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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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퍼
그림/삽화
발아현미우유
작품등록일 :
2014.08.20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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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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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1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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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18쪽

(25막) 탈태(奪胎) (5)

DUMMY

“.......”


다른 덜린족에 비해 왜소하다고는 하나, 고브나이의 체격은 인간의 시선으로는 위압감을 느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눈에 띈다는 이유로 로빈의 제안을 거절하고 도시의 외곽으로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귀빈이라는 신분보다, 아르다르 특유의 조립식외성벽에 더욱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우락부락한, 그것도 흉측한 가면까지 쓴 미지의 종족이 주변을 어슬렁거리자 성벽 위의 경비병들은 경계의 날을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신경 쓰지 말라는 드렌턴의 명령이 내려오면서 그나마 의심의 농도를 낮출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주변의 온도가 어떻든, 고브나이는 집중을 놓지 않는다. 그는 때로는 멀리 벗어나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있는 성벽의 정경을 한눈에 담아보기도 하고, 갑자기 접근하여 직접 성벽을 쓰다듬기도 한다. 몇몇 경비병들로부터 그가 수첩으로 보이는 물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보고가 들어오기도 했으나, 여전히 배회하는 덜린족에 대한 방침은 ‘방치’였다.


“아아, 드디어 찾았네.”


가까이서 들려온 색깔 없는 목소리. 고브나이는 손을 멈추고 가면을 돌려 그 주인공을 찾는다. 주변에 있는 것이라곤 숲의 경계뿐이었기에, 그는 어렵지 않게 기묘한 차림의 사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소매가 커다란 로브. 걸음걸이를 보조해줄 목발과, 왼쪽 무릎을 중심으로 단단히 감싼 붕대까지. 덜린에게는 쉽게 그 정체를 유추하기 어려운 복장이었다. 고브나이는 몸을 돌리며, 굵은 허리춤에 들고 있던 수첩을 꽂아 넣는다.


“처음 듣는 목소리군.”


“처음 보니까 당연한 거 아닐까요? 반가워요. 벤이라고 합니다. 고브나이 맞죠?”


목발과 함께 다가와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는 벤. 그러나 고브나이는 가만히 그의 하얀 손을 내려다보기만 한다.


“목소리의 이름은 의미 없다. 그대는 나에게 아직 그대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 죄송. 제 이름은 벤. 그냥 벤입니다. 카나반 공화국의 검성을 하고 있어요. 그쪽이 로빈, 그러니까 카나반의 왕과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검성?”

이번엔, 가면 너머로도 느낄 수 있는 시선으로 벤의 전신을 훑어보는 덜린족 사내. 그의 감상은 짧고 굵었다.

“그대에겐 검의 향이 나지 않는데.”


“하지만 피비린내는 확실하겠죠.”


“.......”


부정할 수 없었다.


“대화를 하기엔 좀 뜬금없는 장소이긴 한데......., 오히려 잘됐네요. 듣는 사람도 없으니까.”


“영혼석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하, 직설적이시네. 얘기가 빠르겠네요.”


계속 서있는 것이 불편했는지, 벤은 목발을 옮겨 외곽의 숲그늘로 움직인다. 그가 짧은 신음과 함께 자리에 주저앉고 나서야, 고브나이는 천천히 벤의 뒤를 따라 어둠으로 다가온다.


“그 이야기라면 이미 붉은 나무와 끝났다. 나는 그의 호의를 선택했고, 맹세를 했다. 뭘 더 원하나?”


“아, 우선 그 움브라스톤, ‘영혼석’이란 걸 다시 짚고 넘어가죠. 제가 듣기로는, 당신들, 그러니까 덜린족이 로빈의 배려 속에서 하고자 하는 게 바로 당신네 선조들의 영혼을 추출한다는 거잖아요?”


“추출이 아니다. 제련이다.”


“뭐 아무튼. 근데 그 제련의 결과물을 따로 생각해놓으신 게 있나요?”


살짝 기울어지는 고브나이의 가면.


“결과물?”


“당신네 선조들은 희미한 영혼의 흔적을 반쯤 억지로 끄집어내서 간신히 두 자루의 검을 만들었잖아요. 하지만 이번엔 비교적 최신의, 선명한 영혼들에다가 공화국의 지원까지 있으니까 사정은 더 낫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선조들의 영혼으로 뭘 제련할지 생각해보셨나요?”


“........”


고브나이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벤의 거침없는 무례함 때문이 아니었다. 이 인간의 말대로, 자신을 비롯하여 종족 전체가 이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진정한 주인으로서 우리가 이 반도에 서기 위해서 해야 할 일. 바로 에일로피아의 자식들로부터 독립하는 거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런 염원으로 만든 게 바로 사도를 베는 검과 악마를 베는 검.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건 ‘오미누스 움브라’ 한 자루뿐이고, 그것만으로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죠.”


“그렇다.”


“그렇다고 여기서 검 한 자루 더 추가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는 건 당신이 가장 잘 알고 계실 테고요.”


“.......그렇다.”


예상한 반응이다. 벤은 얇게 웃으며 목발을 옆으로 치워놓는다.


“바로 그거 때문에 당신에게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듣고 있다.”


이 정도면 적극적인 자세라고 볼 수 있는 건가.

벤은 자신과 로빈이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고브나이 또한 다소 초조해하고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움브라스톤, 영혼석. 관념과 영혼의 집약체.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케테르의 용들’에게 절멸당한 과거 주인들의 영혼들은 완벽하게 소멸되지 못한 채 대지 깊숙한 곳에서 결정화되어 남아있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 또한 시간의 풍화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에, 먼 과거의 주인들, 그들의 영혼은 ‘제련’하기에 너무나 흐리다고요. 그래서 비교적 선명한 영혼석들을 모아 한곳으로 결집, 병기의 형태로 재탄생시키는 거잖아요? 제 말이 맞죠?”

고브나이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근데 그 병기라는 게, 결국은 사용자 한 명의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아무리 검성급의 기사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지니고 있는 영력의 크기는 상식 밖의 괴물이 아닌 이상 한 시대가 응축된 영혼을 만족시키기엔 무리가 있죠. 즉, 비효율적이라는 겁니다.”


“.......효율인가.”


역시, 덜린족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다.


“네, 효율이요. 따라서 우린 ‘제련’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심각한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네 번째 주인과, 다섯 번째 주인들의 영혼은 이제 남아있지도, 돌아오지도 않아요. 이젠 여섯 번째, 즉 당신들의 선조만이 남아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확실하면서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죠. 그쪽이 말했듯, 이번엔 검 한 자루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그래서 그대는 나에게서, 나의 일족에게서 뭘 원하는 건가?”


“사실 간단합니다.”

너무나 가볍고, 무심한 목소리. 벤은 지금부터 자신이 내뱉으려는 말이 이 덜린족 남자에게, 아니, 이 남자의 일족 전체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한 명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큰 힘이라면, 최대한 많은 이들이 나눠 가지면 되는 거잖아요?”





======================





그가 평범한 사람, 평범한 기사후보생 중의 한 명이었다면, 지금쯤 절망과 수치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았을지도 모른다.


“씨바아아알!”


하지만 에두는 오만했으며, 자기중심적이었고, 미친개새끼였다.

아무리 치체가 영력을 숨기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을 해줘도 소용이 없었다. 에두의 적의는 계속해서 베르달 용사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발각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조우한 자들이 모두 소규모 정찰대였다는 점이었다.


“크흑!”


그리고 에두가 부상(정확히는 엘라에게 쳐발린)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도.

석궁을 들어 올리려던 베르달 용사의 손을 무릎으로 쳐올리고, 그 사이 크게 벌어진 간격으로 파고드는 에두. 당황한 용사가 단검을 빼어들려고 했지만 에두의 손바닥이 먼저였다. 아래서부터 턱을 가격당한 용사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무너졌고, 치체가 이어지는 에두의 행동을 말리기 위해 다가섰지만 에두는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좆같은 새끼들.”


정신을 잃은 용사의 곁에 욕설이 담긴 침을 탁- 뱉어버리는 에두. 이에 치체는 쓰러져있는 세 명의 용사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벌써 네 번째야. 이쯤 되면 비상경계령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걸.”


“하긴, 벌써 이상하게 경계가 삼엄해진 거 같은데.”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에이미가 내려오면서 한마디 거들자, 에두는 다시 한 번 욕을 터트린다.


“그 좆같은 씨발년 수작이겠지.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적당히 해라. 분대 단위의 정찰대에게 걸리면 당하는 건 우리 쪽일 테니.”


“적당? 니새끼부터 적당히 손봐줄까? 가만히 있었더니 내가 좆으로 보이냐? 네가 대장이라도 돼?”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치체에게 다가서는 에두. 그런 그의 앞을 에이미가 가로막는다.


“그만해. 어차피 우리 목적은 같잖아? 지금은 협력해야 할 때라고?”


“협력? 목적이 같다고?”

에두는 다가선 에이미의 손길을 강하게 뿌리친다.

“지랄 마. 니들은 그 씨발년 똥꼬나 핥으면서 계급장 다는 게 목적이겠지만, 난 아냐. 그년한테 죽빵 한 번 꽂는 게 내 목적이라고. 협력은 개뿔, 씨발 이런 좆밥들 뚫고 가는데 니들 도움 따윈 필요 없어. 따라올 생각하지 마라, 따라오면 진짜로 죽인-”


“야아, 좆밥들이라니 너무하네.”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느긋한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가 들려온 거리는 세 후보생들의 경악을 이끌어내기엔 충분했다. 치체와 에이미는 곧바로 자세를 낮추었고, 에두는 거침없는 몸짓으로 그림자를 향해 돌아선다.


“.......이건 뭐야?”


에두의 입에서 누구냐-라는 말 대신에 이런 반응이 나온 이유는 명백했다. 수풀 사이로 나타난 그림자의 주인공이, 그에게 있어선 너무나 생소한 ‘종족’이었던 탓이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푸르스름한 피부. 뾰족한 귀와 기다란 콧날. 거기에 탁한 눈동자까지.

물론 모르는 건 아니다. 에이미도, 치체도, 이 ‘엘론’이라는 종족에 대해선 익히 보고 들어왔다. 문제는, 어째서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이 엘론족 남성이, 그것도 무장한 채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가-였다.


“적어도 누구냐고 물어봐 주지 않을래?”


비죽 웃으며 크게 한 걸음 다가서는 엘론. 치체와 에이미는 경계의 농도를 짙게 했지만, 에두는 오히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껄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 넌 뭐하는 씹쌔냐?”


“내 이름은 네돈나 듀라. 네가 밟고 서있는 그 인간의 대장되는 씹쌔시다.”


“아하~ 그러셔?”

의식을 잃은 용사의 머리를 더욱 깊게 밟아버리는 에두의 전투화. 듀라의 눈가가 희미하게 씰룩인다.

“이딴 좆밥새끼들의 대장이라니, 대충 알겠네. 좆발리기 전에 깝치지 말고 가던 길 가라.”


“.......”

어떠한 반응도 없이, 가만히 에두와 치체, 에이미의 행색을 살펴보는 엘론족의 탁한 눈동자. 그리고 그 끝에서, 듀라는 낮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아하, 엘라 경이 말한 게 이거였나.”


그리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에두의 입에서 비웃음이 사라진다.


“너, 그년 알고 있냐?”


“.......그년?”


노골적으로 굳어버리는 듀라의 표정.


“그래, 그 씨발년. 어딨어? 성에 있냐? 빨리 불어라, 짱나기 전에.”


“입이 험하시네.”


“근데 씨발놈아? 얼굴도 험해지기 전에 빨리-”


무릎이 꺾인다. 손을 주머니에 넣은 상태였기 때문에, 에두는 자신의 얼굴이 숲의 바닥으로 추락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아찔해져 가는 정신. 턱에서부터 희미하게 올라오는 통증. 어딘가 익숙한 굴욕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끼며, 에두는 정신을 잃는다.


“그래, 그쪽 둘도 해볼래? 아니면 순순히 잡힐래?”


고꾸라진 에두의 등을 사뿐히 짓밟으며 올라서는 듀라.

그의 물음에 치체와 에이미는 살짝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인 뒤에 양옆으로 갈라선다.

듀라가 미소를 되찾는 순간이었다.




“좋지 않은 대답이야.”




=================




“실망실망. 정말 실망이 크다, 여러분드을.”

바크달룬 성 내성 앞의 작은 연병장. 엘라가 모여 있는, 정확히는 각자 잡혀온 생도들을 향해 던진 첫마디였다.

“야, 아무리 그래도 한 명도 통과 못 한 건 좀 심하지 않니? 심지어 중상자도 스무 명이나 나왔어. 그것도 모두 베르달의 용사들이 아니라 너희들에게서.”


“.......”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굳이 엘라가 언급하지 않아도, 후보생들 사이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신음들이 이 사실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내가 너희를 너무 과대평가했던 거 같아. 내가 시작하기 전에 말했지? 통과 못 하면 나랑 1:1 대련 아니면 마즈다힐 파견이라고. 근데 내가 너희들 모두 일일이 1:1로 교습을 해줄 순 없잖니. 그럼 답은 뭐다?”


“하, 하지만 대장님!”


용기 있는 후보생 하나가 앞으로 나선다. 베르달 기사 중의 하나가 그의 접근을 막아섰지만, 엘라는 괜찮다는 듯 손짓을 해 보인다.


“말해봐.”


“솔직히 훈련방식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저희 중엔 아직 기초군사교육도 받지 못한 인원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공화국 최정예군의 감시를 뚫고 성에 진입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마즈다힐 파견이라니요? 거긴 최전방아닙니까?”


“그래서?”


“실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지역으로 가는데, 훈련도 받지 못하고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선별이 된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꼬우면 네가 대장하든가.”


“.......예?”


후보생은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그러나 ‘꽃잎’의 미소는 선명했다.


“말해두지만, 니들이 납득하지 못하고 때려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우리 왕께서 날 짜르지 않는 이상, 니들이 지금 관두고 재입대해도 여전히 너흴 기다리고 있는 건 나야~. 불합리하다고? 기초군사훈련?”

또각또각-, 검은 드레스차림에 굽 높은 신발로 생도들을 향해 다가서는 엘라.

“저어기 건너편에서 니들이랑 싸우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애들이 어떤 새끼들인지 알아? 쟤네는 니들이 장난감 들던 시절에 검을 들었고, 니들이 첫 딸딸이 치던 때에 기초훈련을 끝냈어. ‘제국의 기사’라는 걸 너네랑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쟤들은 종족이 달라. 태어난 의미부터가 너희랑은 다르다고. 오직 피와 전투, 황제에 대한 충성만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이란 말이야. 그런 걔네들을 상대로, 너희 주제에, 기초군사훈련으로 맞먹겠다고? 그건 아아주 좆같은 욕심이지. 안 그래?”


“.......”


“우리가 여태까지 저런 괴물들을 상대로 선전을 펼칠 수 있었던 건, 숲이라는 지형적인 이점과 실전감각만큼은 저들에게 뒤지지 않는 베르달의 용사들과 지휘관들 덕분이었지, 절대로 니네 신입 기사들이 잘나서 그런 게 아니야. 이번에 북쪽 얘기 들었지? 너네 윗기수 선배들이 어떻게 좆터져나갔는지? 그게 바로 현실이야. 이제와서 아무리 기초부터 쌓아 올리려고 해봤자, 너흰 쟤들을 이길 수 없어. 출발선이 너무 다르다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엘라의 목소리에 후보생들의 목이 말라간다. 그러나 처음 질문을 던진 후보생은 자신의 의무를 끝까지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겨우 입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 그럼 저흰 여기 왜 있는 겁니까?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저흰 왜-”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있는 거잖아. 나는 너희한테 기초 따위 가르칠 생각 없어. 난 너희에게, ‘생존하는 법’을 가르칠 거야.”

생존.

어쩌면 당연하면서도,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

모두의 가슴과 모두의 머리에 똑바로 박혀오는 그 단어.

멀리서 지켜보던 크라트마저 미소를 짓게 만드는 단어였다.

“지휘관의 명령을 어떻게 해석하고 따라야 하는가, 내 앞에 있는 병사들을 어떻게 이용하고, 내 옆에 있는 동료를 어떻게 이용해야 내가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너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오직 이거 하나야. 전술? 전략? 대형? 기사전? 솔직히 말해서, 너흰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다뤄보기도 전에 9할은 죽어 나갈걸? 그러니까 가르칠 의미가 없는 거야. 좆이고 나발이고 일단 살아남아야 배운 걸 써먹을 수 있을 거 아냐?”


“.......”


“야, 씨발!”

베르달의 용사들과 기사들은 순간 엘라가 욕을 하는 줄 알고 당황했지만, 생도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연병장 뒤쪽으로 모여든다. 그곳엔, 자신을 부르는 엘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줄곧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치체와 에이미의 손길을 뿌리치고 일어난 에두가 있었다.

“너, 내가 따로 싸우는 법 가르쳐 줘야 돼?”


“미쳤냐? 평생 쌈박질만 해왔는데, 여기서 배우긴 뭘 더 배워?”


“그럼 내가 너한테 뭘 가르쳐 줘야 할까?”


“니년을 이기는 법.”


단호한 에두의 대답에 엘라가 미소 짓는다.


“날 이기려면 먼저 나에게서 살아남아야겠지. 알겠냐? 이번 기수의 목표는 ‘생존’이다. 그 적은 나일 수도 있고, 제국일 수도 있고, 여러분들 서로일 수도 있어. 지금 포기할 사람은 포기해도 좋아.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우린 살기 위해 모였고, 살아남을 거야. 오늘 밤은 이곳에서 야영한다. 편히 쉬고, 많이 먹어둬. 내일 해가 뜨자마자 마즈다힐로 행군할 거니까.”

끔찍한 침묵 속에서, 엘라는 선언과도 같은 말을 맺고 뒤돌아선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한다. 한 가지 까먹었다는 듯이, 손가락을 들며 되돌아선 것이다.

“아 맞다, 이번 기수대표는 너야, 씨발.”


“.......뭐?”


기울어가는 햇볕과 함께 연병장에 남은 것은 오직 경악뿐이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미흡한 글을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문장이나 문맥, 오타가 있다면 지적부탁드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Lv.38 Fenix11
    작성일
    17.01.17 22:07
    No. 1

    엘라 정말 좋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7.01.20 20:20
    No. 2

    페닉스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evolutio..
    작성일
    17.01.18 22:35
    No. 3

    너무 욕이 많아요..ㅠ 원래 종종 등장하긴 했으나 이번화에는 조금 많은 것 같아요ㅠ 욕을 살짝 줄이면서 에두의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작가님이 어련히 알아서 사용하신거겠지만..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세스퍼
    작성일
    17.01.20 20:21
    No. 4

    에볼루션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ㅠㅠ 쌍욕이 너무 난발되죠 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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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막간) 우리가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8 16.12.23 451 11 13쪽
265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0) +4 16.12.18 498 12 18쪽
264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9) +8 16.12.13 394 12 23쪽
263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8) +2 16.12.08 370 12 22쪽
262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7) +6 16.12.03 520 11 16쪽
261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6) +7 16.11.28 435 12 19쪽
260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5) +4 16.11.23 401 11 17쪽
259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4) +8 16.11.18 415 11 17쪽
258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3) +4 16.11.13 487 11 20쪽
257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2) +6 16.11.07 727 12 17쪽
256 (24막) 다시 품은 목소리 (1) +8 16.11.02 436 12 17쪽
255 (막간) 무게 +4 16.10.28 509 13 16쪽
25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1) +10 16.10.23 512 13 23쪽
253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0) +10 16.10.18 422 13 19쪽
252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9) +10 16.10.13 480 15 17쪽
251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8) +8 16.10.08 475 12 18쪽
250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7) +12 16.10.03 549 14 16쪽
249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6) +5 16.09.28 470 15 16쪽
248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5) +10 16.09.23 432 13 17쪽
247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4) +8 16.09.18 508 15 19쪽
246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3) +10 16.09.13 511 13 18쪽
245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2) +10 16.09.08 458 14 13쪽
244 (23막) 네 눈물 속에서 나를 본다 (1) +7 16.09.03 511 1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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