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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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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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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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1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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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DUMMY

아실레마제국 3군단 좌익군 사령관이자 2사단장 알렉시스 젠센.

다른 출중한 제국기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가문의 빈약함을 물리치고 오직 실력과 성실함만으로 이 자리에 오른 체제의 산물이었다. 수많은 전투를 눈과 몸으로 거치며 쌓아온 그녀의 신중한 대처능력이야말로, 3군단장 카이우스 드레브냑이 직접 그녀를 차출하여 곁에 두고 싶어했던 이유.

그녀는 특별히 오만한 것도 아니었고, 방심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눈앞의 전투를 넘어 전장 전체를 보고자 했던 그녀의 드높은 시선이 살짝 그녀의 이성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적’은, 그녀의 경험이나 신중함, 그리고 충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변수였다.


“흠!”


젠센의 장검이 두 카나반 병사의 상체를 하늘로 흩뿌린다. 사방으로 쏟아지는 붉은 폭우와 낙엽처럼 우수수 내리깔리는 내장과 갑옷의 파편들. 젠센은 본능적으로 다음 적을 향해 장검을 휘두르면서도, 동시에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상황을 분석한다.

패퇴하는 적의 잔당에 대한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곳곳에서 매복으로 이쪽의 발길을 붙잡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발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악은 ‘발악’이 아닌, 철저하게 계산된 견제행위였다. 통신이 복구되고 사단의 주력이었던 2연대가 패퇴 중이란 보고를 듣고 나서야, 젠센은 이 모든 게 하나의 군을 희생시키면서 완성한 누군가의 연극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각 부대에 명령은 하달되었나?”


“옛!”


당황할 법도 하다. 아니, 실제로 젠센은 당황했다. 2연대를 격파하고 곧바로 사단본부를 통해 중앙돌파를 해온 적의 규모는 그녀가 궤멸시켰던 패잔병의 잔당 따위가 아니었다. 적어도 5천 이상의 병력이 충원된, 새로운 군세. 여기서 젠센은 군단정보부의 카나반에 대한 군세파악이 미흡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충원할 수 있는 병력이라 함은 오직 하나. 카나반의 북부군뿐이다. 그러나 3군단 내부에선 이미 카나반의 북부군은 전력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이번 전투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 못을 박아놓은 상태였다. 브린타이나와의 동맹과 팔루뎀의 양도를 통해 카나반의 주력이 통합군이란 형태로 재편되었고, 그 결과 본래 아르보리스를 중심으로 브린타이나와의 국경을 책임지고 있던 북부군의 역할은 애매해질 터. 즉, 3군단은 북부군이 곧 통합군에 흡수되는 형태로 해체될 거라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나반은, 아니, 적어도 카나반의 ‘누군가’는, 아직 북부군의 역할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누가 타국의 전쟁에 처음부터 2개의 군을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좋아, 우린 여기서 버텨낸다!”


정보전과 기만책에 유린당한 탓에 사단본부가 직격으로 공격을 받고 있다. 이 상황에서 사단장이 내려야 하는 판단이란 무엇일까. 흐트러진 전선을 다시 재정비하고 난입한 적에 대해 반격을 하는 것? 평범한 지휘관이었다면 그런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신이 복구되자마자 젠센이 각 부대에 지시한 것은 사단본부에 대한 구원이 아니었다.









“검성님, 흩어진 적 부대가 돌아오질 않습니다. 이대로 브린타이나 중앙군을 공격할 셈인 것 같습니다.”


“흐음.”

보르케의 보고에 벤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부슬부슬 앳된 수염이 올라온 턱을 쓰다듬는다.

“전부? 아무도 이쪽에 구원을 안 온다고?”


“예. 매복군의 지휘관들로부터 더 이상 적들의 발을 묶어두기 힘들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재밌네. 자기는 이대로 박살 나도 상관없다는 건가.”

벤은 다시 한 번 확신을 갖는다. 역시 3군단, 제국은 제국이다. 이 정도로 흔들어놓아도 적의 지휘관은 전황을 읽고 있다. 얄팍한 희생정신과는 다르다. 적은 지금 최선의 판단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벤은, 그 선택이 곧 정답이 되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자히르 경에게 전문을 보내. 병사들을 이끌고 흩어진 적 부대를 추격하라고. 놈들이 중앙군에게 가도록 냅둬선 안 되니까.”


“.......예? 하지만.......”


자신의 기마술이 어설프다는 사실도 잊은 채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려세우는 보르케. 크게 요동친 말의 허리 덕분에 안경이 그의 콧등에서 떨어졌지만, 보르케는 익숙한 손동작으로 부유마법을 발현해 그를 잡아낸다.


“이길 생각도 없고, 버틸 악만이 남아있는 적을 상대로 낭비할 시간은 없지. 적들을 꾀어내지 못했으니 우리가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잖아.”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벤의 태도였지만, 보르케의 당황은 다른 방향을 향해있었다.


“그럼 북부군이 빠진 나머지는....... 어떻게 합니까?”


보르케가 묻고 있는 바는 간단했다. 현재 카나반군의 주력은 자히르가 데려온 북부군. 나머지는, 패배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본대의 생존병들이다. 이 상황에서 주력인 북부군을 돌려놓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보르케는 벤이 자신의 명령에 깃든 의미를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북부군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저놈들을 잡아두고 있어야지.”


그리고 그에 대한 벤의 대답은 간단했다. 마치, 이 명령과 자신의 선택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없었다는 듯이. 여태까지 꽤나 오랜 시간 그를 보조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는 보르케였지만, 이번만큼은 참아낼 수가 없었다.


“......주제넘은 짓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검성님,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북부군이 빠진 나머지 군세는 1개 연대규모도 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오늘 하루 종일 패배와 후퇴를 반복하느라 부상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적 사단본부를 상대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런데? 뭐 문제라도 있어?”


저것은 우회적으로 비꼬는 질문일까, 아니면 순수한 의문에서 비롯된 질문일까.

어느 쪽이든,

소름이 돋는 건 마찬가지다.


“이미 동맹이라는 명분을 지키고 이 전투의 확전을 위해 만 명에 가까운 카나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검성께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동맹국 측면의 안녕을 위해 3천의 병사를 추가적으로 희생시킬 생각-”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단순히 남의 나라의 전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보르케. 그리고 너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봐. 만약 네 아버지가 아직도 북부군사령관이었다 해도, 나의 이 선택에 반대를 했을까?”


“.......”


보르케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아버지, 전 북부군 사령관 그라우치 장군이 이 상황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너무도 명백했으니까.


“흠, 그런데 네 말도 일리는 있어. 기껏 통합군으로 재편한 뒤의 첫 실전인데, 전멸이라는 형태로 끝나버리면 여론도 좋지 않겠지.”

전멸? 여론?

이 남자가 이런 단어를 이토록 쉽게 내뱉는 사람이었던가?

“흐으으으으음, 그렇다고 놈들을 놓칠 수도 없고....... 아, 그래. 고도에게 다시 망자들을 일으켜달라고 할까?”


“적당히 해!!”

갑작스러운 호통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소리를 지른 보르케 본인이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터무니 없는 무례를-”


“바로 그거야, 보르케.”

얕은 웃음. 보르케가 고개를 들자, 만족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검성의 미소가 있다.

“감정을 숨기지 마. 날 의심해. 네 아버지가 너에게 바라는 모습은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몸종이 아니잖아? 그리고 내가 너에게 바라고 있는 것도 고개만 끄덕이는 인형이 아니라고. 이런 때야말로,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뭘 해야 하는지 깨닫고 각성해야 하는 순간이야. 적당히 해서 이길 수 있는 전쟁이란 없어. 결국엔 배짱 싸움이지.”


“.......”


벤이 북쪽을 향해 말머리를 돌린다.


“하나, 토우칸과 특작부대. 둘, 카니아. 셋, 고도와 오캄푸스. 전부는 못 줘, 하나만 골라. 말했다시피 제일 중요한 건 북쪽이니까. 자, 어쩔래?”

대답을 재촉하듯, 벤은 천천히 말을 몰아 움직인다. 이미 그의 명령은 전달되었고, 자히르의 북부군이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후끈 다가오는 전장의 열기. 크게 주변을 둘러보는 보르케를 향해, 벤이 마지막 미소를 짓는다.

“혹시 까먹었을까봐 다시 말하는데, 난 분명 ‘놈들을 잡아둬야’한다고 했다?”



‘배짱싸움.’


보르케는 퍼뜩 고개를 든다.




“셋 모두 필요 없습니다. 군마 백 필만 주십시오.”









“놈들이 전선에서 이탈합니다!”


눈앞에서 튀는 피와는 별개로 젠센은 입술을 깨문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적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쪽의 움직임과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다.


“남아있는 적군의 규모는?”


“2천, 아니, 3천 정도입니다!”


“우릴 묶어둘 생각이군. 멈춰선 안 된다! 이대로 밀어붙여서 놈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추격한다!”

각 부대마다 경로를 달리하여 움직이는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 저 정도의 군세를 풀어놨다가는 공격을 위해 나선 부대들이 각개격파 당할 위험성이 크다. 저쪽이 이 사단본부를 미끼로 삼았던 것처럼, 역으로 이 미끼를 그대로 쥐고 있어주길 바랐지만 역시 적은 이 의도를 읽고 있었던 모양. 이렇게 된 이상 젠센에게 남은 선택은 강행돌파뿐이었다.

“이탈한 군세가 적들의 주력일 것이다! 남아있는 건 버리는 패다! 깊숙이 따라갈 필요 없이 정면에서 압살을-”


“장군!”


자신을 부르는 부관의 목소리. 그러나 그 뒤의 보고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젠센 또한 느끼고 있었다. 굳이 훌륭한 기사의 피가 아니었을지라도,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매캐한 향은 이 전장에 서있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현실이었으니까.


“부, 불이다!”


화염마법? 아니다.

마력의 잔향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저 시뻘건 실체는 철저하게 의도적으로 계획된 시기와 장소를 가지고 있다. 확신을 가진 젠센의 눈에, 저 멀리 불타는 수레와 기름통을 달고 뛰어다니는 군마가 포착된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수십의 불길이, 동시에 크게 원을 그리며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화공.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다. 문제는, 카나반이 아닌 제국의 계책으로써 고려되었다는 점이다. 숲의 민족을 자처하는 카나반이 숲 전체를 불태우는 방법을 쓸 리가 없으니까. 그것은 단순히 세뮈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수준의 행위가 아니다. 그들의 역사를 더럽히고, 거부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도, 젠센의 경악을 이끌어낸 진실은 따로 있었다.


‘자신의 병사들까지 함께 태워죽이겠다는 것인가!’


불길은 카나반의 북부군이 전선을 이탈하자마자 솟아올랐다. 즉, 남아있는 카나반의 병사들도 고스란히 2사단과 함께 불길 속에 갇혀버린 상태. 머리로는 이 선택을 납득할 수 있다. 만약 남아있는 이 병력들마저 이탈시키려 했다면 이쪽을 묶어둘 수단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장군! 적들이 돌진해옵니다!”


다급한 부관의 외침과 함께 어느덧 뜨거운 불길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젠센은 움직이지 못하고 반대편의 적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3천에 가까운 훌륭한 병사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이쪽의 의지를 뒤흔들려 한다. 이것이 정녕 전투인가? 저것이 정녕 저들의 의지인가?

이 살육 뒤에 남게 될 잿더미들에 과연 어떤 영광이 남아있을까?

젠센은, 조용히 장검을 내린다.


“.......퇴각한다.”


“예엣?”


당황한 부관의 얼굴. 하지만 돌아서는 젠센의 얼굴에 미련은 남아있지않았다.


“퇴각한다. 우회하려고 해봤자 목숨을 걸고 달라붙는 저 불길을 뿌리칠 수는 없어. 그렇다고 정면으로 돌파하려 했다간 저들과 함께 화염 속으로 삼켜지겠지. 우리의 역할은 끝났다. 내 부하들을 의미 없이 불타 죽게 놔둘 수는 없다.”


“.......장군.......”


“적이 쫓아올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빠르게 물러난다. 남쪽으로 향하면 될 거다. 그래 봤자, 저들에게 생명의 은인이라는 소릴 들을 수는 없겠지만.”


저들도 굳이 전선에서 멀어지는 적을 견제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터. 기수를 크게 남쪽으로 돌린다면 이 위험천만한 불장난도 멈추리라. 그녀가 ‘역할이 끝났다’고 단정한 것처럼, 자신의 부하들도, 그리고 저 3천의 병사들도 이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모두가 죽느냐, 아니면 불편함을 씹더라도 모두가 살아남느냐. 젠센은 후자를 택했을 뿐이었다.


“허나 장군, 이러면 아군의 공격부대가 위험한 것이 아닌지.......”


“한두 부대를 각개격파 할 수는 있어도 공격부대 모두를 요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카나반군이 아니야. 어디까지나 중앙군이다. 흔들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군단장님께서 처리해주실 거다.”


불길이 번지는 방향에서 벗어나는 제국군. 젠센은 확신이 가득한 눈동자로 검은 연기 너머의 북쪽을 바라본다. 선취점을 3군단이 가져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것은 오직 거뭇한 추악함뿐. 그럼에도, 젠센은 씁쓸함을 씹는다.




===================




“후우.”


말끔했던 머리카락은 잔뜩 흐트러졌고, 강화복으로도 감출 수 없는 상처가 상체 곳곳을 더럽히고 있다. 그럼에도, 디미르는 상쾌한 표정으로 콧등의 땀을 훔쳐내는 중이었다. 거칠어진 호흡은 그와 상대하고 있는 카이우스도 마찬가지였다.

몇 합째 충돌하고 있는 것인지 세는 것조차 잊었다. 넋이 빠졌던 병사들도 저 멀리서 자신들만의 전투를 재개했고, 이제 결투를 지켜보는 건 오직 비명과 폭발음, 그리고 죽은 자들의 시선뿐이다.


“.......”


호흡을 고르는 사이, 카이우스는 자신의 단검을 들어 날을 살펴본다. 이가 빠진 곳곳에 주인을 알 수 없는 피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제아무리 이스누시아 연철단검이라 할지라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온건한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는 법. 결국, 카이우스는 들고 있던 단검을 내던지고 세 번째 단검을 품속에서 꺼내 든다.


“돈 많으신가 봐? 그 비싼 걸 휙휙 버리시고?”


때를 놓치지 않는 미소의 미소.


“원한다면 싸게 넘겨주지.”


“하핫, 이제 농담도 다 하네?”


창을 쥔 팔을 크게 쳐들어 뜨거운 근육을 풀어내는 디미르. 그는 격하게 목을 한 번 돌리고 나서, 다시 낮은 자세를 잡는다.

몇 번이나 반복해왔다. 저 동작은 이제 곧 도약하겠다는 의미.

그러나

카이우스는 검을 들지 않는다.


“이제 그만 하지, ‘미소’.”


“잉? 뭘?”


“의미도 없이 이렇게 서로 간만 보는 것 말일세.”


“응? 그랬어? 난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디미르는 가볍게 자세를 풀고 ‘콴탈루엘의 눈물’을 어깨에 걸치며 웃는다. 그러나 카이우스는 전투만으로 집중을 잃어버리는 기사가 아니었다.


“적당히 봐주면서 날 묶어두려는 이유가 뭐지? 전력을 낸다면, 분명 자네와 나 둘 중 하나는 죽을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내가 보기엔, 내 쪽이 그럴 가능성이 더 높군.”


“에헤이, 뭔 소리야? 갑자기 약한 소리를 하고? 겸손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 아니었어?”


“미안하지만 검성, 자네가 바라고 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형식적인 도발이나 위협이 아니다.

디미르의 미소가 사라진 것이 바로 그 증거.

카이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남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노골적인 통신교란. 나를 붙잡아두고 시간 끌기. 자네가 노리고 있는 수가 무엇인지는 뻔히 보이네만.”


“.......”


“그들은 패배했네, 미소.”

카이우스가 입에 담고 있는 ‘그들’이 누구인지는,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타국에 의지하는 순간 자네는 패배한 것이네. 이건 좌익이냐, 우익이냐 따위의 문제가 아니야.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지휘관은 자신의 부하들을, 병사들을 신뢰해야 하네. 그렇지 못하면, 이미 전투는 내부에서 시작된 거야.”


거친 함성이 솟아오른다. 제국군의 진영이었다. 병사들의 환호는, 카이우스와 마찬가지로 남쪽을 향해있었다.


전선의 남쪽으로 낮게 솟아있는 언덕. 적당한 비탈길 위로 나부끼는,

3군단의 깃발.

그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검은 물결.

수많은 제국군의 먹색 제복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숙하게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왕을 모시고 퇴각하게. 자네 아비를 따르던 귀족들의 비난과 불만으로부터 살아남는다면, 다시 협상을 시작해보도록 하지.”


고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로 검을 집어넣는 카이우스. 디미르는 여전히 웃을 수가 없었다.


“남아있는 방패병들은 측면으로! 적의 돌진에 대비하라! 포격은 허용하지 않는다, 마력을 아껴!”


디미르를 대신하여 말을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추스르는 크리스였다. 직접 검을 뽑아 들고 지휘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병사들은 전의를 되찾았으나,

결국 그뿐.

거대한 함성과 함께 밀고 내려오는 적의 지원군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충격에 대비하라! 충격에 대비하라!”


애타게 울려 퍼지는 크리스의 목소리. 이미 브린타이나의 병사들은 잔뜩 움츠러든 상태다. 이를 놓칠 3군단의 병사들이 아니었다. 팽팽하던 전방의 전선이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곳곳에서 무너진 대열로 인한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한다.


“협상이라....... 그건 아실레마 좌검성으로서의 제안인가?”


표정이 사라진 디미르의 목소리는 그의 얼굴만큼이나 차갑게 식어버린 뒤였다.


“그렇게 확신할 수는 없지. 하지만 오늘을 계기로, 그 자리를 향한 큰 계단을 오르게 될 것이다.”


확신을 거부하면서도 ‘은빛의 사선’이 지닌 야망은 날카롭게 이쪽을 침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디미르는 웃었다.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체념의 웃음인가?”


“음? 오, 아냐 아냐. 그냥 당신에게 이 말을 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거든.”


이마를 짚으면서까지 장난스럽게 깔깔 웃는 디미르의 모습은 카이우스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무슨 말?”


“아아, 별건 아냐. 그냥-”



함성과 함성이 맞부딪치는 거대한 충돌음이 숲을 뒤흔든다. 새로운 비명이 솟아오르고, 경악과 탄식이 번진다.

카이우스는 고개를 돌려 근원지를 바라보았고, 곧바로 턱을 살짝 떨어트린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에서 나타난 제국군.


그 검은 물결이 돌진한 곳은

브린타이나 중앙군의 측면이 아니었다.




“당신이 검성에 오를 일은 없을 거라고. 이걸 말해 주고 싶었어.”



미소의 미소가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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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6) +2 17.03.19 339 1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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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25막) 탈태(奪胎) (1) +8 16.12.28 479 12 16쪽
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265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8 12 18쪽
264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4 12 23쪽
263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70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20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1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7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2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9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2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8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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