉대를 도취시켰고, 적의 발을 묶었으며, 이로써 안톤 드레브냑을 사로잡을 수 있었죠. 그리고 그 안톤 드레브냑의 죽음이, 곧 카이우스 드레브냑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다-라는 게 작전의 요지였습니다.”


“포로의 처형을 통한 3군단장의 몰락. 이는 지금 당장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항이죠. 지켜봐야 할 문제지, 당장 성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검성도 동의하시죠?”


“예.”


공격을 하는 듯 쏘아대면서도 정작 상황은 물 흐르듯 넘겨버린다. 로빈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몰라볼 대사제가 아니었다.


“증인 신문은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죠. 이미 말을 맞춘 자들에게 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져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맞춘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인데요.”


“판결하겠습니다.”


벤의 불만을 한 귀로 흘려버리며 대사제가 기다란 로브를 질질 끌며 앞으로 나선다. 하지만 판결의 그의 몫이 아니었다. 애초에 대사제는 대리인, 그리고 누구를 대신하여 벤을 고발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답은 간단했다.


“잠깐.”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온, 낯선 목소리.

노랫소리처럼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였지만, 분명 이 교회에는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신비한 울림의 주인공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몇몇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몇몇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얼굴이었다. 특히 대사제 레기라에게는 더욱 그랬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여긴 숲의 사도께 허락받은 자들에게만 허락된 신성한 공간입니다! 근위-”


“함부로 오만한 그 입을 놀리지 마라, 대리인. 네 주인의 딸을 알아보지 못하는 거냐?”


속이 비칠까 걱정될 정도로 하늘하늘한 백색의 얇은 드레스. 문명과는 동떨어진 하얀 맨발. 하지만 그 먹색의 눈동자와 기다란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기운은, 레기라의 기억 속에서 겸손이란 단어를 꺼내어준다.


“.......드루이드?”


“붉은 나무의 땅에서 나에게 허락을 운운하지 마라.”


“.......”


기사와 마법사들은 느낄 수 없는 위압감. 레기라는 인상을 구긴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비록 평생 숲의 사도를 모시고 있는 그였지만, 드루이드가 자신과 숲의 어머니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분명했으니까. 단지, 어째서 숲속 깊은 곳에서 문명을 등지고 있거나 리벨리움의 바다를 유영하고 있어야 할 존재가 이곳에 있는지를 이해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증인석에서 멈춘 드루이드의 발걸음과 그녀의 한마디에 레기라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증언하겠다.”


“.......예?”


“제 이름은 진. ‘그냥’ 진. 어머니께 플로닉스의 변덕으로부터 숲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은 니에브공국의 드루이드로, 니에브공국 권성, 무혈의 쉔즈톤 브론스키와는 약혼한 사이입니다. 즉, 저는 이 자리에 어머님의 딸이자 니에브공국의 대리인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약혼? 대리인? 드루이드가 대리인이라니, 그게 무슨-”


“증언하기에 앞서, 제가 왜 니에브를 떠나 여기까지 왔는지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이미 레기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듯한 태도. 하지만 신성한 법정을 더럽히는 저 인간이 바로 그 신성함을 부여해준 존재의 딸이라는 사실에 대사제는 어떠한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교회 안에 침묵이 내리깔리고,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저기에 서있는 벤, ‘변수의 검성’이었죠. 왜 그런지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얘기해봤자 이해할 수도 없을 테니까. 아무튼, 저는 어머님께 제 악몽에 대해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숲의 어머니 세뮈엘께서는, 제 악몽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악몽의 근원인 저 인간을 배제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받아들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의 근거를, 저 벤이라는 인간이 카나반 공화국, 넓게는 피의 악마 아펜타우스와 제국에 저항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에 끼칠 영향에서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영향?”


침묵하는 레기라를 대신하여, 진과는 남매라고도 볼 수 있는 로빈이 앞으로 나선다.


“네. 만약 그가 이 흐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되면 그를 받아들이라 하셨습니다.”


“.......그럼 부정적인 영향이라면?”


“죽여야 했지요.”


대사제의 인상이 구겨진다. 그에게 있어서 세뮈엘이란 언제나 고결하고 인자한 숲의 어머니다. 그런 그녀가, 일개 인간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게다가 그 대상이 붉은 나무의 검성이라고?


“그래서, 어떤 판단을 내리셨습니까?”


모든 혼란을 대표하여 로빈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진다. 그에 진은 슬쩍 벤을 쳐다본다. 눈이 마주쳤지만, 꼭 닮은 서로의 먹색 눈동자엔 더 이상 뒤틀린 서로의 모습이 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숲을 불태웠고, 붉은 나무의 은총을 받은 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멋대로 병력을 차출하였으며 멋대로 포로를 처형했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청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는 살아서 저기에 서있습니다. 바로 이게 제 대답입니다. 자, 대사제. 아직도 어머님을 소환하여 대답을 듣고 싶나?”


“.......”


“난 어머니의 명령을 받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딸로서 판단을 내렸다. 이를 의심하고 어머니께 판결을 원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교회의 이름에 먹칠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레기라 독트리스, 숲의 뜻을 받드는 자여?”


만약 레기라와 같은 편에 서있지 않았다면 로빈은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끝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단 한 명, 레기라 본인을 제외하고는.


“이것은 종교재판이 아닙니다. 변수의 검성은 전쟁범죄로 고발을 당한 겁니다. 그대가 섣불리 간섭할 문제가 아닙니다, 니에브의 드루이드.”


“어머니의 뜻에 거스르겠다는 건가?”


“아뇨, 그녀의 뜻은 받들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카나반 공화국의 주인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교회는 그분께 판결을 위임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로빈슨 폐하야말로 공화국의 주인. 동시에, 그 판결로부터 파생될 모든 후폭풍을 감내하셔야 할 분이지요.”


“.......뭐?”


지켜보던 카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뱉는다. 나머지 청중, 심지어 로빈까지도 같은 반응이었지만, 레기라는 멈추지 않는다.


“애초에 저 벤이라는 남자는 기사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며, 심지어 붉은 나무의 축복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신성한 공화국에 혈마법과 악마를 끌어들였습니다. 그가 검성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약간의 공적과 특수한 상황, 그리고 선대 검성이셨던 한센 경의 뜻이었다는 점뿐이었지요. 그런데 정말로, 그가 검성에 어울리는 자입니까, 폐하?”


“.......”


로빈은 대답하지 않고 뒤돌아 대사제의 얼굴을 바라본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었던 거리감이 그와 레기라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입으로는 폐하와 공화국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그 밖의 존재들에게 희생을 요구합니다. 만약 그에게 검성이라는 직책이 없었다면, 이것이 용인될만한 일이었을까요? 만약 지금이 단순한 군사재판이었다면 그는 검성의 면책특권을 내세워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었을 테죠. 저는 묻고 싶은 겁니다. 지금 우리 공화국의 검성은, 정녕 검성이란 직책에 어울리는 자인지.”


“그가 아니었다면 공화국의 모습은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겁니다!”


모두가 놀란다. 거친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벌떡 일어난 토우칸이었으니까. 더듬지도, 불안하지도 않은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이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레기라는 흔들리지 않는다.


“예, 달랐겠죠. 하지만 그 다른 모습이 긍정적이었을지, 부정적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굳이 지금 눈앞의 결과만 언급하고 싶으시다면, 타국의 땅에서 희생당한 만여 명의 영혼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정말로, 그게 일국의 검성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일입니까?”


“대사제, 지금 그대는 저와 의회의 결정에 대해 재신임을 요구하시는 겁니까?”


로빈은 최대한 정중함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레기라의 표정은 여전히 단호했다.


“재신임? 아니요, 저는 검성, 아니, 벤이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도와 검성으로서의 자격에 의문을 표하고 싶습니다.”


“의도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벤의 질문. 레기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낚아챈다.


“검성, 지금 북부군사령관 자히르 드라흐마 경이 군대를 이끌고 아르다르 외곽에 주둔 중이라는 사실을 그대는 알고 계시겠죠? 애초에 그대가 부탁한 일일 테니까.”


‘아, 씨발.......’

벤은 낮게 탄식을 뱉는다.


“이게 대체 무슨 의도입니까? 재판이 잘못되면 북부군의 개입이라도 요청할 셈이었습니까? 이게 반역이 아니라면 뭐란 말입니까? 여러분 모두 아시겠습니까? 벤이라는 사람은 이런 작자입니다. 자신의 판단에만 의지하고 그게 어떻게 보일지, 어떤 평가를 받을지, 누구에게 어떤 피해를 입힐지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일국의, 공화국의 검성을 맡는다는 게 정녕 올바른 일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토우칸도, 카니아도, 그 밖의 모든 증인들과 청중도 어떠한 말을 꺼내지 못한다. 로빈과 벤 본인들조차도, 흐름이 이렇게 이어질지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무거운 침묵. 불길한 예감이 이어진다.

다만,

오직 한 명만이,

마침내 재판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짜증’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제르나비 고도. 증언하겠습니다.”


벤이 경악한다.

아니,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소문난 애라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

레기라 또한 기세가 끊겼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표정을 일그러트렸지만, 이내 목을 가다듬으며 자리에 앉는다. 급한 마음에 나선, 보잘것없는 저항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십시오.”


“감사.”

무심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증인석으로 올라서는 고도. 그 자리에 있던 진이 눈빛으로 의문을 표하지만, 고도는 답하지 않는다.

“증언에 앞서, 레기라 대사제님께 여쭤보고 싶은데요, 대사제님께서는 지금 벤의 사람 됨됨이를 지적하고 계신 거죠?”


“.......굳이 정리하자면, 예, 그렇습니다.”


“좋아요. 그럼 저는 이 자료를 제출하겠습니다.”

고도가 총총걸음으로 레기라에게 다가가 종이 몇 장을 내민다. 그가 종이의 내용을 읽고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에, 고도는 먼저 그 정체를 내뱉는다.

“이건 검성의, 그러니까 벤의 일기장 일부입니다.”


“뭐어?!”


무릎이 불편하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펄떡 뛰어버리는 벤.


“이 일기의 진실 여부는 카모라 숲의 페어리 아이데아, 그리고 더 나아가 세뮈엘님까지도 확인해주실 겁니다. 필요하다면 요청하세요.”


“잠깐, 일기라니, 이게 무슨-”


“7월 2일. 날씨 평범.”

레기라의 목소리를 묻어버리며, 고도는 그대로 일기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오늘은 로빈과 이야기를 했다. 세 달 째 팔리지 않고 있는 의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결국 분해해서 로빈의 집 지붕을 보수하기로 했다. 저녁엔 벌레 녀석과 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지루하다.”


“야, 고도, 지금 이게 무슨-”


벤의 무의미한 저항.


“8월 3일. 날씨 평범. 오늘도 로빈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녀석은 우물 건너편에 살고 있는 에밀리라는 여자아이의 가슴이 점점 커져 가는 현상에 대해 즐거운 듯 의견을 내뱉었다. 물론 나도 에밀리를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저녁에 벌레 녀석에게 이걸 물어봤지만, 이상한 놈 취급만 받았다.”


로빈은 청중석에서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지나의 시선을 애써 피해야 했다.


“11월 21일. 작년보다 한 달이나 빨리 첫눈이 내렸다. 하지만 쌓일 정도는 되지 못했다. 집에 놀러 온 로빈이 이런 첫눈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며 시를 한 편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기, 그 부분은 좀 넘겨도 될까요.......?”


“아 네, 폐하. 11월 29일. 로빈이 경사면에서 미끄러져 무릎을 다쳤다. 본인은 슈테인울프를 봐서 그런 거라고 변명을 하는데, 내가 봤을 땐 걍 딴 데 한눈팔다가 그런 것 같다. 드렌턴 아저씨에겐 나와 장난을 치다가 그랬다고 말씀드렸다. 같이 혼났지만, 상관없다. 눈을 뗄 수 없는 녀석이다.”


“.......”


“12월 31일. 날씨 우중충함. 올해도 끝났다. 여전히 내 시간은 멈춰있다. 다음에 오는 또 다른 ‘올해’도 같을 것이다. 절대 절망스럽지 않을 테고, 동시에 절대 흥미롭지도 않을 테지. 이 굴레를 벗어난다는 생각은 가끔 한다. 하지만 생각뿐이다. 세상은 책의 내용처럼 글자로 정의 내릴 수도 없는 일이고, 나는 로빈의 곁을 떠날 수 없으니까. 녀석에게 내가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필요하다. 언젠가 기회라는 것이 찾아올 때가 있겠지. 하지만, 그 녀석이 없이는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 녀석은 또 다른 나의 굴레다. 벗고 싶지 않은 굴레.”


“잠깐, 이게 지금 재판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겁니까?”


결국 보다 못한 레기라가 고도의 낭독회를 중지시킨다. 그에 고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레기라를 정면에서 맞이한다.


“검성의, 벤의 모든 일기에 나타나는 공통점이 뭔지 아시겠나요?”


“.......공통점?”


“네, 바로 로빈이라는 이름입니다. 그 로빈이 누구인지는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계시겠죠.”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벤과 로빈을 번갈아 향한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아시다시피, 폐하와 벤은 제가 우연히 그 마을을 찾아가기 전까지 함께, 평생을 그곳에서 함께 지내왔습니다. 벤의 일기에 매번 폐하의 이름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지요. 그에게 폐하라는 존재는 거울이었습니다. 자신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증거, 바로 그 반증이었어요. 그리고 이건 그들이 숲속의 시골을 벗어나 이곳에 이른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벤이 자신의 판단에만 고집하여 주변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당연합니다. 그는 오직 로빈, 그리고 그 로빈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공화국에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요.”


“.......”


레기라도,

로빈도,

벤도,

침묵한다.


“벤이 판단을 내리는 기준은 자기 자신의 이득이나 고집이 아닙니다. 오직 폐하와, 공화국이 그 중심에 있지요. 이건 그와 함께 전장을 누벼보거나, 그와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동의할 겁니다. 비록 그 방식에 피가 묻거나 처참하더라도, 그는 그 오명을 모두 감내할 겁니다. 왜냐, 폐하를 위해서니까요. 공화국 검성으로서의 자격이 의심된다고 하셨나요? 그렇다면 한번 말씀해보시죠. 모든 가치판단을 폐하와 공화국만을 위해서 하는 사람보다 검성이란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가 언제 자신의 가치, 자신의 부와 명성을 위해 움직이거나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나요? 대사제께서 한번 말씀해보시죠.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서서 당신께 이런 질문들을 듣고 있는 이유가, 정녕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했기 때문인가요? 당신이 모시고 있는 세뮈엘님은 자신의 딸에게 그 판단을 맡겼고, 그 딸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세뮈엘님이 아닌 폐하께 마지막 판단을 맡기실 테죠? 당신은, 그 폐하의 결정에 대해 반박하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네?”




.........





“뭐, 왜?”


목발을 보조하기 위해 벤의 팔을 잡아주면서, 고도는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벤을 쏘아붙인다. 그에 벤은 잠시 기억을 되짚는다. 익숙한 광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거 혹시 복수야?”


“복수?”


“왜, 예전에 내가 너 종교재판 때 했던.”


“아아, 뭐어. 그렇다고 해둘까. 그때 네가 지껄인 개소리에 비하면 이건 애교 아니야?”


“.......하아, 제대로 당했네.”


벤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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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의 굴레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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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4) +2 17.05.09 316 9 15쪽
292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3) +4 17.05.04 335 9 17쪽
291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2) +3 17.04.29 379 9 16쪽
290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1) +3 17.04.24 329 12 21쪽
289 (막간)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쉽게 아무는 건 상처가 아니라고. +3 17.04.19 384 11 14쪽
288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1) +3 17.04.14 336 12 21쪽
287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0) +3 17.04.09 319 11 19쪽
286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9) +5 17.04.04 328 8 14쪽
285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8) +6 17.03.29 326 9 13쪽
284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7) +4 17.03.24 313 12 16쪽
283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6) +2 17.03.19 339 10 16쪽
282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5) +2 17.03.14 344 10 17쪽
281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4) +4 17.03.09 360 8 15쪽
280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3) +4 17.03.04 369 13 14쪽
279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2) +4 17.02.27 423 10 17쪽
278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 +6 17.02.21 403 13 16쪽
277 (막간) 이 구역의 미친개는 나야 +4 17.02.16 367 10 18쪽
276 (25막) 탈태(奪胎) (10) +8 17.02.11 553 6 16쪽
275 (25막) 탈태(奪胎) (9) +4 17.02.06 379 10 20쪽
274 (25막) 탈태(奪胎) (8) +6 17.02.01 383 10 17쪽
273 (25막) 탈태(奪胎) (7) +4 17.01.27 471 6 17쪽
272 (25막) 탈태(奪胎) (6) +4 17.01.22 492 11 14쪽
271 (25막) 탈태(奪胎) (5) +4 17.01.17 388 9 18쪽
270 (25막) 탈태(奪胎) (4) +10 17.01.12 541 11 18쪽
269 (25막) 탈태(奪胎) (3) +8 17.01.07 425 14 18쪽
268 (25막) 탈태(奪胎) (2) +8 17.01.02 424 12 20쪽
267 (25막) 탈태(奪胎) (1) +8 16.12.28 479 12 16쪽
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265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8 12 18쪽
»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4 12 23쪽
263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69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19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0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7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1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8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1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8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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