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최근연재일 :
2020.08.11 17:50
연재수 :
389 회
조회수 :
450,885
추천수 :
12,219
글자수 :
3,143,319

작성
16.12.18 18:58
조회
498
추천
12
글자
18쪽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DUMMY

“아, 어서 오세-”


“만약에.”

자신을 향해 예를 갖추려는 왕의 인사를 틀어막으며, 대사제 레기라는 성큼성큼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다.

“만약에, 폐하께서 세뮈엘님을 소환하시고 그분께 답을 얻으려고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지친 얼굴. 경건한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파의 흔적들. 더 이상 새하얗지 않은 사제복과 그 소매를 장식하고 있는 붉은 나뭇잎문양은 이런 대사제의 주름살만큼이나 낡고 빛이 바래있었다.


“.......레기라 사제님. 사제님이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셨는지는 이해하고 있어요.”


“허어, 정말이십니까?”


진심과 비꼼의 중간을 파고드는 대사제의 미소였다.


“하지만, 애초에 이렇게 되실 걸 알고 계셨죠?”

로빈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접대용 탁자로 다가서면서, 레기라의 뒤를 따라 들어온 드렌턴에게 나가도 좋다는 손짓을 한다.

“대전쟁 이후로, 이 나라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애초에 명예직이나 다름없었던 왕이라는 자리가 이토록 힘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죠. ‘힘이 통치하는 시대’ 말이에요.”


“.......”


익숙한 동작으로 차를 내어주는 로빈. 대사제는 뜨끈한 김과 향이 피어오르는 잔 위로 마른 시선을 옮긴다.


“그렇기에 공화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군사적 측면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벤, 아니, 검성을 심판하겠다는 건 힘든 일이죠. 이건 단순히 검성이 제 측근이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사람들과 군인들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어요. 그가 만들어낸 동맹에 기대를 걸고 있어요. 그리고 마즈다힐의 승리로부터 그 희망을 확인했어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흘려서는 안 될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폐하.”

일렁이는 잔을 붙들고, 레기라는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입술을 적신다. 그 눈빛은, 로빈이 봤던 그의 얼굴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것이었다.

“이기기 위해, 성과를 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익숙한 말이지 않습니까? 바로 200년 전, ‘학살의 검성’이 반도의 모든 국가를 상대로 학살을 벌일 당시 했던 행동입니다. 그때에도 제국은 이미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괴물과 망자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반도를 철저하게 피로 물들였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최선의 의도가 있다고는 해도, 그 과정이 공화국의 가치를 훼손하기 시작하면 결과는 참담하게 다가오게 되어있습니다.”


“세뮈엘님의 은총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무렇지도 않게 이 말을 입에 담는 로빈을, 레기라는 다소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며 한숨을 잇는다.


“약화되는 교회의 세력과 위기의식에 따른 대사제의 발악. 남들이 이렇게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일은, 폐하, 그리고 검성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국가는 붉은 나무의 뿌리에서 자라난 줄기입니다. 세뮈엘님의 축복을 받아 행복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고, 우리는 그분의 씨앗, 미트라블루스라는 이름을 지닌 분들을 기념하여 모셔왔습니다. 작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세뮈엘님의 축복이 깃들지 않은 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탐욕과 욕심을 위하여 이 뿌리와 가치에 피를 뱉어버리면, 그곳에서 자라나는 것은 병든 줄기가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감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제님과 저의 역할이죠.”


뒤틀리는 레기라의 눈썹.


“그럼 어째서-”


“사제님, 벤이 저지른 일은 분명 전쟁범죄라고 볼 수도 있는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붉은 나무의 뿌리에 피를 뱉는 짓을 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신을 오물로 더럽혀, 스스로 거름이 되기를 자처한 거죠. 굳이 그 창피한 일기 내용을 예로 들지 않아도, 그가 작게는 누굴 위해, 크게는 어느 국가를 위해 그런 행동을 해왔고, 앞으로 할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세뮈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죄를 묻는 건 그 다음이 되어도 늦지 않아요.”


“하지만 어차피 저에게 다음은 없을 테지요.”


담담한 레기라의 목소리에, 로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다.


“.......네?”


“이번 고발은 교회라는 존재 자체를 걸고 강행한 제 마지막 경고였습니다. 일이 이대로 마무리가 된다면, 세간에 ‘레기라 독트리스’라는 이름은 흐려져 가는 존재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끝내 패배한 인간으로 알려지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무너져가던 교회의 권위는 더욱 추락할 것이고, 저는 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건 허락할 수 없네요.”


이번엔 레기라가 크게 눈을 치켜뜬다.


“.......예?”


“대사제 레기라 독트리스. 붉은 나무의 명맥이 끊겨 섭정과 귀족들의 시대가 왔음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교회의 명맥과 전통을 지켜온 남자입니다. 그리고 제가 세뮈엘님과의 연결점으로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이런 분을, 제가 쉽게 내칠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당황하는 레기라의 시선을 쫓아 로빈은 깊숙이 탁자 위로 허리를 숙인다.


“사제님, 이제 교회의 역할이 달라져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벤에게 전혀 죄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왕으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판단해야 하겠지만, 로빈슨이라는 이름으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은........”


“벤에게는, 검성에게는 분명 제동장치가 필요합니다. 그가 저와 공화국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는 긍정적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다음에도 똑같이 되리란 보장은 없어요. 본인이 자각하기도 전에 너무 나갈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 역할을 교회에게, 그리고 대사제님께 맡기고 싶어요.”


노인이 허리를 펴고, 부드러운 등받이로 지친 몸을 기댄다.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레기라는 그로써 한층 시야가 넓어진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분별성. 그에게 필요한 것이로군요.”


“지금은 벤에게 다들 믿음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고 그 결과물이 계속해서 가시적이지 않다면, 사람들은 믿음을 잃을 겁니다. 그게 바로 제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구요. 단순히 벤의 행동을 제한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걔도 이번 고발을 통해 느낀 바가 있을 테니까요. 그에게 필요한 건, 바로 어느 부분까지 발을 내밀어야 하는가-하는 기준입니다. 그리고 혹시나 그 기준을 깨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앞으로 저와 대사제님이 함께 짊어져야 할 몫입니다.”


“.......”


답하는 목소리는 없었지만, 잔과 향 위로 떠오르는 레기라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만약 벤이 보았다면 벌의 독침 같다고 했겠지. 로빈은 얇게 웃으며, 자신 또한 잔을 들어 코끝에 차향을 묶는다.





=====================





“축하할 게 뭐 있다고.”


퉁명스러운 벤의 목소리. 그러나 카니아의 거친 손길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목발차림으로 여관에 들어선 그를 번쩍 들어 안아 상석에 내려놓은 것이다. 외성의 작은 여관인 ‘은벽의 낭만’. 본래 손님도 별로 없고 조용한 곳이었지만, 오늘 밤은 이 시끌벅적한 손님들에게 세를 내놓은 참이었다.


“이런 게 축하할 일이 아니면 뭐가 축하할 일인데?”


벤이 오기 전에 이미 몇 잔 했는지, 걸쭉하게 웃는 카니아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있었다. 그리고 그건 여관 식당에 있는 대부분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낮 재판에 참석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얼굴까지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다.


“이야, 근데 우리 폐하께서 무섭게 공격하시데? 난 처음엔 진심으로 달려드는 줄 알았어.”


“헹, 우리 오빠가 좀 하지.”


“.......리즈, 그거 칭찬이 아닌 거 같은데.”


레이쇼의 천박한 웃음과 덩달아 가슴을 펴는 리즈. 그리고 그런 왕녀에게 한숨을 쉬는 유진까지. 테이블 하나를 독식하고 있는 그들의 떠들썩함에 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맥주잔을 잡는다.


“토우칸, 혹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로빈이 말한 거 없었어요?”


아빠미소로 주변 테이블을 지켜보던 토우칸은 벤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머금고 있던 맥주를 반쯤 내뱉고 나서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아, 저, 그, 로비...빈에겐 아직 없었습...니다. 아, 아마 주말이 지나고 나...나서 구체적인 계, 계획이......”


“블라고슬로바 쪽을 먼저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던데. 우리 통합군도 일정에 맞춰서 피해복구랑 재편을-”


“통합군은 잠시 숨을 고르는 편이 나을 겁니다. 아직 여론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이번 전투를 통해 병사들의 기본전투력이 엉망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으니까요. 베르달군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벤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별다른 특색이 없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벤의 미간이 구겨진 것은 물론이었다.


“휴식과 재편이 필요한 건 베르달군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더군다나 그들은 마즈다힐의 방위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마음대로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돼요.”


“그건 마즈다힐 방위군이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계속 북쪽에만 계시던 검성께서 파악하실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아니, 근데......, 누구세요?”


“실례했습니다. 줄리아라고 합니다. 그냥 줄리아.”


“.......줄리아?”


생소한 얼굴에 걸맞은 생소한 이름이다. 더욱 깊게 인상을 구기는 벤의 뒤로 지나가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다가온다.


“역시, 둘이 잘 맞을 거 같았어.”


“.......이게 잘 맞는 거라고 보이면 안경을 쓰시는 걸 추천합니다, 왕비님. 근데 저 인간 누구야?”


“줄리아. 이번에 왕실참모 겸 지휘관으로 배정된 사람이야. 어윈 아이언하트의 밑에서 부관으로 일하고 있었어.”


“부관?”


묵묵히 맥주를 머금는 줄리아를 향한 벤의 시선에 의구심이 덧붙여진다. 하지만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지나는 새빨간 혀끝을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찾아낸 원석이지. 기대하셔.”


“.......글쎄......”

마음에 안든다-라며 대놓고 반박하지는 못한 채 껄끄러운 존재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벤. 그리고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비어있는 왕비의 손을 찾아낸다.

“응? 오늘 내가 사는 거 아니었나?”


“맞아. 네 비루한 봉급이 모두의 간에서 분해되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마시셔?”


“아....... 나는 몸이 좀 안 좋아서.......”


방황하는 샛노란 눈동자와 어색한 미소. 벤의 의심이 증폭된다.


“.......왕비님이 공짜술을 마다해.......? 이거 무슨 음모인가? 제국에서 똑같이 생긴 사람들 데려다가 날 속이고 있는 거 아냐?”


“헛소리 말고 마시기나 해. 오늘 검성놀이는 그쯤하고.”


그렇지 않아도 지저분한 벤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트리며 지나는 뒤로 물러선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어느새 리즈가 닭다리를 들고 다가와 있었다.


“언니, 오빠는 안 온 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랑 반대편에서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데, 끝났다고 같이 웃고 마시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


“에잉, 모처럼 다 모였는데. 오빠가 와야 드렌턴 아저씨랑 오즈카 오빠도 올 거 아냐. 그 두 명 근무 중에 술 마시는 걸로 놀리면 되게 재밌는데.”


“아니, 그러면 안 되지, 리즈.......”


“몰랑!”


꺄륵 웃으며 먹을 게 남아있는 테이블로 달려가는 리즈. 이미 그 자리엔 로즈가 엄마의 무릎에 앉아 잔뜩 볼을 부풀리고 있었기 때문에, 두 철부지의 날카로운 눈치싸움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흐음.”


여관의 열기가 더해져 가는 가운데, 지나의 눈동자는 창문을 찾는다. 이곳에서 본궁이 보일 리는 없었지만, 무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은, 결국 또 다른 행동을 낳는다.





====================





“후아.”

이왕 말이 나온 거, 아예 밑그림을 그려놓자는 생각에 몰두했더니 벌써 해가 져 있다. 아마 자신 때문에 덩달아 퇴근하지 못한 드렌턴과 오즈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로빈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혼잣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화장실도 가지 않고 몇 시간이나 앉아있었던 탓에 몸 곳곳이 비명을 질러대었고, 그는 신음을 삼켜야 했다.

“.......요즘 통 훈련을 안 했더니 몸이.......”

비록 계급장은 떼어버렸지만 기사는 기사. 왕위에 오른 후에도 한센에게 계속해서 훈련을 받았으며, 그가 타계한 후에는 지나, 또는 드렌턴과 함께 훈련을 해왔다. 그렇게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마즈다성에서의 전투에서도 어렵지 않게 대응을 할 수 있었다. 빈말을 잘 하지 않는 드렌턴도 로빈의 몸 상태만큼은 칭찬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역시 업무였다. 일이 밀리는 것도 모자라 오늘처럼 스스로 일을 만들어낼 지경이니, 이래서야 훈련받을 시간이 날 수가 없다.

“들어오세요.”


노크에 대한 답이었다. 그리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샛노란 태양이 빼꼼 모습을 드러낸다. 언제 보아도 미소가 절로 새어 나오는 얼굴이다.


“바빠?”


“아니아니, 이제 막 가려는 참이었어.”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굳이 드렌턴이 따라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곧바로 손을 맞잡고 입맞춤을 나눌 수 있었다.


“은벽의 낭만에서 다들 마시고 있어.”


“아, 그래? 아깝네. 모처럼 다들 모였는데.”


“리즈도 같은 말 하더라.”


“근데 왜 안 마시고 일루 왔어? 공짜잖아?”


“.......너네 뭔가 날 주정뱅이로 취급하고 있는 거 같다?”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에 앉히는 로빈. 워낙 접대용 소파가 푹신했기 때문에, 그는 지나와 함께 몸의 반쯤을 소파의 품에 파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왕비님께선 외롭게 혼자 뺑이치고 있는 날 위로해주러 오셨나?”


“그건 아니고, 할 말이 있어서.”


“할 말? 아, 저번에 말하려던 거?”


사실 살짝 흔들렸던 당시의 분위기 때문에 로빈은 내심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온기를 찾는 고양이처럼 로빈의 가슴으로 파고든다.


“응.”


“뭔데? 얘기해.”


로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지나는 샛노란 눈동자만을 들어 그의 미소를 바라본다. 깔끔하게 면도된 턱과 반듯한 입술. 검붉은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따스하게 이쪽의 가슴을 파고들어온다. 더 이상 그에게선 투박했던 기사시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한 나라의 왕이자, 한 여인의 다정한 남편, 그리고-.......


“.......로빈.”


“응?”


“내가 살면서 가장 크게 후회했던 것 중에 하나가 너랑 관련되어 있는데, 뭔 줄 알아?”


“.......설마 나랑 결혼한 거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멍청아, 진지하게 말이야.”


로빈은 울상을 지으며 쳐맞은 콧잔등을 쓰다듬는다.


“음, 글쎄?”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는 거였어.”


“.......”


지나의 노란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로빈의 손길이 멈춘다.

‘그 아이.’

지우고 싶었지만 결코 지울 수 없는, 그랬기에 여태까지 언급하지 않고 있었던 기억. 하지만 지나의 아랫배에 새겨진 것만큼 선명한 상처.


“그렇잖아. 그 아이는, 우리 아이는, 이름조차 받지 못하고 떠나버린 거잖아. 이름을 받지 못해서 엄마아빠에게 잊혀질까 울고 있는 그 아이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찢어져. 적어도 이름이라도 지어줬다면,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평생 기억될 수 있었을 텐데.”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더라도 우린 평생 기억할 거야.”


로빈의 손길이 되돌아온다. 그전보다 훨씬 따스하고 부드럽게.


“그래, 기억할 거야. 하지만 우리뿐만이 아니라, 누군가가 평생 그 아이를 기억해줬으면 했어. 만약 언젠가 우리 둘 다 사라져버리면, 그 아이의 증거도 사라져버리는 거잖아. 그래서 나는 마음이 아파. 적어도 이름을 지어줬으면, 적어도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면, 그 아이도 외롭게 울면서 사라지지 않아도 됐을 텐데.”


“.......”


“그래서 난 지금이라도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줬으면 해.”


가만히 지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로빈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생각해둔 이름 있어?”


“이제부터 함께 정해야지.”


“.......그래.”

로빈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긴다. 그녀가 눈물을 흘릴까 걱정했지만, 그녀 입가에 스민 미소는 아직 색이 바래있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응?”


“갑자기 왜 상처를 꺼내 들었어?”


묵혀두었던, 어쩌면 평생을 묵혀두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상처다. 로빈은 갑자기 그녀가 이걸 파헤치며 나온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아니,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야.......”

그러나 지나의 미소는 이어진다.

“동생이 기억해줄 이름은 있어야 하잖아.”



로빈이 멈춘다.

그의 사고가 다시 작동을 하고,

짤막했던 지나의 말을 곱씹어본 후,

그는 턱 아래까지 다가와 있는 지나의 얼굴을 겨우 마주한다.


“.......뭐?”


“말했잖아. 우리 말고도 평생 그 아이를 기억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아이의 동생이 아니면 또 누가 있겠어.”


“..............................어, 그 말은-.”


“응.”


지나가 웃는다.

로빈이 봐왔던 그 어떠한 미소보다도 밝고, 따스하고, 애잔하며, 행복하게.





“지어줄 이름이 하나 더 있다는 뜻이야.”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6.12.20 13:48
    No. 1

    그가 아니었다면 공화국의 모습은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겁니다!

    여태껏 개인적으로 가장 전율이 흘렀던 장면..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6.12.20 18:37
    No. 2

    에볼루션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할 때는 해주는 형님이시죠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니푸르
    작성일
    17.01.09 17:47
    No. 3

    9%괴물과 망자 등 모둔 수단을 동원하여-]모든
    이번 아이는 무사하길...작가님 제발ㅠㅠ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7.01.10 19:43
    No. 4

    라루사님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변수의 굴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93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4) +2 17.05.09 316 9 15쪽
292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3) +4 17.05.04 335 9 17쪽
291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2) +3 17.04.29 379 9 16쪽
290 (27막) 이쪽을 보고, 들짐승처럼 웃어주세요 (1) +3 17.04.24 330 12 21쪽
289 (막간)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쉽게 아무는 건 상처가 아니라고. +3 17.04.19 384 11 14쪽
288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1) +3 17.04.14 336 12 21쪽
287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0) +3 17.04.09 320 11 19쪽
286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9) +5 17.04.04 328 8 14쪽
285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8) +6 17.03.29 327 9 13쪽
284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7) +4 17.03.24 314 12 16쪽
283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6) +2 17.03.19 339 10 16쪽
282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5) +2 17.03.14 344 10 17쪽
281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4) +4 17.03.09 362 8 15쪽
280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3) +4 17.03.04 370 13 14쪽
279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2) +4 17.02.27 423 10 17쪽
278 (26막) 태동이 시작되고 욕이 솟아오른다 (1) +6 17.02.21 404 13 16쪽
277 (막간) 이 구역의 미친개는 나야 +4 17.02.16 367 10 18쪽
276 (25막) 탈태(奪胎) (10) +8 17.02.11 553 6 16쪽
275 (25막) 탈태(奪胎) (9) +4 17.02.06 380 10 20쪽
274 (25막) 탈태(奪胎) (8) +6 17.02.01 383 10 17쪽
273 (25막) 탈태(奪胎) (7) +4 17.01.27 472 6 17쪽
272 (25막) 탈태(奪胎) (6) +4 17.01.22 493 11 14쪽
271 (25막) 탈태(奪胎) (5) +4 17.01.17 389 9 18쪽
270 (25막) 탈태(奪胎) (4) +10 17.01.12 543 11 18쪽
269 (25막) 탈태(奪胎) (3) +8 17.01.07 426 14 18쪽
268 (25막) 탈태(奪胎) (2) +8 17.01.02 425 12 20쪽
267 (25막) 탈태(奪胎) (1) +8 16.12.28 479 12 16쪽
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9 12 18쪽
264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4 12 23쪽
263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70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20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2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7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8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2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9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3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8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