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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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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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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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0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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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DUMMY

본래 의원들과 지나만이 질의응답을 하기로 되어있었던 일일회의는 결국 군회의로 변질되고 만다. 참모들과 지휘관들이 대거 회의실로 비집고 들어왔으며, 회의실 중앙, 즉 지나가 앉아있던 책상 위로는 이스누시아 지역이 포함된 작전지도가 펼쳐진다. 지도 위, 붉은 나무의 깃발표식이 세워졌었던 이스누시아 성엔 다시금 세 개의 먹색 연대 식별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스누시아 지역에 진입한 적의 증원군은 그 숫자만 파악되었고, 소속이나 지휘관에 대한 정보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척후대의 정보를 종합한 카논의 보고였다. 그에, 지나는 여전히 시선을 지도에 고정시켜놓은 채 입술만을 움직인다.


“상황은?”


“저항 없이, 성문을 열고 투항한 듯합니다.”


“.......확실해?”


“예. 어떠한 전투의 징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흥, 내 이럴 줄 알았소!”

분주하던 분위기가, 란다의 불평으로 인해 일순간 잦아든다.

“인질로 잡아 와도 모자랄 판에 적의 지휘관이었던 자를 무장한 병사들과 함께 방치하고 오다니, 당연한 결과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소득 없던 전투에, 이젠 티끌만큼 남아있던 보람마저 사라지게 생겼군요!”


“아직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엔 이릅니다, 란다 경.”


오로메의 변호, 그러나 란다의 목소리는 한층 더 힘을 받는다.


“이 이상 판단을 내릴 게 뭐가 있습니까? 이번 원정은 대실패입니다!”


일종의 선언처럼까지 보이는 그의 확신에 귀족당의원들에게서 동조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나머지 침을 튀기며 책상을 두들기는 자도 있었고, 대놓고 왕당파 의원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오로메는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었다. 흥분하고 있는 의원들 중 대다수가 이번 원정에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던 이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뭐어, 실패가 맞겠죠. 적어도 지금까지는요.”


그리고 그런 의원들을 향해 침묵의 주문을 퍼트리는 지나의 한마디.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란다만이 간신히 그 주문에서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선다.


“마제스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원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곳곳에서 탄식이 흐른다. 헛웃음과 함께 의자를 뒤로 젖히는 자들과 팔꿈치를 책상 위에 두고 머리를 감싸는 자들 등, 각각의 반응은 달랐지만 그 의미는 모두가 똑같았다. 그러나 정작 지나는 여전히 전술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결국, 모든 혼란을 대표하여 란다가 다시 입을 열어야 했다.


“왕비님 설마, 다시 한 번 이스누시아 성을 공격하시겠다는 겁니까?”


“네.”


너무나 단호한 대답. 란다는 펜을 떨어트리며 웃는다.


“핫! 이미 아무것도 얻을 게 없음이 밝혀진 마당에 굳이 다시 원정을 가시겠다니요? 이미 앞선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할 판인데, 또다시 모두의 인력과 자원을 낭비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결과에 따른 책임은 반드시 질 겁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시 여러분들의 주머니를 털 생각은 없어요.”


란다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마제스티, 그 말씀은-”


“대위, 현재 중앙군의 남아있는 보급수준으로 움직일 수 있는 병사는 얼마나 되지?”


여전히 시선은 받지 못했으며 동시에 계급으로만 불렸지만, 카논은 지나의 의식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왕실참모로서 그녀의 두뇌는 직책에 걸맞은 계산으로 빠르게 답을 내놓는다.


“오천입니다.”


“기간은?”


“일주일입니다.”


“좋아, 충분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충분하다니요?!”

결국, 란다가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지른다.

“적은 추가된 인원만 일만입니다! 고작 오천의, 제대로 재정비조차 하지 못한 병사들로 재공격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아니 애초에, 이렇게까지 이스누시아에 집착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경제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이미 가치가 없는 지역이라고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가치가 있고 없고는 의회에서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지나의 말에 경고의 의미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란다의 심기를 건드리기엔 충분했다.


“아아~, 그렇죠. 그 대단하신 ‘기밀’말이지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어윈 아이언하트를 성에 남기고 온 그 선택이 왕비님의 책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 그래서 책임진다고 했잖아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책임을 지실 건지? 대리기사직 사퇴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게 그런 거라면요.”


“자자, 잠깐만요, 여러분. 잠깐만 진정들 하세요.”

신경전이 여기까지 이르자,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로빈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란다 경, 죄송합니다. 지나가 잠시 흥분해서 그래요. 너그럽게-”


“뭔 소리야? 흥분 안 했어. 책임진다니깐?”


“넌 좀 조용히 있어 봐!”


때아닌 촌극. 란다는 낮게 비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뭐, 지금은 전시. 그리고 이스누시아가 다시 넘어갔으므로 이곳, 마즈다성도 최전선이라 볼 수 있겠지요. 이런 상황에서의 군권은 어디까지나 폐하와 원정군사령관인 왕비님께 있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약속된 바를 보상받을 수 없는 지금, 저를 포함한 귀족당의원 전원은 이번 원정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저희 시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위가 목적이라면 몰라도, 중앙군부의 독단적인 군사작전에 지원을 해줄 의무는 없어요.”


란다에 이어 아델까지 입장을 내세운 가운데, 로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로빈은 앞쪽에 서있는 지나를 바라본다. 마침 지나 또한 로빈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둘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지나의 입가엔 미소도, 분노도 스며있지 않다. 그러나 그 샛노란 눈동자에서 엿볼 수 있는 확신은, 로빈에게 몇 시간 전 침대 위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주었다.


오천과, 일주일.

결국,

로빈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은 건가?”


지평선 너머로 멀어져가는 오천의 원정대. 하염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로빈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망루에서 만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존재로, 본래 오늘 참고인의 자격으로 의회에서 발언할 예정이었던 덜린족 고브나이였다. 다른 덜린족에 비해서 왜소하다고는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망루를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했다. 계단 옆에 있던 드렌턴이 줄곧 경계심을 세울 정도였으니.


“본인이 괜찮다니까 믿어봐야죠, 뭐.”


“남아있는 동포들은 내가 없는 이상 저번처럼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고 하더군. 바로 돌아올 거, 따라올 필요가 없다면서.”


“.......으음, 뭐어....... 자신감은 좋은 거죠.”


로빈의 대답에, 우락부락한 상체를 스윽 시야 안으로 들이미는 고브나이. 드렌턴이 다가오려 했지만, 로빈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한다.


“목소리에 확신이 없군. 그녀를 믿지 못하는 건가?”


“네? 아뇨아뇨, 물론 믿어요.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인데요. 하지만....... 걱정은 별개니까요.”


“우려야말로 불신의 조각일 뿐. 너는 진실로 너의 태양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붉은 나무.”


“하아, 뭐어,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쓴웃음과 함께 다시금 저 멀리 시선을 옮기는 로빈. 하지만 이미 원정군의 그림자는 숲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버린 뒤였다.


“애초에 우려할 필요가 있는 건가? 만 개의 목소리를 상대하는 것에 오천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우리 모두가 당신네들처럼 튼튼한 게 아니라서요.”


“철심장이라면 충분히 단단하지 않나?”


“바로 그 철심장이 배신했다는 게 문젠데요.”


“배신? 철심장이?”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한 어조와 함께 가면을 이쪽으로 향하는 고브나이. 로빈은 저 기괴하고 두터운 가면 아래로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좀처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는 패배하고 한쪽 눈까지 내줬잖나?”


“어....... 패배하고 눈까지 내줬으니까 배신을 한 거 아닐까요?”


“이해하기 어렵군. 우리들에게 패배는 곧 스승이다. 적일지라도 패배를 안겨준 상대에겐 존중을 표하고 승자의 명예를 지켜줘야 한다. 철심장은 머리가 뜨겁긴 해도, 명예를 아는 사내였을 텐데.”


“인간들은 증오에 쉽게 휩쓸리는 존재라서요.”


농담조에 가까운 로빈의 대답이었지만 고브나이는 크게 수긍하는 눈치였다.


“증오는 다른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원동력이지만, 동시에 그 무엇보다도 빠르게 생을 갉아먹는 맹독이기도 하지. 철심장이 증오에 잠식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감정은 분출하면서 살아야죠. 어떻게 삼키고만 살겠어요?”


“.......네 말이 누구를 옹호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게 만드는군.”


“이 애매모호함이야말로 제가 모두를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거든요.”


아직 인간과의 대담이 익숙하지 않은 고브나이로서는 지금 로빈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흔들리지 않는 검붉은 눈동자만큼은, 종족을 불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의지였다.





================





“.......”


창문을 포함한 모든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했기에, 방 내부는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치료와 휴식에 전념한다는 이유로 식사마저 거부한 채 틀어박히기를 꼬박 하루. 하지만 벤의 머리에선 아직도 답이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아, 뭘 고민을 하고 있냐? 그냥 지금 군대 그대로 이끌고 쳐들어가서 교횐지 뭔지 싸그리 털어버리면 되는 거 아냐?”


그리고 그런 벤의 사색을 끈질기게 방해하고 있는 렌. 그는 어느 취사장에서 훔쳐왔는지 제대로 조리되지도 않은 닭을 손가락으로 찢어먹으며 침대 곁을 뒹굴고 있었다. 결국, 벤의 미간이 구겨진다.


“닥쳐, 좀. 넌 너네 나라로 꺼질 것이지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지랄이니?”


“와, 시발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저년도 여기 남아 있잖아.”


“난 적어도 누구처럼 눈치 없이 나불대진 않거든.”


커튼이 드리워진 창가에 걸터앉아 차를 홀짝이던 진의 핀잔. 그에 렌은 그녀와 벤을 번갈아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는다.


“너는 죽인다어쩐다 허세만 잔뜩 부리더니 순한 양이 되셨어? 나 없는 사이에 둘이 끈적하게 붙어먹기라도 했냐?”

진은 렌을 향해 역겹다는 듯한 경멸의 눈길을 줬을 뿐, 그 이상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나름 벤의 침묵을 배려하기 위함이었지만, 렌이 그런 걸 상관할 리 없었다.

“아아, 씨발, 존나 심심해! 여긴 죄다 우락부락한 년들밖에 없어서 덮칠 생각도 안 들어. 어디 전쟁 난 곳 없나?”


“그러니까 너네 나라로 꺼지라고. 왜 쫓아와서 난리야?”


“어휴, 우리 형제님을 놔두고 내가 어딜 가? 어차피 내 부하들도 다 해산시켰고 ‘미소’한테 허락도 받았으니, 사양하지 말렴.”


“좀 사양하고 싶은데.”


“앙탈 부리기는!”


렌이 실실 웃으며 생닭다리를 들이미는 바람에 결국 벤은 줄기 하나를 소환하여 그를 허공에 매달아야 했다. 독이 번지는 느낌이 신선했는지 낄낄 웃는 렌을 저 멀리 치워두고, 벤은 진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진, 니에브에도 중앙교회라는 게 있어?”


“아니, 우린 애초에 신앙이란 걸 따질 이유가 없거든. 눈은 우리의 생활이고, 기준이자 삶 그 자체니까. 플로닉스가 숭배받는 걸 싫어한다는 성격도 한몫했지만.”


“숭배받기를 싫어한다라....... 그럼 대공이 굳이 플로닉스의 축복을 받지 않아도 되는 건가?”


“글쎄, 니에브에서 태어나서 자란 모두는 플로닉스의 축복을 받으니까. 그걸 축복이라고 해야 할지 저주라고 해야 할지는 상대적이지만.”


눈의 나라 니에브공국. 그리고 눈을 다스리는 악마 플로닉스. 그 근본은 사도이면서도 스스로 악마라 칭할 정도로 변덕이 심한 플로닉스인만큼 니에브의 기후는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한여름에 눈이 내리기는 일쑤고, 대전쟁 당시에는 피냄새가 싫다는 이유로 다섯 달 내내 눈보라를 흩뿌려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든 적도 있었다. 본인의 성별마저도 기분에 따라 바꿔버리기 때문에 니에브의 사람들도 눈의 악마를 ‘그’라고 불러야 할지 ‘그녀’라고 불러야 할지 의견이 갈릴 정도. 물론 걷잡을 수 없는 모든 변덕 속에서도 그(또는 그녀)의 축복 아래 태어난 니에브의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추위 내성을 타고난다는 것만큼은 한결같았다. 문제는, 그만큼 니에브인은 더위와 습기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는 니에브공국이 반도의 북쪽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카나반 같은 경우는 영토를 확장함에 따라 숲을 조성하는 것으로 축복을 유지할 수 있지만, 날씨는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


“카나반의 세뮈엘도 플로닉스와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어. 단순히 축복으로 인한 병사들의 능률뿐만이 아니라 벌목, 사냥, 그리고 토지의 질까지 모두 그녀의 의지에 달려있으니까. 숲으로 뒤덮이지 않은 땅은 좀처럼 자원을 뱉어내지 않으니, 카나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눈치를 봐야 했던 거야.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세뮈엘과 인간을 연결하는 교회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고. 물론, 대전쟁을 기점으로 많은 게 바뀌기는 했지만, 아직 그 근본만큼은 여전하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걸까?”

마침내, 벤이 턱에서 손가락을 떼어놓는다.

“플로닉스는 권위와 숭배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러니까 교회가 필요 없지. 하지만 그럼에도 니에브공국 전체에 축복을 내려줘.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저주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정말로 저주였다면 처음부터 추위에 대한 내성 따윈 주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세뮈엘은 어때? 교회는 물론이고, 혈통이라는 이유로 왕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잖아.”


“.......다시 물을 게. 그래서 그거랑 네가 전쟁범죄로 고발당했다는 거랑 뭔 상관인데?”


“세뮈엘의, 교회의 입김이 너무 과하게 세다는 거야.”

벤이 손을 흔들어 줄기에 얽매여있던 렌을 바닥으로 내팽개친다. 이미 중독으로 인해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방해받을 일은 없어 보였다.

“세뮈엘이 개인적으로 날 싫어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 일을, ‘인간’의 일을 방해하려 한다면 문제가 되지. 전쟁은 이제 시작이야. 내가 세뮈엘의 축복을 받은 아군 몇천 명을 희생양으로 삼고 숲을 불태웠다고 해서 매번 군사재판도 아닌 전범재판에 서야 한다면, 나는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야.”


“그 말은, 앞으로도 계속 그런 짓을 할 거라는 얘기야?”


“당연하지.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몇천이 아닌 몇만이라도, 그리고 숲이 아닌 반도 전체를 태워버릴 수도 있어.”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나 있을까. 진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벤의 대답은 단호했으며 표정은 밋밋했으니까.


“.......네가 말한 그 목표라는 게, 기본적으로 네 친구라는 카나반의 왕을 위한 거지?”


“그래.”


역시나 망설이지 않는 대답. 만약 자신이 그 왕이었다면 이런 벤의 태도에 감동했을까. 진은 쓴웃음을 짓는다.


“그런데 만약, 네가 생각하는 목표가 네 가장 소중한 친구의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희생시키는 거라면, 너는 그래도 목표를 위해 강행할 수 있어?”


“.......”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가능성으로 따지자면 희박하고, 공상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벤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그런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짧은 머뭇거림이었다.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냐. 군권이 교회에게 침해당했다는 사실부터 당장 처리해야 해.”


“아, 그러니까 걍 애들 몰고 가서 다 쓸어버리래도.”


“아놔, 넌 이제 독도 안 듣냐? 징글징글하네 진짜.”


어느새 망자처럼 기어와 침대에 닭다리를 올려놓는 렌을 보며 벤은 혀를 찰 수밖에.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쓸어버려. 굳이 교회가 필요해? 세뮈엘 그년한테 빨아달라고 부탁하는데 굳이 남의 입을 빌려야 하냐고? 쌔끈한 너네 왕이 직접 부탁하면 되잖아.”


“표현력하고는......., 헛소리하지 말고 다시 쳐.......”


더욱 강한 독을 품은 줄기를 소환하려던 벤의 손가락이 멈춘다. 대신, 그 손가락은 천천히 주인의 턱을 받쳐 사고의 속도를 더해준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렌은 진을 바라보았지만, 그녀 역시 어깨를 으쓱할 뿐.


렌의 지루함이 되살아날 때쯤, 벤이 고개를 든다.

무릎의 고통과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인해 흐트러져있던 그의 먹색 눈동자는, 그를 바라보는 렌의 눈동자만큼이나 선명함이 되돌아와 있었다.


“하앙, 나는 네가 그런 얼굴 할 때마다 너무 좋더라.”


“제발 닥쳐.”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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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2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9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3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8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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