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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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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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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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5막) 탈태(奪胎) (9)

DUMMY

“야! 넌 연락도 없이 이런 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카랑카랑한 고도의 목소리가 본관의 외벽을 강타한다. 겨울방학에 접어든 시기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수업 중이었다면 수많은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무슨 일인지 구경했을 정도의 날카로움이었다. 물론, 시기와는 상관없이 벤의 집중을 흩트려놓기엔 충분했다.


“아, 왔어?”


“아, 왔어-가 아니라, 본부엔 연락도 없이 이런 곳에서 뭐하냐고? 보르케 아니었으면 아르다르 전체를 뒤집고 다닐 뻔했잖아.”


“미안. 무슨 일인데?”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듯 평온한 표정과 감흥 없는 억양. 그 무심함에 고도는 짜증을 내고 열을 올리는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져 결국 한숨으로 머리를 가로젓는다.


“폐하께서 찾아왔다가 너 없대서 다시 갔어. 나가기 전에 본궁에 좀 들렸다 가래.”


“폐하라니, 우리끼리 있을 땐 걍 로빈이라고 해.”


“아, 닥쳐. 너 때문에 공식석상에서 자꾸 말실수한단 말이야.”

목적을 달성하고, 분노와 짜증이 사그라지면서 고도는 그제야 눈앞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인적이 없는 대학본관의 뒤편. 교직원들의 흡연실이랍시고 조성해놓은 작은 정원은 이미 추락한 낙엽들의 무덤으로 가득하다. 당연하지만 벤의 손가락엔 회색연기를 내뱉는 막대기 따윈 들려있지 않았다. 또한, 터무니없는 낭만의 상징인 시집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뭐하고 있던 거야?”


“마지막 실전점검.”


“실전점검.......? 뭐의?”


“이거.”


벤이 로브의 소매를 걷어내고 팔을 주욱 펴고 나서야 고도는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정체까지 간파해낸 것은 아니었다.

벤의 양 손목을 감싸고 있는 조잡한 팔찌.

가죽과 철사를 이어붙인 듯한 고리는 급조했다는 사실을 광고라도 하듯 간신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었고, 로브 안쪽으로 이어진 줄의 연장선으로 보아 그 형편없는 연결이 마찬가지로 조잡한 목걸이에 닿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소매가 넉넉한 로브였기에, 만약 후드까지 끌어올려 뒤집어쓴다면 팔찌와 목걸이의 존재를 완벽히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사실은 고도의 혐오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뭐야 이게.......? 새로운 변태놀이기구야?”


“뭐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뭐라 씨부렸냐.”


“아니, 자세히 보라고.”


자신의 팔목을 들이미는 것으로 간신히 폭행을 면하는 벤. 일그러진 고도의 표정은 팔찌의 안쪽을 자세히 봄으로써 풀리게 된다.


“이건.......”


“응, 이게 그거야.”


조금 전 자신이 이 물건을 뭐라 칭했는지도 잊어버린 채, 고도는 벤의 팔목을 낚아채어 팔찌를 더욱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한다.


“벌써 완성된 거야?”


“아직. 말했잖아, 실전점검이라고. 시제품이랄까.”


고도에게서 한발 물러나 다시 소매를 내리는 벤. 고도는 마침내 그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랬기에 더욱 큰 근심이 시선에 머무른다.


“위험한 거 아냐? 안전장치는 있어?”


“이 안에 철사 있지? 이래 보여도 이스누시아 연철이거든.”


“그걸로 충분해?”


“지금까지는. 일단, 너도 지금 내 마력을 전혀 못 느끼고 있잖아?”


“.......뭐?”

뒤늦게 마력과 감각을 끌어올리는 고도였지만, 벤의 말대로 그녀는 주변에서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바닷빛 눈동자는 간파한다. 꿈틀거리며 낙엽 아래를 가로지르고 있는 인공적인 줄기들과,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을 대신하여 마력의 싹을 틔우고 있는 뿌리들을.

“.......너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


“세 시간. 내가 괜히 학교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거든. 근데 아무도 눈치 못 채더라. 심지어 교수들도.”


“내성은?”


“아직 정신붕괴의 조짐은 없어. 대신에 마력을 따라 요상한 목소리들이 들려오는데, 아마도 영혼석에 묶여있는 자들의 속삭임이겠지.


“그럼....... 동기화가 완벽하게 된 거야?”


“그런 거 같아. 이제 남은 건 안정성을 더 높이고, 동기화에 필요한 기간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을 찾아내는 거정도. 지금 상태로는 아무리 너라도 열흘 이상은 걸릴 거 같으니까.”


여전히 느긋한 벤의 목소리. 고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나 역시, 마땅히 피부와 정신으로 다가왔어야 할 벤의 마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느껴져....... 기사가 상대방의 영력을 읽을 수 없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런 개념이 핵심이었으니까.”


“주문 영창은?”


“안 했어.”


“세 시간 내내?”


“응. 근데 말했잖아. 괜찮다고.”


“.......”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하기 전 주문을 영창한다고 해서 그 위력이 증폭되거나 마력의 순환이 매끄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법사들이 주문영창을 필수로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마법이라는 행위 자체가 마법사 본인의 생명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사가 자신의 생명력을 소모하여 힘을 이끌어내듯이, 마법사는 정신력을 소모하여 마법을 발현한다. 그러나 영력자체가 곧바로 물리력이란 형태를 갖추고 발산되는 기사들과는 달리, 마법사의 마력은 시전자의 내성을 통해 여과되어 특정한 한 가지, 또는 복수의 속성으로 물질계에 형상화된다. 이 여과과정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데, 바로 주문의 영창이 그 안전장치의 역할, 즉, 정신계에 내리는 사전경고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주문 영창이라는 내성을 통한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고 마력의 발산을 반복하게 되면, 기사가 본인의 수명을 깎아가며 무리해서 영력을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력의 중독이 마법사의 정신력을 갉아먹게 된다. 이는 일국의 가장 위대한 마법사라는 그랜드마스터들조차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내가 볼 때, 지금까지의 전투마법사는 진정한 ‘전투’마법사가 아니야. 오히려 ‘전투지원’에 가깝지. 그리고 이건 마법사라는 존재의 근본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거고. 기사와 마법사의 정면대결에서 마법사는 이길 수 없다-라는 통념도 마찬가지야. 그야 간단하잖아. 기사는 무기에 영력을 싣는 것만으로도 공격이 가능한데, 우리는 마력을 끌어올리고 주문까지 영창해야 하니까. 그리고 우리가 영력을 느낄 수 있듯이, 기사들도 마력을 감지할 수 있으니까.”

주변을 휘감고 있던 줄기들을 땅속으로 돌려보내고, 벤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끝을 통해 빠져나가던 마력을 거둬들인다.

“그런데 만약 마법을 시전할 때 주문을 영창할 필요가 없다면? 기사들이 자신의 영력을 감추듯 우리도 마력의 존재를 감출 수 있다면? 소모한 마력의 일부를 회수할 수 있다면?”


“.......”


고도는 대답 없이 벤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얼핏 보면 무표정으로 뒤덮인 듯한 그의 표정이, 사실은 희열에 물들어있다는 사실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전투마법사들이 일선에서 활약할 수 있다면 전투의 판도는 지금과 크게 달라질 거야. 기사전력에서 열세라도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지. 대신 전투마법사들의 기초군사훈련과정에 육체의 단련부분이나 병기의 사용부분을 추가해야하고, 지원자를 확보하기 위해 굳이 마법대학을 통하지 않더라도 전투마법사 특채를-”


“벤!”


벤은 어째서 고도가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지, 하늘이 기울어질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너지는 몸의 중심에 이어 잊고 있었던 왼쪽 무릎의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그의 이성은 마침내 현실로 되돌아오게 된다.


“아오, 까먹고 있었네.”


“벤, 너 코피.......”


“응?”

쓰러진 채 인중을 매만지는 벤. 그 비루한 손가락은 빠르게 새빨간 색을 빨아들인다.

“뭐야, 어디 부딪쳤나?”


“너 그거, 아직 조금 위험한 거 아냐?”


걱정 어린 고도의 시선은 로브에 가려진 장식품들에 향해있었다.


“음, 아냐. 이건 내가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면서 이 짓을 하느라 그런 거고.”


“.......자랑이다.”

고도는 주변을 둘러봐 정원 구석에 쳐박혀있던 목발을 찾아낸다. 벤은 고도와 목발의 도움이 있고 난 후에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도는 벤과 얼굴을 가까이 함으로써, 읽을 수 없는 마력으로 감춰져있던 그의 피로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발표야? 로빈, 아니, 폐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쳐도, 의회와 교회에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야-”


“아니, 별도로 허가는 받지 않을 거야.”


“.......뭐?”


익숙한 불안으로 일그러지는 고도의 얼굴. 그러나 약간의 핏자국과 피로로 물들어있을 뿐, 벤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검성이 의회에 모든 군사기밀을 밝힐 의무는 없어. 명예검성이 아니라 정식검성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의회에 밝히고, 교회에 허가를 요구하고, 심판을 받고 점검하고 개선하고....... 우리에겐 그럴 시간이 없어. 언제까지고 겉치레일 뿐인 도덕성과 거추장스러운 절차에 얽매일 수는 없는 거라고. 내가 이번 재판에서 배운 거라곤 이거 하나뿐이야.”


“하지만, ‘이게’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알게 되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이건’ 그저, 이스누시아산 연철과 덜린족의 기술로 만들어진 보조장비로 보고될 테니까. 이 안에서 영혼석이 어떤 방식으로 이용되는지는 알릴 필요 없지.”


“.......뭐, 네가 알아서 해.”


“걱정 마. 그럴 거야. 이젠 눈치 보면서 뭔가 할 시기는 지났어.”


코피를 흘리고, 부서진 무릎 때문에 목발 없이는 몸의 중심조차 잡지 못하는 검성. 전쟁범죄로 고발되어 재판까지 받았던 검성. 이 이상 ‘권위’에 흠집이 생길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고도는 불안을 놓지 못한다. 벤의 절박함은 인정한다. 3군단과의 전투에서 있었던 그 모든 손실과 부분적인 실패는 분명 벤의 책임이고,

그 사실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싸그리 바꿔버릴 때가 됐다고.”



빛을 되찾은 벤의 먹색 눈동자는, 어느새 새로운 피로를 빨아들일 준비를 마친 뒤였다.





==========================





빈속에 구토를 하는 자와, 회복되지 못한 부상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자, 그리고 포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절망으로 울먹이는 자들이 뒤엉켜 처참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이 훈련이 표면상으로는 단순한 ‘구보’였다는 점이었다.


“헉.....헉.....”


“크억...헉....”


입술은 말라 터진 지 오래고, 이젠 위액조차 역류하지 않는다. 지금이 몇시냐고 묻는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애들 죽겠는데요.”


망루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레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그녀의 걱정은 생도들의 안위를 향한 것이 아닌, 행여나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구역에서 불편한 일이 발생할까-하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엘라는 그런 레티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다.


“걱정 마. 고작 여섯 시간 뛴 거 가지고 설마 죽겠어?”


“쟤네입장에선 차라리 죽는 게 낫겠네요. 그건 그렇고, 파벌 건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흐응.”


별다른 답 없이, 묘한 미소만을 지은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엘라. 그에 레티는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나간다.


“입대한지 몇 달 되지도 않은 꼬꼬마들이 벌써부터 정치질입니다. 그것도 귀족과 평민 신분으로 나뉘어서요. 지금 본국에서는 차별금지안이다 뭐다 해서 잔뜩 힘을 실어주고 있는데, 훈련소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상당히 귀찮아질 겁니다.”


“뭐 어때. 걍 냅둬.”


“.......예?”


레티는 방금 자신이 들은 내용이 정말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 무례를 무릅쓰고 엘라를 향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나 엘라의 미소는 바뀌질 않는다.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우린 이쪽의 일이나 신경 쓰자구. 그거 수정했어? 야간경계작전?”


“아, 예, 예. 주말부터 생도들을 경계조에 편성해서 작전에 투입할 겁니다.”


그러나 엘라의 미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증발해버린다.


“주말? 웬 주말?”


“.......예?”


“왜 주말부터냐고.”


“아니, 그야....... 부상에서 회복하고 재정비할 시간이-”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오늘 밤부터 투입 시켜.”


엘라라는 기사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레티였지만, 이번만큼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예에?”


“오늘 밤부터 투입시키라고. 2인 1개조로 해서, 네가 파악한 ‘귀족파’애들은 남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평민파’애들은 남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경로를 잡아서 겹치게 말이야. 알았지?”


“잠깐, 왜 굳이 그렇게-”


“까라면 까, 이 년아.”


“.......지금 생각난 건데, 국경초소지휘관이 훈련대장보다 더 높은 거 아닌가요?”


“너 나랑 싸워서 이길 자신 있니?”


“아 치사하네, 진짜.”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레티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엘라는 그런 레티의 뒷모습이 흡족한 듯, 다시 미소를 되찾고 전방을 향해 영력이 실린 목소리를 내뱉는다.


“모두 주목! 전원 완전군장 해제하고 식사, 정비하는데 한 시간 주겠다. 정확히 자정에 무장한 상태로 다시 이곳에 집합하는 거야, 알겠지?”


“.......”


“대표는 애들 인솔 잘해서 데려와라.”


“.......”


우렁찬 대답대신 들려오는 것은 마른 기침과 구역질, 그리고 얇은 욕지거리뿐. 그나마 서있는 것이 고작이었던 생도들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엘라는 이런 이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꺄르륵 웃으며 망루를 내려간다.



“.......하아, 씨바알.......씨바알.......”


기수대표인 에두는 군장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바닥에 뻗어버린다. 인솔이고 뭐고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과 물 한 모금뿐. 다행히도, 그에게 물이 남아있는 수통을 내미는 그림자가 있었다.


“일어나. 애들 인솔하라잖아.”


에두나 다른 생도들과는 달리, 이마와 전투복이 살짝 땀으로 젖어있을 뿐인 에이미였다.


“아, 꺼져, 좀. 인솔이고 지랄이고 나발이고 뒤지겠는데.”


고맙다는 말도 없이 에이미의 수통을 단숨에 비워버리고는 옆으로 내던지는 에두. 빈 수통은 힘없이 굴러가다가, 이내 한 전투화의 그림자 아래 멈춰 선다.


“.......”


몇몇 생도들과 함께 복귀 중이었던 치체였다. 그는 땀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손빗으로 가볍게 정돈한 후에, 수통이 굴러온 경로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바닥에 뻗어있는 에두와 눈이 마주친 것은 물론이었다.


“뭘 야려, 씨발롬아.”


거친 표정과는 달리, 에두의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급격하게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다시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치체 주변에 있던 생도들 사이로 웃음이 번진 순간이었다.


“이런, 대표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의무병을 불러올까요? 어서 빨리 저흴 인솔하셔야죠?”


그리고 치체가 비웃음의 파도에 정점을 찍는다. 동시에, 에두의 얼굴도 뒤틀린다.


“싸물어라, 진짜. 뒤지는 수가 있다.”


“이런, 무서워라. 여기서 기다릴까요? 기어오실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낮은 웃음소리,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수십 명의 생도들과 함께 기지로 복귀하는 치체. 에두는 그 뒷모습을 향해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흙을 집어 던졌지만, 그 처절함과 안쓰러움에 비해 실속은 그다지 없었다.


“.......넌 타고난 재능은 좋은데 기초가 너무 부실해. 체력도 그렇고.”


씩씩거리며 주저앉아버리는 에두를 향한 에이미의 한마디였다. 물론, 이런 충고를 곱게 들을 리 없는 대표였다.


“씨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꼴 보이기 싫으면 기초부터 제대로 쌓아. 훈련과정에 불만가지지 말고. 기수대표로서의 위엄이나 책임감은 바라지도 않아. 그저, 저 귀족 애들이 우리를 싸잡아서 비웃지는 못하게 해야 할 거 아냐.”


“내 알 바냐, 씨발. 저리 꺼져 좀.”


“.......뭐, 알아서 하셔.”


에이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를 벗어난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치체의 ‘귀족’무리에 속하지 않은 평민 생도들 몇몇도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기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한 번씩 자신들의 대표를 향해 힐끗 시선을 주었지만, 손을 내밀어주거나 그의 ‘인솔’을 기다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어서 와.”

침실의 문을 열어주는 란다의 입가로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난다. 그 미소는 자연스럽게 방문자인 유진에게도 전염되고 있었다.

“사실 좀 걱정했다. 내가 너무 무리해서 밀어붙인 게 아닌가 해서 말이야.”


“아니에요, 오라버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을 뿐이에요.”


늦은 시간이었지만, 란다의 책상은 여전히 온갖 서류와 보고서로 탑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소중한 여동생의 방문만큼이나 중요한 일들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그는 능숙하게 찻잔을 들고 유진이 앉아있는 소파로 다가선다.


“그래, 정리는 끝난 거냐?”


정리.

참으로 간단하지만, 복잡한 내용들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다.

유진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입가가 떨리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네.”


“그 녀석도?”


“네.”


“.......그래, 잘 생각했다. 그게 그 녀석을 위해서도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다.”


차향으로 입술을 적시며 란다는 살짝 붉은 시선으로 동생의 안색을 살핀다. 마찬가지로 차를 음미 중인 그녀였지만, 그 표정에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풍미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란다의 입가로 만족의 미소가 떠오른 이유였다.


“다만, 오라버니.”

그러나,

란다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한다.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혈육의 상징인 그 새빨간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었다.


“다음 원정까지만 제 복무를 허락해주세요.”


“.......뭐?”


동시에 찻잔을 내려놓는 두 남매. 하지만 일렁임이 없는 쪽은 동생이었다.


“저는 일반적인 기사로 복무 중인 것이 아닙니다. 폐하의 곁을 지키는 근위대입니다. 근위대장이신 루디 드렌턴 경께서 평소 좋게 봐주신 덕분에 오라버니의, 아니, 제 요청을 별다른 절차 없이 수락해주신 겁니다만, 이렇게 멋대로 그만두는 것은 폐하에게도, 그리고 근위대 선후배들에게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따라서, 완벽하게 주변 정리가 될 때까지는 근위대에 남아 봉사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으로 적합한 것이 바로 내년 초, 블라고슬로바 선전포고....... 부디 그 원정까지만, 제 복무를 허락해주세요. 이렇게 마무리하는 편이 가원으로서의 제 ‘가치’를 올리는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그녀가 어째서 ‘가치’라는 단어에 이리도 힘을 줬는지 란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년 봄.

블라고슬로바를 향한 선전포고가 기정사실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원정과 전투가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지, 그리고 근위대의 손을 빌리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니바르토 가문과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식이 잡혀있었다면 유진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겠으나 시간이 필요한 것은 란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유진을 제대시키려 했던 이유의 절반은, 다름 아닌 ‘셰르 시즈키치’에게 있었으니까.


“.......뭐, 알겠다. 나도 좀 급하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니바르토 가문과 이야기를 더 해보고, 구체적인 날짜를 잡자꾸나.”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늦은 시간에 죄송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가주를 향한 예를 다하는 유진. 그녀가 집무실 문을 열고 사라질 때까지, 란다는 가만히 접대용 소파에 앉아 그녀가 남긴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여태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싸늘할 정도로 굳건한 동생의 표정을 되새기면서.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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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 +6 17.02.21 403 13 16쪽
277 (막간) 이 구역의 미친개는 나야 +4 17.02.16 367 10 18쪽
276 (25막) 탈태(奪胎) (10) +8 17.02.11 553 6 16쪽
» (25막) 탈태(奪胎) (9) +4 17.02.06 378 10 20쪽
274 (25막) 탈태(奪胎) (8) +6 17.02.01 383 10 17쪽
273 (25막) 탈태(奪胎) (7) +4 17.01.27 471 6 17쪽
272 (25막) 탈태(奪胎) (6) +4 17.01.22 492 11 14쪽
271 (25막) 탈태(奪胎) (5) +4 17.01.17 388 9 18쪽
270 (25막) 탈태(奪胎) (4) +10 17.01.12 541 11 18쪽
269 (25막) 탈태(奪胎) (3) +8 17.01.07 425 14 18쪽
268 (25막) 탈태(奪胎) (2) +8 17.01.02 424 12 20쪽
267 (25막) 탈태(奪胎) (1) +8 16.12.28 479 12 16쪽
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265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8 12 18쪽
264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3 12 23쪽
263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69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19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0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7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1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8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1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8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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