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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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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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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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6.2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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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104)

DUMMY

까트린은 내심 흠칫하였다. 총살형이라. 황녀에게 본심을 그대로 말한 대가가 이것인가?

이사벨 데 아라고른은 데스크를 짚고 일어선 채 차가운 눈빛으로 기병대원과 눈을 마주치고 있엇다. 에메랄드 눈동자를 지닌 저 고귀한 여인이 벨린 데 란테를 각별히 여기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이사벨은 종이를 움켜쥐고 데스크에서 벗어나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까트린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서명 부분이 공란으로 비워져 있는 총살형명령서를 기병대원의 얼굴에 바짝 내보였다.

까트린은 글을 몰랐지만 그 명령서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그 기세를 통해 느꼈다.

이사벨이 흥, 하고 명령서를 거뒀다.

"네 명예와 의사를 존중하는 뜻에서 네가 뱉은 그 말을 정정하길 강요치는 않겠다. 대신 그 마음을 더는 발전시키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거야. 그랬다간 주저없이 네 가문을 욕보이게 할 테니까."

"마마의 뜻을 알겠나이다."

까트린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억울함을 내비추지 않는다면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허나, 그 뜻이 실현되길 바라신다면, 마마."

까트린이 황녀를 쏘아보며 한마디했다. "어릿광대같은 그 사냥꾼을 잘 단속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점은 네가 염려할 바가 아니다. 대위."

이사벨이 자리로 돌아가 턱을 괴고 앉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데스크만 바라보고 있었다. 벨린 데 란테와 연관되었던 그 일로 황녀가 속이 상한 게 틀림없다고 까트린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단지 그 일 때문에 총살형명령서를 들이대며 호출했단 말인가?

까트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를 이 자리에 소환하신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까?"

"짐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너를 부를만큼 멍청한 줄 아느냐."

황녀가 고개를 들며 질투어린 치기를 드러냈다. 허나 데스크에 다시 앉은 그녀는 놀랍게도 처음 보였던 이지적인 표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사벨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짐의 아우가 추기경의 볼모로 있었을 때, 네가 짐의 아우를 호위했다 들었다.

"디에네 데 아라고른 마마 말씀이십니까?"

까트린이 묻자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까트린은 그 일을 어떻게 황녀가 알게 되었을까 내심 놀랐다.

이사벨이 물었다.

"네 아우와 가까이 지냈던 모양이지?"

까트린은 이번에도 이실직고할 참이었다.

"디에네 데 아라고른 마마를 호위했던 시기만큼 저에게 영광스러운 임무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그 임무에서 제외됐지?"

"그건..."

까트린이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황녀가 그 이유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이사벨이 복수라도 하려는 듯이 나직이 말했다.

"네가 제2황녀를 호위할 때, 짐의 아우와 매일 밤 처소에서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사랑을 나눈다는 소문이 있었다는데?"

그 말에 젊은 기병대원의 눈빛이 돌연 사납게 변했다. 이사벨이 사악하게 한마디 더 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하군. 대위."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까트린이 분노에 몸을 떨며 내뱉었다.

"디에네 마마와 저의 순수한 우정을 치기한 바보같은 사내들의 술책일 뿐입니다."

"순수한 우정이라."

이사벨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 대쪽같은 여 기병대원의 당당함을 꺾어버려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반면 까트린은 대낮에 공격당한 사람마냥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사벨이 미소를 머금은 채 도도히 말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대위. 짐의 충성스런 신하들 가운데 두 명이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건 너도 알고 있겠지."

까트린이 침착히 대답했다.

"동방회사와 그 빌랜드인들이 결탁하고 있었죠."

"그 일을 꾸미고 있는 자들의 손 발을 자르고 몸뚱아리를 잡아먹으려면 매우 조심스레 함정을 파야해. 놈들의 목적과 수단을 파악하여 명분을 만들어 단번에 섬멸할 필요가 있지."

까트린이 불안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이사벨이 웃어보였다.

"너는 이미 우리와 한 배를 탔다. 만약 네가 여전히 추기경에게 충성을 맹세하고자 한다면 진실을 알고 있는 너를 그들이 가만히 둘까?"

까트린이 초조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가 선포하듯 단정지었다.

"너에게는 시간이 없다, 까트린 데 세비아노. 선택하거라. 짐의 명을 따를 테냐. 아니면 추기경 밑에서 반역무리로 몰려 개죽음을 당할 테냐?"

까트린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황녀의 말마따나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까트린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굴욕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라고 그녀는 애써 생각했다. 자신보다 훨씬 고귀한 여인에게 충성맹세를 하는 것이니까. 군인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굴욕스러울까. 무릎을 꿇으며 까트린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사벨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금발머리 가병대원에게 다가가 반지를 내밀었다. 까트린이 복종의 뜻으로 황녀의 손을 잡고 반지에 키스를 했다.

"제 목숨은 이제 마마의 것입니다."

여 기병대원의 그 말에 이사벨 황녀는 재밌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짐은 네 목숨을 거두려 했다. 나중에 네 목숨을 살려준 자에게나 고맙다고 하려무나."

* * *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오후 내내 아스티아노궁의 서쪽 정원 뜰에 서 있었다. 아무도 그녀의 신병을 구속하지 않았다. 근위총사들로부터 기병도를 돌려받았고 기병대 제복을 입은 채로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흉갑기병대의 막사로 돌아가지 못할 판이었고, 까트린은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그 양측 세력 사이에서 치이지 않고 무사히 살아난 게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이사벨 황녀는 그녀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주지 않았다. 오늘 밤은 황녀의 명에 따라 궁내부에서 지정해준 황궁의 처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될 터였다.

몸은 자유로웠지만 까트린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사벨 황녀는 사적인 감정으로 그녀의 목숨을 노리려 들 테고, 어떤 위험한 임무를 내릴 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추기경과 황녀 사이에서 이중첩자 노릇을 해야할 지도 몰랐다. 첩자 노릇은 그녀가 상당히 꺼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걱정은 따로 있었다.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왜 요즘따라 이렇게 우울하고 외로울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머리가 어떻게 된 듯 싶었다. 황녀에게 그 사냥꾼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것만 해도 그랬다. 이러다 정말 처세를 제대로 못해 총살 당하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해질 무렵이 다 되어갔다. 까트린은 아름답게 치장된 미로 정원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근처에는 무도회장이 있었고, 대리석으로 지어진 그 무도회장은 저녁노을에 주홍빛으로 서서이 물들어갔다.

여 기병대원은 흉갑기병대 제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문득 황녀가 왜 디에네 데 아라고른에 대해 물어봤는지 궁금했다. 디에네 데 아라고른이 황궁 생활을 잘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제국 전역으로 퍼지고 있는 성전기사단과 제2황녀가 얽힌 짓궂은 소문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때 디에네 황녀와 아름다운 추억을 나눈 적 있는 까트린에게 그것은 참 가슴아픈 일이었다. 신앙심 깊고 상냥하면서도 아름다운 제2황녀가 권력수호의 수단으로 타락해버렸으니.

바람이 불어왔다. 정원의 참나무들이 흔들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까트린은 두 다리를 벤치 위까지 올려 초라하게 붙여 앉았다. 그녀에게 이 자세는 혼자 있었던 긴 시간 동안 외로움을 달리기 위한 방편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게 잠깐 졸았나 싶었다.

어깨에 손을 올리는 듯한 감촉에 까트린은 불현듯 잠에서 깼다.

"누구..."

까트린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검은색 삼각모를 쓴 갈색머리 사내가 그녀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했다.

"삶이 권태로운 모양이군. 세뇨리타."


---------------


역시 삼각관계묘사는 쉽지가 않음.

담화에 뭔가를 쓰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있네요

(플롯상으로 써줘야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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