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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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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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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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103)

DUMMY

까트린은 흠칫하여 고개를 들었다. 이지적인 얼굴을 한 이사벨 황녀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도함은 서려있지 않았지만 보는 이를 빠져들게 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흥미로움이 한 가득이었다.

까트린은 말문이 막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러자 이사벨이 반지를 내밀었다. 까트린은 재빨리 그 반지에 키스했다. 황녀가 위엄있는 몸놀림으로 무릎꿇은 까트린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모든 대신들과 상원의회 의원들과 장군들과 각종 내빈들의 시선을 받았다. 이사벨 황녀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까트린은 그 시선을 견뎌내는데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차라리 누군가 권총을 겨누는게 더 참을 만했을 것이다.

이사벨이 까트린을 옆에 세운 채 품위 있게 말했다.

"히스파니아 만세."

그러자 모두들 히스피나아 만세 하고 크게 외쳤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이사벨 황녀가 대신들의 앞을 가로지르며 알현실의 문밖으로 나섰다. 추기경과 돈 주스피안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사벨 황녀의 눈짓에 까트린도 뒤늦게 따라나섰다.

히스파니아 만세 하는 외침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신들의 충성 맹세도 있었지만, 지난 3년 동안 공백상태나 다름 없었던 제국 황제를 계승하는 역사적인 자리에 있다는 감격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즉 히스파니아에 펼쳐질 새로운 절대왕정 시대의 시발점이었다.


함성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황녀와 대신들은 빠른 속도로 복도를 가로질러 집무실로 향했다.

추기경이 황녀의 옆에 서서 조언했다.

"주님께 맹세하건데 마마의 즉위를 반대하는 이는 없습니다. 이제 누구도 황위의 적통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을 겁니다."

"그대의 공이 크다. 프란치스코 데 리베라."

황녀가 도도하게 대꾸했다.

추기경이 부드럽게 말했다.

"만일 아직도 신에 대해 불신이 남아 계신다면, 그것은 마마의 신상이 염려되어 그랬을 뿐입니다. 지난 3년 간 황제의 권력을 메울 세력은 교회뿐이었습니다. 마마께서 아직도 디에네 마마의 일로 상심하고 계신다면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이사벨은 대꾸하지 않았다. 맨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는 까트린은 갈수록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 부담은 총사대원이 지키는 황녀의 집무실 출입문에 당도하면서 절정에 치달았다.

그들은 집무실 안으로 당도했고, 까트린 데 세비아노까지 들어오고나자 총사대원들이 문을 닫았다. 초봄의 햇살이 방안을 비추는 가운데 이사벨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집무실의 데스크에 앉아 깃펜을 들었다. 소문대로 그녀는 조언자나 비서를 활용하지 않고 국정을 직접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돈 주스티안이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어 데스크 위에 올려놓자, 황녀는 그 내용을 검토하며 깃펜으로 서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대신들에게 설명했다.

"제국의 온 신민들을 위해 짐의 포고령을 작성하였다. 이 방을 나서는대로 궁내부의 데 콘체가 줄 것이다. 그 포고령을 짐이 즉위하는 4월 7일까지 제국의 모든 시 의회 의장과 영주들, 식민지 총독들에 전달토록 해야할 것이다."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동방회사의 총수가 대답했다. 황녀가 다른 서류를 검토하며 물었다.

"국채에 대한 이자가 상당하구나. 연간 얼마 정도 하지?"

"칠천팔백만 페소입니다."

"그 가운데 히스파니아 동방회사의 몫은?"

"대략 이천만 페소 정도 됩니다."

황녀가 눈을 날카롭게 뜨며 말했다.

"정부에게 그 정도의 돈이 없다는 걸 알 텐데?"

"이번 새 무역로에 대한 선박들의 세금 감면이면 충분합니다, 마마. 거기에다 저희에게 물자의 공급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개인 채권자들의 원성도 덜 수 있지요."

"포고령을 써 주겠다."

이사벨이 종이 한장을 들고 서한을 작성했다. 짤막한 문구였지만, 그녀가 황실 인장 반지를 찍고, 깃펜으로 서명을 하자 강력한 영향력이 생긴 칙허장이 되었다. 황녀가 그 문서를 돈 주스티안에게 주었다. 히스파니아 동방회사의 총수가 웃으면서 종이를 받았다.

까트린은 가만히 서서 황녀가 국정현안을 처리하는 장면을 20분 정도 목도했다. 대다수가 그녀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충분했다. 황녀는 국정전판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펼치며 두 대신들과 업무를 처리했다. 그들의 대화에는 식민지 문제와, 즉위식에 필요한 자금의 활용문제, 빌랜드에 대한 보복조치, 이번 불온서적 유포사건과 관련된 것들까지 나돌았다.

불현듯, 황녀가 시중에 나도록 있는 거슬리는 소문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추기경은 제국 전역에 퍼져나가는 소문에 대해 방책을 세워둔 게 있느냐?"

황녀가 그 문제로 화가 난 것은 아닌 듯 싶었다. 그녀는 그저 재상이자 교회의 수장이며 헌병군의 원수인 리베라의 견해를 듣고 싶은 듯했다.

추기경이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사람은 잡을 수 있어도 말은 잡을 수 없지요, 마마. 과민반응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긁어부스럼만 나니까요. 무지렁이들의 입담에 불과하오니 마마께서 즉위하신다면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이사벨 황녀가 눈을 깜빡였다. 모종의 계책을 구상한 듯했다.

그녀가 종이 한장을 데스크에 미끄러뜨리며 넌저시 말했다.

"그 무지랭이들의 여론이 그대나 짐의 목을 달아나게 할 수 있다. 빌랜드에서는 혁명으로 왕의 목이 참수당하지 않았느냐. "

그 말에 두 대신들이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인 게 틀림없었다. 이사벨은 그것을 단번에 포착했다. 추기경은 부자연스레 눈을 깜빡였고 돈 주스티안은 잠시나마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보인 반응이었지만, 그것은 의심의 여지를 남겼다.

"혁명이라, 당치 않습니다." 추기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찌 감히 히스파니아서 그런 일을 벌일 자들이 있단 말입니까? 황위와 교회의 권위가 엄정한데 말입니다."

이사벨이 입가에 미소를 품었다.

"하긴 그렇지. 그대들처럼 유능한 신하가 있는데 누가 감이 짐의 권위에 대적할까? 대대로 성전기사단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 아니고서야."

"망극하옵니다."

추기경이 고개를 숙였다. 황녀가 다시금 서류에 집중하며 명했다.

"이만 물러들 가보거라. 짐은 빌랜드인을 처단한 저 용감한 여인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까."

"하오나, 마마."

추기경이 맨 뒤에 차렷자세로 서 있는 까트린을 바라보더니 보고했다.

"실은 마마께서 저 기병대원을 갑자기 찾으시는 바람에 아직 그녀의 임무를 설명하지 못했나이다."

"그거 마침 잘 되었구나."

황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저 여걸에게 이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직접 말해줘야 하니까."

추기경이 절을 하면서 복종의 뜻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돈 주스티안이 직접 문을 열었다. 추기경이 먼저 나서자, 동방회사의 총수가 신사답고 쾌활한 어조로 작별인사를 했다.

"아디오스 콘프리체."

그가 답변을 기다렸다. 이사벨은 쳐다보지도 않고 이리 말할 따름이었다.

"그대가 짐의 성은을 얻으려면 더 분발해야 할 것이다. 주스티안."

이윽고 돈 주스티안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기며 문을 닫았다.


집무실 안에는 오직 두 여인만 남아 있었다.

이사벨 황녀는 건너편에 서 있는 금발머리 여 기병대원을 힐끗 바라본 다음, 데스크에 널린 서류들을 한쪽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새 종이를 꺼내어 깃펜으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대는 짐과 공통점이 있지. 까트린 데 세비아노."

까트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깃펜이 스치는 사각사각하는 소리만 침묵을 깼다.

"짐은 그대가 거칠 것 없이 당당한 성격이라 들었다. 짐의 사냥꾼에게 대뜸 검을 겨눴다면서?"

"그가 저를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마마."

까트린이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그 바람에 호되게 당했다던데?"

이사벨이 장난스레 물었다. 꼭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까트린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벨린 데 란테가 그때의 그 일을 황녀에게 고스란히 보고했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렸다.

이사벨이 다시 말을 꺼냈다.

"짐의 사냥꾼이..."

그녀가 글쓰기를 멈춘 채 까트린을 올려보았다.

"그대 또한 유혹했겠지. 그렇지?"

까트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녀가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 쳤다.

"여인이라면 한번 건드려 보는 것. 그것이 녀석의 자연스런 순리야."

까트린은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아무 말도 못하는 자신이 너무 바보스러웠다. 용기를 내야 했다. 무엇 때문에 황녀와 논쟁을 벌여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순수한 감정을 억누르며 지고 싶지는 않았다.

"부인하지는 않겠나이다. 마마. 하오나."

"그를 좋아하지는 않는단 말이냐?"

까트린이 고개를 든 채 푸른 눈동자로 이사벨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빼았아갔습니다. 제 자존심과 더불어 지금껏 느낄 수 없었던 그런 마음까지 앗아갔지요."

이사벨이 글쓰기를 멈췄다. 기병대원의 말이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황녀가 웃음을 지운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굳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까트린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네 말이 재밌게 들리는군. 까트린 데 세비아노. 그러나 그 말을 번복하지 않는다면, 너는 여인의 몸으로써 감당할 수 없는 큰 대가를 치러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짐은 지금 너의 총살형 명령서에 서명만 앞두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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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랄까. 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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