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레스의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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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Gavin
작품등록일 :
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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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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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레스의 총사(114)

DUMMY

디에네 황녀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 까트린에게는 신선한 충격인 듯했다. 그녀는 잠시 동안 왼손으로 허리에 찬 기병도 검자루를 붙잡은 채 서 있었다. 살짝 벌린 입에서는 하얀 이가 드러났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벨린은 기다렸다. 이윽고 까트린이 속삭이듯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디에네 황녀를 납치해간 대가로 결투를 걸었으면서."

까트린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뒤늦게 그 옛날의 민망한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벨린 데 란테는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주안 스피놀라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알레한드로 바레스만이 눈치 없이 질린 얼굴로 그와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더구나 그 조차도 벨린의 눈치에 궁시렁거리며 어디론가 가 버렸다.

까트린이 작게 말했다.

"황녀는... 날 기억 못할 거야. 사실 그거 옛날 일이거든. 3년도 더 됐지."

"분명한 건 따로 있어, 세뇨리타."

벨린이 진지한 어투로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싼 채 앞으로 나아갔다. 계단 방향이었다.

"디에네 황녀는 외톨이야. 여제마저도 외면하고 있다구. 그녀에게는 지금 순수한 열정으로 자신을 섬길 호위장교가 필요해. 놈들이 음모를 계속 꾸미고 있다면 디에네 황녀는 분명 위험에 빠지게 되니까."

까트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린 데 란테가 그녀를 이끌고 계단을 완전히 올랐다. 황제의 시신을 모셔둔 방이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귀족들이 아직도 서 있었다. 방 끝에서 누군가 라투니스어로 기도문을 외우며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벨린에게 이끌린 채 까트린이 눈을 크게 뜬 홀린 표정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어느 순간, 벨린이 멈춰섰다. 그녀가 홀로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까트린은 침대 밑에 무릎꿇고 앉아 기도를 올리는 금발머리 여인을 보았다. 검은색 드레스에 검은 리본을 단 디에네 데 아라고른 황녀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를 풀어헤친 채였고, 소녀티를 채 벗지 못한 앳된 면이 만연했다.

그녀는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울면서 계속 기도를 읊조리고 있었는데 라투니스어로 된 그 기도문은 흐느낌에 간간히 멈췄다. 모두를 가슴 아프게 하는 장면이었다.

상복을 입은 시녀 둘이 디에네 황녀를 부축하여 다른 곳으로 모셔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시녀들은 감히 그녀를 다른 곳으로 데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벨린 데 란테는 뒤에서 까트린이 천천히 디에네 데 아라고른에게 다가서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 자리에서 영웅은 그녀가 되어야 했다.

까트린이 디에네 황녀의 바로 등 뒤에까지 섰다. 가슴아픈 그 장면에 감흥을 받은 기병대원이 용기를 내어 접근했다.

까트린이 말했다.

"마마."

디에네 황녀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실의와 슬픔에 잠겨 있는 그 황녀를 일깨우려면 좀 더 적극적인 제스쳐가 필요해보였다.

까트린은 그것을 깨닫고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이런 일은 까트린으로서는 애먹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앞으로 그녀가 충성을 다할 주인이 되기로 다짐한 터였다. 이것은 신이 주신 기회였고 과거의 우정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 디에네 황녀에게 충성을 다짐해야 한다면 이곳에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까트린 데 세비아노는 울고 있는 디에네 데 아라고른의 뒤로 다가가 두 손을 황녀의 어깨 위에 올렸다.

"디에네 마마."

분명한 인기척이었다. 디에네 황녀는 놀란 나머지 울음을 뚝 그쳤다. 이윽고 아라고른 황가의 둘째 공주가 뒤로 고개를 돌리자 까트린 데 세비아노와 얼굴이 마주쳤다.

둘 다 한동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게 분명해보였다. 까트린은 애처러운 듯 벨린 데 란테에게 지금껏 보이지 않은 다정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디에네 데 아라고른은 비록 두 뺨이 눈물에 젖어 있었지만 전혀 추하지 않았다. 눈가에 반짝거리는 그 눈물이 도리어 아름답다고 해야 옳았다.

여 기병대원이 침묵을 깼다.

"저를 기억하시겠죠. 마마. 성 세바스찬 대성당을 지켰던..."

"데 세비아노..."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황공합니다 마마."

여 기병대원이 디에네에게 절을 했다.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여인으로써 디에네는 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절을 받아보는 것이었다.

황녀가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드레스자락으로 얼굴을 닦았다.

까트린이 조용히 말했다.

"마마를 다시 보필할 수 있게 되었어요. 폐하의 성은을 받아서요."

실은 등 뒤에 서 있는 저 사내의 선물이지만 까트린은 그렇게 말했다.

"이곳에 계속 계시면 많은 이들에게 부담을 주십니다."

실의에 빠진 황녀가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나 따위는 신경쓰지 않을 거야. 주님께서는 내게 외톨이로 살라 명하신 게 분명해."

"그렇지 않습니다. 마마"

까트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그녀를 달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까트린은 잘 알고 있었다.

여 기병대원이 두 시녀에게 눈짓을 해서는 황녀를 부축하도록 했다. 그녀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의심스러운 추기경이 그녀를 신앙심으로 이용하려 하기 전에 황녀를 잘 달래고 구슬러야 했다.

힘이 빠진 디에네 황녀를 부축하던 시녀 가운데 하나가 까트린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까트린은 잠시 난감하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제는 망설일 필요 없이 당당해져야 했다. 벨린 데 란테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까트린이 눈빛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까트린 데 세비아노 대위, 디에네 데 아라고른 황녀 마마의 호위기병이다."

시녀가 장교에게 걸맞는 예의를 갖춰 정중히 절을 하고서는 황녀를 부축해 나갔다.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벨린 데 란테가 까트린에게 다가섰다. 그가 모자를 벗어 긴 갈색머리칼이 흩날리게 하고서는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까트린의 오른쪽 뺨에 키스를 하고서는 작게 속삭였다.

"네 주인을 돌려줬어. 조만간 다시올 테니 그때까지 몸 조심하기를."

벨린 데 란테는 사람들을 헤쳐나가며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까트린은 그 여운을 오랫동안 느끼고 싶었지만 금세 자신의 임무에 대해 떠올렸고, 그 임무을 수행하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뇌리속에 숨겨진 의문은 여전했는데 그것은 바로 벨린 데 란테가 왜 자신에게 이런 선물을 주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 * *

벨린 데 란테는 황궁을 빠져나갔다. 황궁의 정문으로 검은색 마차 행렬이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여러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그 마차 가운데서는 히스파니아 교회의 인장과 깃발을 단 추기경의 마차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벨린 데 란테가 정문을 나서는 순간 추기경의 마차는 헌병군 기병대의 호위 하에 아스티아노궁으로 진입하던 중이었다. 벨린은 그 마차에 냉소를 흘리며 앞으로 벌어질 비상시국에 대한 대착을 예견했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었다. 곧 비상의회가 신속한 대관식을 위한 예산을 집행할 테고, 프란치스코 데 리베라 추기경은 총사대장의 의견을 수렴 비상시국에 따른 계엄령을 선포할 터였다. 거기까지가 각본이었다. 제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그 장본인이 음지로 숨어든 그 순간 음모는 그때부터 시작될 터였다.

그 음모의 실체를 파헤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 있었다. 자코모 다빈치. 그는 돌연 자취를 감추었고 벨린이 그의 소재를 파악하는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그 제노아 공국출신의 란툰반도 마법사는 이미 궁전을 빠져나가고 없었다. 그 황실 주치의는 궁전의 정문을 지키는 위병에게 급한 일이 있어 대학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고 했다.

벨린 데 란테는 강선 파인 머스킷총과 탄약가방을 맨 채 대학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벨린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다.

황궁과 대학 사이의 짧은 거리 곳곳에서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다! 라는 큰 외침이 울려퍼졌다. 그와 함께 교회에서는 서거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스티아노 광장에 이르자 상당수의 백성들은 기도를 올렸고 많은 이들이 거리의 이곳저곳에 모여 언성을 높이며 언쟁을 벌였다. 그 언쟁은 새 여제가 될 이사벨을 지지하는 자들과 지지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말다툼이었다. 치안을 담당하는 헌병군들이 즉각 모인 군중들을 해산시켰지만, 이미 양분된 민심은 동요하고 있었다. 오렌지공 마우리체호에서 빌랜드 마법사가 예견한 대로 성전기사단 소문으로 인해 민심이 새 여제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한 듯했다.

벨린은 그 광경에 무관심하다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갈 길을 갔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티아노 대학 정문에 이르자, 자신의 머스킷총이 잘 작동하는지 점검했다. 대학 정문은 황제의 서거 소식 때문인지 대학생들도 보이지 않았고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벨린은 정문 앞에서 머스킷총의 격철을 뒤로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태연히 머스킷총을 어깨에 걸고 자코모 다빈치의 사무실이 있는 의학부 건물로 향했다.

멀리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오후 햇살이 의학부 건물의 현관 앞에 쏟아지고 있었다. 벨린 데 란테는 햇살을 등지고 다빈치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벨린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사무실 안은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아 어둑어둑했다.

"자코모 다빈치 박사."

벨린이 머스킷총을 겨눈 채 사방을 살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자코모 다빈치의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함정에 빠졌어. 사이프러스 마녀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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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박나와서 글쓴다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 글쓰고픈 마음보다는 놀고싶은 마음이 더 앞서긴 합니다만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답니다.

만약 탈고를 하게 되면 묘사를 좀 강화해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오탈자와 이상한 문장도 고치구요. 전역하는 11월이나 되야 시간이 나겠어요.

비평 리플 추천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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